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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신화 읽기 - 바가바드기타는 인도를 어떻게 신비화하였는가
박효엽 지음 / 글항아리 / 2011년 11월
평점 :
이책은 바가바드기타의 해설서이다. 그러므로 이책의 내용을 알아보기 전에 바가바드기타가 어떤 책인가부터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누구나 이름은 알지만 그 책이 무슨 책인지 아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바가바드기타는 마하바라타의 일부이다. 예기의 일부인 중용과 대학을 따로 떼어 독립된 책으로 읽는 것처럼 마하바라타 중 일부를 떼어 독립시킨 경우이다. 그러므로 바가바드기타를 이해하려면 원래 있었던 마하바라타란 책이 무엇인가를 이해해야 한다.
일리아드, 오딧세이와 비교되는 마하바라타는 인도의 2대 서사시 중 하나이다. 이 서사시가 성립된 시기는 축의 시대가 끝나가던 기원전 500년경이다. “이야기의 천체 윤곽은 기원전 4세기말에 확립되었을 것이다. 축의 시대의 결정적 텍스트들이 사제와 출가자들의 저작인 반면 이 서사시는 크샤트리야 전사 계급의 에토스를 반영한다. 축의 시대의 종교혁명은 그들에게 곤혹스러운 딜레마를 안겨주었다.” (카렌 암스트롱)
축의 시대에 일어난 종교혁명의 에토스는 아힘사, 폭력에 대한 반감이었다. 아직도 원시시대 수렵채집생활을 하던 시절의 기억이 남아있던 당시로선 전사들의 악의적인 폭력은 새로운 것이엇고 폭력과 함께 열린 영웅시대도 인간에겐 낯선 것이었다고 카렌 암스트롱은 말한다.
영웅시대 이전 아리아인들의 종교는 수렵채집인과 초기 농경민들의 종교가 그러했듯이 “호혜주의, 자기 희생, 동물을 사랑하는 태도를 가르쳤다.” (카렌 암스트롱) (아이슬러가 말하는) 협력의 원리가 지배하던 시절, 그리스 신화에서 말하는 황금의 시대였다. 그러나 스티브 테일러가 말하는 자아폭발 이후 협력의 원리는 지배의 원리로 바뀌었고 그들은 약탈자가 되었으며 그들의 종교도 변했다. “이제 습격자들이 갈망하는 신의 모범은 신성한 전사 인드라였다. 아리아인 카우보이들은 싸우고 죽이고 강탈하면서 자신들이 무력으로 세계질서를 확립한 인드라를 비롯한 호전적인 데바들과 하나라고 느꼈다. 그들은 전차와 강력한 청동검을 사랑햇다. 그들은 목축민이었으며 이웃의 가축을 훔쳐 생계를 유지했다. 희생제는 인도 아리아 사회의 영적 핵심이엇다. 그러나 희생제는 경제의 중심이기도 했다. 과거 초원지대의 평화로운 제의는 가축 도둑의 위험한 생활을 반영하여 훨씬 호전적이고 경쟁적으로 변햇다. 아리아인의 희생제는 미국 북서부 원주민 부족들이 거행하는 포틀래치의식과 비슷해졋다. 부족민은 자신의 노획물을 과시하며 많은 짐승을 도살하여 호사스러운 희생잔치를 벌였다. 공동체가 필요 이상의 동물이나 작물을 축적하면 이런 잉여는 태워야 햇다. 늘 이동하는 유목민 집단이 잉여 생산물을 보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미 이 지역에 만연해있던 폭력이 희생제 때문에 더 증가했다. 희생제가 끝나면 라자는 가축이 남지 않았으므로 재산을 채우려고 다시 습격을 시작했다.” (카렌 암스트롱)
광란의 영웅시대가 지나고 아리인들도 정착해갔다. “경제는 약탈보다 농업생산물에 더 의존하기 시작했다. 약탈과 대응 약탈이라는 파괴적 순환을 중단해야 한다는데 점차 합의가 이루어졋던 것같다.” (카렌 암스트롱)그 합의는 기원전 9세기의 전례 개혁으로 나타났고 인도에서 축의 시대를 열었다. 전례개혁의 목적은 희생제에서 폭력을 없애는 것이엇다. 폭력에 대한 반감은 점차 자아에 대한 공격으로 발전한다.
