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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년중국역사의 어두운 그림자
김택민 지음 / 신서원 / 2006년 3월
평점 :
“세계경제를 객관적으로 보면 1천년 전 중국 송조의 우위를 대번에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아시아, 특히 중국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우월한 지위는 적어도 1800년까지는 계속되었다. 세계경제의 판도 변화는 1850년 아니 어쩌면 1870년 이후에야 실제로 가시화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점점 강해진다. 1750년에 세계인구의 66%를 차지하던 아시아 인구가 같은 시기 전세계 GNP의 80%를 떠맡고 있었다. 세계인구의 2/3였던 아사아인이 세계 GNP의 4/5를 생산한 반면, 세계인구의 1/5인 유럽인은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과 함께 나머지 1/5을 생산했다. 아시아 특히 중국이 장구한 역사의 시간대로 본다면 극히 최근까지 그러니까 2세기 전까지만 해도 주도적 지위를 점하고 있던 것이 거대한 세계경제의 틀이었다.” (안드레 군더 프랑크)
2세기 전까지만 해도 세계의, 최소한 세계경제의 중심은 중국이었다. ‘중심인 나라’란 이름이 잘 어울리는 나라였다는 말이다. 중국이 그런 지위를 갖게 된 것은 왜일까? 4대문명 중에서 중국은 출발이 늦었다. 농경이나 청동기, 철기와 같은 기원전 시기의 첨단기술이 태어난 것은 중동이었고 군대와 국가와 같은 사회적 기술의 첨단을 달렸던 것도 중동이었다. 그러나 시작은 늦었지만 중동의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이 사라진 후에도 살아남는 것을 넘어 오랜 세월을 번영하고 세계경제의 중심으로 군림한 것은 중국이었다. 그 이유를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중국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지역은 주변지역에 대해서 계속해서 중핵적 위상을 확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유지 발전하지도 못했다. 그것은 자립적인 문명단위로 발전할 수있을만큼 퇴적지가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4대문명이 시작된 곳은 모두 강의 퇴적물이 쌓여 만들어진 퇴적지에서 만들어졋다. 그런 땅의 “토양이 원시농경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농경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원시시대에는 간단한 방법으로 경작할 수 있는 토양이 충분히 받달되어 있어야 농경이 가능했다. 땅을 갈아엎지 않아도 작물이 뿌리를 내릴 수있고 거름을 주지 않아도 될 정도로 비옥해야 하며 한 동안 비가 내리지 않고 관개를 하지 않아도 작물의 성장에 필요한 수분이 공급되거나 토양 자체가 수분을 보존하는 성질이 높아야만 농경이 가능햇다.”
4대문명이 시작된 나일강 삼각주, 유프라데스/티그리스강 유역의 퇴적지, 인더스강 중하류, 황하강이 만든 충적평야인 중원평야는 모두 그런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문제는 그 퇴적지의 크기였다. 나일강 퇴적지는 “중원평원의 1/10을 넘지 않을 것이다. 유프라데스/티그리스강 연안을 따라 형성된 ‘비옥한 초승달 지대’나 인더스강 유역의 퇴적지도 나일강보다 결코 넓거나 좋은 조건이 못된다. 아마도 이 때문이겠지만 원시 농경문화 단계를 지난 뒤 이들 지역은 더 이상 주변지역에 대해” 우위를 유지할 수 없었고 문명 자체가 소멸되엇다. 면적의 우위는 바로 인구의 우위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농경이 쉬운 비옥한 토지가 넓기까지 했기에 중국의 인구는 압도적이었다. CE 2년 중국의 인구는 “5,956만명인데 이 가운데 55.2%인 3,293만 명이 중원에 거주했다. 학자들은 당시 중국인구가 세계인구의 1/4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다면 중원인구는 세계인구의 15% 이상이 된다. 2천년전 세계인구 백명 가운데 15명 이상은 중원에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중원의 면적은 대략 남한의 4배 정도이다. 넓기는 하지만 그 땅에 인간의 15%가 살았다는 것은 그 땅의 경제력 때문이었다. 오랜 세월동안 세계경제에서 중국이 우위를 차지한 이유는 그 경제력 때문이며 그 땅에서 나온 상품 때문이엇다. 그 상품 중 하나는 비단이었다.
