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격 - 무엇이 우리를 최고의 자리로 이끄는가
이시형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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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품격 또는 기품에 관한 책이다. 그런데 기품이란 도대체 무슨 뜻일까? “품격은 쉽게 말해 자기 존중감, 자기긍정감이다.” 저자의 정의이다. 정확하다. 그러나 이 한줄의 정의로 그 뜻이 잡히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품격이란 말은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보면 아는 그런 말 중의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품격 또는 기품이 무엇인지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누구나 기품이 있는 사람을 알아본다.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보면 아는 그런 말은 그 말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를 생각하는 것이 이해가 빠르다.

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것보다 바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관계를 맺을 때
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는 것을 깨달았으면서도 스스로 문제를 만들지는 않았는지, 문제해결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는지 생각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핑계 만들기에 급급할 때
 자기 자신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지만 스스로 해야 할 일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때
 동료들을 못살게 굴거나 놀리고 별명을 부를 때
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끼어들거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지 않을 때
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주위 사람을 관찰할 때
 다른 사람의 업무성과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많지만 자신의 생각을 생산적으로 정교화하지는 못할 때
 일을 더 잘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현 상황의 부정적인 면에만 초점을 맞출 때
 동료의 성공을 시기하며 못마땅해하고 심지어 훔치려 할 때
 혼잣말을 할 때도 분노를 폭발하거나 고함을 지를 때
                                                                                               (브루스 툴간)

직장에서 흔히 보는 꼴불견이다. 이런 사람을 기품이 있다 품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기품의 본질은 여유이기 때문이다. 기품은 강자의 여유이다. 세상 무엇도 자신을 흔들지 못한다는 자신감이다. 기품은 귀족을 말할 때 쓰는 말이었다. 귀족은 여유를 타고 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주역인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주어진 사람,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어서 아무 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기품은 제2의 천성이다.

“카이사르는 어머니의 애정을 한몸에 받으며 자랐다. 평생 동안 그를 특징지은 것은 하나는 아무리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도 유쾌한 기분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게 낙천적일 수 있었던 것은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나이에게 최초로 자부심을 심어주는 것은 어머니의 애정이다. 어릴 때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면, 자연히 자신감에 뒷받침된 균형감각을 얻게 된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는 적극성도 어느새 저절로 몸에 배게 된다.” (시오노 나나미)

카이사르는 모욕을 당해도 너그럽게 웃어넘기는 사람이었다. “분노나 복수는 상대를 자신과 대등하게 여기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고 일어날 수 있는 행위다. 카이사르가 평생 이것과 무관했던 것은 분노나 복수가 윤리 도덕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우월성에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월한 자신이 왜 열등한 타인의 수 준으로 내려가서 그들과 똑같이 분노에 사로잡히거나 그들과 똑같이 복수심을 불태워야 하 는가.”(시오노 나나미) 정적을 가차 없이 제거했던 술라와 정적을 포용하고 관용을 베풀었던 카이사르는 “많은 유사점을 갖고 있었지만, 이 점에서는 양극단이었다. 후세 역사가 들은 이런 카이사르를 '진정한 귀족 정신의 소유자'라고 평한다.” 카이사르가 해적에게 잡혔던 이야기는 그 귀족정신의 본질을 보여준다.

“젊은 시절 해적에게 붙잡혔을 때 카이사르는 타고난 천성대로 해적을 마음껏 무시했고 이런 점은 오히려 해적들에게 큰 매력으로 작용했다. 이들은 제발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며 공포에 빠진 포로는 익숙했지만 카이사르처럼 해적을 자신의 바쁜 일정을 잠시 방해하는 훼방꾼 이상으로 보지 않는 포로는 처음이었다. 카이사르는 자기 몸값이 겨우 20달란트(어마어마한 거액이었다)밖에 되지 않는다는데 모욕감을 느끼고 스스로 몸값을 50달란트(은화 30만냥)까지 올리기도 햇다. 카이사르는 동료 한 명과 노예 두명만 남기고 나머지 일행에게 몸값을 가져오게 햇다. 카이사르는 포로로 지내는 40여일 동안 해적과 어울려 식사를 했고 그들의 체력훈련에 동참하기도 했다. 시를 지어 들려주었다가 해적들이 시를 이해하지 못하면 천박하고 난폭한 야만인이라고 면박을 주기도 햇다. 이런저런 주문을 하기도 했고 잠자리에 들어서는 노예를 시켜 해적들에게 조용히 좀 하라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또 자신이 풀려나면 반드시 다시 돌아와 모두 책형에 처해 죽이고 말겠다고 반복해서 이야기하기도 햇다. 해적들은 이 대담한 젊은이를 무척 좋아햇고 몸값을 실은 배가 도착하자 아쉬움을 드러낼 정도였다. 카이사르는 떠들석하게 웃고 손을 흔들며 해적들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바로 배와 의용군을 징발해 해적들에게 돌아와 모두 체포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필립 프리먼)

그러면 더 이상 귀족이 없는 세상에서 기품은 어떤 의미인가? 기품은 타고나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질 수 잇다고 저자는 말한다.

“얼마 전 한 다큐 프로그램에서 본 91세 인어 할머니, 김화순 씨. 구부정한 허리, O자형 다리에 겨우 제 몸 가누기도 힘든 할머니다. 하지만 잠수복을 입고 뱃전에 서면 그 당당한 카리스마가 바다를 압도한다. 풍덩-. 홍합을 찾아 유연한 몸짓으로 헤엄쳐 내려간다. 누가 그를 91세 해녀라 할까. 이윽고 그물 가득 채워 배에 오른 늙은 해녀의 주름진 얼굴에 웃음이 피어난다. ‘오늘은 바다가 고바서…’ 바다가 잠잠해서 많이 땃단다. 속에서 우러나오는게 품격이라면 그리고 참 아름다움 속에서 피어오르는 내적 미가 품격이라면 저 늙은 해녀의 품격과 웃음을 누가 당하랴.”

문제는 그런 품격은 귀족으로 태어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이다. 돈으로 살 수도 없고 꾸밀 수도 없기 때문이다. “명품족을 지켜보노라면 아는 짓이 도대체 격이 없다. 큰 재산에도 베풀기는커녕, 오로지 내 것, 그리고 더 크고 화려한 것만 찾을 줄 알지 단아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모른다. 자기에게 맞지도 어울리지도 않는 걸 명품이라고 걸치고 다닌다. 졸부라 부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옹졸한 부자, 가짜 부자다.”

자신감이란 말이 어울릴 지위에 올라도 부를 쌓아도 명예를 얻어도 기품을 얻을 수 잇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기품은 얼마든지 스스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어떻게?

저자는 7가지 덕목을 ‘나열’한다: 절제, 포용, 배려, 정직, 신의, 배움. 틀린 말이 아니다. 우리가 보면 아는 ‘기품’이란 말을 분석해보면 그런 덕목을 보았을 때 말하는 것이니. 그러나 기품은 그 덕목들로 분해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기품이란 말을 할 때는 그 덕목들의 합 이상의 무엇을 말한다. 그렇지 않다면 기품이란 말을 쓸 이유가 없다.

“한국의 시위는 격렬하다. 길을 막는 건 예사고 유혈충돌, 방화, 투석, 보기만 해도 끔찍하다. 자기 회사 기물을 파괴, 불도 지른다. 구호부터 살벌하다. ‘결사쟁취’. 강한 의지를 보여줘야겠다는 의도이긴 하지만 합리적인 눈으로는 이해가 안된다.
‘목숨까지 걸다니…’
외국인 투자자가 발길을 돌리며 한 소리다. 그리곤 끝내 공장문을 닫게 된다.”

“1992년 LA에서 일어난 한국교포 상점 약탈 방화사건,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왜 한국인 상점만 당했을까? 그 옆에 중국, 일본 상점도 있는데 왜 하필 우리만 피해를 입었을까?

한국 교포들은 빈민촌에 슈퍼마켓을 열어 번 돈으로 벤츠를 타고 백인 동네에 산다. 땡볕에서 땀을 흘리며 길거리 농구를 하는 이웃 아이들에게 콜라 한병 주는 법이 없다. 유행이 지나 창고에 쌓인 신발 한 켤레 준 적이 없다. 거기가 내 삶의 터전인데 이웃 아이들에게 너무 인색햇다. 그 난리 통에도 평소 인정을 베풀었던 한인 상점은 아이들이 ‘이 집은 우리 친구야’라며 안전하게 지켜주엇다고 한다.”

저자가 절제, 배려란 덕목을 설명하면서 든 예이다. 저자가 이책에서 하려는 말은 그런 덕목 들 하나 하나를 몸에 배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이책에서 하는 말은 위에서 직장의 꼴불견을 나열한 것 이상은 아닌 것 같다. 물론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기품이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기품이 있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이 이책의 한계이다.

평점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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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년중국역사의 어두운 그림자
김택민 지음 / 신서원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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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제를 객관적으로 보면 1천년 전 중국 송조의 우위를 대번에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아시아, 특히 중국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우월한 지위는 적어도 1800년까지는 계속되었다. 세계경제의 판도 변화는 1850년 아니 어쩌면 1870년 이후에야 실제로 가시화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점점 강해진다. 1750년에 세계인구의 66%를 차지하던 아시아 인구가 같은 시기 전세계 GNP의 80%를 떠맡고 있었다. 세계인구의 2/3였던 아사아인이 세계 GNP의 4/5를 생산한 반면, 세계인구의 1/5인 유럽인은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과 함께 나머지 1/5을 생산했다. 아시아 특히 중국이 장구한 역사의 시간대로 본다면 극히 최근까지 그러니까 2세기 전까지만 해도 주도적 지위를 점하고 있던 것이 거대한 세계경제의 틀이었다.” (안드레 군더 프랑크)

2세기 전까지만 해도 세계의, 최소한 세계경제의 중심은 중국이었다. ‘중심인 나라’란 이름이 잘 어울리는 나라였다는 말이다. 중국이 그런 지위를 갖게 된 것은 왜일까? 4대문명 중에서 중국은 출발이 늦었다. 농경이나 청동기, 철기와 같은 기원전 시기의 첨단기술이 태어난 것은 중동이었고 군대와 국가와 같은 사회적 기술의 첨단을 달렸던 것도 중동이었다. 그러나 시작은 늦었지만 중동의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이 사라진 후에도 살아남는 것을 넘어 오랜 세월을 번영하고 세계경제의 중심으로 군림한 것은 중국이었다. 그 이유를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중국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지역은 주변지역에 대해서 계속해서 중핵적 위상을 확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유지 발전하지도 못했다. 그것은 자립적인 문명단위로 발전할 수있을만큼 퇴적지가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4대문명이 시작된 곳은 모두 강의 퇴적물이 쌓여 만들어진 퇴적지에서 만들어졋다. 그런 땅의 “토양이 원시농경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농경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원시시대에는 간단한 방법으로 경작할 수 있는 토양이 충분히 받달되어 있어야 농경이 가능했다. 땅을 갈아엎지 않아도 작물이 뿌리를 내릴 수있고 거름을 주지 않아도 될 정도로 비옥해야 하며 한 동안 비가 내리지 않고 관개를 하지 않아도 작물의 성장에 필요한 수분이 공급되거나 토양 자체가 수분을 보존하는 성질이 높아야만 농경이 가능햇다.”

