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배신 - 긍정적 사고는 어떻게 우리의 발등을 찍는가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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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 to Great에서 짐 콜린스는 그가 말하는 좋은 기업에서 위대한 기업으로 도약한 기업들의 공통점을 분석한다. 많은 공통점 중 하나는 ‘우리는 이길 것이다’라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다. 이런 믿음은 전쟁에서도 비즈니스에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개인차원에선 자신감이라 부르고 조직차원에선 사기라 부르는 것이다. 그런 믿음을 무엇이라 부르건 그것은 자기실현적 예언(self-fulling prophecy)가 되어 승리의 사이클을 만든다.

그러나 그 믿음에는 조건이 있다. 현실은 냉혹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냉혹한 현실을 똑바로 봐야 한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이런 말은 짐 콜린스만 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경영자들의 자서전이나 경영에세이에도 수없이 반복되는 말이다. 베트남 전쟁 중 포로로 잡혔던 최고위 장교였던 짐 스톡데일 장군의 이름을 따 짐 콜린스는 이런 마인드 세트를 스톡데일 패러독스라 부른다.

“스톡데일은 1965년부터ㅓ 1973년까지 8년간 수용소에 갇혀 있는 동안 20여 차례의 고문을 당하면서 전쟁포로의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고 정해진 석방일자도 없고 심지어는 살아남아 가족을 다시 볼 수 있을지조차 불확실한 상태로 전쟁을 견뎌냈다.”

짐 콜린스는 그 시간을 견디고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지 장군을 만나 물었다.

“나는 이야기의 끝에 대한 믿음을 잃은 적이 없었어요. 나는 거기서 풀려날 거라는 희망을 추호도 의심한 적이 없거니와 한 걸음 더 나아가 결국에는 성공하여 그 경험을 돌이켜 보아도 바꾸지 않을 내 생애의 전기로 전화하고 말겠노라고 굳게 다짐하곤 했습니다.”

“견뎌 내지 못한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아 그건 간단하지요. 낙관주의자들입니다.”
놀라운 말이었다. 아무 근거도 없이 풀려날 것이라고 믿었던 그의 확신은 낙관주의가 아니었단 말인가? 짐 콜린스는 어리둥정할 수 밖에 없었다.
“낙관주의자들입닏.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나갈 거야’하고 말하던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다가 크리스마스가 오고 크리스마스가 갑니다. 그러면 그들은 ‘부활절까지는 나갈 거야’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부활절이 오고 다시 부활절이 가지요. 다음에는 추수감사절, 그리고는 다시 크리스마스를 고대합니다. 그러다가 상심해서 죽지요.

이건 중요한 교훈입니다. 결국에는 성공할거라는 믿음, 결단코 실패할 리 없다는 믿음과 그게 무엇이든 눈앞에 닥친 현실 속의 가장 냉혹한 사실들을 직시하는 규율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책의 저자는 자기계발서들이 말하는 낙관주의는 규율없는 낙관주의라 말한다. ‘긍정적 사고는 널리 확산된 문화적 합의 중 하나라는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세력을 넓히고 잇다. 긍정적 사고에는 이론적 지도자와 대변인, 전도사, 판매원이 존재한다. 자기계발서 저자와 동기유발 강사, 코치, 트레이너가 그들이다.”