중국은 비단을 처음 만든 곳이다. 그러나 중국만 비단을 만들었던 것은 아니다. “한반도와 일본에서도 비교적 일찍부터 비단이 생산되엇”고 다른 지역에서도 비단이 생산되었다. 그러나 “8세기 무렵 세계 비단의 95%는 중국의 중원에서 생산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비단은 오늘날로 치면 자동차나 명품처럼 고가의 상품이엇는데 이런 비단이 대량으로 생산되는 곳은 중국밖에 없었다.” 그 이유 역시 “뽕나무 재배에 적합한 비옥한 퇴적지”의 면적 때문이엇다. 그러나 중원평원은 복이면서 화였다.
“중국인들은 중원대지가 천하의 중심임을 확신하고 자부햇다. 주변민족들도 중원대지와 그 땅 위의 왕조를 동경과 외경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중원대지는 실상 고난의 땅이엇고 심지어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잔혹한 땅이엇다.”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계절풍 지역인 중원평원은 농업에 유리하다. 그러나 여름에 강우량이 집중되고 비가 내리지 않는 기간이 길게 마련이라 “가뭄 또는 홍수로 인한 재해가 기록되지 않은 해가 없다. 정확한 통계를 얻을 수 있는 1470년부터 1979년까지 510년 가운데 491년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재해를 입었고 재해를 입지 않은 해는 단 19년이다.”
재해는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메뚜기떼의 피해도 사서에 많이 보이는 재해이다. 중원은 지형, 기후, 토양 등 자연조건이 메뚜기가 서식하기 알맞으므로 적당한 기후조건이 되면 메뚜기떼가 대폭발하여 엄청난 재난을 일으킨다.”
기후조건이 비슷한 한반도 역시 가뭄과 홍수가 많았고 “한국이나 일본에도 큰 가뭄 때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중국만큼 참혹한 사태는 많지 않았다. 한국이나 일본은 기후가 비교적 습윤한데다 산이 많다. 최악의 가뭄 때에도 산에 나무와 풀뿌리는 남아 잇어 연명할 수 있고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므로 조개나 물고기로라도 연명할 여지가 있엇다.”
그러나 남한의 4배 크기의 땅 90%가 “가뭄이 든 경우, 호아하와 그 지류들이 말라버리고 들판의 농작물과 나무와 풀도 모두 말라비틀어진다. 너무 멀어 바다로 나갈수도 없다. 사서에 ‘풀부리와 나무껍질까지 다 먹어버렸고 마침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라고 기록되는 것은 바로 이런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다.”
넓은 면적은 가뭄의 피해만 증폭하지 않는다. 한반도처럼 홍수는 해마다 반복되는 장마가 원인이다. “한국이나 일본의 강은 국토의 중앙에 큰 산맥이 있어 대개의 강이 산에서 발원하여 바다까지 급류로 흐르므로 홍수의 기간이 짧다. 수백mm의 집중호우가 쏟아져 심각한 홍수가 일어나고 농지가 초토화되어도 곧 물이 빠지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수확이 가능하므로 최악의 재앙은 덜 일어난다.”
그러나 중원평원은 다른 나라라면 그다지 높지 않은 태산이 엄청난 산이 될 정도로 평판한 저지대이다. 그런 넓은 저지대에 “폭우가 쏟아지면 물이 빠지지 않아 수해를 가중시키며 이때 대개 황하가 범람하여 참혹한 재난으로 발전한다. 일단 범람하면 물이 빠지지 않아 농지가 오랫동안 수몰된다. 중원평원은 바다로부터 6백Km 떨어진 개봉 부근의 고도도 수십m에 불과하여 일단 물에 잠기면 좀처럼 물이 빠지지 않기 때문에 그것으로 그 해 농사는 끝이다.”
저자는 펄 벅의 대지에 묘사된 홍수 장면을 인용한다. “늦은 봄에서 초여름까지 물은 불기만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바다처럼 되어버렸다. 구름과 달과 반쯤 물에 잠긴 수양버들과 대숲의 그림자가 거울 같은 물에 비친 모양은 한 폭의 그름처럼 아름답고도 처참햇다. 여기저기 피난간 빈 토벽집들이 보였다. 그런 집들은 며칠 가지 않아 흙벽이 무너져 물에 섞여버리고 만다. 사람들은 작은 배나 뗏목을 타고 성 안을 오가게 되었고 다시 예전과 같이 사람들은 굶주림에 허덕이게 되었다. 그러나 홍수는 여전히 잔잔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또 홍수가 났다. 강물은 불어 논밭 위를 해류처럼 흘러갔다. 물은 집 안까지 넘쳐들어 흙벽을 무너트리고 물 속에 잠겨 그 흔적도 찾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상의 물이 천상의 물을 끌어들이는 것처럼 맹렬한 기세로 비가 퍼부엇다. 매일매일 비가 왔다. 이해는 수확이 전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땅에서 물에서 죽었다. 전에 없는 기근이 마침내 닥칠 것이라고 왕릉은 생각했다. 겨울의 밀씨를 뿌릴 때가 되어도 물은 빠지지 않았다. 이래서는 내년에도 수확이 없다.”