4대문명이 시작된 나일강 삼각주, 유프라데스/티그리스강 유역의 퇴적지, 인더스강 중하류, 황하강이 만든 충적평야인 중원평야는 모두 그런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문제는 그 퇴적지의 크기였다. 나일강 퇴적지는 “중원평원의 1/10을 넘지 않을 것이다. 유프라데스/티그리스강 연안을 따라 형성된 ‘비옥한 초승달 지대’나 인더스강 유역의 퇴적지도 나일강보다 결코 넓거나 좋은 조건이 못된다. 아마도 이 때문이겠지만 원시 농경문화 단계를 지난 뒤 이들 지역은 더 이상 주변지역에 대해” 우위를 유지할 수 없었고 문명 자체가 소멸되엇다. 면적의 우위는 바로 인구의 우위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농경이 쉬운 비옥한 토지가 넓기까지 했기에 중국의 인구는 압도적이었다. CE 2년 중국의 인구는 “5,956만명인데 이 가운데 55.2%인 3,293만 명이 중원에 거주했다. 학자들은 당시 중국인구가 세계인구의 1/4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다면 중원인구는 세계인구의 15% 이상이 된다. 2천년전 세계인구 백명 가운데 15명 이상은 중원에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중원의 면적은 대략 남한의 4배 정도이다. 넓기는 하지만 그 땅에 인간의 15%가 살았다는 것은 그 땅의 경제력 때문이었다. 오랜 세월동안 세계경제에서 중국이 우위를 차지한 이유는 그 경제력 때문이며 그 땅에서 나온 상품 때문이엇다. 그 상품 중 하나는 비단이었다.

중국은 비단을 처음 만든 곳이다. 그러나 중국만 비단을 만들었던 것은 아니다. “한반도와 일본에서도 비교적 일찍부터 비단이 생산되엇”고 다른 지역에서도 비단이 생산되었다. 그러나 “8세기 무렵 세계 비단의 95%는 중국의 중원에서 생산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비단은 오늘날로 치면 자동차나 명품처럼 고가의 상품이엇는데 이런 비단이 대량으로 생산되는 곳은 중국밖에 없었다.” 그 이유 역시 “뽕나무 재배에 적합한 비옥한 퇴적지”의 면적 때문이엇다. 그러나 중원평원은 복이면서 화였다.

“중국인들은 중원대지가 천하의 중심임을 확신하고 자부햇다. 주변민족들도 중원대지와 그 땅 위의 왕조를 동경과 외경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중원대지는 실상 고난의 땅이엇고 심지어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잔혹한 땅이엇다.”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계절풍 지역인 중원평원은 농업에 유리하다. 그러나 여름에 강우량이 집중되고 비가 내리지 않는 기간이 길게 마련이라 “가뭄 또는 홍수로 인한 재해가 기록되지 않은 해가 없다. 정확한 통계를 얻을 수 있는 1470년부터 1979년까지 510년 가운데 491년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재해를 입었고 재해를 입지 않은 해는 단 19년이다.”

재해는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메뚜기떼의 피해도 사서에 많이 보이는 재해이다. 중원은 지형, 기후, 토양 등 자연조건이 메뚜기가 서식하기 알맞으므로 적당한 기후조건이 되면 메뚜기떼가 대폭발하여 엄청난 재난을 일으킨다.”

기후조건이 비슷한 한반도 역시 가뭄과 홍수가 많았고 “한국이나 일본에도 큰 가뭄 때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중국만큼 참혹한 사태는 많지 않았다. 한국이나 일본은 기후가 비교적 습윤한데다 산이 많다. 최악의 가뭄 때에도 산에 나무와 풀뿌리는 남아 잇어 연명할 수 있고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므로 조개나 물고기로라도 연명할 여지가 있엇다.”

그러나 남한의 4배 크기의 땅 90%가 “가뭄이 든 경우, 호아하와 그 지류들이 말라버리고 들판의 농작물과 나무와 풀도 모두 말라비틀어진다. 너무 멀어 바다로 나갈수도 없다. 사서에 ‘풀부리와 나무껍질까지 다 먹어버렸고 마침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라고 기록되는 것은 바로 이런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다.”

넓은 면적은 가뭄의 피해만 증폭하지 않는다. 한반도처럼 홍수는 해마다 반복되는 장마가 원인이다. “한국이나 일본의 강은 국토의 중앙에 큰 산맥이 있어 대개의 강이 산에서 발원하여 바다까지 급류로 흐르므로 홍수의 기간이 짧다. 수백mm의 집중호우가 쏟아져 심각한 홍수가 일어나고 농지가 초토화되어도 곧 물이 빠지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수확이 가능하므로 최악의 재앙은 덜 일어난다.”

그러나 중원평원은 다른 나라라면 그다지 높지 않은 태산이 엄청난 산이 될 정도로 평판한 저지대이다. 그런 넓은 저지대에 “폭우가 쏟아지면 물이 빠지지 않아 수해를 가중시키며 이때 대개 황하가 범람하여 참혹한 재난으로 발전한다. 일단 범람하면 물이 빠지지 않아 농지가 오랫동안 수몰된다. 중원평원은 바다로부터 6백Km 떨어진 개봉 부근의 고도도 수십m에 불과하여 일단 물에 잠기면 좀처럼 물이 빠지지 않기 때문에 그것으로 그 해 농사는 끝이다.”

저자는 펄 벅의 대지에 묘사된 홍수 장면을 인용한다. “늦은 봄에서 초여름까지 물은 불기만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바다처럼 되어버렸다. 구름과 달과 반쯤 물에 잠긴 수양버들과 대숲의 그림자가 거울 같은 물에 비친 모양은 한 폭의 그름처럼 아름답고도 처참햇다. 여기저기 피난간 빈 토벽집들이 보였다. 그런 집들은 며칠 가지 않아 흙벽이 무너져 물에 섞여버리고 만다. 사람들은 작은 배나 뗏목을 타고 성 안을 오가게 되었고 다시 예전과 같이 사람들은 굶주림에 허덕이게 되었다. 그러나 홍수는 여전히 잔잔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또 홍수가 났다. 강물은 불어 논밭 위를 해류처럼 흘러갔다. 물은 집 안까지 넘쳐들어 흙벽을 무너트리고 물 속에 잠겨 그 흔적도 찾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상의 물이 천상의 물을 끌어들이는 것처럼 맹렬한 기세로 비가 퍼부엇다. 매일매일 비가 왔다. 이해는 수확이 전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땅에서 물에서 죽었다. 전에 없는 기근이 마침내 닥칠 것이라고 왕릉은 생각했다. 겨울의 밀씨를 뿌릴 때가 되어도 물은 빠지지 않았다. 이래서는 내년에도 수확이 없다.”

이런 땅에 살면서 중국인들에게 자연은 정복하고 지배해야 할 대상이었다. “막스 베버의 주장과는 다르게 중국인들은 전근대 시기에 그 어떤 북서 유럽인들보다 더 자연계를 함리적으로 지배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엇다. 다시 말해 변덕스러운 기후로부터 자유로움이엇다.” (마크 엘빈)

중국인의 그런 욕망은 정치가 안정되고 위정자들이 제 역할을 한다면 실현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시기를 중국인들은 치세라 불렀다. 치세에는 자연재해가 발생해도 최악의 사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역사에서 태평성세는 드물었다. 위정자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고 사복 채우기에 급급한 경우 큰 기근이 들면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는 혹독한 시절이 된다. 이런 시기를 사람들이 살기 어려운 시절 즉 난세라 부른다.” 그리고 난세는 자연재해를 최악의 사태로 증폭시켰다.

난세는 빈부격차의 증폭과 함께 시작된다. 중국의 제국 시스템에서 빈부격차의 증폭은 필연이었다.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는 유목민과 건달패에게 빈주먹과 오합지중에 불과한 농민은 맛좋은 먹이에불과하다. 그 허약한 토끼에 불과한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안정시킬 수 잇는 능력이 없다. 그들은 단지 중앙집권의 정치권력에 기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다시 말해 강력한 정권이 질서를 유지해야만 그들도 외부의 침입과 소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제국이 존재해야만 백성들 자신의 안전이 보장되고 제국이 지속적으로 치안을 유지해야만 그들 역시 小康의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천하에 큰 난리가 날 때마다 그들이 ‘진명천자’의 출현을 손꼽아 기다렸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제국의 평화공존은 권력과 권력 배후의 무력에 의해 유지될 따름이며 天下爲公은 통치를 유지하는 구실에 불과할 뿐 실질은 국가가 소유권을 지니고 통치권은 황제가 소유하며 정권은 절대로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기적인 선거나 집권교체 등은 아예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는 제국은 물론 인민들도 동의하지 않을뿐더러 관심조차 없었다. 안정과 평안을 바라는 제국의 신민들은 결코 집권 세력의 빈번한 교체를 반기지 않았다.” (이중톈)

중국의 제국은 전형적인 ‘권력사회’였다. 물론 권력은 동의에 기초한다. 벌거벗은 힘은 번거롭고 지속되지도 않지만 동의에 기반한 권력은 비용이 낮고 지속가능하다. 그 동의의 기반은 안정이란 한 가지 위에 서있었고 다른 것은 불필요햇다. 기본적인 안정만 되면 나머지는 자유란 말이다. 그것도 엄청난 자유.

권력의 본능은 생존이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선 경쟁자가 없어야 한다. 역대 중국의 제국이 중농억상 정책을 내세운 것은 경쟁자를 없애기 위해서였다고 이중톈은 말한다. “어떤 권력 집중 사회나 권력 집중에서 전재로 발전하는 사회에서는 민간자본이 규모를 키우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유럽의 제국과 왕국은 이처럼 민간자본으로 형성된 재력사회에 의해 무너졌다.” 중국의 통치자들은 “상공업에 대해 거의 본능적으로 적대시하고 증오했다. 역대 정권 상구너을 경계하고 적대시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진이 굴기하고 천하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당시 재부가 나라에 필적할 만한 거상대고에게 많은 덕을 입었다. 상인의 세력이 막강해져 나라와 임금을 세우고 조정을 좌우할 지경에 이르렀다. 말에 오르는 것을 도왔다면 말에서 끌어내리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민간의 상공업을 억제, 탄압함으로써 제국은 자신의 생존을 확고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정권을 세우고 공고하게 만들려면 무기와 붓, 그리고 돈에 의지해야 한다. 이 세가지는 반드시 정권의 최고 통치자의 수중에 완전히 장악되어야 한다.”

중국의 역대 제국은 그렇게 했고 천하의 권력이 국가기구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집중된 권력은 제 무덤을 파기 마련이다.

견제없는 권력인 “제국은 본질적으로 수탈을 기반으로 한다. 제국의 몸통에 기생하는 통치집단이 수탈을 하지 않는다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기생’이라 말한 까닭은 그들이 세금을 징수한 현대국가의 정부처럼 납세자에게 세금에 상응하는 서비스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끊임없는 욕망을 채우는데 사용하기 때문이다. 수탈을 한다고 해도 백성이 그 나머지만으로 배불리 먹고 등만 따시다면 그것이 곧 치세인 것이다.” (이중톈)

자신의 무능 때문에 나라가 망하게 만들었던 만력제의 경우를 보자. 만력제의 능은 “재위시인 1585년부터 1590년까지 6년에 걸친 대공사끝에 완공되었으며 연인원 6천5백만명(오타 아님)과 은 8백만냥이 소요되었다. 6년동안 매일 3만명이 동원되었다는 말이다. 당시 명나라의 1년 조세수입이 은 1천5백만냥을 넘지 않았다 하니 은 8백만냥은 국가의 1년예산의 반이 황제의 능을 조성하는 데 소모되엇다는 말이다. 이 돈을 당시 쌀값으로 환산하면 1백만명이 6년 반 동안 먹을 양이다. 그런데 이 만력제릉도 진시황릉의 지하궁전 면적의 1/20에 불과하다.”