그들의 낙관주의를 한줄로 요약하면 ‘컵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도 그 컵에 물이 절반 차있다고 생각하라’가 된다. “긍정적 사고 또는 긍정적 태도가 치유책으로 제시되지 않는 분야는 사실상 거의 없을 정도다. 체중을 줄이고 싶다면? 작을 구하는 데 애를 먹고 잇다면? 돈 문제가 있다면? 그 모든 문제의 해답이 긍정적 태도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고방식의 대표주자가 시크릿이다. 원하기만 하면 세상 모든 것이 ‘끌어당김의 법칙’에 의해 나에게 온다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그러면 당신에게 긍정적인 일들이 찾아올 것이다. 원하는 것에 집중하기만 하면 당신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다. 무한한 재산이든, 성공이든, 사랑하는 사람이든, 레스토랑의 앉고 싶은 자리든, 말 그대로 무엇이든 가질 수 있다. 우주는 당신의 요청에 응하기 위해 존재한다. 당신은 욕구의 힘을 다루는 방법만 배우면 된다. 원하는 것을 눈앞에 그려보라. 그러면 그것이 당신에게로 ‘끌려온다’. 요청하고 믿고 받아라. 혹은 원하는 것을 정확히 제시하고 당연한 권리로 요구하라.”

시크릿의 요약이다. 놀랍도록 주술의 사고방식과 닮은 시크릿의 유심론은 긍정주의의 훌륭한 요약이다.

저자는 긍정주의의 핵심에는 무력감이 있다고 말한다. 긍정주의자들은 불평분자와 나쁜 뉴스와 같이 당신의 긍정적 태도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을 치워버리라 권고한다. 그런데 “왜 뉴스를 나 몰라라 하는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요.’ 재난 보도에서도 눈을 돌리라면서 ‘재난 소식은 당신에게 슬픔을 불러일으키지만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부정적인 뉴스다’”

시크릿이 말하는 것처럼 “정신의 힘이 무한하다면 굳이 주위에서 부정적인 사람들을 제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들의 행동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해석하면 되는 것 아닐가? 저 사람이 나를 비난하는 것은 모두 나를 이해서 그러는 것이다. 저 여자가 뚱한 얼굴로 있는 것은 나를 좋아하는데 내가 관심을 보여 주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등등으로 생각하면 그만 아닐까?” 불평분자를 몰아내라, 뉴스를 듣지 마라 같이 “환경을 바꾸라는 얘기는 우리가 희망한다고 해서 바꿀 수 없는 ‘진짜 세상’이 저 바깥에 있다는 것을 시인하는 셈이다. 이런 무서운 가능성에 ‘긍정적으로’ 대응하는 유일한 방법은 찬성과 지지, 좋은 뉴스, 미소 짓는 사람들만으로만 조심스럽게 구성해 둔 자신의 세계로 후퇴하는 것 뿐이다 그 우주는 지독히 외로운 곳이다”

누구에게 뺨을 한 대 얻어맞으면 오히려 자신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맞아준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비참함을 ‘정신승리법’으로 극복하는 아Q처럼 시크릿류의 긍정주의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그대로 따른다.

“우리는 현실에 불만을 가지기 쉽다. 그러나 불만을 가지면 가질수록 심리적 부조화와 괴리감을 느낀다. 이런 불편한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부모를 바꿀수도 학교를 바꿀 수도 국가를 바꿀 수도 없다면 태도를 바꾸는 수 밖에 없다. 편입을 하거나 다시 대입준비를 해 원하는 학교로 갈 수도 잇고 나라가 싫으면 이민을 갈 수도 있다. 부모가 싫으면 부모를 등지기도 한다. 이 역시 부조화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이다. 그러나 현실을 바꾸는 것보다는 태도를 바꾸는 편이 더 빠르고 쉽다.” (강현식)

그러면 왜 이런 유아론이 지구적인 규모로 유행하는가? 저자는 먼저 긍정주의의 뿌리로 거슬러 올라간다.

저자는 긍정주의의 뿌리는 청교도 윤리에 대한 반작용으로 태어났다고 말한다. 미국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은 신세계에서 살아남는 것 못지 않게 ‘칼뱅주의 그 자체를 견뎌내기 위해서도 분투해야 했다. 자기혐오에 이를 정도의 자기반성과 끝없는 노력을 요구하는 칼뱅주의의 무게는 신도 개개인이 감당하기엔 벅찬 것이었다. 엄혹한 종교는 아이들을 겁에 질리게 했다. 17세기의 판사 새뮤얼 시월의 글에는 열일곱 살 난 딸 이야기가 나온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조금 두ㅟ에 딸이 대성통곡을 했다. 아내가 이유를 물었지만 딸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딸이 입을 열고 한 말은 자기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지옥에 갈까 봐 너무 무섭다는 것이었다.’ 그런 불안은 사람들을 병들게 했다.