악의적 폭력은 비대해진 자아에서 자라난다. 그점을 잘 보여주는 것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이다. “호메로스는 두 시에서 전쟁이 주는 흥분, 동지애의 기쁨, 아리아스테이아-전사가 ‘승리의 흥분’에 사로잡혀 저항할 수 없는 힘이 되어 앞의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상태-의 영광을 찬양한다. 호메로스는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더 강렬한 삶을 산다고 말하는 것 같다. 만일 영웅의 명예로운 행위가 서사시에서 기억된다면 그는 죽음의 망각을 극복하고 소멸할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가능한 유일한 불멸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명성은 생명보다 소중하며 시는 명성을 얻기 위해 서로 필사적으로 경쟁하는 전사들을 보여준다. 이 영광의 탐구에서 모든 사람은 자신을 위해 나선다. 영웅은 명예와 지위의 문제에 시달리는 자기중심적인 인간이며 시끄럽게 자신의 공적을 떠벌리고 자신의 존엄을 높이기 위해 전체의 이익을 언제든지 희생한다. 케노시스, ‘자기 버리기’는 없다. 전사가 자아의 경계 밖으로 나가는 유일한 길은 살해의 엑스타시6스를 경험할 때뿐이다. 전사는 전쟁의 신 아레스에게 사로잡히면 생명의 엄청난 풍요를 경험하며 신과 같은 상태에 이르고 아리스테이아 속에서 자신을 잃고 앞에 있는 모든 것을 도륙한다. 따라서 전쟁은 삶에 의미를 줄 수 있는 유일한 활동이다.” (카렌 암스트롱) 전형적인 자아폭발(이 개념에 대해선 ‘자아폭발’ 리뷰 참조)의 심리상태이다.
자아폭발 즉 “타락의 결과로 권태가 인간의 근본적인 상태가 되었고 우리 자신이 비현실성에 대한 인식의 희생물이 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권태는 우리의 경험에서 사실성을 제거하는 ‘둔감화기제’가 작동한 결과 발생한다. 이로 인해 세상은 어슴프레하고 절반만 사실인 장소이다. 이곳에서는 실제로 아무 것도 우리를 감동시키지 못하고 흥미를 끌지도 못하며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잇는 것조차 없어 보인다. 그리고 비현실감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퍼져 나가는 끊임없는 생각의 수다의 결과이다. 전쟁은 이 권태와 비현실감을 덜어주려는 시도의 한 방법으로 발달했을 수도 있다. 바꿔 말하면 전쟁은 권태와 무목적성의 공포가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오락 내지는 운동으로 그리고 인간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만드는 하나의 방법으르도 중요해졌다. 이것이 왜 전쟁 발발이 특히 전장에 나가 싸워야 할 젊은 남성에게 그토록 자주 축하할 만한 일이엇는가에 대한 이유이다. ‘나의 투쟁’에서 히틀러는 1차대전의 개전이 그에게 얼마나 활기를 띄게 했는지 정확히 묘사한다.” (스티브 테일러)
파스칼의 말마따나 “인간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기 방에서 조용히 머무는 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소위 영웅들이란 자들의 폭력은 그 불행의 증상이었다. 9세기 인도의 종교혁명은 그 불행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란 깨달음으로 발전한다. “그들은 분리된 자아인식을 초월할 수 있으며 이 과정을 통해 자아가 초래하는 고통을 초월할 수 있음을 발견하였다. 