물론 거대한 능묘는 정치적 장치였다. “황제가 영원히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권위를 담은 칭호이듯이 거대한 궁전과 능묘도 황제의 권위를 공간적, 시각적으로 극대화해 누구도 도전할 엄두를 낼 수 없도록 하기 위해 조성된 장치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천하의 부를 한손에 움켜쥐고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던 사람들이 그 영화를 사후까지 연장하고 싶은 인간적 욕망이 거대한 능묘로 표현된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제국은 근본적으로 견제받지 않는 ‘절대’권력이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 아래선 부 역시 집중될 수 밖에 없다. “전통시대에는 종놈이 아닌 (자기 땅을 가진) 일반농민도 1년 내내 농사를 지어봐야 세금을 내고 나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것이 보통이다. 게다가 2,3년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가뭄, 홍수, 메뚜기의 피해를 입게 되면 굶주리게 되어 얼마 안되는 땅뙈기도 몇 됫박의 곡식에 부자들의 손아귀로 넘어가게 되고 급기야는 몸을 팔아 남의 종놈의 신세로 전락해 평생 뼈빠지게 수고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빈부격차가 극심해져 지배층의 “토지는 산천을 경계로 할 정도이나 가난한 백성들은 송곳 꽂을 땅도 없지만 세금은 점차 가혹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홍수, 가뭄, 메뚜기때의 재해가 일어나고 전명변까지 만연”하면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한가지가 된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난다. 대동란의 시작이다. 역사학자들은 지금까지 중국사에서 9번의 대동란(저자는 문화혁명까지 10번이라 말한다)이 있었다고 말한다. 황건적의 난, 홍건적의 난, 태평천국의 난 등이 그것이다.

“왕조교체기의 난세는 민중봉기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예측할 수 없는 총체적인 전쟁국면이 연출되어 전체의 삶이 부정되는 최악의 난국이 형성되었다. 민중봉기가 총체적인 전쟁국면으로 발전하는 이유는 일단 한 지역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면 전국에 걸쳐 동시다발적으로 민중봉기가 뒤따르게 되고 곧이어 호족들이 봉기에 참여하여 전국이 전쟁터로 변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민중군은 달리 생계수단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약탈을 자행하게 마련이다 농민들은 약탈을 피하기 위해 고향을 등질 수 밖에 없어 농지는 황무지로 버려지고 생산활동이 정지된다. 전국이 전쟁터로 변한 상황에서 기존왕권은 유명무실하게 되면서 수많은 수령들이 스스로 천명을 받은 새로운 패권자임을 자칭하여 치열한 패권다툼을 벌이게 되는데 이 소용돌이 속에서 생산기반은 철저하게 파괴된다.

도처에 약탈하는 군도들이 횡행하게 되자 외부에서 양식을 조달해야 하는 도시에서는 더 이상 사람들이 거주할 수 없게 되어 유랑할 수 밖에 없는데 성시를 떠난 사람들은 대부분 생존을 위해 도리없이 군도들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 세력이 더욱 급속히 확산된다. 또한 향촌의 주민들도 약탈을 피해 농사를 포기하고 산으로 숨거나 군도를 따르는 사람이 많아져 농토는 황무지로 버려지게 된다. 그나마 일부 농민들이 위협을 무릅쓰고 지은 농사도 언제 약탈당할지 몰랐다. 대전란이 없을 때도 결코 식량이 풍족할 수 없는데 몇 년동안 농사가 이루어질 수 없으니 식량이 엄청난 대기근과 죽음의 재앙에 휘말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를 좀더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대전란이 있기 전과 후의 인구통계이다. 전체인구의 1/2 이상 죽어간 대동란이 최초로 발발한 기원전 3세기 말 이래 2천1백년동안 아홉번이나 있었다. 또 대동란과 맞먹거나 그보다 더 참혹했던 이민족의 침략전쟁도 네 번이나 있었다. 지역에 따라 ‘열에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다’든가 ‘백 중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고 굶어죽은 ‘백골이 들판에 가득하다’는 말도 사실에 가까울 수 있다.

원래 민중들은 가만히 앉아 있다가는 굶어죽거나 얼어죽을 위험 앞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봉기했으나 그 결관느 참혹한 죽음의 세계를 연출한 것 이상이 되지 못했다. 이 같은 처참한 죽음의 세계 즉 난세가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온 것이야 말로 중국역사의 숙명적 비극성이다.”

일단 대동란이 정리되고 새로운 제국이 서면 대동란으로 지배층의 숫자가 정리되면서 빈부격차가 어느 정도 해소된 상태에서 새출발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한나라는 진나라 멸망의 원인을 교훈으로 삼아 엄격한 법치를 지양하고 세금을 감면하고 노역동원을 자제하며 흉노에 대해서는 무력동원을 최소화하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책을 견지하고자 햇다. 이러한 정책은 대동란을 거치고 난 뒤 많은 민이 살상되고 대부분의 토지가 황무지로 변한 상황에서 생산기반을 회복하고 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해 부득이한 조치엿지만 민들은 일시 숨을 돌리고 생산력을 회복하게 되엇으며 이에 따라 국가재정도 충실해졌다.” 이때를 문경지치라 한다. 역대 3대 치세로 꼽히는 당태종의 정관지치도 같은 상황에서 같은 정책을 취한 결과엿다. 제국의 초반은 대부분 이런 치세에 속한다. 그리고 치세와 함께 2-3백년의 사이클이 다시 시작된다. 그러한 사이클은 중국에서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농경에 기반한 제국에는 보편적인 사이클이라 할 수 있다. 단지 중국에선 그 사이클의 끝이 자연재해가 증폭되면서 더 참혹하고 더 극적일 뿐이다. 농경제국에서 관찰되는 사이클의 일반론을 보면서 리뷰를 끝내려 한다.

“안정과 내부 평화는 번영응ㄹ 가져오고 번영은 인구 증가를 낳는다. 인구 증가는 인구과잉을 낳고 인구 과잉은 임금하학과 지대 상승, 평민들의 1인당 소득의 삼소를 가져온다. 처음에는 낮은 임금과 높은 지대가 상류층에 유례없는 부를 가져다주지만 그들의 수가 증가하고 탐욕이 늘면 그들도 소득감소를 겪기 시작한다. 생활수준의 하락은 불만과 갈등을 불러일으킨디ㅏ. 엘리트층은 국가에 의지해 고용과 추가 수입을 얻으려고 해 국가의 지출을 끌어올리지만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빈곤해져 세수는 줄어든다. 국가의 재정이 붕괴되면 국가가 군대와 경찰을 통제할 수 없다. 그러면 모든 제약에서 풀려나 엘리트층의 갈등이 고조되어 내전이 일어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불만은 폭발해 민중 반란이 일어난다.

질서가 무너지면 묵시록의 네 기사, 즉 기근과 전쟁, 전염병, 죽음이 몰려온다. 그러면 인구가 감소하고 임금이 상승하지만 지대는 떨어진다. 그래서 평민의 소득은 회복되지만 상류층의 부는 바닥에 떨어진다. 엘리트층의 경제적 어려움과 정부다운 정부의 부재는 계속 내전을 부채질한다. 그러나 내전이 일어나면 엘리트층이 얇아진다. 일부는 파벌 싸움으로 죽고 일부는 이웃과의 반몫으로 목숨을 잃으며 많은 사람이 귀족의 지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다 결국 포기하고 조용히 평민층으로 떨어진다. 엘리트층 내부의 경쟁이 잦아들면 질서가 회복된다. 그러나 안정과 내부 평환느 번영을 낳아 다시 순환이 시작된다. 그래서 평화는 전쟁을 낳고 전쟁은 평화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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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은 왜! 사라지는가 - 배부른 세계의 종말, 그리고 식량의 미래
빌프리트 봄머트 지음, 전은경 옮김 / 알마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녹색혁명은 1960년대 참담한 식량 상황에 대한 대응이었다. 녹색혁명의 핵심은 품종개량이었다. 밀과, 옥수수, 벼에서 수확량이 뚜렷하게 많은 품종이 개발되었다. 이 품종들은 관개와 질소비료에도 훨씬 잘 반응했다. 사람들은 이 농작물들이 앞으로 전 세계 경작지의 모습을 결정하고 특히 아시아에서 대량으로 발생하는 기아에 맞서 싸우리라 예상했다.

고성능 작물은 아시아 벼 경작지의 75%, 아프리카 밀 경작지의 절반, 남미 옥수수 경작지의 2/3 이상을 차지했다.

성과는 획기적이었다. 인도의 수확량은 두배가 늘었다. 새로운 벼는 옛 품종보다 빨리 자랐고 빨리 여물었다. 게다가 1년에 두 번이나 추수할 수 있었다. 인도는 1980년대에 600만톤의 밀을 수출햇다.

그러나 인도 농부들은 예전처럼 수확의 일부를 다음 해 종자로 쓸 수 없었다. 녹색혁명 식물들은 유감이지만 최고 수확량을 한 번밖에 올리지 못햇다. 다음번 수확을 위해선 종자를 사야 했다. 게다가 이 식물들은 혼자 잘 자라지 못했다. 그때까지 마을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지원과 부가물이 필요했다. 그중 하나는 마을에 설치된 관개수로에 물이 흐르지 않아도 새 품종에 제때 물을 댈 수 있는 강력한 펌프였다. 또 벼를 두번 수확하기 위해서는 인공비료도 필요했다. 토양에 저장된 영양소는 두번 수확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빨리 성장하는 품종개량 작물의 얇은 세포벽을 쉽게 뚫고 들어가 성장을 저해하는 곰팡이와 박테리아, 곤충과 사우기 위해 화학적 지원도 필요했다.

예전과 완전히 다른 점도 있었다. 녹색혁명에 참가하려면 글을 읽을 줄 알아야 했다. 글을 읽어야 작물에 언제 물과 비료와 농약을 주는지 언제 수확하는지 언제 땅을 다시 갈아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또 종자와 기술, 화학적 첨가물들을 살 돈도 필요했다. 이는 수익자의 이윤을 현저하게 떨어트리는 결과를 불러왔다.”

녹색혁명은 농업의 산업화를 뜻했다. 문제는 산업형 농업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첫째 문제.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산업화된 농업 역시 석유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우리는 석유를 입고 석유를 먹는다. 석유화학으로 만든 섬유가 없다면 지금같이 섬유제품의 가치가 낮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석유가 아니라면 지금처럼 식량이 싸지지 않는다. 화학비료 때문이다. 화학비료는 원래 화약을 만들기 위해 개발된 질소고정법(구체적으로는 암모니아를 만드는 제조법)을 전후 비료생산에 응용하면서 만들어졋다. 문제는 암모니아를 얻기 쉬우면서 대량으로 조달할 수 잇는 재료가 화석연료라는 것이다. 그 재료로 보통 천연가스를 사용한다. 천연가스 2를 투입하면 화학비료 1이 얻어진다. 석유의 지속성이 산업형 농업의 지속성이라 할 수 있다.

둘째 문제. 산업형 농업이 대량으로 소비하는 것은 석유자원만이 아니다. 산업형 농업은 토지도 대량으로 소비한다.

“우리는 얇은 토양 위에 산다. 우리가 식량을 얻는 토양은 겨우 15센티미터에서 20센티미터 두깨고 지구 전체에 차지하는 면적은 11%에 불과하다. 나머지 89%는 너무 건조하거나 너무 염분이 많거나 너무 얕거나 너무 축축하거나 얼어있다.”

토양이 만들어지는 시간에 비하면 인간의 수명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토양은 북구불가능한 자원이다. “자연이 1밀리미터의 흑을 다시 만들려면 100년 이상이 걸린다. 우리가 사는 토양층의 평균두께는 150밀리미터이다. 이를 보충하려면 적어도 1만5000년이 걸린다.” 그러나 자연이 저축해온 석유를 단기간에 소비하듯이 인간은 자연이 저축해둔 흙을 단기간에 소비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경작이 가능한 땅을 ‘금 비축량’에 비유한다.