이런 땅에 살면서 중국인들에게 자연은 정복하고 지배해야 할 대상이었다. “막스 베버의 주장과는 다르게 중국인들은 전근대 시기에 그 어떤 북서 유럽인들보다 더 자연계를 함리적으로 지배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엇다. 다시 말해 변덕스러운 기후로부터 자유로움이엇다.” (마크 엘빈)
중국인의 그런 욕망은 정치가 안정되고 위정자들이 제 역할을 한다면 실현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시기를 중국인들은 치세라 불렀다. 치세에는 자연재해가 발생해도 최악의 사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역사에서 태평성세는 드물었다. 위정자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고 사복 채우기에 급급한 경우 큰 기근이 들면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는 혹독한 시절이 된다. 이런 시기를 사람들이 살기 어려운 시절 즉 난세라 부른다.” 그리고 난세는 자연재해를 최악의 사태로 증폭시켰다.
난세는 빈부격차의 증폭과 함께 시작된다. 중국의 제국 시스템에서 빈부격차의 증폭은 필연이었다.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는 유목민과 건달패에게 빈주먹과 오합지중에 불과한 농민은 맛좋은 먹이에불과하다. 그 허약한 토끼에 불과한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안정시킬 수 잇는 능력이 없다. 그들은 단지 중앙집권의 정치권력에 기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다시 말해 강력한 정권이 질서를 유지해야만 그들도 외부의 침입과 소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제국이 존재해야만 백성들 자신의 안전이 보장되고 제국이 지속적으로 치안을 유지해야만 그들 역시 小康의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천하에 큰 난리가 날 때마다 그들이 ‘진명천자’의 출현을 손꼽아 기다렸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제국의 평화공존은 권력과 권력 배후의 무력에 의해 유지될 따름이며 天下爲公은 통치를 유지하는 구실에 불과할 뿐 실질은 국가가 소유권을 지니고 통치권은 황제가 소유하며 정권은 절대로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기적인 선거나 집권교체 등은 아예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는 제국은 물론 인민들도 동의하지 않을뿐더러 관심조차 없었다. 안정과 평안을 바라는 제국의 신민들은 결코 집권 세력의 빈번한 교체를 반기지 않았다.” (이중톈)
중국의 제국은 전형적인 ‘권력사회’였다. 물론 권력은 동의에 기초한다. 벌거벗은 힘은 번거롭고 지속되지도 않지만 동의에 기반한 권력은 비용이 낮고 지속가능하다. 그 동의의 기반은 안정이란 한 가지 위에 서있었고 다른 것은 불필요햇다. 기본적인 안정만 되면 나머지는 자유란 말이다. 그것도 엄청난 자유.
권력의 본능은 생존이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선 경쟁자가 없어야 한다. 역대 중국의 제국이 중농억상 정책을 내세운 것은 경쟁자를 없애기 위해서였다고 이중톈은 말한다. “어떤 권력 집중 사회나 권력 집중에서 전재로 발전하는 사회에서는 민간자본이 규모를 키우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유럽의 제국과 왕국은 이처럼 민간자본으로 형성된 재력사회에 의해 무너졌다.” 중국의 통치자들은 “상공업에 대해 거의 본능적으로 적대시하고 증오했다. 역대 정권 상구너을 경계하고 적대시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진이 굴기하고 천하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당시 재부가 나라에 필적할 만한 거상대고에게 많은 덕을 입었다. 상인의 세력이 막강해져 나라와 임금을 세우고 조정을 좌우할 지경에 이르렀다. 말에 오르는 것을 도왔다면 말에서 끌어내리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민간의 상공업을 억제, 탄압함으로써 제국은 자신의 생존을 확고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정권을 세우고 공고하게 만들려면 무기와 붓, 그리고 돈에 의지해야 한다. 이 세가지는 반드시 정권의 최고 통치자의 수중에 완전히 장악되어야 한다.”
중국의 역대 제국은 그렇게 했고 천하의 권력이 국가기구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집중된 권력은 제 무덤을 파기 마련이다.