칼뱅주의는 고통받는 영혼에게 오직 하나의 위안거리를 주었는데 그것은 물질적 세상 속에서” 자신이 쓸모있는, 구원받을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힘들게 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자신을 증명할 수 없는 가정주부 같은 경우, “남은 것은 병적인 자기성찰이었다. 사람들은 소화불량, 불면증, 요통 등 신경쇠약 증세를 불러들이기에 딱 좋은 상태에 놓였다. 유행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몰라도 여성의 병약함은 강제된 나태함과 불필요한 존재라는 느낌에서 기인한 것이었고 실제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주었다. 수십 년동안 병약함으로 고통을 겪었던 (핸리 제임스의 누이인) 앨리스 제임스는 유방암 판정을 받자 곧 죽을 수 잇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일상의 노동이 비정형적이며 많은 부분 여서으이 노동과 겹치는 성직자들 또한 마찬가지엿다. 칼뱅주의를 믿는 영혼, 혹은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은 영혼은 진짜 일, 그러니까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자기혐오로 자신을 소진시킬 수 밖에 없었다.”

칼뱅주의의 음울함에 대한 반동으로 1860년대 신사상 운동이 막을 올린다. 신사상은 헨리제임스의 표현을 빌리면 “지옥불 신학과 관계된 병”에 대한 치료제였다. “신사상의 관점에서 보는 신은 냉담하고 무관심한 존재가 아니라 편재하는 전능한 정신 또는 영혼이다.” 신사상의 핵심은 “물질적 세계란 존재하지 않으며 있는 것은 오직 생각과 마음, 정신, 미덕, 사랑일 뿐이다. 따라서 질병이나 가난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이 세상의 실체는 해체되어 정신, 에너지, 진동으로 변하며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의식적 통제에 잠재적으로 복종한다. 이것이 크리스천 사이언스의 ‘과학’이다.” 일체유심조니 고통은 마음에 달렸다는 말이다.

그러나 “칼뱅주의와 새로운 긍정적 사고 사이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연속성은 양쪽 모두 자기반성이라는 부단한 내면적 과제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칼뱅주의자들은 느슨함, 죄악, 방종함의 징후를 찾기 위해 스스로 감정을 감시했다. 한편 긍정적 사고에서는 분노나 의심과 관련된 부정적 생각을 끊임없이 경계한다.”

아Q의 정신승리법은 끊임없이 패배를 몰아내야만 승리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일체유심조란 긍정성을 유지하려면 긍정성을 오염할 부정성을 끊임없이 청소해야만 한다. “이제 자아는 영원히 맞붙어 싸워야 할 적대자가 되었다. 칼뱅주의는 사악한 성향을 이유로 긍정적 사고는 ‘부정성’을 이유로 자아를 공격한다.”

오늘날 긍정주의는 수십억달러 규모의 동기유발산업으로 다시 태어났고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거대기업이란 시장을 잡았기 때문이다. “긍정적 사고는 고용주의 손에 의해 19세기의 주창자들이 짐작도 못했을 용도로 바뀌었다. 떨치고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라는 권고가 아니라 직장에서의 통제를 위한 수단, 더 높은 실적을 내라고 들들 볶는 자극제가 되었다.”

