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 골딘 Nan Goldin 열화당 사진문고 11
귀도 코스타 지음, 김우룡 옮김, 낸 골딘 사진 / 열화당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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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집의 표지는 방콕 게이클럽의 여장남자를 찍은 사진이다. 이책에는 뉴욕의 게이바의 여장남자들, 트랜스젠터, 호모 또는 가끔씩 레즈비언들의 초상과 그들의 성교장면이 등장한다. 그 사진들은 연출된 것이 아니다. 모두 사진작가의 친구들이다.

퀴어, 뭔가 어긋났다고 말해지는 그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따뜻하며 그들에게 공감을 숨기지 않는다. 사진집의 처음에 놓인 사진은 강가에서의 소풍을 찍은 것이다. 그 사진에는 케이크를 먹으며 즐겁게 웃고 잡담을 나누는 여장남자들과 여성이 담겨져 있다. 작가가 퀴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 사진처럼 따뜻하다. 이성애자들이라면 역겹다고까지 생각할 동성애자들의 성교장면도 비정상이란 느낌을 갖기 어렵다. 그녀는 그 사진들에서 비정상이 아니라 정상적인 아름다움을 잡아낸다.

그녀는 왜 그런 시선을 갖게 된 것일까? 물론 그녀가 동성애를 경험하긴 했지만 이성애자이기도 하다. 그녀가 레즈비언이 된 이유는 많은 레즈비언들이 그렇듯 남성과의 관계에서의 환멸때문이었다.

그녀의 출세작인) ‘The Ballad of Sexual Dependecy’가 출간되었을 때 표지에 쓰인 ‘침실에서의 낸과 브라이언(1983)’을 보자. 이 사진은 “책 전체의 시상을 대변하는 결정체라 할 만하다. 친밀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고독하게 존재하는 두 사람과 남성과 여성 사이에 영속저긍로 존재하는 변증법을 완벽하게 묘사해내고 있다. 화면에 나타난 빛의 구성조차도 두 존재간의 거리감과 차이점을 강화한다. 골딘의 표정에는 남자와 좀더 접촉하기를 원하는 욕망과 함께 어떤 두려움이 동시에 나타난다. 둘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를 암시해준다.”

‘친밀함 안에 존재하는 끝없는 거리감’은 ‘The Ballad of Sexual Dependecy’의 중심주제이다. ‘침실에서의 남녀(1977년) 역시 같은 주제를 다훈다. “이 이미지에서는 남녀가 섹스 후 종종 느끼게 되는 기묘한 소외감과 소원한 분위기가 드러나 있다. 골딘은 이런 상황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물론 남녀관계에 대해 골딘이 그렇게만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섹스 중의 스킨헤드족(1978)’이나 ‘쿠키와 빗토리오의 결혼식(1986)’, ‘키스하고 잇는 라이즈와 몬티(1988)’는 섹스에서 드러나는 연인사이의 일체감을 잘 포착한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이 포착한 일체감에 “이 에로틱한 마주함이 일시적인 것이며 실패로 끝나고 말 것이라는 어떤 불편한 느낌”을 숨기고 있다.

“골딘은 섹스를 영혼을 비추는 하나의 거울로 보았다. 그리하여 섹스를 사랑과 우정에 동반하는 고통과 기쁨의 보다 깊고 복합적인 관계성의 한 부분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 관계는 고독에 대한 해독제가 될 수 없다. 그녀가 찍었던 친구들이 즐겼던 마약처럼 일시적인 위안일 뿐이다.

그녀는 그런 시선을 어떻게 얻은 것일까? 어린 시절의 상처를 많이 언급한다. “얘기는 1960년대 초, 워싱턴의 별 특징 없는 한적한 마을에 살던 한 중산층 가정에서 시작된다. 아버지와 아버지와 네 자녀가 있었고 그 네 아이들과 함께 민권운동 집회에 참가하곤 하던 리버럴하고 진보적인 어머니가 잇었다. 당시 미국의 보수적인 분위기에 식상해 있던 전형적인 유태인 지식인 가정이엇다.

가족 모두를 보여주는 폴라로이드 사진이 한 장 남아 잇다. 어느 식당에서의 축하모임이엇던 것으로 보인다. 1964년이엇다. 바버라 홀리와 스티븐이 부모와 함께 앞불에 앉아 있고 그 뒤로 이제 갓 열살을 넘긴 낸시와 조나단이 서 잇다. 앨리스 밴드를 착용한 낸시는 가족 중 유일하게 카메라를 응시하지 않고 잇다. 당시 낸시의 꿈은 정신분석가가 되는 것이엇다. 언니 바버라 홀리는 낸시에게 마음으로 통하는 친구이자 삶의 한 본보기엿고 재능있고 열성적인 피아니스트엿다. 나른하고 즐거운 시골 생활이 일년간 이어졌다. 같은 또래 여자아이들처럼 ‘아메리칸 드림’에 빠져 잇던 시간이엇다. 그런 후 어둠의 시기가 찾아왔다.

1965년 4월 12일 언니 바버라가 끔찍한 방법으로 자살한다. 당시 열여덟이었다. 바버라의 죽음은 가족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낸시의 부모들은 상실감과 죄책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엄청난 이 사실을 단지 부정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살아 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엇다ㅓ.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버라의 죽음을 이웃들이 모르게 하는 것이엇다. 낸시에게도 사고로 죽은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예민한 낸시는 이미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 알고 있었고 깊이 상처받게 된다. 어떤 경우라도 진실을 찾아내는 데 집착하고 만일 그것이 진실이라면 불편함이나 따분함, 체면 손상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 그의 태도는 아마 이 사건에 연원하는 것 같다.낸시는 온갖 사람들과 온갖 사물들을 대상으로 격렬한 싸움을 벌인다. 그녀는 미국 정신의 어두움으로 존재하는, 그 ‘꿈’ 뒤에 감춰진 악몽인 당대의 거짓과 물질주의를 가장 미워햇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녀는 싸움에 지친 것 같다. 그녀가 사진경력을 시작할 때 주류는 미술계와 마찬가지로 추상적 구조가 지배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만의 싸움을 해나갓다.

그러나 그녀는 진실만 보는데 지쳐간 것으로 보인다. ‘부두에 서 있는 귀도(1998)’을 보자. “이탈리아 친구 중 한 사람을 찍은 이 사진은 인물과 풍경 간의 대조를 담아내려는 골딘의 새로운 추구를 보여준다. 보다 묵상적이고 부드러운 것에 대한 골딘의 기호를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어떤 특정한 작업 안에 들어가 잇지 않으면서도 골딘의 야외사진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는데 자연광을 교묘히 이용해 사람의 몸을 순수 추상처럼 묘사해내고 있다.”