우파니샤드가 주장하는 세계관은 타락한 세상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우파니샤드는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가정, 즉 우리가 보는 세계가 있는 그대로의 세계인 것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인도 현인들은 타락한 정신이 하는 ‘거짓말’을 풀어내고 있었다. 자아가 고립되었으며 자기 이외의 우주는 저기 밖에 있는데 자기만은 머릿속에 갇혀 있으며 그리고 아무 상관도 없는 외계에 살고 있다는 무시무시한 인식. 그들은 예리해진 자아인식은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거짓된 인식을 주는 일종의 ‘가면현상’임을 깨달았다. 우리는 오도된 정체성으로 고통받는다. 우리는 우리가 이러한 자아들이라고 믿지만 자아들이 사라져야만 우리으 진정한 본성이 될 수 있다.” (스티브 테일러)
우파니샤드에서 시작되어 붓다에서 절정에 이른 케노시스, 자기 버리기는 영웅의 가치들을 깡그리 부정했고 거짓된 자아의 파생물인 무의미한 폭력을 부정했다(아힘사). 영웅시대, 그리스사에선 암흑시대라 부르는 시절을 다루는 마하바라타 역시 그 시대에 대해 부정적이다. “서사시 내내 유디슈티라는 필사적으로 외친다. ‘크샤트리아의 다르마보다 더 악한 것은 없다.’ 전쟁은 신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피의 희생제가 아니었다. 잔혹행위였다.” 호메로스와 달리 마하바라타의 저자는 영웅을 기리지 않는다. “이 서사시의 이야기는 폭력이 더 큰 폭력을 낳으며 불명예스러운 배신은 또 다른 배신을 낳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하바라타는 그 폭력의 시대, 불의의 시대가 어떻게 끝날 수 밖에 없었는가를 주제로 한다. “영웅시대가 폭력적인 결말에 다가가고 있었기 때문에 대규모 희생제의로 질서를 회복해야 했다. 바로 전투가 이런 희생제였다.”(카렌 암스트롱)
종교 혁명 이후 전사들은 “림보로 밀려 들어간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세상의 다르마에 묶여 있기 때문에 출가자나 요가 수행자들에게 감담할 수없었다. 그러나 밝은 베다 신앙은 자신들을 지탱해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낡은 신앙은 때때로 악마적으로 보였다.” (카렌 암스트롱)
그렇다면 “왕이나 전사는 공동체를 방어하기 위해 싸우거나 죽여야 하는 자신의 소명을 이행하면서 어떻게 동시에 아힘사라는 이상을 존중할 수 잇는가? 축의 시대의 종교혁명은 그들에게 곤혹스런 딜레마를 안겨주었다.” (카렌 암스트롱) ‘마하바라타’는 이 딜레마에 대한 고민이며 바가바드기타는 그 고민에 대한 크샤트리아 입장에서의 대답이었다.
바가바드기타는 아르주나의 질문과 함께 시작된다. 나는 왜 싸워야 하는가? “아르주나는 적군으로 대면한 친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스승들을 둘러본다. 그러고는 그들을 죽여야만 하는 전쟁에 참여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한 끝에 싸우지 않기로 결심한다.” 바가바드기타는 아르주나의 그 결심이 왜 틀렸는가를 크리슈나 신이 설득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아르주나가 싸워야할 전쟁은 따지고 보면 흑백이 명확하지 않은 동족상잔의 지저분한 싸움이다. “아! 왕권의 행복에 대한 탐욕 때문에 친족을 죽이려고 애쓰는 이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려고 우리가 마음먹었다니! 만약 이 전쟁에서 무기를 손에 든 드리타라슈트라의 아들들이 무장하지 않은 채 저항도 하지 않는 저를 죽인다면 그것이 저에게는 더 편할 것입니다.”