“흙이 사라지는 속도는 숨 막힐 정도로 빠른데 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빨라진다. 머지않아 토양은 부족해질 것이다. 지난 40년 동안 전 세계 경작지의 30%가 사라졌다.” 토양침식의 극단적인 예가 대공황 시절 더스트 볼이다.

“매년 1300억 톤의 비옥한 토양이 경작지에서 씻겨 나간다. 현대식 농업이 그 원인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쟁기질이 문제다. 쟁기는 경작지 토양을 뒤집고 최소한의 덮개도 없이 토양을 그대로 드러낸다. 흙이 자연재해에 속수무책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쟁기질은 토양 위아래로 골을 내는 작업인데 이는 비가 오면 곧장 물길로 변한다. 토양은 물길을 따라 계곡으로 흘러내려가 사라진다.”

문제는 쟁기질로 씻겨내려가는 흙만이 아니다. 산업형 농업은 남은 흙조차 경작이 불가능한 것으로 바꾸고 있다. 인공관개가 문제다.

산업형 농업은 대량의 물을 필요로 한다. 그 물을 대려면 인공관개를 할 수 밖에 없는데 이렇게 대는 물의 양이 많을수록 토양에 더 많은 염분이 남는다. 식물의 뿌리는 삼투압으로 흙의 양분을 흡수한다. 그런데 염도가 올라간 흙은 그 삼투압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바로 관개농업에 의한 염화로 무너졋다. “소금은 이제 전 세계 경작지의 1/3을 위협한다.”

세번째 문제. 염화를 부르는 인공관개 자체도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 산업형 농업의 거대한 물수요를 대기 위해 하천, 호수의 물을 한계까지 이용해왔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지하수를 대량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지하수 역시 금 비축량과 다를 것이 없다. 물론 지하수는 다시 채워진다. 그러나 소비되는 양이 채워지는 양을 압도한다.

네번째 문제. 기후변화는 물부족을 악화시킨다. 유럽을 예로 들면 “지중해 기후는 이미 북쪽으로이동중이다. 남쪽에는 ‘사하라’가 다가온다. 지중해와 대서양 사이에 놓인 지역은 21세기 후반 뜨거운 오븐처럼 달아오를 수 있다. 스페인, 이탈리아, 발칸 국가들, 그리스, 터키, 북아프리카 전체와 지중해 섬들의 눈앞에 폭서가 기다리고 잇다. 북쪽이 스텝으로 변하는 반면, 남쪽은 사막화가 진행되고 잇다. 기후변화는 북쪽으로 ‘대이동’을 하라고 말하는 듯하다.”

올 여름 한국에 폭우가 쏟아진 것은 기후변화의 방향 그대로이다. 동북아 지역은 아열대성 기후에 가까워지면서 이번 여름 같이 강우량이 많아지지만 지나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선 사막화가 진행되면서 물부족이 심각해진다.

기후변화는 물부족만으로 농업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 더 심각한 것은 경작 자체가 불가능하게될 것이란 점이다. 현재 곡물로 재배되는 종들이 기후변화로 높아진 기온 때문에 재배가 불가능한 지역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 기온이 상승하면 식량 안전도는 하락한다. 기온이 3도까지 상승하면 북쪽은 약간 이득을 보는 반면, 남쪽은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아프리카의 사하라 이남은 가장 큰 위험에 처해 있다. 몇몇 지역은 더위와 가뭄으로 더 이상 옥수수를 심을 수 없다. 아시아의 쌀 생산얄은 21세기에 급감할지도 모른다. 기온이 2도만 올라가도 벼농사는 큰 피해를 입어 두 자릿수의 감소를 보일 것이다. 밀은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특히 동아시아의 남쪽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는 산업형 농업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그 대안은 소농형 농업의 부활이다. 더 이상 낭비할 석유도 흙도 물도 기대할 수 없다. 지구의 한계에 기후변화라는 거대한 위협까지 더해지면서 산업형 농업은 더 이상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 대안은 비용이 더 낮고 낭비가 적은 소농형으로의 복귀이다. 어떻게든 자본집약적 농업을 유지할 수 여유가 있는 1세계는 모르지만 그런 농업이 불가능한 3세계에선 다른 대안이 없다. 원래 농업에 기대 잘 꾸려나가던 제3세계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자립이 불가능하고 기아와 빈곤에 허덕이는 이유를 저자는 1세계의 산업형 농업에 전통적 소농형 농업이 무너졌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러나 미래에도 산업형 농업이 경쟁력을 갖기는 힘들다. 산업형 농업의 경쟁력은 자원의 대량소비 때문이엇지만 앞으로 더는 그런 자원을 싸게 대량으로 소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먹여야 할 입의 대부분은 개도국에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그 입을 산업형 농업으로 감당할 수는 없다. 저자는 그들이 스스로를 먹일 농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명확하게 말하면 해당 국가들의 자립농 강화를 의미한다. 소농의 자립을 지원하는 데 성공한다면 이미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 제대로 작동하는 농촌식 농업만이 이농 현상과 그로 인해 일어나는 대도시의 슬럼화를 막을 수 잇다.” 물론 미래의 소농은 과거와는 다를 것이다. 농약과 대량의 화학비료, 양수기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의 미래는 기술에 달려있다. 예를 들어 현재 1톤의 곡물이 자라는 곳에서 앞으로 4톤을 기”를 수 있는 종자 같은 것이다. 그런 “종자는 학계 연구소의 선반에 이미 갖추어져 잇다.” 산업형 농업과 맞지 않아 사용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외에도 저자는 여러가지 예를 든다. 염화된 땅에서도 자랄 수 있는 밀이라든가건기에 잘 견디는 옥수수, 벼멸구에 저항력을 가진 벼, 콩처럼 질소를 고정해주어 질소비료가 필요없게 해주는 나무, 등등

그러나 농업연구는 식량과잉이었던 80년대 이후 정체되거나 예산이 삭감되어 왔다. 저자는 이런 추세를 뒤집어야 한다고 말한다. 산업형 농업의 극복 역시 기술에 달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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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의 시대 - 종교의 탄생과 철학의 시작
카렌 암스트롱 지음, 정영목 옮김 / 교양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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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인은 하늘과 땅의 간극을 보지 않고 오직 그 연속성만을 보았다. 그들은 ‘저 바깥’에서 원가 신성한 것을 찾는 일보다는 이 세계를 하늘의 원형과 일치시켜 더 신성하게 만드는데 관심이 있었다. 여기 땅에서 모든 것을 하늘의 도와 일치시키는 일상적이고 실용적인 노력을 하면서 신성함을 경험햇다. 일식이 일어나면 왕과 봉신들은 지단 주위에 모여 각자 정확한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우주의 질서를 회복하려는 것이엇다. 이렇게 땅은 하늘의 동반자엿다.

왕이 왕으로서 천명을 받아 천자가 되면 지상에서 하늘을 위한 ‘길이 열린다.’ 그는 도덕 즉 ‘도의 힘’이라 부르는 마법적 능력을 부여받는데 이 힘으로 적을 진압하고 충성스런 추종자들을 끌어들이고 자신의 권위를 강제한다. 왕이 일단 이 힘을 가지면 왕이 있는 것만으로도 그 힘이 발휘된다고 믿었다. 왕의 힘이 강하면 땅이 부서져 꽃이 피어난다. 왕의 힘이 쇠퇴하면 백성이 병들어 때 이르게 죽고 흉년이 들고 우물이 마른다. 자연과 사회는 서로 묶여 있다.

왕은 더할 수 없이 높은 권력을 가졌지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평생 천상의 모범과 일치해야 햇다. 그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왕의 역할은 자신의 힘으로 대외 또는 국내 정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냥 길을 따르는 것이엇다. 왕이 제의적인 의무를 정확하게 이행하면 그의 힘(도덕)이 만물을 ‘차분하고 온순하게’ 만들었다. 이런 신성한 안정 상태를 큰 평화(태평)라 불렀다. 왕은 살아있는 원형이었다. 사람들은 하늘의 아들을 모방하여 자신의 생활이 하늘의 도와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축제는 신성한 사회를 드러내는 것이었으며 신적인 것에 가까이 다가가 사는 것이었다. 모두에게 남과 바꿀 수 없는 유일무이한 역할이 있었다. 그들은 일상의 자아를 떠남으로써 더 크고 더 중요한 것에 사로잡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제의는 극적으로 천궁의 복제품을 창조햇다.

중국인들은 정교하게 고안된 의식의 중요성을 이해햇다. 이런 복잡한 드라마를 공연하면서 그들은 완전한 인간을 행해 나아간다고 느꼈다. 기원전 9세기에 이르면 제의에서 경험하는 변화의 힘이 신들을 다루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햇다. 우리는 어떤 역할을 수행하여 우리 자신과는 다른 존재가 된다. 다른 페르소나를 맡음으로써 우리는 순간적으로 다른 존재 속에서 우리 자신을 잃는다. 제의는 참여자에게 조화, 아름다움, 신성의 전망을 제시했으며 이 전망은 그들이 일상의 혼란으로 돌아가도 그대로 남았다.

제의의 확립은 주나라의 위대한 업적으로 꼽히며 뒷세대들도 이 점을 인정했다. 축의 시대 이후에 완성된 텍스트인 ‘예기’는 상나라는 영혼을 앞에 두고 제의를 두번째에 놓았으나 주나라는 제의를 앞에 두고 영혼을 두번째에 놓았다고 말한다. 상나라는 제의를 통해 신들을 통제하고 이용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주나라는 직관적으로 제의 자체가 신보다 큰 변화의 힘을 지니고 잇음을 깨달았다.”

공자가 述而不作이라 말할 때 그가 ‘술’하는 대상은 물론 서주의 ‘문화’이다. 그러나 그 문화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려면, 그리고 유교가 종교라 불리는지 이해하려면 고대중국인의 天觀, 원형에 대한 사고를 알아야 한다. “예란 하늘의 도(經)이며 땅의 의(義)이니 사람이 해야 할 것이다”란 춘추의 말은 공자에게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었고 유효한 것이엇다.

중국인들의 원형에 대한 사고는 고대인들에게 공통된 것이엇다. 중국인들이 신과 대화하기 뼈에 문자를 썼듯이 이집트에서도 문자는 신과 소통하기 위한 수단이엇다. 고대인들에게 인간은 혼자가 아니라 하늘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였다.

그런 고대인들의 사고방식을 엘리아데는 이렇게 요약한다. 고대인들은 “외계의 사물이거나 인간의 행동이거나 간에 그 자체로선 어떤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에 의하면 사물이나 행동은 어떤 가치를 본래 가지는 것이 아니라 획득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서 실재가 된다. 그런데 그럴 수 잇는 것은 사물이나 행동이 그들 자체를 초월하는 다른 실재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돌 중에서 어떤 돌이 거룩한 돌이 되었다고 하자. 그 돌이 거룩하게 된 것은 그 돌이 聖顯(hierophany)이 된다든가 마나를 소유한다든가 혹은 그 돌이 신화적 행위를 기념한다든가 하는 이유 때문이다. 사물은 어떤 외부의 힘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용기이다. 그 외부의 힘은 그 사람을 독특한 것으로 해줄 뿐 아니라 그 사물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인간의 행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행동이 의미와 가치를 갖는 것은 자연 그대로의 육체적 여건과 연결된 것이 아니라 원초적인 행위를 재현하고 신화적 범례를 반복할 때 이다. 음식을 먹는 것도 생리작용이 아니며 결혼과 질탕한 주연도 신화적 원형을 반향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반복되는 이유는 태초에 신들이나 조상들이나 영웅들에 의해 그런 것들이 성별되었기 때문이다.” (M. 엘리아데)

고대인에게 실재란 하늘의 원형(celestial archetype)을 모방한 것일 뿐이었다. 하늘의 장소를 본떠 만들어질 때 도시나 사원이나 집은 실재가 된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티그리스강 은 아누니트 별을 그 모델로 하고 유프라테스강은 스왈로우 별을 모렐로 한다고 한다. 이집트인들은 장소라든가 주의 이름을 천상의 ‘들판’ 이름을 따라 지었다. 먼저 천상의 들판을 안 다음에 지상의 지리와 그것을 동일시 한 것이다.” (엘리아데)

하늘의 따라 만들어진 장소는 ‘세계의 중심’ 또는 우주의 배꼽(Omphalos)이며 그렇기에 거룩한 장소이다. 고대인들은 누구나 자신이 우주의 배꼽, 거룩한 곳에 살고 잇다고 생각햇다. 그들은 성스러운 장소에서 성스러운 행위를 모방하며 성스럽게 살았다.