그리고 ‘실버 힐 병원의 골든 리버 다리 위에서 찍은 셀프 포트레이트(1998)’를 보자. “최근의 이 사진은 골딘의 자화상과 새롭게 발견한 자연을 하나로 결합하고 있는 것으로 그 안에는 개인의 고독이 묘사되어 잇다. 골딘으로서는 매우 힘겨운 시기에 찍은 이 사진은 배경의 아름다운 금빛과 완전히 대조되는 고통스런 내면으로부터 만들어졋다는데 큰 의미가 잇다. 슬픔과 비밀을 간직하고 잇으면서 동시에 희망과 화해를 암시하고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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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으로 보는 로마인 이야기
강현식 지음 / 살림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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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장르는 역사심리학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미 일어난 역사적 사실, 이책의 경우엔 로마의 역사를 심리학으로 설명한다는 말이다. 말은 이해가 가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이런 식이다.

“영웅이라면 많은 갈등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아주 대단한 적을 상대해야 할 것같다.” 그러나 로마건국신화의 로물루스 형제는 늑대가 키웠다는 특이한 출생 이외엔 그리 특별하지 않다. 형제가 로마를 세우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고난도 그리 특별할 것이 없고 그들의 행동도 영웅답지 않다. 동생을 쳐죽이는 비윤리성은 그렇다치더라도 폭군이 되어 원로원 의원들에게 살해당하는 결말은 무어란 말인가? 위대한 천년제국의 건국신화치고는 좀 그렇다. 로물루스 형제는 결코 영웅답지 않다.

왜 그럴까? 어차피 신화라면 다른 민족들처럼 그럴듯하게 포장할 수 잇지 않았을까? 왜 유독 로마만 그럴까? 저자는 로마인들의 집단무의식 때문이라 말한다.

“로마는 한 사람의 영웅을 원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뿌리가 되는 신화에서조차 건국 시조를 한 명이 아닌 두명, 혼자가 아닌 쌍둥이, 동생에게 인정받는 형이 아니라 동생을 죽인 형, 시민들에게 칭송받는 왕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암살을 당해도 더 이상 찾지 않는 왕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신들의 성공은 뛰어난 한 사람의 영웅 때문이 아님을 천명한다. 이런 측면에서 로마는 다른 제국들과 구별된다. 많은 제국들이 한 명의 영웅과 함께 출현했다 사라졌지만 로마는 조직을 중심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천 년 동안 지속될 수 있었다.”

로마사엔 많은 영웅들이 있었다. 가령 리델 하트는 한니발을 이긴 스키피오를 역사상 최고의 전략가로 평가한다. 카이사르도 역사상 어떤 영웅 못지 않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처음부터 끝까지 로마인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한니발을 이긴 것도 이순신처럼 혼자의 힘으로 이룬 것이지 로마인들의 지원을 받아 이룬 것이 아니다. 카이사르의 최후도 스키피오의 운명 못지 않게 비참했다.

저자는 로마의 건국신화에서 영웅을 거부하는 로마인들의 집단무의식을 읽는다. 사람보다 시스템을 신뢰하는 로마인들의 성향은 원로원이란 시스템을 낳았다. 저자는 한니발에 맞서 절대적인 어려움을 딛고 연전연패를 최후의 승리로 만들 수 있었던 이유를 원로원이란 시스템의 우월성으로 설명한다.

공화정 시대 로마의 최고의결권은 사실상 원로원에 있었다. 원로원의 의사결정이 효율적이었기에 로마는 성공할 수 있엇다고 저자는 본다.

원로원은 집단이다. “집단이 개인보다 훌륭한 결정을 하려면 몇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의사결정은 먼저 문제가 무엇인지 정의하는 단계에서 시작해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토의하는 과정을 거쳐 의사결정을 하고 결정된 것을 이행하는 과정을 거친다. 집단의 의사결정은 집단내에 다양성이 살아있을 때 개인보다 뛰어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원로원은 다양성이 살아있었다. 여러 계층에 의석이 개방된 “원로원의 물갈이는 비교적 빠른 편이었다. 원로원의 구성권들은 원로 못지한게 신참도 많을 수 밖에 없엇다. 당연히 패기와 의욕이 넘치는 사람들, 다시 말해 분위기를 아직 파악하지 못햇거나 굳이 다른 사람의 눈칠르 볼 필요가 없는 사람들도 많앗다. 토의과정에서 다양하고 기발한 의견들이 제시될 수 잇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원로원이 승리한 가장 핵심적 이유가 아닐까.”

저자는 원로원의 개방성이 폐쇄성으로 바뀌면서 로마공화정의 몰락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기원전 200년부터 카르타고가 멸망한 해인 기원전 146년까지 54년 동안 집정관 수는 108명이 된다. 이들 가운데 과거에 집정관을 배출한 적이 없는 가문의 출신자, 즉 로마인들이 신참자라고 부른 사람의 수는 8명에 불과하다. 원로원 계급에 속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점점 고정되어갔다.” 원로원의 멤버가 그 사람이 그 사람이 되면서 원로원은 정체되었고 집단사고가 지배하게 되엇다고 저자는 말한다.

“2차 포에니 전쟁 때의 원로원과 이후의 원로원은 달랐다. 구성원이 바뀌지 않아서 폐쇄적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불필요한 친밀감만 발생하게 된다. 서로 얼굴을 붉히지 않기 위해 서로의 의견에 동조해 주는 것이다. 누가 새로운 의견이나 다수와 다른 의견을 내기만 하면 곧바로 공격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러나 원로원의 정체는 로마공화정 몰락의 원인이라기보다는 증상에 가까웠다. 로마가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병제가 아닌 징병제로 국민개병제를 채택햇던 것이 한몫햇다. 당나라 군대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평화보다는 전쟁이 일상이엇던 로마에서 징병제는 사회를 무너트렷다. 징병자원인 시민이 전쟁터에 묶이면서 가계가 무너진 것이다. 물론 원로원계급도 징병대상이엇다. 그러나 그들은 전쟁터에 나가도 가계가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전쟁의 과실을 쓸어담았다.