“아르주나는 무엇이 선이고 악이며 무엇이 정의이고 불의인지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면서 선과 악, 정의와 불의를 가르는 참된 기준을 알지 못”한다고 절규한다. “기타에서 크리슈나의 가르침은 아르주나가 그 무너진 기준을 다시 세울 수 있게 하는 목적을 가질 뿐이다. 회색지대에 놓인 아르주나가 진실한 가르침을 절실하게 필요로하 는 바로 그때 두 사람의 대화는 그 기준에 대한 물음이자 대답이다.”
싸움은 상대가 있다. 영웅시대의 전사는 상대는 고려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영광과 자신이 얻을 전리품만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아르주나는 그 상대를 보아야만 했다. 자신의 사촌, 친구, 스승들이 상대였으니. 싸움의 상대, 타자를 발견했을 때 그는 묻는다. 왜 싸워야 하는가? 이 폭력의 의미는 무엇인가? “크리슈나여, 싸우기를 원하여 정렬한 저의 이 친족들을 보고 나니 제 사지는 맥 빠지고 입은 바싹 마르며 제 몸은 전율하고 털끝이 곤두섭니다. 손에서 간디바(활)가 미끄러져 떨어지고 살갗이 따끔따끔거리며 심지어 서 있을 수조차 없고 제 마음이 빙빙 도는 듯합니다.” 그에 대해 크리슈나가 한 조언의 요점은 마음이 문제란 것이다.
라즈니쉬의 해석은 이렇다. “무가치한 자신의 의무가 잘 실행된 타인의 의무보다 낫다로. 자신의 의무 속에서 죽는 것이 낫다오.’ 여기서 자신의 의무와 타인의 의무가 나온다. 아르주나는 무사이기 때문에 무사로서의 자기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기타는 ‘당신이 누구인지 당신 자신에게 일깨우려는 노력’으로 가득한 경전이다. 자신의 본성을 억누르지 말고 자유롭게 하라는 것이다. 크리슈나는 그에게 자기 본성이 무엇인지 계속 상기하면서 본성을 따르는 행동이 무한한 자유를 준다고 가르친다.”
아힘사는 보편윤리일 뿐이다. “비폭력은 비본적인 것일 뿐 중요한 것은 아니다. 크리슈나는 보편적인 윤리보다 계급의 윤리가 우선된다고 가르친다. 기타에 나타나는 고민은 이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악이다. 따라서 전쟁에서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 그런데 아르주나는 무사가 아닌가. 무사는 반드시 전쟁에서 사람을 죽여야만 한다. 무사가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크리슈나는 이 고민에 대해 확실한 해결책을 내놓는다. 아르주나는 인간이기 이전에 무사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사의 폭력은 업을 쌓는 것일 필요가 없다. 마음의 문제란 말이다. 여기서 기타는 3가지 요가를 제시한다. “기타에서 요가한 정신을 수련하여 보다 더 살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사람의 길을 가리킨다. 그 세가지 요가는 지혜의 요가, 행위의 요가, 사랑의 요가로 불린다.” 지혜의 요가는 요가학파나 불교의 승려들이 하는 기존의 요가를 말한다. 그러나 나머지 둘은 기타에서 새롭게 제시된다.