저자는 아리아인들의 성스러운 삶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들은 이름부터 성스러웟다. “아리아인이라는 말은 자부심의 표현으로서 ‘고귀하다’거나 ‘명예롭다’는 의미엿다. 그들은 기원전 4500년 경부터 카프카스 초원 지대에 살았다. 아리아인들은 조용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멀리 여행할 수 없었다. 말이 아직 가축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야는 초원 지대에 한정되엇다. 그들은 땅을 경작하고 양, 염소, 돼지를 치고 안정성과 지속성을 귀중히 여겼다. 이렇다할 적도 없엇고 새로운 땅을 정복할 야망도 없었다 그들의 종교는 단순하고 평화로웠다. 다른 고대인들처럼 자신의 내부와 자신이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경험햇다. 폭풍, 바람, 나무, 강은 비인격적인 정신이 결여된 현상이 아니었다. 아리아인들에게 인간, 신, 동물, 식물, 자연의 힘은 모두 같은 신성한 영혼의 표현이었으며 이것을 마이뉴 또는 마냐라 불렀다. 이것이 그들에게 생기를 주고 그들을 유지해주고 그들을 모두 함께 묶어주었다. 신들도 인간처럼 우주를 지탱하는 이 힘에 신성한 질서에 복종해야 했다. 이 질서가 삶을 가능하게 했다. 모든 것을 제자리에 유지해주고 진실하고 옳은 것이 무엇인지 정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느리고 무탈한 삶은 아리아인이 최신 기술을 발견하면서 끝이 났다 기원전 1500년 무렵 그들은 카프카스 산맥 남쪽의 메소포타미아와 아르메니아인에게서 청동무기를 배웠으며 전차를 얻었고 야생마를 길들이는 법을 배웠다. 남쪽 왕국에서 용병으로 일하고 돌아온 아리아인은 전사가 되엇다. 그들은 이제 빠른 속도로 여행을 할 수 있었고 새로운 기술을 이요해 이웃을 기습하고 가축과 작물을 빼앗았다. 습격과 약탈이 가축을 기르는 것보다 재미도 있고 이익도 많았다. 그들은 죽이고 약탈하며 전통적인 아리아인을 공포에 떨게 햇다. 전통적인 아리아인은 당황하고 겁을 먹었다. 방향 감각을 완전히 상실했다. 삶은 엉망으로 뒤집혔고” 더 이상 우주적 질서를 따르는 성스러운 것이 아니게 되었다.

길고 긴 영웅시대가 시작되었다. “힘이 정의였다. 족장들은 이익과 영광을 추구했다. 시인들은 침략, 무모한 배짱, 무용을 칭송했다. 이전의 아리아 종교는 호혜주의, 자기 희생, 동물을 사랑하는 태도를 가르쳤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가축 약탈자들의 마음을 끌지 못햇다. 이제 습격자들이 갈망하는 신의 모범은 신성한 전사 인드라였다.”

가축 도둑들은 전사가 되엇고 전사는 명예를 아는 귀족이 되었다. 귀족의 뿌리는 언제 어디서든 전쟁이었다. 귀족이 귀족일 수 있는 것은 귀족이 귀족의 자격을 갖는 것은 목숨의 대가였다. 가장 먼저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자. 남보다 앞에 서서 죽음을 향해 돌진할 수 있는 자만이 남에게 목숨을 요구할 자격을 가졌다. 남의 앞에 설 자격이 있는 자, 귀족은 전장에서 남의 앞에 서는 자들이 그 기원이었다. 중세 유럽의 기사도는 그런 전사의 에토스가 가장 세련되게 진화한 예일 것이다.

비겁하지 않겠는가?

약자를 보호할 것인가?

스스로를 속이지 않겠는가?

맹세는 죽음으로 지키겠는가?

넌 언제든 죽을 각오가 되었으니 이제 기사다

중세의 기사서약이다. 그 의식이 치뤄졌을 고딕 성당이 머리 속에 그려지는 맹세이다. 중세 기사도를 규정했던 가치는 명예였고 그것은 신의 영광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그 외양이 어떻든 그 본질은 전사의 에토스에 있었다.

항우는 길고 긴 중국의 역사에서 전사의 에토스를 가장 완벽하게 보여주었다. “항우의 관심은 부귀영화가 아니라 영웅의 업적이었다. 더구나 그는 결과(황제라는 ‘저 자리’)보다 과정(저 자리에 ‘오르는’)을 더 중시했다. 그는 원하는 바를 얻은 후에 무엇을 어떻게 누리며 살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에게는 오직 자신이 바라는 바를 얻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진정한 영웅은 승리를 위해서보다 전투 그 자체에 더 혼신을 다하는 법이다. 어느 영웅이 하릴없이 소일이나 하며 자기 생을 소모하고 싶겠는가. 할 일이 있으며 나서서 해내는 것이 영웅의 자세이다. 무슨 일을 하는 지는 중요치 않으며 그 일을 하고 나서 어떻게 되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감정의 인간이 생각하는 방식이요 행동하는 방식이다.” (이중톈) 감정의 인간은 머리로 세상을 보지 않고 가슴으로 세상을 느낀다. 감정의 인간에게 삶은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미학적이다. 그들에게 삶은 추하거나 멋있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그런 삶의 태도를 속된 말로는 폼생폼사라 하며 고상하게는 명예라 한다.

삶의 멋이란, 명예란 항우에게 무엇이었는가는 그의 최후에서 잘 드러난다. “항우는 줄곧 백전백승이었다가 마지막 전쟁에서 참패해 체면을 구기고 집에 돌아가지도 못햇다. 그는 ‘내가 강동의 자제 8천명과 함께 강을 건너 서쪽으로 왔다 지금 한 사람도 돌아가지 못하니 강동의 부형들이 불쌍히 여겨 나를 왕으로 삼더라도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만나겠는가!’라고 했는데 이는 ‘낯으로 그들을 보러 가겠는가’하는 것이다. 결국 항우는 자살했다. 비록 죽음의 길 밖에 없었지만 죽음의 길도 길이다. 항우가 자살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영웅이라 칭송하며 그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는 또한 ‘면목이 없다’라는 성어를 남겼으니 영원히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할 수 있다.” (이중톈)

항우에게 체면 또는 명예는 목숨보다 귀했다. 달리 말해 ‘폼’이 망가지는 것은 죽는 것보다 못했던 것이다. “그는 어째서 면목이 없다고 말했을까?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외에도 사람들의 연민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항우처럼 일생동안 강함을 추구해온 인간에게 연민이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연민을 받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

“그에게는 승리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전투 그 자체였다.” 그런 미학적 인간에게 구질구질하게 악착같이 포기하지 않는 것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천자의 자리가 아니었고 그가 원한 것은 영웅호걸의 통쾌한 삶일 뿐이었”으니 다 진 싸움에서 구차하게 목숨을 건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전장에서 물러나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 그는 다만 멋진 피날레를 연출하고 싶어햇다.” 삶을 미학적으로 살았던 항우는 그 최후에도 폼(또는 명예)을 꺾지 않았다. 그러나 그 폼, 그 명예가 어떤 명예인가가 문제이다.

‘면목이 없다’ 외에도 항우는 많은 고사성어의 원전이 되었다. 금의환향도 그중 하나이다. 그런데 그 말이 나온 배경이 문제이다.

항우는 진의 수도 함양을 점령한 후 힘없는 어린 황제를 죽이고 궁궐을 불태웠고 백성을 모조리 죽엿다. “역사서에는 이를 두고 성에 모기 새끼 한 마리 없었다고 전한다 분명 아녀자와 어린애도 죽였을 것이다. 모든 일이 끝나자 부하가 간언했다. ‘함양은 제왕의 수도입니다. 함양을 수도로 정하고 천하를 호령하십시오’ 점입가경으로 항우는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는 ‘부귀한 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으니 누가 알아줄 것인가’라 말했다. 입신출세해 비단옷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항우는 황궁에서 약탈한 금은보화와 수백명의 미녀들을 수레에 태워 의기양양하게 고향으로 갔다.” (이중톈)

항우는 명예를 중시했다. 그러나 그 명예는 약자를 위한 것도 천하를 위한 것도 아닌 자기를 아는 사람에게만 세우면 되는 폼이었고 명예였다. 그런 명예이니 그가 모르는 사람이 얼마가 죽든 상관이 없었다. “항우는 일단 성을 점령하면 성에 있는 백성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학살했으며 투항한 병사까지 생매장했다. 커다란 구덩이를 판 다음 수십만명이나 되는 사람을 며칠 밤을 새워 생매장했다.” (이중톈)

항우의 명예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명예였다. 이기적이고 쾌락주의적이고 잔인한 그런 명예는 호머가 그린 그리스 영웅들의 것이기도 하다. 알렉산드로스 역시 그런 삶을 살았다. 스승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게 말려도 그가 전쟁터까지 끼고 갔던 책은 일리아드였다. 그에게 호머의 영웅들은 삶의 모범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영웅들의 삶을 살았다. 명성을 쫓고 과시하기 좋아하는 호머의 영웅들은 책임감 있는 통치자라기 보다는 전사였다.

“호메로스는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더 강렬한 삶을 산다고 말하는 것같다. 만일 영웅의 명예로운 행위가 서사시에서 기억된다면 그는 죽음의 망각을 극복하고 소멸할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가능한 유일한 불명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명성은 생명보다 소중하며 시는 명성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경쟁하는 전사들을 보여준다. 이 영광의 탐구에서 모든 사람은 자신을 위해 나선다. 영웅은 며예와 지위의 문제에 시달리는 자기중심적인 인간이며 시끄럽게 자신의 공적을 떠벌리고 자신의 존엄을 높이기 위해 전체의 이익을 언제든지 희생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그런 자기중심적인 전사들은 통치자의 모델이 될 수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먼저 살았던 공자도 그랫고 당시는 정치철학이 완숙된 시절이었다. 당시 완성된 정치철학에서 군주란 민심을 헤아리고 천명을 받드는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알렉산더를 움직인 것은 그런 정치철학이 아니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야망과 허영에 따라 행동했다.

물론 그는 페르시아 제국을 소수의 병력으로 쓰러트릴 정도로 유능한 전술가였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권력을 다룰줄 아는 노련한 정치가였다. 그리고 그가 능력이 있었기에 그가 이룬 정복사업의 결과 위에서 그의 사후 헬레니즘이란 문명이 태어날 수 있었으며 로마제국이 가능했고 로마제국 위에서 기독교가 일어나고 지금의 서구문명이 태어날 수 있었다. 이것은 분명 그의 업적이다.

그러나 인간 알렉산더에게 세상은 자신의 명성과 새로운 도전 또는 모험을 위해 존재할 뿐이었다. 항우가 제국건설에는 무관심하고 오직 전쟁 자체에 열광했던 것처럼, 그는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트린 후 통치를 어떻게 할 것이라는 비전이 전혀 없었다. 물론 뛰어난 정치적 감각이 있었지만 그에게는 정복자체가 당기는 것이지 통치는 지겨울 뿐이었다. 그의 사후 그의 제국이 사분오열된 것은 당연하다.