양극화는 그 자체로 심각한 문제이지만 양극화로 인한 징병자원의 부족은 징병대상의 하한선을 내리게 만들었고 로마군의 질을 떨어트렷다. 이대로는 로마가 망할 것이라 본 그락쿠스 형제는 개혁을 밀어붙였다. 그들의 개혁은 로마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정책들이었다. 그러나 원로원은 형제를 죽이면서까지 개혁에 저항햇다. 왜 그랫을까?

“로마의 원로원 귀족들을 비롯하여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은 날마다 호황이엇다. 그런데 이 모든 경제적 이득은 로마라는 울타리가 존재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만약 로마가 이민족의 침입으로 무너진다면 아무것도 보장받을 수 없다. 그런데 로마라는 울타리 역할을 해주던 막강 군대가 허약 군대가 되어가고 도시에는 걸인이 넘쳐났다. 이렇게 계속 가다가는 울타리가 무너질지도 모른다.” 귀족이, 그들의 공화정이 유지되려면, 그들이 계속 ‘무임승차’를 하려면 평민층이 건재해야 한다. 그락쿠스 형제의 개혁은 그것을 위한 것이엇다. 원로원 계급을 무너트리는 ‘혁명’이 아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개혁’이엇다. 그러나 그들은 저항했다.

왜 그랫을까? 그락쿠스 형제의 개혁이 급진적이엇던 것은 사실이다. 속도를 너무 빨리 냈다. 그러나 형제는 합리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들의 개혁에 동의할 것이라 순진하게 생각한 것같다고 저자는 말한다. 인간은 합리적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다. 원로원 계급이 저항한 이유는 당장의 손실이, 개혁으로 평민층에게 내주어야 할 손실이 장기적인 이익보다 더 크게 보였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행동경제학에서 말하는 손실회피 성향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개혁이 힘든 것은 바로 이런 심리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예를 들어보자. “자유주의 시장경제에서 부유한 사람들로부터 많은 세금을 걷어 모두를 위한 특히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위한 서비스를 한다고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속마음은 다르다. 부유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부를 내놓지 않는 이상 누군가에 의하여 자신의 재산권이 침해당한다고 느낀다면 그 심리적 고통은 생각보다 훨씬 클 것이다.’

결국 그락쿠스 형제의 개혁은 실패했다. 공화정의 몰락은 확정되었고 카이사르는 로마가 존재하기 위해선 제국이 되는 수 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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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 - 산월기(山月記) / 이능(李陵)
나카지마 아츠시 지음, 명진숙 옮김, 이철수 그림, 신영복 추천.감역 / 다섯수레 / 199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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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에 대해 안 것은 이책을 감수한 신영복 씨의 책에서 이다. 논어를 다룰 때 이책에 수록된 ‘제자’를 언급했다.

논어를 읽는 방법은 여러가지이다. 주자가 논어집주 첫머리에 인용한 “논어를 읽고도 사람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다.”는 정자의 말은 논어를 읽는 방법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말이다.

논어에서 읽어야 하는 것은 인(仁)이라든가 성(誠)이라든가 또는 충, 효 등의 추상적 개념이나 가치가 아니다. 공자라는 사람의 구체적인 삶의 진실이다. 공자의 논술이 아니라 공자의 말을 기록한 논어는 제자들과의 대화를 기록했다. 그렇기에 논어의 말은 구체적인 상황이 있고 대화의 상대방이 있다. 그 말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 상황을 이해해야 하고 누구에게 한 말인가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공자라는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런 구체적인 상황에서만 가능하다.

이책에 실린 ‘제자’는 그렇기에 논어를 읽는 사람에겐 공자를 이해하려는 사람에겐 가치가 높다.

언뜻 보기에 ‘제자’는 그리 대단한 작품은 아니다. 한문고전을 어느 정도 읽은 사람에겐 어디선가 읽은 말들을 이어붙인 글에 불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작가 자신의 원칙 때문이기도 하다.

“작가로서의 나카지마는 ‘이능’뿐만 아니라 ‘산월기’ ‘명인전’ ‘제자’에 이르기까지 시종일관 술이부작이라는 절제된 필의로 역사의 사람들을 단지 현재에다 생환해 놓는데에 자신의 역할을 한정해 둔다.” 그러나 그 술이부작은 문학적 상상력의 술이부작이다.

“이대로 좋은 것인가? 사마천은 자문했다. 이렇게 열띤 필치가 과연 괜찮은 것인가? 그는 ‘만드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자신이 할일은 ‘논술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사실 그는 논술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얼마나 생기발랄한 논술 방법이가? 비상한 상상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기술이엇다. 그는 때때로 ‘만드는 것’을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이미 쓴 부분을 다시 읽어보고 그것이 있으므로 해서 역사상의 인물이 살아서 움직인다고 생각되는 자구는 지웠다. 그러면 인물은 분명히 생생했던 호흡을 먼춘다. 이로써 ‘만드는 것’에 대한 우려는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면 항우가 항우가 아니지 않은가. 항우도 시황제도 초나라 장왕도 모두 같은 인물이 되어 버린다.

다른 인간을 같은 인간으로 기술하는 것을 ‘논술한다’고 할 수 있는가? ‘논술한다’란 다른 인간은 다른 인간으로 기술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되면 그는 역시 지워버린 자구를 다시 살려 두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원래대로 고쳐 다시 한 번 읽어본다ㅑ. 그제야 그는 마음이 가라앉는다. 아니 그뿐이 아니다. 거기에 기록된 역사상의 인물들, 항우나 번쾌, 그리고 범증 등이 모두 이제는 제대로 각각의 자리에 안주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 어떤 고민을 했을지 저자가 상상한 대목이다. 사마천의 사기, 특히 열전은 역사이기도 하지만 문학이기도 하다. 역사적 사실만 기록했다면 사기열전이 지금까지 널리 읽히는 힘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사마천은 역사적 사실만 기록하지 않고 그 인물이 되어 그 사람이 했을 법한 말들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었기에 인물은 더 진실에 가까운 인물이 되었다.

저자가 이책에 실린 작품들에서 하려한 것이 바로 그런 일이다. 술이부작하기 위해 창작하는 것.

이책에 실린 역사상의 인물들에 대한 저자의 해석에는 새로운 것이 없다. 위에서 인용한 사마천에 대한 ‘창작’도 사마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제자’에서 그리는 자로와 공자에 대한 저자의 인물분석도 새로운 것은 없다. 이책에서 읽는 자로는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논어 전체를 통하여 자로는 가장 많은 단편에서 그 언행을 보여 주고 잇을 뿐 아니라 그의 두드러진 개성 때무누에 논어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로부터 강한 인상을 받는다. 이를테면 그가 용기와 신의를 중히 여긴다던가 성격이 직설적이라던가 공자에 대해 종종 불만도 갖는 강한 의협심의 소유자라던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자로는 공자가 자신에게 하는 대부분의 말이 어떤 커다란 가르침의 일환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공자의 노선과 갈등을 일으켰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자로 자신의 타고난 기질이 공자의 세계를 수용하기에는 늘 지나치게 견고하였기 때문이다.