견제없는 권력인 “제국은 본질적으로 수탈을 기반으로 한다. 제국의 몸통에 기생하는 통치집단이 수탈을 하지 않는다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기생’이라 말한 까닭은 그들이 세금을 징수한 현대국가의 정부처럼 납세자에게 세금에 상응하는 서비스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끊임없는 욕망을 채우는데 사용하기 때문이다. 수탈을 한다고 해도 백성이 그 나머지만으로 배불리 먹고 등만 따시다면 그것이 곧 치세인 것이다.” (이중톈)
자신의 무능 때문에 나라가 망하게 만들었던 만력제의 경우를 보자. 만력제의 능은 “재위시인 1585년부터 1590년까지 6년에 걸친 대공사끝에 완공되었으며 연인원 6천5백만명(오타 아님)과 은 8백만냥이 소요되었다. 6년동안 매일 3만명이 동원되었다는 말이다. 당시 명나라의 1년 조세수입이 은 1천5백만냥을 넘지 않았다 하니 은 8백만냥은 국가의 1년예산의 반이 황제의 능을 조성하는 데 소모되엇다는 말이다. 이 돈을 당시 쌀값으로 환산하면 1백만명이 6년 반 동안 먹을 양이다. 그런데 이 만력제릉도 진시황릉의 지하궁전 면적의 1/20에 불과하다.”
물론 거대한 능묘는 정치적 장치였다. “황제가 영원히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권위를 담은 칭호이듯이 거대한 궁전과 능묘도 황제의 권위를 공간적, 시각적으로 극대화해 누구도 도전할 엄두를 낼 수 없도록 하기 위해 조성된 장치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천하의 부를 한손에 움켜쥐고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던 사람들이 그 영화를 사후까지 연장하고 싶은 인간적 욕망이 거대한 능묘로 표현된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제국은 근본적으로 견제받지 않는 ‘절대’권력이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 아래선 부 역시 집중될 수 밖에 없다. “전통시대에는 종놈이 아닌 (자기 땅을 가진) 일반농민도 1년 내내 농사를 지어봐야 세금을 내고 나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것이 보통이다. 게다가 2,3년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가뭄, 홍수, 메뚜기의 피해를 입게 되면 굶주리게 되어 얼마 안되는 땅뙈기도 몇 됫박의 곡식에 부자들의 손아귀로 넘어가게 되고 급기야는 몸을 팔아 남의 종놈의 신세로 전락해 평생 뼈빠지게 수고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빈부격차가 극심해져 지배층의 “토지는 산천을 경계로 할 정도이나 가난한 백성들은 송곳 꽂을 땅도 없지만 세금은 점차 가혹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홍수, 가뭄, 메뚜기때의 재해가 일어나고 전명변까지 만연”하면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한가지가 된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난다. 대동란의 시작이다. 역사학자들은 지금까지 중국사에서 9번의 대동란(저자는 문화혁명까지 10번이라 말한다)이 있었다고 말한다. 황건적의 난, 홍건적의 난, 태평천국의 난 등이 그것이다.
“왕조교체기의 난세는 민중봉기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예측할 수 없는 총체적인 전쟁국면이 연출되어 전체의 삶이 부정되는 최악의 난국이 형성되었다. 민중봉기가 총체적인 전쟁국면으로 발전하는 이유는 일단 한 지역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면 전국에 걸쳐 동시다발적으로 민중봉기가 뒤따르게 되고 곧이어 호족들이 봉기에 참여하여 전국이 전쟁터로 변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민중군은 달리 생계수단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약탈을 자행하게 마련이다 농민들은 약탈을 피하기 위해 고향을 등질 수 밖에 없어 농지는 황무지로 버려지고 생산활동이 정지된다. 전국이 전쟁터로 변한 상황에서 기존왕권은 유명무실하게 되면서 수많은 수령들이 스스로 천명을 받은 새로운 패권자임을 자칭하여 치열한 패권다툼을 벌이게 되는데 이 소용돌이 속에서 생산기반은 철저하게 파괴된다.