그는 죽을 때까지 영원한 아이로 살았다. 게다가 술주정뱅이에 변덕스럽고 신경질적인 성격이었다. 그리고 독재적인 기질이 있는 권력욕의 화신이었다.

영웅시대는 항우와 알렉산더 같은 전사들이 세상이엇다. 그리고 그 영웅들의 신이 그들을 닮은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아리아인은 초원 지대에서 습격을 시작한 이후로 자신들의 일상 생활의 경쟁적인 분위기를 반영하는 방향으로 제의의 형식을 바꾸엇다. 그들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전차와 강력한 청동 검을 사랑했다. 그들은 목축민이엇으며 이웃의 가축을 훔쳐서 생계를 유지했다. 가축 도둑질은 목숨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에 오락이 아니었다. 또한 행위에 신의 힘을 불어넣는 제의가 결합된 성스러운 활동이었다. 인도의 아리아인들은 역동적인 종교를 우너했다. 그들의 영웅은 이동하는 전사이자 전차를 탄 투사였다. 아리아 전사들은 습격과 전투에서 데바와 아수라가 벌이는 천상의 전투를 재연했다. 그들은 싸움을 할 때 자신을 넘어서서 인드라와 하나가 된 것처럼 느꼈다. 이런 제의들은 그들의 전투에 영혼을 부여했으며 지상의 전투와 신성한 원형을 결합하여 전투를 성스러운 활동으로 만들었다.”

인도 아리아인의 종교에 그리고 그들의 그리스 사촌의 종교는 영광과 공포라는 영웅의 에토스를 재연했다. “전사의 삶 전체가 식량과 부를 둘러싸고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위험한 경쟁 즉 아곤이었으며 이런 경쟁은 죽음으로만 끝날 수 있었다.”

영웅시대는 달리 암흑시대라고도 부른다. “중동에서는 철의 야금 및 가공 기술이 보급됨과 더불어 기원전 1200년부터 기원전 1000년 사이에 침입과 이민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히브리인, 도리아인, 그 밖의 많은 새로운 민족이 역사에 등장하여 야만적이면서 훨씬 평등주의적인 시대를 열었다. 성서 ‘판관기’의 저자는 폭력과 유혈로 가득 찬 그 이야기를 이렇게 요약한다. ‘그때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서 사람마다 제멋대로 하던 시대였다.’” (윌리엄 맥닐)

일리아드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미케네 문명이 무너진 후 “그리스의 암흑시대 초기에는 정치체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대부분 스무 명 정도의 소규모 집단을 이루고 목축을 하거나 농사를 지으며 근근히 연명해나갔다. 실제 그리스 인구가 그전의 번영했던 시절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고 경작지도 따라서 감소했으며 당연히 식량생산도 줄었다.

농업이 시들해지자 많은 그리스인들은 유목민처럼 살았다. 머물던 곳의 목초지가 과도하게 방복되면 그 다음에는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떠나야 했다. 운이 좋으면 곡식을 경작할 땅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런 반 정착민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동할 때를 대비하여 간단한 오두막을 짖고 최소한의 집기만을 갖추고 살았다.” (토머스 마틴) 물론 그들은 떠돌며 약탈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파라오 람세스 3세는 북쪽으로부터 이집트의 변방응ㄹ 침략해온 해상 침략자들의 가공할 만한 연합세력을 기원전 1182년에 패퇴시키고 이렇게 말햇다. ’갑자기 사람들이 움직였다. 그 어떤 땅도 그들의 공격을 물리칠 수 없엇다. 그들은 땅끝까지 그들의 영토를 확장하려 들었고 그들의 정신은 자신감과 믿음으로 흘러넘쳤다.’ 이집트의 기록은 이들 바닷사람들(sea people: 암흑시대의 약탈자를 가리키는 역사용어)이 여러 다른 인종으로 구성되었다고 전핝다. 그들은 아마도 미케네 그리스, 에게 해 제도, 아나톨리아. 키프로스, 근동의 여러 지역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어떤 통일된 민족집단을 구성하지 않았다. 그들은 본거지의 정치적, 경제적 혼란 때문에 본거지를 떠나온 독립된 집단이엇다. 그들 중 일부 세력은 과거의 강력한 지도자 밑에서 한때 용병을 하던 자들이엇다. 그러다 권력과 전리품을 노려 그 지도자들에게 반기를 들었다. 일부 세력은 외국 땅에서 노략질을 하려고 먼 곳에서 온 자들이엇다. 지중해 동부를 휩쓴 바닷사람들은 여러 번에 걸쳐 파괴행위를 자행했다. 공격과 퇴각의 연쇄반응이 반복적으로 확장되는 사이클로 진행됨으로써 더 많은 약탈 집단이 파괴행위에 가담하게 되엇다. 바다사람들 중 일부는 순전히 약탈을 목적으로 했고 일부는 새로운 거주지를 찾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런 침략자 집단이 자행하는 물질적 피해는 그들이 기존의 정착사회에 끼친 사회적 혼란으로 더욱 악화되엇다. 이런 침략과 이주는 지중해의 정치적 지도와 인구의 지도를 바꾸어 놓았다. 이런 요란한 소동의 이유와 원인은 수수께끼로 남아잇지만 그것이 근동문명과 그리스문명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토머스 마틴)

암흑시대는 그리스와 중동 그리고 인도까지 지배했다. 암흑시대가 길어지면서 사람들은 지쳣다. “’리그베다’의 후기 시들 가운데 몇 편은 전에 볼 수 없는 피로와 비관을 표현한다. ;곤궁과 헐벗음과 피로가 나를 아프게 죄어 온다. 내 마음은 새의 마음처럼 차닥거린다. 쥐가 직조공의 실을 쏠쏠 듯 근심이 나를 갉아먹는다.’ 이런 허약한 상태는 혼란스러운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던 베다 시대 후기의 특징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새로운 시대의 폭력과 무자비함에 당황햇다. 전통적인 가치들은 쓸모없게 되엇고 무너졌다. 익숙한 생활방식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로 들어선 질서는 무시무시하고 낯설었다. 인도인들이 삶을 ‘두카’라고 느낀 것도 당연했다. 이 말은 보통 ‘괴로움’이라고 번역하지만 ‘불만족스럽다’, ‘결함이 잇다’, ‘뒤틀렸다’와 같은 말이 원뜻에 더 가깝다.” (저자의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에서)

그리스의 비극은 암흑시대의 두카에서 태어난 예술이다. “비극은 고난을 무대에 올려놓았다. 비극은 관객에게 삶이 두카라는 것, 고통스럽고, 불만스럽고, 비틀린 것임을 잊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기원전 5세기의 비극작가들은 폴리스보다 고통받는 개인을 앞세우고, 그 사람의 고통을 분석하고 관객이 그에게 공감하는 것을 도움으로써 축의 시대 영성의 핵심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이 두카를 그들 자신의 카르마의 결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외부의 신성한 원천에서 나온 것으로 경험한다. 필멸인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책임지지 않는다. 그들은 안티고네처럼 비극을 치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노력을 할만큼 한 뒤에는 당당하게 용기를 내어 운명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그리스 비극의 비관주의, 숙명론은 그리스인들이 암흑시대에 얻은 트라우마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 트라우마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햇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부자였던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아테네의 현자 솔론에게 자신의 보물창고를 보여주었다. 그러면 그 현자가 ‘부의 장대함’에 놀라워하리라 생각햇다. 그리고 크로이소스는 솔론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고 말햇다. 그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솔론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크로이소스가 아니라 한창 나이에 전사한 아테네의 어느 가장인 텔루스라고 답했다. 그 다음으로 행복한 사람도 역시 죽은 두 형제였다. 이 형제는 마치 한 쌍의 황소처럼 자신들을 마차에 매고 달려 어머니를 마을 축제에 모셔다 드리고 나서 쉬려고 곤히 잠든 사이에 세상을 떠났다.

크로이소스는 당연히 당혹했고 분노했다. ‘정말이지 어리석은 자’ 솔론을 멀리 쫓아버렸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나오는 에피소드이다. “솔론의 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건장한 형제가 휴식을 취하다 곤히 단잠에 빠진 뒤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하게 된것, 그리고 인생의 한창때 아내와 자식들을 남기고 생을 마감한 젊은 가장, 대체 어떤 면에서 이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볼 수 잇는가?

크로이소스가 갈망했던 손에 잡히지 않는 ‘그것’을 명명하는 단어는 그리스어의 유(eu: 좋은)와 다이몬(daimon: 신, 영혼, 악마)의 합성어인 유다이모니아(eudaimonia)는 행운이란 뜻(좋은 신, 안내해주는 영혼을 옆에 가진다는 것은 행운이므로)을 내포하게 된다. 이 말은 신성의 개념도 띠는데 다이몬이 신들을 대신해서 보이지 않게 인간을 지켜보는 신들의 사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에서 불행한 데스데모나는 신들도 인간처럼 변덕을 부린다는 것에 놀란다. 그녀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불행을 뜻하는 디스다이몬을 변형한 것이다. 다이몬은 악귀 또는 악령 즉 데몬의 어원이기도 하다. 그 모호하고 불길한 어떤 의미가 유다이몬에 녹아있다. 크로이소스가 물었을 때 솔론은 운이라는 것은 아무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이라 말한 것이다.

‘크로이소스, 신이 질투도 하고 인간을 괴롭히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잇는 당신이 내게 인간사에 대해 물었고. 인생을 보자면 원치 않지만 봐야 할 것도 많고 겪고 싶지 않은 고통도 많이 겪게 되는 것이외다. 인간의 수명을 70년으로 봅시다. 윤년을 빼면 25,200일로 환산되니 대략 한 인간 앞에 놓이는 것은 26,250일이오. 이 수많은 날 중 어느 하루도 같은 날이 없소. 그러니 크로이소스, 인간이란 자신 앞에 닥치는 것에 전적으로 달려 있을 뿐이라오. 당신이 아주 대단한 부자이고 많은 사람을 거느린 왕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없는 분명한 것이오. 허나, 당신이 내게 물은 그것은 당신이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내가 대답할 수 없는 문제라오.’

공포를 자아내는 천둥이나 일식, 월식, 공동체 전체를 휩쓸어버리는 주기적인 역병이나 기아, 어느 부락이든 어김없이 존재하는 끔찍하게 뒤틀린 외양을 가진 남녀들, 기껏 5년도 넘기지 못하고 죽는 아이들, 존재의 취약함을 부단히 상기시키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들. 이런 세상에서 삶이란 뭔가 추구해가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견디어 내는 것이엇다. 성공적으로 잘 견디어낸 자만이 운좋고 축복받은 행복한 사람들로 간주될 수 있었다.” 솔론이 말한 텔루스는 “역병이나 약탈군에 파괴되지 않은 도시에 살면서 출산 중에 자손을 하나도 잃지 않은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이기도 했다ㅓ. 건강과 유복함을 누렸으며 죽어서도 “아테네 시민들은 그가 숨을 거둔 장소에 공식 장례식을 거행하는 영예를 안겨주는” 명예로운 삶을 살았다.