자로는 적어도 공자가 어떤 측면에서는 소극적이고 옹색하다고 불만스러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결코 그러한 현실적 조건들에 얽매이지 않고 초연할 수 있다는 자신만만했다. 그것은 그가 호방한 사람이엇다는 사실을 말해주기 이전에 부귀와 공명 등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행동하는 신념의 사람이었음을 말해준다.

이런 개성적이고 자기중심이 강한 제자와 공자와의 사제관계는 특별했다. 공자는 자공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가르침에 있어서 바로 그의 여러 자기 자긍하는 부분을 정면으로 찌르며 그의 가르침을 시도햇다. 따라서 공자가 자로의 장점으로 인정하는 바는 다음 순간 어김없이 비판의 표적이 된다. 공자의 비판을 읽다보면 자로가 어떻게 공자와 각별한 사제의 인연을 유지하며 공문의 중요한 인물로 부각될 수 있엇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러나 자로에게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 특별한 미덕이 었었다. 그의 두드러진 미덕인 저으이감이라든가 신의 또는 용기와는 또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공자에 대한 아주 특이한 경외심이엇다. 이 경외심은 자로에 있어써 언제나 그 어떤 예감과ㅣ도 같이 늘 그를 사로잡고 있었지만 좀처럼 의식적으로 자각되지는 않았고 그만큼 논어 단편에서도 은미한 모습으로만 나타난다. 자로와 공자의 관계를 이해할 때 이 측면을 놓치면 자로는 거의 희화화되는 것이 보통이다.

자로는 공자라는 이 희유한 인물과의 만남을 그 자신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전 생애를 걸고 이 인물을 돌보고 존중하고 또 그의 진실성을 끊임없이 시험하면서 그와의 이 인연을 유지해갔다. 그러나 정작 그는 위나라 대부 공회의 읍재로 있던 중 위나라의 정변에 휘말려 공자보다 한 해 먼저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의 비극적 최후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스승과 제자로서의 길고도 절실한 인연에서 끊임없이 이끌리고 또 끊임없이 달아났던 그는 역시 완전히 끌려들 수도 오나전히 달아날 수도 없었던 그 미묘한 인간적 거리에서 공자와는 크ㅜ게 다른 모습으로 자신의 생을 마감했다.” (이수태)

좀 길게 인용한 것은 자로에 대한 표준적인 이해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이책의 ‘제자’는 위의 인용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논술’인 위의 인용에선 느낄 수 없는 역사의 진실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제자’만이 갖는 점이다. 그 느낌은 사기열전을 읽을 때의 맛과 같다. 그 느낌을 신영복 씨는 이렇게 말한다.

“견고하면서도 결코 과열하지 않는 그의 담담한 문장과 함께 그의 작품 도처에서 느껴지는 공간과 여백과 여유가 바로 그 점을 증거로 보여준다. 모든 문학작품의 여백은 곧 독자와 관객들의 창조적 공간이다. 독자들의 몫이고 책임이다. 뿐만 아니라 때와 장소를 초월해 생환한 역사의 사람들을 삶의 현장으로 인도하는 이른바 ‘생환의 완성’도 어차피 당대 사람들이 고뇌해야 할 몫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사람들을 살려내는 작업은 곧 역사를 완성시켜 가기 위한 실천이고 또 하나의 창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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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배신 - 긍정적 사고는 어떻게 우리의 발등을 찍는가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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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 to Great에서 짐 콜린스는 그가 말하는 좋은 기업에서 위대한 기업으로 도약한 기업들의 공통점을 분석한다. 많은 공통점 중 하나는 ‘우리는 이길 것이다’라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다. 이런 믿음은 전쟁에서도 비즈니스에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개인차원에선 자신감이라 부르고 조직차원에선 사기라 부르는 것이다. 그런 믿음을 무엇이라 부르건 그것은 자기실현적 예언(self-fulling prophecy)가 되어 승리의 사이클을 만든다.

그러나 그 믿음에는 조건이 있다. 현실은 냉혹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냉혹한 현실을 똑바로 봐야 한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이런 말은 짐 콜린스만 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경영자들의 자서전이나 경영에세이에도 수없이 반복되는 말이다. 베트남 전쟁 중 포로로 잡혔던 최고위 장교였던 짐 스톡데일 장군의 이름을 따 짐 콜린스는 이런 마인드 세트를 스톡데일 패러독스라 부른다.

“스톡데일은 1965년부터ㅓ 1973년까지 8년간 수용소에 갇혀 있는 동안 20여 차례의 고문을 당하면서 전쟁포로의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고 정해진 석방일자도 없고 심지어는 살아남아 가족을 다시 볼 수 있을지조차 불확실한 상태로 전쟁을 견뎌냈다.”

짐 콜린스는 그 시간을 견디고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지 장군을 만나 물었다.

“나는 이야기의 끝에 대한 믿음을 잃은 적이 없었어요. 나는 거기서 풀려날 거라는 희망을 추호도 의심한 적이 없거니와 한 걸음 더 나아가 결국에는 성공하여 그 경험을 돌이켜 보아도 바꾸지 않을 내 생애의 전기로 전화하고 말겠노라고 굳게 다짐하곤 했습니다.”

“견뎌 내지 못한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아 그건 간단하지요. 낙관주의자들입니다.”
놀라운 말이었다. 아무 근거도 없이 풀려날 것이라고 믿었던 그의 확신은 낙관주의가 아니었단 말인가? 짐 콜린스는 어리둥정할 수 밖에 없었다.
“낙관주의자들입닏.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나갈 거야’하고 말하던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다가 크리스마스가 오고 크리스마스가 갑니다. 그러면 그들은 ‘부활절까지는 나갈 거야’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부활절이 오고 다시 부활절이 가지요. 다음에는 추수감사절, 그리고는 다시 크리스마스를 고대합니다. 그러다가 상심해서 죽지요.