“행위의 요가란 행위를 하되 행위의 결과에 신경 쓰지 말고 행위 자체에 몰두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타의 핵심이다. “기타는 행위를 추종하는 것도 아니고 행위를 배척하는 것도 아닌 행위를 추종하면서도 배척하는 새로운 대안을 가르친다. 제1의 길도 아니요 제2의 길도 아닌 제3의 길을 가르친다. 제1의 길은 일상에서 마주치는 보통 사람들이 사는 길이다. 제2의 길은 속세를 떠난 승려들처럼 고행을 하는 사람들이 사는 길이다. 그리고 제3의 길은 이 두 가지를 절묘하게 혼합한 길이다. ‘그대의 특권은 행위 자체에 있을 뿐 전혀 결과들에 있지 않다오. 행위의 결과를 행위의 수단으로 삼지 마시오, 그대는 행위를 하지 않음에도 집착하지 마시오. 제3의 길은 행위를 하면서도 행위의 결과를 얻지 않는 길이다. 일상인으로서 이 사회를 유지한채 살면서 마치 고행자처럼 절제하는 삶의 길이다. 아르주나는 진퇴양난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싸우려고 하니 친족을 마구잡이로 죽여야 하고 싸우지 않으려고 하니 무사의 의무를 져버려야 한다. 이에 크리슈나는 무척 간단한 해법을 제공하는데 즉 싸우면서 싸우지 않는 법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이는 말이 되지 않는 엉터리가 아니라 현실에서 충분히 실현가능한 방법이다. 이 방법이 행위의 요가이다. ‘행위에서 무행위를 볼 수 있고 무행위에서 행위를 볼 수 있는 사람들 가운데 지혜로우며 제어된 채로 모든 행위를 한다오.’ 인도의 역사에서 행위와 깨달음은 앙숙 사이였다. 둘은 결코 어울릴 수 없었다. 경이롭게도 기타는 이 둘을 절묘하게 화해했다. 행위의 요가는 행위의 구출이었ㅎ고 동시에 깨달음의 확장이엇다.”
좋다. 그러나 행위는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필요한 것이 사랑의 요가이다. “신이 행위를 하는 이유가 되고 근거가 된다. 이 세상의 모든 행위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 모든 행위의 이유를 따지고 따지면 마지막에 신이 있다는 것이다. 신이 모든 행위의 궁극적인 이유이기에 항상 신을 생각하면서 행위를 하라.” 이 대목은 힌두교의 혁명이었다.
“기독교에서 예수의 등장이 획기적이었던 것처럼 힌두료에서 크리슈나의 등장은 획기적이다. 인도의 종교사에서 붓다의 등장이 한번의 종교개혁이었다면 기타에서 크리슈나의 등장은 또 한번의 종교개력이었다. 인도고대종교에 대항하여 붓다가 영원불멸의 형이상학을 무너뜨렸다면 크리슈나는 그 속물스러운 세속의 신학을 무너뜨렸다. 무엇에 대한 개혁일까? 고대 인도의 브라흐만 종교에 대한 개혁이었다. 고대의 브라흐만 사제들은 제식이나 제의에 미쳐있었다. 그들은 제식을 통해 모든 것을 이루려 했다. 제식을 통해 신의 축복을 얻을 수 있고 비가 오게 할 수있고 아들을 낳게 할 수 있다. 제식만능주의의 시대였다. 그래서 그들은 속물스러웠다.”
그러나 “기타에서부터 새로운 풍경이 등장한다. 하나. 여러 신을 숭배하지 않고 최고신만ㅁ을 숭배한다. 비슈누의 화신인 크리슈나가 그 대상이다. 둘. 최고신은 인간에게 공물을 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은 그에게 공물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 셋. 최고신이 원하는 것은 단 한가지이다. 진심어린 마음으로 신을 믿고 의지하는 것. 즉 사랑뿐이다. 인간이 신에게 바쳐야 하는 것은 오로지 감정 뿐이다. 브라흐만 종교에서 사제들만 독점하던 그 어려운 언어는 이제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마음과 감정의 언어로 대체되었다.크리슈나는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지 말한다. 먼저 신에게 지고한 사랑을 행하는 자이다. 그리고 평범하게 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궁극의 비밀을 알려주는 자이다. 궁극의 비밀은 무엇일까? 바로 크리슈나에게 의지하면 구원을 얻을 수있다는 것이다.”
“행위의 요가에서는 현재 내가 하는 행위가 미래에 어떤 결과를 낳을지 고민하지 말라고 한다. 왜? 미래의 결과는 나의 몫이 아니고 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결국 신을 생각하면서 현재의 행위에 충실하고 있는 나의 삶은 그 자체로 신에게 구원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