도처에 약탈하는 군도들이 횡행하게 되자 외부에서 양식을 조달해야 하는 도시에서는 더 이상 사람들이 거주할 수 없게 되어 유랑할 수 밖에 없는데 성시를 떠난 사람들은 대부분 생존을 위해 도리없이 군도들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 세력이 더욱 급속히 확산된다. 또한 향촌의 주민들도 약탈을 피해 농사를 포기하고 산으로 숨거나 군도를 따르는 사람이 많아져 농토는 황무지로 버려지게 된다. 그나마 일부 농민들이 위협을 무릅쓰고 지은 농사도 언제 약탈당할지 몰랐다. 대전란이 없을 때도 결코 식량이 풍족할 수 없는데 몇 년동안 농사가 이루어질 수 없으니 식량이 엄청난 대기근과 죽음의 재앙에 휘말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를 좀더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대전란이 있기 전과 후의 인구통계이다. 전체인구의 1/2 이상 죽어간 대동란이 최초로 발발한 기원전 3세기 말 이래 2천1백년동안 아홉번이나 있었다. 또 대동란과 맞먹거나 그보다 더 참혹했던 이민족의 침략전쟁도 네 번이나 있었다. 지역에 따라 ‘열에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다’든가 ‘백 중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고 굶어죽은 ‘백골이 들판에 가득하다’는 말도 사실에 가까울 수 있다.
원래 민중들은 가만히 앉아 있다가는 굶어죽거나 얼어죽을 위험 앞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봉기했으나 그 결관느 참혹한 죽음의 세계를 연출한 것 이상이 되지 못했다. 이 같은 처참한 죽음의 세계 즉 난세가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온 것이야 말로 중국역사의 숙명적 비극성이다.”
일단 대동란이 정리되고 새로운 제국이 서면 대동란으로 지배층의 숫자가 정리되면서 빈부격차가 어느 정도 해소된 상태에서 새출발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한나라는 진나라 멸망의 원인을 교훈으로 삼아 엄격한 법치를 지양하고 세금을 감면하고 노역동원을 자제하며 흉노에 대해서는 무력동원을 최소화하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책을 견지하고자 햇다. 이러한 정책은 대동란을 거치고 난 뒤 많은 민이 살상되고 대부분의 토지가 황무지로 변한 상황에서 생산기반을 회복하고 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해 부득이한 조치엿지만 민들은 일시 숨을 돌리고 생산력을 회복하게 되엇으며 이에 따라 국가재정도 충실해졌다.” 이때를 문경지치라 한다. 역대 3대 치세로 꼽히는 당태종의 정관지치도 같은 상황에서 같은 정책을 취한 결과엿다. 제국의 초반은 대부분 이런 치세에 속한다. 그리고 치세와 함께 2-3백년의 사이클이 다시 시작된다. 그러한 사이클은 중국에서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농경에 기반한 제국에는 보편적인 사이클이라 할 수 있다. 단지 중국에선 그 사이클의 끝이 자연재해가 증폭되면서 더 참혹하고 더 극적일 뿐이다. 농경제국에서 관찰되는 사이클의 일반론을 보면서 리뷰를 끝내려 한다.
“안정과 내부 평화는 번영응ㄹ 가져오고 번영은 인구 증가를 낳는다. 인구 증가는 인구과잉을 낳고 인구 과잉은 임금하학과 지대 상승, 평민들의 1인당 소득의 삼소를 가져온다. 처음에는 낮은 임금과 높은 지대가 상류층에 유례없는 부를 가져다주지만 그들의 수가 증가하고 탐욕이 늘면 그들도 소득감소를 겪기 시작한다. 생활수준의 하락은 불만과 갈등을 불러일으킨디ㅏ. 엘리트층은 국가에 의지해 고용과 추가 수입을 얻으려고 해 국가의 지출을 끌어올리지만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빈곤해져 세수는 줄어든다. 국가의 재정이 붕괴되면 국가가 군대와 경찰을 통제할 수 없다. 그러면 모든 제약에서 풀려나 엘리트층의 갈등이 고조되어 내전이 일어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불만은 폭발해 민중 반란이 일어난다.
질서가 무너지면 묵시록의 네 기사, 즉 기근과 전쟁, 전염병, 죽음이 몰려온다. 그러면 인구가 감소하고 임금이 상승하지만 지대는 떨어진다. 그래서 평민의 소득은 회복되지만 상류층의 부는 바닥에 떨어진다. 엘리트층의 경제적 어려움과 정부다운 정부의 부재는 계속 내전을 부채질한다. 그러나 내전이 일어나면 엘리트층이 얇아진다. 일부는 파벌 싸움으로 죽고 일부는 이웃과의 반몫으로 목숨을 잃으며 많은 사람이 귀족의 지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다 결국 포기하고 조용히 평민층으로 떨어진다. 엘리트층 내부의 경쟁이 잦아들면 질서가 회복된다. 그러나 안정과 내부 평환느 번영을 낳아 다시 순환이 시작된다. 그래서 평화는 전쟁을 낳고 전쟁은 평화를 낳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