이건 중요한 교훈입니다. 결국에는 성공할거라는 믿음, 결단코 실패할 리 없다는 믿음과 그게 무엇이든 눈앞에 닥친 현실 속의 가장 냉혹한 사실들을 직시하는 규율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책의 저자는 자기계발서들이 말하는 낙관주의는 규율없는 낙관주의라 말한다. ‘긍정적 사고는 널리 확산된 문화적 합의 중 하나라는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세력을 넓히고 잇다. 긍정적 사고에는 이론적 지도자와 대변인, 전도사, 판매원이 존재한다. 자기계발서 저자와 동기유발 강사, 코치, 트레이너가 그들이다.”

그들의 낙관주의를 한줄로 요약하면 ‘컵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도 그 컵에 물이 절반 차있다고 생각하라’가 된다. “긍정적 사고 또는 긍정적 태도가 치유책으로 제시되지 않는 분야는 사실상 거의 없을 정도다. 체중을 줄이고 싶다면? 작을 구하는 데 애를 먹고 잇다면? 돈 문제가 있다면? 그 모든 문제의 해답이 긍정적 태도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고방식의 대표주자가 시크릿이다. 원하기만 하면 세상 모든 것이 ‘끌어당김의 법칙’에 의해 나에게 온다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그러면 당신에게 긍정적인 일들이 찾아올 것이다. 원하는 것에 집중하기만 하면 당신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다. 무한한 재산이든, 성공이든, 사랑하는 사람이든, 레스토랑의 앉고 싶은 자리든, 말 그대로 무엇이든 가질 수 있다. 우주는 당신의 요청에 응하기 위해 존재한다. 당신은 욕구의 힘을 다루는 방법만 배우면 된다. 원하는 것을 눈앞에 그려보라. 그러면 그것이 당신에게로 ‘끌려온다’. 요청하고 믿고 받아라. 혹은 원하는 것을 정확히 제시하고 당연한 권리로 요구하라.”

시크릿의 요약이다. 놀랍도록 주술의 사고방식과 닮은 시크릿의 유심론은 긍정주의의 훌륭한 요약이다.

저자는 긍정주의의 핵심에는 무력감이 있다고 말한다. 긍정주의자들은 불평분자와 나쁜 뉴스와 같이 당신의 긍정적 태도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을 치워버리라 권고한다. 그런데 “왜 뉴스를 나 몰라라 하는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요.’ 재난 보도에서도 눈을 돌리라면서 ‘재난 소식은 당신에게 슬픔을 불러일으키지만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부정적인 뉴스다’”

시크릿이 말하는 것처럼 “정신의 힘이 무한하다면 굳이 주위에서 부정적인 사람들을 제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들의 행동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해석하면 되는 것 아닐가? 저 사람이 나를 비난하는 것은 모두 나를 이해서 그러는 것이다. 저 여자가 뚱한 얼굴로 있는 것은 나를 좋아하는데 내가 관심을 보여 주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등등으로 생각하면 그만 아닐까?” 불평분자를 몰아내라, 뉴스를 듣지 마라 같이 “환경을 바꾸라는 얘기는 우리가 희망한다고 해서 바꿀 수 없는 ‘진짜 세상’이 저 바깥에 있다는 것을 시인하는 셈이다. 이런 무서운 가능성에 ‘긍정적으로’ 대응하는 유일한 방법은 찬성과 지지, 좋은 뉴스, 미소 짓는 사람들만으로만 조심스럽게 구성해 둔 자신의 세계로 후퇴하는 것 뿐이다 그 우주는 지독히 외로운 곳이다”

누구에게 뺨을 한 대 얻어맞으면 오히려 자신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맞아준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비참함을 ‘정신승리법’으로 극복하는 아Q처럼 시크릿류의 긍정주의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그대로 따른다.

“우리는 현실에 불만을 가지기 쉽다. 그러나 불만을 가지면 가질수록 심리적 부조화와 괴리감을 느낀다. 이런 불편한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부모를 바꿀수도 학교를 바꿀 수도 국가를 바꿀 수도 없다면 태도를 바꾸는 수 밖에 없다. 편입을 하거나 다시 대입준비를 해 원하는 학교로 갈 수도 잇고 나라가 싫으면 이민을 갈 수도 있다. 부모가 싫으면 부모를 등지기도 한다. 이 역시 부조화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이다. 그러나 현실을 바꾸는 것보다는 태도를 바꾸는 편이 더 빠르고 쉽다.” (강현식)

그러면 왜 이런 유아론이 지구적인 규모로 유행하는가? 저자는 먼저 긍정주의의 뿌리로 거슬러 올라간다.

저자는 긍정주의의 뿌리는 청교도 윤리에 대한 반작용으로 태어났다고 말한다. 미국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은 신세계에서 살아남는 것 못지 않게 ‘칼뱅주의 그 자체를 견뎌내기 위해서도 분투해야 했다. 자기혐오에 이를 정도의 자기반성과 끝없는 노력을 요구하는 칼뱅주의의 무게는 신도 개개인이 감당하기엔 벅찬 것이었다. 엄혹한 종교는 아이들을 겁에 질리게 했다. 17세기의 판사 새뮤얼 시월의 글에는 열일곱 살 난 딸 이야기가 나온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조금 두ㅟ에 딸이 대성통곡을 했다. 아내가 이유를 물었지만 딸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딸이 입을 열고 한 말은 자기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지옥에 갈까 봐 너무 무섭다는 것이었다.’ 그런 불안은 사람들을 병들게 했다.

칼뱅주의는 고통받는 영혼에게 오직 하나의 위안거리를 주었는데 그것은 물질적 세상 속에서” 자신이 쓸모있는, 구원받을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힘들게 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자신을 증명할 수 없는 가정주부 같은 경우, “남은 것은 병적인 자기성찰이었다. 사람들은 소화불량, 불면증, 요통 등 신경쇠약 증세를 불러들이기에 딱 좋은 상태에 놓였다. 유행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몰라도 여성의 병약함은 강제된 나태함과 불필요한 존재라는 느낌에서 기인한 것이었고 실제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주었다. 수십 년동안 병약함으로 고통을 겪었던 (핸리 제임스의 누이인) 앨리스 제임스는 유방암 판정을 받자 곧 죽을 수 잇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일상의 노동이 비정형적이며 많은 부분 여서으이 노동과 겹치는 성직자들 또한 마찬가지엿다. 칼뱅주의를 믿는 영혼, 혹은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은 영혼은 진짜 일, 그러니까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자기혐오로 자신을 소진시킬 수 밖에 없었다.”