솔론이 말하는 것은 “진정 그들에게 의미있는 것은 그 마지막 바로 죽음이다. 인간의 행운, 축복이 이제는 더 이상 빼앗길 수 없는 것이 됐음을 마지막에 확신하게 된 것이다. 인생은 불확실성으로 좌우되는 것이므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행복하다고 볼 수 없다. 솔론이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 크로이소스는 ‘악마의 엄청난 방문’에 맞닥드리며 비로소 솔론이 남긴 말을 깨닫는다. 아들이 이상한 죽음을 맞고 자신은 신탁을 잘못 이해해 전쟁의 재앙에 휩쓸리며 그의 왕국은 페르시아군에게 파괴당한다. 포로가 되어 장작더미 위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 그는 ‘살아 잇는 자는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도다’라고 외치며 솔론의 이름을 세번 부른다.” (대린 맥마흔)

축의 시대는 두카에 대한 것이며 두카의 극복에 대한 것이었다. “축의 시대의 영적 혁명은 혼란, 이주, 정복을 배경으로 이루어졋다. 어떤 사회에 전쟁과 테러가 만연한다면 이것은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에 영향을 준다. 증오와 공포는 그들의 꿈, 관계, 욕망, 야망에 스며든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이런 일이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이것을 극복하는 것을 돕기 위해 자아의 더 깊고 덜 의식적인 수준에 뿌리를 둔 교육을 만들어냈다. 그들이 서로 다른 경로를 거쳤음에도 깊은 수준에서는 서로 비슷한 해결책을 제시햇다는 사실은 그들이 인간이 움직이는 방식에서 어떤 중요한 것을 실제로 발견했음을 보여준다. 그들의 프로그램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폭력의 원인인 자기 중심주의를 없애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그 첫 프로그램은 인도에서 시작되었다.

인도의 축의 시대는 전례개혁과 함께 시작된다. “희생제는 인도 아리안 사회의 영적 핵심이었다.” 희생제의 의미는 지금도 농촌에 가면 고시레를 볼 수 잇는데 음식을 먹기 전 첫 숟가락의 음식을 조금 떠서 신에게 바치는 제의(祭儀)의 유물이다. 고시레와 마찬가지로 ‘아리아인은 신들이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느라 소비한 에너지를 채워주려고 희생물을 바쳤다.” 고대인들은 사람이 살기 위해선 다른 생물의 죽음 즉 희생이 필요하듯이 신도 살기 위해 그런 희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희생제는 중국인들의 제의와 마찬가지로 하늘과 땅이 연결되었다는 원형론을 전제로 한다. 아리아인들이 초원지대에 살때는 그들의 평화로운 삶처럼 희생제 역시 평화로웠지만 아리아인들이 가축도둑으로 거듭나면서 희생제 역시 호전적이고 경쟁적이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9세기 무렵이 되면 아리아인은 점차 약탈보다 농업 생산물에 더 의존하게 되었다. 정착인이 되면서 약탈의 악순환을 중단해야 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전통적 제의는 이런 파괴적 패턴을 정당화했을 뿐 아니라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기까지 했다. 사제들은 희생 전례를 체계적으로 평가하여 폭력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는 관행은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희생제의 핵심인 희생 즉 죽음은 내면화되었다.

“후기 베다 시대로 오면서 아리아인은 브라만, 즉 최고의 실재라는 개념을 발전시켯다. 브라만은 데바가 아니라 신들보다 더 높고, 더 깊고, 더 기본적인 힘, 우주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모든 요소득을 한데 묶어 그것들이 파편이 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힘이었다. 브라만은 정의되거나 묘사될 수 없엇다 모든 것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브라만 밖으로 나와 그것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제의에서는 경험할 수 있었다.”

희생제의 의미는 브라만을 느끼고 필멸자인 인간의 운명인 죽음을 극복한다는 의미로 확장된다. 그러나 그 자격을 얻으려면 “전리품을 들고 습격에서 안전하게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제의 개혁가들은 죽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투사하는 대신 자신의 내부로 받아들였다.” 희생 제물과 제물의 제공자가 하나가 되어 “세로운 제의에서 상징적으로 죽어 신들에게 바쳐졌으며” 희생제물처럼 “불멸을 경험했다. ‘그 자신이 희생물이 됨으로써 희생제를 바치는 사람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후원자는 이제 영웅시대의 약탈자들이 만신전의 주인으로 모셨던 “인드라처럼 죽여서 불멸을 얻는 것이 아니라 제의화된 죽음을 겪었다. 그렇게 해서 적어도 의식이 진해오디는 동안만이라도 시간을 초월한 신들의 세계에 들어가야 했다. 그는 이렇게 선포할 수 있다. ‘나는 하늘을, 신들을 얻엇다. 나는 불멸이 되었다.’”

여기서 개혁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발전한다. 필멸자가 불멸자가 된다는 것은 희생제를 바치는 사람은 자신을 바치는 것이며 자신을 바치는 것으로 브라만과 하나가 되어 “그의 자아(아트만)을 재구성한다”는 의미가 된다. 제의의 의미는 다음 세상에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생전에 ‘신성한 자아’를 알기 위한 것으로 바뀐다.

“전례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내면 세계의 발견”이 되었다. 사제들은 “희생제를 드리는 사람의 정신적 상태를 강조하여 그의 관심을 내부로 이끌었다 고대에는 종교가 보통 바깥을 외부의 현실을 가리켰다. 과거의 제의들은 신에게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들의 목표는 가축, 부, 지위 등 물질적 이익을 얻는 것이엇다. 자의식적 반성은 거의 또는 전혀 없었다. 제의 개혁자들은 선구자였다. 아트만이란 말은 점차 한 인간을 독특하게 만드는 그 사람의 본질적이고 영원한 핵심을 가리키게 되었다.”

내적 자아의 발견은 제의를 불필요하게 만들었다. “혼자서 명상을 하는 것이 외적인 제의만큼이나 효과가 있다. 제의 지식을 아는 자는 제의에 참가하지 않고도 하늘에 이르는 길을 찾을 수 있다. 고행자도 혼자서 적어도 자신의 신성한 아트만은 창조할 수 있을 것 아닌가? 따라서 이 순간부터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신과 동급이 되었으며 신들을 섬길 필요가 없었다. 인도에서 축의 시대가 열렷다. 그 이후로 인도의 영적인 탐구는 외적인 신이 아니라 영원한 자아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러나 인도에는 이 득의양한 자기만족이 (영웅들의) 괴물 같은 자기중심주의로 변하지 않도록 해줄 강력한 윤리적 의무가 여전히 결여되어 있었다.”

축의 시대의 촉매는 폭력과 그 결과인 무질서엿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질서를 무너트리는 폭력은 자기중심주의에서 나온다고 보았고 질서를 회복하려면 작은 나를 버리고(초월해) 더 큰 나를 깨달아야 된다는 케노시스가 축의 시대의 핵심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전사에겐 케노시스(또는 초월)란 “전사가 자아의 경계 ‘밖으로 나가는’ 유일한 길은 살해의 엑스타시스를 경험할 때뿐이다. 전사는 전쟁의 신 아레스에게 사로잡히면 생명의 엄청난 풀요를 경험하며 신과 같은 상태에 이르고 아르스테이아 속에서 자신을 잃고 앞에 있는 모든 것을 도륙한다. 따라서 전쟁은 사람에 의미를 줄 수 잇는 유일한 활동이다.”

전사들의 라그나로크를 끝내려면 케노시스가 필요햇고 축의 시대는 케노시스의 방법론에 관한 것이엇다고 저자는 말한다. 인도에서 그 방법론은 자아의 발견이엇다면 중국에선 윤리의 탐구와 함께 시작되었다.

기원전 8세기, 중국의 천자는 더 이상 도덕(도의 힘)을 가진 자가 아니었다. “종교도 다시 생각해야 햇다. 왕은 과거의 전례에서 핵심이었다. 그러나 이제 무력한 꼭두각시가 되고 말았는데 어떻게 그의 힘을 계속 숭배할 수 있을까?” 왕의 힘은 정치적인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주적인 문제엿다. 우주의 질서를 떠받치는 힘을 잃었을 때 질서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 중국에서도 그 해답은 제의전문가들이 내놓았다. “제의 전문가(儒)들은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귀족 생활의 원리를 정리햇다. 군자는 봉신들의 모임에서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할지 어떻게 서서 사람들과 어떻게 인사를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아야 햇다. 언제 이야기를 할지 언제 입을 다물어야 할지도 알아야 했다. 그때그때 정확한 옷을 입고 적절한 몸짓을 하고 적당한 얼굴 표정을 지어야 했다. 이 모든 것에는 종교적 가치가 있었다. 주나 초기에 왕실의 제의는 자연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고안되었었다. 이제 군주제가 쇠퇴하자 유는 대평원 지대에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생활 전체를 정교한 제의 수행과 다름없게 바꾸어놓았다.

제의 개혁은 폭넓은 의미를 지니는 원칙에 기초를 두었다. 예는 전례를 실행에 옮기는 사람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이런 의식에서 관심을 쏟는 자의 신성함도 높여준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주술적인 개념이지만 깊은 심리적 통찰에 기초를 둔 것이엇다. 일관되게 최고의 존경심으로 사람을 대하면 이 사람은 자신이 숭배를 받을 자격이 잇다고 느끼게 된다. 전례는 군자의 지위와 위엄을 고양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그러나 제대로 실행에 옮기기만 하면 조정에서 자기중심주의를 몰아낼 수도 있었다. 봉건제는 모두가 자기 자리를 지켜야 유지되었다. 봉신이 너무 힘이 강해지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국가의 평형을 흔들 수도 잇었다. 예는 폭력과 교만을 제어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전례는 제방이 홍수를 방지하듯이 무질서를 방지한다.’”

“제의화된 새로운 절제는 점차 중원의 제후국들에 뿌리를 내렸다. 비록 긴장된 시대엿지만 이러한 절제는 예로 표현되는 중국의 이상에 여전히 충성하는 이 오래된 읍성들이 평화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엇다. 제후국들 사이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폭력을 일정한 테두리 안에 가두어둘 수 있었다. 기원전 7세기가 되자 제후국의 삶은 예로서 세밀하게 규제되어 사회, 정치, 군대 생활이 주나라 조정의 정교한 제의적 의식을 닮아가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제의 개혁의 “목적은 절제와 자제로 우아한 삶을 사는 군자들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엇다.”

그러나 예는 시대를 이길 수 없었다. 예의 내용은 조화이다. 조화는 서로를 존중하는데서 나온다. 그러나 “이런 전례를 따르는 것이 사실 케노시스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귀족의 제의화된 생활 양식은 귀족들에게 겉으로는 서로를 존중하며 겸손하게 행동하도록 가르쳤지만 보통의 경우 예의 특징은 자기 이익이엇다. 모든 것이 위신의 문제였다. 귀족은 특권과 명예를 선망했으며 예를 이용하여 자신의 지위를 높엿다.” 결굴 예는 형식만 남고 그 내용은 그 시대의 정신인 자기이익을 담게 되었다. 유가식으로 말하자면 質이 文을 압도했고 무질서는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형식마저도 초나라와 같은 변방의 無禮한 나라들이 무대에 오르면서 무너져 내린다. 초나라 뿐 아니라 “다른 큰 나라들도 전통의 속박을 벗어던지기 시작했다.” 이제 절제와 양보의 미덕으로 구속했던 전쟁은 달라졌다. “적을 완전히 없애는 한이 있어도 더 많은 영토를 정복하고 확장하려 했다. 전쟁은 과거의 위엄있는 출정과는 사뭇 달라졌다. 제의에 대한 결멸이 확산되었다. 절제의 기풍도 희미해졋다.

이것은 단순한 사회적, 정치적 위기가 아니엇다. 하늘과 땅은 상호의존적이기에 천도를 이렇게 경멸하다가는 우주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겠다고 걱정했다. 노나라의 제의 전문가들은 새로운 탐욕, 폭력, 물질주의를 신성한 제의에 대한 신성모독이라 보앗다.

공자는 “제의의 깊은 의미를 이해했으며 그것을 제대로 해석하면 중국 사람들을 천도로 돌이킬 수 잇다고 확신했다.” 중국의 축의 시대는 공자의 그 확신과 함께 시작되엇다.