긍정주의가 처음 뿌리를 내린 곳은 영업부문이었다. 언제나 떠돌아다니며 언제나 거절과 패배에 온몸으로 부딪혀야 하는 세일즈맨들은 자기기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거부에 직면해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국 당신을 거부한 사람들을 믿는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동기유발산업의 황금기는 다운사이징과 함께 찾아왔다. “1981년부터 2003년까지 다운사이징 여파로 미국에서는 약 3000만명의 전업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다.” ‘외로운 세일즈맨’처럼 불안에 떠는 직원들에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다운사이징을 행한 당사자들은 닥치는대로 총을 쏴 댄 다음 정신적 상흔을 가리려고 동기 유발 포스터를 벽에 붙였다.”

“동기유발 산업은 이런 새로운 현실을 교정할 수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현실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고치라고 제안하는 것뿐이다. 기업 구조 조정은 환영해야 할 즐겁고 진보적인 변화이고 실업은 스스로 탈바꿈할 수 잇는 기회이며 새로운 ‘승리자’는 격동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기업들이 동기 유발 업체에 높은 비용을 치르면서 해 주길 바라는 일도 바로 그것이다.” 지그 지글러의 말은 동기유발산업의 메시지를 훌륭하게 요약한다. ”그건 당신의 잘못입니다. 체제를 탓하지 마십시오. 상사를 비난하지 마십시오.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열심히 기도하세요.”

재미있게도 다운사이징의 칼을 휘두르던 사람들도 그 메시지를 믿게 되었다. “고급 관리자들 역시 부하 직원과 마찬가지로 소모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들은 일반직원과는 다른 큰 잇점이 있었다. 혼란의 와중에서도 엄청난 부를 얻을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커다란 위험과 눈부신 보상이 결합된 강력한 칵테일은 미국 경영진을 휩쓸고 있는 아찔한 흐름으로 이어졌다. 톰 피터스가 말한 것처럼 무슨일이 일어나는지 논리적으로 생각하며 앉아 있기에는 모든 것이 너무 빨리 움직이고 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에서 위험을 피하고 보상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신비주의가 답이었다.

“위계질서의 꼭대기에 있는 CEO들은 급속히 변하는 세상사에 대해 올바른 직관과 육감을 가졌다는 확신을 심어 주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라는 새로운 자아상을 연출해냈다. CEO의 이미지는 유능한 관리자에서 지도자로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현란한 지도자로 바뀌었다. 아무리 봐도 동기 유발 ㄱ강사와 몹시 흡사하다. 이런 흐름을 두고 한 자기계발서는 ‘기업이 신비주의자들로 가득차 있다. 진정한 신비주의자는 수도원이나 성당이 아니라 임원실에서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새로운 ‘영적’ 기업문화에서는 긍정적 사고와 끌어담김의 법칙을 통해 세상을 자기 생각대로 통제할 수 잇다는 기대에 털끝만치도 의혹을 품지 않는다.”

이번 금융위기는 그 부작용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로버트 라이시는 이렇게 설명했다. ‘경제에 파급된 낙관주의는 미국이 지금까지 발명가와 만물 수선공, 혁신가와 실험가의 나라였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낙관주의는 또 우리가 왜 그렇게 돈을 펑펑 쓰면서 저축은 안 했는지도 설명해준다. 우리가 빚더미에 올라앉아서도 계속 돈을 써 댄 것은 우리의 낙천성과 관련이 있다.’ 꼭 필요하지도 않은 곳에 돈을 씀녀서 거리낌 없이 카드 빚을 쌓아가고 집에 2차 모기지를 설정하거나 시간이 지나면 대출이율이 상승하는 모기지 계약을 맺게 된 핵심에는 이 낙천주의가 있었다.

실제로 무모하기는 대출 기관이 돈을 빌린 사람들을 훨씬 앞질렀다. 서브프라임을 취급한 한 금융업체는 자산 대비 부채 비율이 1대 30에 달햇다. 미국 기업 문화가 전문경영의 따분한 합리성을 내던지고 신비주의, 카리스마, 번득이는 육감이라는 정서적 감동에 몰입한지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동기유발강연자들과 성스러운 영감을 받은 CEO들의 활약으로 기업들은 기만적 기대의 정점을 향해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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