칼뱅주의의 음울함에 대한 반동으로 1860년대 신사상 운동이 막을 올린다. 신사상은 헨리제임스의 표현을 빌리면 “지옥불 신학과 관계된 병”에 대한 치료제였다. “신사상의 관점에서 보는 신은 냉담하고 무관심한 존재가 아니라 편재하는 전능한 정신 또는 영혼이다.” 신사상의 핵심은 “물질적 세계란 존재하지 않으며 있는 것은 오직 생각과 마음, 정신, 미덕, 사랑일 뿐이다. 따라서 질병이나 가난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이 세상의 실체는 해체되어 정신, 에너지, 진동으로 변하며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의식적 통제에 잠재적으로 복종한다. 이것이 크리스천 사이언스의 ‘과학’이다.” 일체유심조니 고통은 마음에 달렸다는 말이다.

그러나 “칼뱅주의와 새로운 긍정적 사고 사이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연속성은 양쪽 모두 자기반성이라는 부단한 내면적 과제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칼뱅주의자들은 느슨함, 죄악, 방종함의 징후를 찾기 위해 스스로 감정을 감시했다. 한편 긍정적 사고에서는 분노나 의심과 관련된 부정적 생각을 끊임없이 경계한다.”

아Q의 정신승리법은 끊임없이 패배를 몰아내야만 승리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일체유심조란 긍정성을 유지하려면 긍정성을 오염할 부정성을 끊임없이 청소해야만 한다. “이제 자아는 영원히 맞붙어 싸워야 할 적대자가 되었다. 칼뱅주의는 사악한 성향을 이유로 긍정적 사고는 ‘부정성’을 이유로 자아를 공격한다.”

오늘날 긍정주의는 수십억달러 규모의 동기유발산업으로 다시 태어났고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거대기업이란 시장을 잡았기 때문이다. “긍정적 사고는 고용주의 손에 의해 19세기의 주창자들이 짐작도 못했을 용도로 바뀌었다. 떨치고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라는 권고가 아니라 직장에서의 통제를 위한 수단, 더 높은 실적을 내라고 들들 볶는 자극제가 되었다.”

긍정주의가 처음 뿌리를 내린 곳은 영업부문이었다. 언제나 떠돌아다니며 언제나 거절과 패배에 온몸으로 부딪혀야 하는 세일즈맨들은 자기기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거부에 직면해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국 당신을 거부한 사람들을 믿는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동기유발산업의 황금기는 다운사이징과 함께 찾아왔다. “1981년부터 2003년까지 다운사이징 여파로 미국에서는 약 3000만명의 전업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다.” ‘외로운 세일즈맨’처럼 불안에 떠는 직원들에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다운사이징을 행한 당사자들은 닥치는대로 총을 쏴 댄 다음 정신적 상흔을 가리려고 동기 유발 포스터를 벽에 붙였다.”

“동기유발 산업은 이런 새로운 현실을 교정할 수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현실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고치라고 제안하는 것뿐이다. 기업 구조 조정은 환영해야 할 즐겁고 진보적인 변화이고 실업은 스스로 탈바꿈할 수 잇는 기회이며 새로운 ‘승리자’는 격동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기업들이 동기 유발 업체에 높은 비용을 치르면서 해 주길 바라는 일도 바로 그것이다.” 지그 지글러의 말은 동기유발산업의 메시지를 훌륭하게 요약한다. ”그건 당신의 잘못입니다. 체제를 탓하지 마십시오. 상사를 비난하지 마십시오.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열심히 기도하세요.”

재미있게도 다운사이징의 칼을 휘두르던 사람들도 그 메시지를 믿게 되었다. “고급 관리자들 역시 부하 직원과 마찬가지로 소모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들은 일반직원과는 다른 큰 잇점이 있었다. 혼란의 와중에서도 엄청난 부를 얻을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커다란 위험과 눈부신 보상이 결합된 강력한 칵테일은 미국 경영진을 휩쓸고 있는 아찔한 흐름으로 이어졌다. 톰 피터스가 말한 것처럼 무슨일이 일어나는지 논리적으로 생각하며 앉아 있기에는 모든 것이 너무 빨리 움직이고 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에서 위험을 피하고 보상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신비주의가 답이었다.

“위계질서의 꼭대기에 있는 CEO들은 급속히 변하는 세상사에 대해 올바른 직관과 육감을 가졌다는 확신을 심어 주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라는 새로운 자아상을 연출해냈다. CEO의 이미지는 유능한 관리자에서 지도자로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현란한 지도자로 바뀌었다. 아무리 봐도 동기 유발 ㄱ강사와 몹시 흡사하다. 이런 흐름을 두고 한 자기계발서는 ‘기업이 신비주의자들로 가득차 있다. 진정한 신비주의자는 수도원이나 성당이 아니라 임원실에서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새로운 ‘영적’ 기업문화에서는 긍정적 사고와 끌어담김의 법칙을 통해 세상을 자기 생각대로 통제할 수 잇다는 기대에 털끝만치도 의혹을 품지 않는다.”

이번 금융위기는 그 부작용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로버트 라이시는 이렇게 설명했다. ‘경제에 파급된 낙관주의는 미국이 지금까지 발명가와 만물 수선공, 혁신가와 실험가의 나라였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낙관주의는 또 우리가 왜 그렇게 돈을 펑펑 쓰면서 저축은 안 했는지도 설명해준다. 우리가 빚더미에 올라앉아서도 계속 돈을 써 댄 것은 우리의 낙천성과 관련이 있다.’ 꼭 필요하지도 않은 곳에 돈을 씀녀서 거리낌 없이 카드 빚을 쌓아가고 집에 2차 모기지를 설정하거나 시간이 지나면 대출이율이 상승하는 모기지 계약을 맺게 된 핵심에는 이 낙천주의가 있었다.

실제로 무모하기는 대출 기관이 돈을 빌린 사람들을 훨씬 앞질렀다. 서브프라임을 취급한 한 금융업체는 자산 대비 부채 비율이 1대 30에 달햇다. 미국 기업 문화가 전문경영의 따분한 합리성을 내던지고 신비주의, 카리스마, 번득이는 육감이라는 정서적 감동에 몰입한지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동기유발강연자들과 성스러운 영감을 받은 CEO들의 활약으로 기업들은 기만적 기대의 정점을 향해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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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문화사 - 조몬 토기부터 요시모토 바나나까지
폴 발리 지음, 박규태 옮김 / 경당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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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재로 널리 사용되는 이책은 제목 그대로 일본문화사를 다룬다. 그러나 사학과나 사회과학에서 말하는 생활양식이란 말에 더 가까운 문화보다는 예술, 학문과 같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일본문화를 다룬다.