“이제 예는 귀족의 탐욕과 허세를 제어하지 못했다. 하늘은 무관심해 보엿다. 공자는 축의 시대의 다른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시대로부터 깊은 소외감을 느겼다. 그는 오랫동안 제후국의 행동을 관장했던 전통적인 제의를 무시한 것이 당대 중국에 만연한 무질서의 뿌리 깊은 원인이라 확신햇다. 제후들은 도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치를 쫓고 자신의 이기적인 야심을 채우느라 바밨다. 낡은 세계는 무너져 가는데 과거의 가치를 대신할 새로운 가치는 나타나지 않았다. 공자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좋은 해법은 과거에 잘 운용되었던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이엇다.”

그러나 공자가 해석한 전통은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엇다. “과거의 종교는 하늘에 초점을 맞추엇다. 사람들은 그저 신과 영혼의 은혜를 얻으려고 의생제를 거행햇다 그러나 공자는 이 세상에 집중했다. 사실 그는 하늘에 관해 전혀 말하지 않는 쪽을 더 좋아햇다. 공자는 중국의 종교를 땅으로 끌어내렸다. 사라믈은 내세에 관심을 두는 대신 여기 아래에서 선해져야 했다. 그들의 궁극적 관심은 하늘이 아니라 도였다. 군자의 과제는 그길을 조심스럽게 걸어가는 것이었으며 그 자체에 절대적 가치가 있었다. 그렇게 하면 어떤 장소나 사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선의 상태에 이르렀다. 제의는 그들에게 올바른 방향을 안내해줄 지도엿다.

공자는 인도의 현자들처럼 ‘에고 원리’를 인간이 편협함과 잔혹의 원천으로 보앗다. 사람들이 삶의 매순간 이기심을 버리고 예의 이타적 요구에 복종한다면 덕의 아름다움에 의해 변할 것읻. 그들은 군자. 즉 우월한 인간이라는 ‘원형’을 따를 것이다. 전례는 일상적인 행동을 다른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공자는 덕이 이타주의와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처음으로 분명히 밝힌 사람이다. 공자는 (예의 근본정신인) 황금율을 처음 공포했다. 공자에게 그것은 초월적 가치엿다. 예를 완벽하게 습득하면 그가 仁이라 부른 것을 얻는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공자 이전 제의 개혁자들이 예의 형식만 구할 수 잇었고 내용은 시대의 힘 앞에 무너졌다면 공자는 시대에 맞는 내용을 제시했다. “공자는 인이 도의 힘(도덕)이며 성군들은 이것 때문에 무력 없이 통치할 수 있었다고 믿엇다 인은 마법적 효력이 아니라 정신적 효력으로 간주해야 하며 폭력이나 전쟁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잇다.

공자는 건종적 관습과 전례의 세목에 매달리는 소심한 보수주의자가 아니엇다. 그의 전망은 혁명적이엇다. 그는 관례적인 예에 새로운 해석을 부여했다. 이것은 귀족의 존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잊는 실천을 습관으로 만들어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고안한 것이었다. 공자는 제의에서 자기중심주의를 밀어내 제의의 영적이고 도덕적인 심오한 잠재력을 끄집어냈다. 공자는 굴종적인 순응을 장려하지 않았다. 각 상황이 독특하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판단해야 하기에 예는 상상력과 지성을 요구했다. 공자는 또 새로운 평등주의를 도입했다. 전에는 오직 귀족만 예를 따랐다. 이제 공자는 누구라도 전례를 실행하면 안회처럼 미천한 사람도 군자가 될 수 잇다고 주장햇다. 공자는 법과 질서 이상의 것을 목표로 삼앗다. 그는 인간의 존엄함, 고귀함, 신성함을 원했으며 이것은 인이란 덕을 얻으려고 매일 노력해야만 얻을 수 있음을 알앗다. 실로 대담한 계획이엇다.

인은 얻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인은 엄격하지만 환희에 찬 생활방식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 초월이다. 동정적이고 공감하는 삶을 살면 우리 자신을 넘어 다른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안회는 예와 인이라는 지속적인 규율 덕분에 성스러운 실재를 잠깐 보았다. 이 실제는 내재하는 동시에 초월하는 것이며 안에서 어렴풋하게 나타나는 동시에 함께 벗할 수 잇는 존재이며 ‘내 위에 우뚝 서 잇는’ 것이다.

공자는 삼가는 태도로 자신이 실패자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중국의 영성에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겼다.”


인도의 축의 시대의 다음 단계를 규정한 사람은 브라민 사제가 아니라 출가자엿다. 누가 진정한 브라민인가? 외적인 제의를 거행하는 사제인가, 아니면 어디를 가나 신성한 불(아트만)을 운반하는 출가자인가? 출가자는 축의 시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종교의 내면화를 처음 성취한 사람들이다. 제의전문가들은 희생제가 신성하고 영원한 자아를 창조한다고 주장했다. 희생제가 곧 아트만이엇다. 제의에는 브라만의 힘이 들어있다. 출가자는 여기서 더 나아갔다. 출가자는 아트만을 발판으로 우주를 통합하는 힘에 다가갈 수 있었다.” 그리고 우파니샤드는 이렇게 말한다. “아트만은 브라만과 동일하다. 현자가 자기 존재의 내적 핵심을 발견할 수 잇다면 자동적으로 궁극적 실재로 들어가 필멸의 공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아트만은 이제 누구에게나 있는 당연한 것이 되었다. “아트만은 이제 단순히 인간 존재에 생명을 주는 숨이 아니라 들이마시고 내쉬는 그 자체이기도 햇다. 깨달은 사람은 자기 내부에서 세상을 초월하여 위로 올라갈 수단을 발견한다. 그들은 단지 주술적 제의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본성의 신비를 아는 과정에서 초월을 경험한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아트만은 희생제를 통해 구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행위와 경험의 규정을 받는” 것이 된다. “인간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은 그가 행동하는 방식과 처신하는 방식에 달려 있다. 행동이 좋으면 좋게 변할 것이다. 행동이 나쁘면 나쁘게 변할 것이다. 바라지 않는 사람, 욕망이 없고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고 욕망이 이미 충족되어 잇고 유일한 욕망이 자신의 자아인 사람은 그 핵심적 기능들이 떠나지 않는다. 그가 브라만이며 그는 브라만에게 간다.” 다시 말해 두번 다시 두카의 삶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자신이 온 우주를 포함한 브라만과 동일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현재의 이 제한된 존재에 매달려서 얻을 것이 하나도 없음을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처음으로 ‘행동(카르마)’의 교의를 듣게 된다. 이제 카르마(業)는 인도 영성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이제 신들은 배경으로 물러나 희미해졋다. 초기의 ‘우파니샤드’에서 브라만의 인격화된 펴현인 프라자파티는 이제 평범한 구루가 되어 제자들을 가르쳤다. 제자는 프라자파티를 지고의 실체로 존중하지 않으면서 그들 자신의 아트만을 구해야 했다. 데바와 아수라도 이 중요한 진리를 배워야 했으며 그래서 인간과 마찬가지로 내부로 향하는 훈련을 열심히 했다.” 여기에서 다시 인도의 축의 시대는 한 단계 도약한다.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와 오나전히 다르고 베다 경전에도 거의 눈길을 돌리지 않는 새로운 철학이 나타났다. 이 철학은 상키아(분별)라 부른다. 인도에서 진실은 객관적 가치가 아니라 치유적 가치를 기준으로 평가된다. 삶의 고통과 좌절을 넘어서려면 에고가 진짜 자아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강렬한 인식 행위를 통해 이 구원의 지식에 이르면 우리는 모크샤(해방)를 달성하게 된다. 상키아의 관점에서 희생제는 소용이 없다. 신들 또한 자연에 갇혀 있으니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쓸모없다. 제의하는 수단으로 하늘에서 살아남을 아트만을 구축하는 것도 역효과다. 에고-자아는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직 우리의 가장 진정한 실재에 눈을 뜨는 특별한 앎만이 영원한 해방을 가져온다. 상키아는 사실 (원형론이란) 영속철학의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관점이 발전한 것이다. 사람들으 늘 천상의 모범에 몰입하기를 갈망해왔으나 상키아는 그것이 외적 실재가 아니라 내부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신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참된 자아에 눈을 떠야 절대적인 것을 발견한다는 이야기다. 원형은 머나먼 신화의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 내부에 있다.”

상키아는 두가지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하나는 삶은 두카라는 인식이다. 두번째는 요가이다. “요가는 에어로빅 운동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긴장을 풀거나 과도한 불안을 누르거나 자기 삶에 편안함을 느끼도록 돕지도 않았다. 오히려 반대다. 요가는 에고에 대한 체계적인 공격이엇다. 오랜 시간에 걸쳐 수행자에게 정상적인 의식과 더불어 그 의식의 잘못과 미망까지 없애버리는 가혹한 수련법이엇다. 기원전 6세기에 이르면 요가는 인도의 영적 풍경 안에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요가는 인간이 되는 다른 방식에 입문하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근본적인 정신적 변화를 의미했다.” 자기 안의 원형을 찾는 방법론인 요가는 “원형적 모범의 모방이라는 전통을 축의 시대 방식으로 새롭게 변형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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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부도 - 미친 빚잔치의 끝은 어디인가?
발터 비트만 지음, 류동수 옮김 / 비전비엔피(비전코리아,애플북스)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남유럽 위기 이후 미국신용등급 강등까지 금융위기 이해 국가의 부도란 말은 이론적인 문제나 가십이 아닌 현실이 되었다.

지금의 문제가 터진 것은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 때문이다. 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민간부문의 부채를 공공부문으로 이전하는 방법을 택했고 위기 이후 경기하강을 막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었으니 그많은 돈이 재정적자로 쌓이는 것은 당연했다. 적자는 막대햇다.

그러나 문제를 더 심각하게 하는 것은 그 적자가 이미 위기 이전에 쌓였던 막대한 적자 위해 더해졌다는 것이다. 앞으로 그 부채를 갚을 수 잇다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번 위기의 후유증은 오래 갈 것으로 보이고 후유증이 아니더라도 고령화 때문에 앞으로 경제성장이 미미할 것으로 예상되는 국가들에 그 적자가 더해졌으니 문제이다.

상황이 이러니 국가부도란 말이 위기 이후 현실감을 갖는 것은 당연하고 국가부도를 다루는 책도 많이 나왔다. 이책도 그중의 하나이다.

이 주제에 관한 책의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사람들은 설마 나라가 파산하랴는 의아심을 갖게 마련이다. 살아 생전 그런 일을 겪어보지 못했으니 나라가 망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파산은 상상하기 힘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책의 내용은 역사적으로 국가부도는 드문 일이 아니라는 경제사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역대의 국가파산과 지금의 사태가 그리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현재의 재정위기가 왜 일어났는가를 따진다. 그리고 이 위기를 넘기려면 어떤 대책이 있어야 되는가를 말한다.

이책도 그런 내용으로 구성된다. 그러면 굳이 이책을 읽을 이유는 무엇인가? 다른 국가부도에 관한 책과 이책은 무엇이 다른가? 이책의 가치는 디테일에 있다. 목차를 보면 알겠지만 이책의 구성은 매뉴얼을 보듯이 제정학에 관한 디테일을 조목조목 따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지금까지 이 주제에 대해 다룬 어떤 책보다 디테일면에서 앞선다.

그러나 그 디테일이 이책의 약점이기도 하다. 아탈리가 쓴 이 주제에 대한 책과 이책을 비교해 보면 이책은 읽는 재미가 별로이다. 디테일에 너무 깊게 들어가다보니 내용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큰 틀이 약할 수 밖에 없고 내용들이 분명하게 이어지지 않으니 읽는 재미가 별로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책의 가치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다. 디테일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상당한 가치가 있지만 읽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거나 그냥 국가부도가 어떤 것인가 교양수준에서 알고 싶은 사람에겐 읽는 것 자체가 인내를 요하는 일이 된다. 자신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따라 선택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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