이책의 내용은 책표지에도 소개되어 있듯이 조몬토기부터 요시모토 바나나까지 일본의 시작부터 지금까지를 한권에 포괄한다. 그 내용은 조소, 건축, 문학, 미술, 음악, 공연예술, 영화에서 만화와 대중문화까지 광범위하다.

한 이책이 얇은 책이 아니지만 한권에 다루기에는 결코 만만하다 할 수 없는 내용이다. 그러다보니 읽다보면 주마간산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책 한권 분량으로도 모자랄 내용이 2-3페이지로 메워지니 그런 느낌은 어쩔 수없다. 더군다나 시대도 분야도 그렇게 방대하니 말이다.

그러나 이책이 수십년을 살아남아 교과서로 쓰이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첫째 조몬시대라든가 야마토 조정, 에도시대와 같은 일본사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더라도 일본문화의 흐름을 개관할 수 있게 정치사와 문화사가 유기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둘째 워낙 긴 시대에 걸친 방대한 내용을 다루다 보니 설명이 간략할 수 밖에 없지만 요점을 명료하게 정리하고 있고 짧은 내용들이 어울려 각 시대별 문화의 이미지를 그리는데 성공하고 있다.

셋째 각 시대의 이미지를 관통하는 일본성을 설명하면서 전체적으로 일본문화의 특징을 그리고 있다. 특히 이 부분이 저자가 중점을 두는 부분이다.

“이책의 중심주제는 전근대시대에는 중국으로부터, 그리고 근대에는 서양으로부터 풍부한 문화적 차용을 해온 역사적 맥락 안에서 일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핵심적인 사회적, 윤리적, 문화적 가치를 유지하고 보존해왔으며 그럼으로써 일본인들은 항상 외국으로부터 차용한 것을 자신의 취향과 목적에 맞도록 응용해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에 있었다.”

저자가 일본문화의 특징이라 말하는 것은 미적 감수성이다. 일본의 미적 감수성은 선사시대부터 나타난다고 저자는 말한다.

“조몬 토기와 야요이 토기의 가장 현저한 차이는 전자가 장식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후자는 형식이 강조된다는 점이다. 많은 야요이 토기는 장식이 전혀 없다.” 일본사회의 원형이 만들어진 것도 조몬시대보다는 농경이 시작된 야요이 시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저자는 문화 역시 야요이 시대가 원형이 된다고 본다.

“야요이 토기는 그 고유한 예술적 가치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일본의 미학전통에서 가장 본질적이고 지속적인 가치에 기초하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도기제작술이 유약을 바르지 않은 단순한 형태의 토기로부터 세련된 자기로 이행되면서 초창기의 도기들은 그저 과거의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까지도 원시적인 도기에 대한 사랑을 간직해왔다. 원시적인 도기에 대한 일본인의 애정은 자연스러운 것을 가치있게 여긴다든지 혹은 본래적인 것, 변하지 않는 것을 선호하는 태도에서 기인한 듯하다. 자연스러움은 원재료에 충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원시적인 도기의 제작자는 자신이 사용하는 진흙을 가지고 꾸리며 하지 앟는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질감뿐 아니라 자신이 ‘원시적으로’ 만든 도기의 불완전성을 사랑한다.”

자연스러움에 대한 사랑은 일본에만 특이한 것은 아니다. 물론 재료 자체의 맛을 살리는 일본요리가 한국, 중국의 요리와는 다르지만 동북아 3국에서 자연스러움은 공유된 가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문화에서 자연스러움이란 특별하다. 그것은 단지 예술의 원칙이 아니라 일본인이 세상을 보는 감수성 자체라 저자는 보는 것같다.

신도를 예로 들 수 있다. “신도는 항상 ‘마코토(誠, sincerity)라는 관념과 연관성이 있다. 이 마코토라는 관념은 일본역사상 가장 중요한 지침이 되어 왔다. 천근대 일본에서 가장 대표적인 종교 및 신앙체계로 신도와 불교 그리고 유교를 들 수 있다. 이 중 불교와 유교는 6세기 중엽에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것인데 비해 신도는 일본 고유의 종교이다. 후대에 사람들은 이 세가지 종교시스템을 도식적으로 예컨데 불교가 ‘타계지향적(other-worldly)’ 혹은 ‘형이상학적’이라면 유교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이에 비해 신도는 ‘감성적’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와 관련하여 17세기 말에서 18세기의 학자들은 일본인의 ‘본래적인’ 특성은 신도적, 감성적이라고 규정하는 반면, 불교의 형이상학 및 유교의 합리성을 외해적인 것이라 하여 부정했다ㅓ. 이와 같은 네요-신도학차의 주장을 차치하더라도 우리는 일본인들이 항상 인간본성의 감성적 차원을 중시해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일본인들은 종종 ‘진리’라든가 ‘정의’ 또는 ‘선’과 같은 가치들보다도 그때그때의 느낌과 행위에 충실한 삶을 더 추구해온 것이다. 물론 일본인들에게 진리, 정의, 선 등의 가치가 마코토와 양립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일본인의 정조가 오랫동안 주로 감정의 윤리라 할 만한 마코토에 지배받앗다는 것을 시사한다.”

마코토는 윤리를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감수성의 문제로 보는 태도이다. 다시 말해 세상을 원칙에 따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미학적으로 느끼는 문제이다. 무엇을 느끼는가가 일본문화의 자연스러움을 정의한다.

마코토의 윤리가 미학적 원리로 발전한 것을 저자는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라 말한다. 모노노아와레란 “’사물이나 사건 등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감수성’ 혹은 ‘사물이나 사건에 감동할 줄 아는 능력’”이라 정의된다. “예를 들자면 기노 쓰라유키는 ‘고킨슈’ 서문에서 ‘꽃들 사이에서 지저귀는 새 소리하며 고요한 연못에서 노니는 개구리 소리’를 들을 때 과연 누가 노래나 시를 짖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묻는다. 그러면서 쓰라유키는 사실상 인간이란 정서적 존재라서 어떤 사물을 지각하고 마음이 동하게 되면 이에 반응하여 자연스럽게 직관적으로 노래와 시를 짓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모노노아와레의 가장 핵심적인 감수성은 바로 자연의 아름다움이건 사람의 느낌이건 어떤 사물이나 상황에 접하여 감동할 줄 아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모노노아와레가 미학의 중심원리가 된다면 아름다움은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게 된다. “일본의 전통에서 모노노아와레란 오직 인간이 사물 안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지각’함으로써ㅓ 비로소 성립되는 그런 것이다. 일본인들은 전통적으로 아름다움이란 대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즉 지각하는 인간)에 의해 환기되는 것으로 여겨왔다.”

모노노아와레는 미학은 마코토의 윤리에서도 동일하다. 국학의 대성자인 모토오리 모리나가는 겐지 이야기의 “지극히 여성적인 남자주인공 겐지의 성격규정과 관련하여 유교 및 불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겐지는 ‘말도 안되는 부도덕한 부정을 저지른’ 죄인이다. 그러나 노리나가는 겐지는 ‘선한 자’라 말한다.

“겐지 이야기가 지향하는 주제는 연꽃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것을 가꾸고 키우기 위해 탁하고 지저분한 흙탕물을 일부러 모으고 저장하는 사람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니까 겐지 이야기에 묘사된 부정한 불륜의 사랑이라는 더러운 흙탕물은 그것을 찬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인간존재의 근원적 슬픔을 아는 것의 비유라 할만한 연꽃을 키우기 위한 목적을 ㅅ설정된 것이다. 요컨대 겐지의 행위는 지저분한 흙탕물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아름답고 향기로운연꽃 같은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겐지 이야기는 그런 흙탕물의 부도덕하고 불순한 세계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것은 인간존재의 근원적 슬픔을 아는 공감능력이 뛰어나고 부드러운 심성을 지닌 자들 안에 자리잡고 있기 ㄸ개문이다. 겐지 이야기는 그와 같은 감성이야말로 선한 인간의 토대이자 기준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선과 악을 나누는 것은 감수성의 문제이며 악은 감수성이 메마른 ‘못 된’ 것이다.

전통적으로 일본의 소설은 서구식의 주제의식이나 플롯에 따르는 탄탄한 구조를 그리 중시하지 않았다. 모노노아와레의 미학 때문이다. “사실 일본인들은 이야기의 전개라든가 주의 깊게 구성된 서사적 측면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예를 들어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자연세계 및 그 안에서의 삶은 그 자체의 움직임과 기능을 가지고 잇다. 우리에게, 또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무한히 다양하며 부단히 변한다. 그런 것들에 대해 너무 과도하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해석을 가하게 되면 실패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예술가의 경우 그것은 오류이거나 부정직함이 될 수도 잇다. 바로 이와 같은 관점을 통해 가와바타는 ‘사물에 대한 탁월한 감수성’ 즉 다니자키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매우 익숙하고 친밀했던 고전문학에 널리 깔려 있는 모노노아와레를 드러낼 수 있었다. 그러나 다니자키가 ‘세설’에서 주로 인간관계의 친밀성을 탐구햇다면 가와바타는 그의 작품에서 사람들이 살고 잇는 자연환경에 대한 미묘한 반응을 다루고자 모노노아와레적 감각을 활용햇다.”

그러나 세상은 덧없다. 눈앞의 현상 너머의 세계에 무심한 모노노아와레의 세계에선 모든 것은 덧없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 덧없는 것에 피어나는 아름다움 역시 덧없다. 그렇기에, 덧없기에 그 아름다움은 더욱 가치가 잇다는 벗꽃의 미학이 일본문화를 지배했다고 저자는 본다.

“일본인들은 지속적이거나 영원한 것이 아닌, 깨어지기 쉽고 빨리 지나가버리며 사멸하기 쉬운 것 안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고래로 자연에 대한 그들의 감정은 무엇보다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사계절 가운데 그들은 특히 봄과 가을을 선호했다. 일본인들에게 봄은 생명의 시작 혹은 재생을 기념하는 계절로, 그리고 가을은 모든 생명과 아름다움의 궁극적인 소멸을 예감하는 계절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봄과 가을에 대한 일본인의 선호는 일견 엇비슷해 보이기는 하지만 사물이 소멸해가는 계절인 가을 쪽이 더 강렬한 매력으로 일본인들을 사로잡았다. 많은 일본인들은 그들의 감수성을 ‘아름다움의 피안’에까지 밀어붙여 외로움과 차가움과 시듦의 영역에서 미적 가치를 추구하게 되었다.

사멸하기 쉬운 아름다움을 선호하는 일본인의 감수성에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 깔려 있다. ‘시간의 전제적인 폭압성’이야말로 줄곧 일본문학과 예술사에 편만한 주제엿다. 일본인들은 상식적인 아름다움의 범주를 넘어서서 문자 그대로 시간에 의해 황폐화되고 시들어 소진된 것들에까지 이런 주제를 확장햇다.

스러져가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일본인들이 가지는 특별한 취향으로 인해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일본인의 예민한 감수성으로 인해 모노노아와레는 항상 슬픔과 멜랑콜리의 색조를 띠어왔다.”

논리적으로 모노노아와레는 무상의 미학으로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모노노아와레와 흔히 결합되었던 불교의 세계관이 멜랑콜리의 색조를 띠지는 않는다. 그러면 왜 일본인의 미학은 그런 방향으로 향한 것일까?

모노노아와레는 아와레로 줄여 말하기도 한다. 아와레는 슬픔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처음부터 모노노아와레란 감수성에는 멜랑콜리가 주조를 이룬 것이다. 중세일본문화에서 특히 이 부분을 “슬픔의 뉘앙스가 함축되어 있는 ‘쓸쓸함’ 곧 사비의 미학”이라 말햇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존재이다. 그러나 그런 외로움에 시달리면서도 중세의 일본인들은 사비의 아름다움 안에서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은 앞의 와카에 나오듯이 황량한 들판이나 혹은 단색의 빛바랜 늪지에서 이와 같은 사비의 미학을 발견했던 것이다.”

호지키의 유명한 모두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잇다. “호조키에는 전편에 걸쳐 움막(호조)이라는 말이 불교적 무상의 메타포로 더 나아가 모든 것이 덧없이 지나가버리는 불확실한 인생 그 자체에 대한 세련된 메타포로 주의 깊게 선택되어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우리는 천하고 초라한 움막에서 아름다운 어떤 것을 찾아내려는 경향을 엿볼 수 잇다. 그것은 중세에 전개된 ‘빈곤’의 미학에 기초한 아름다움이다. 움막이라는 중세적 이상은 15, 16세기에 창안된 다도에서 정신적, 미학적으로 그 정점에 도달한다. 불교 특히 선불교의 영향 아래 다인은 농가의 움막을 모델로 삼아 다실을 세웠다. 다도는 정신적일 뿐만 아니라 철저히 미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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