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조각 시간 - 제2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성수진 지음 / 나무옆의자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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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읽는 중에, 혹은 읽고 나서 땅콩죽 해 먹은 사람, 손 드시오. 난 지금 먹으면서 이거 쓰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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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천에는 똥이 많다
이창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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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판이라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여기 리뷰가 하나도 없는데, 곧 줄줄이 달릴 것이다. <가능한 사랑>을 보고 왔다면. 무엇에든 1등을 한 번쯤은 하고 싶었는데, 이 소설집에 리뷰 1등하고, 오래도록 뿌듯할 것 같다. 나, 1등! 이창동 소설가님, 반갑습니다. 시, 버닝, 밀양 다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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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리얄리 2026-09-30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소지> 좋아합니다. 졸업 후에 직장 생활 시작할 때 쯤 읽었는데, 그래서그런지 저의 ‘철부지스러움‘과 막 느껴가던 삶의 무게(?) 같은 것들이 기억나네요.

젤소민아 2026-10-06 13:53   좋아요 0 | URL
앗 얄리얄리님 오랜만이여요~~이제 주문했으니 올 거여요. ‘소지‘ 읽어 보겠습니다! 추천 감사합니다.
 
르네 마그리트 ㅣ 시공아트 18
수지 개블릭 지음, 천수원 옮김 / 시공아트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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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arry Night, Vincent van Gogh/Oil on canvas


오늘 뮤지엄 버디들과 MoMA에 다녀왔다.

사람들이 제일 많이 모여 있는 그림.

단연코 고흐다. 

그중에서도 <별이 빛나는 밤>


앞에 아무것도 가로막힌 존재 없이

그림과 정면으로 마주하기까지 좀 기다려야 했다.


여러 번 마주한 그림이지만 그때마다 설렌다.

원본의 힘 아닐까 싶다.

그림이 그려진 시간이 1889년 6월. 


137년의 시공간을 넘어, 

비록 찰나적으로나마 

고흐의 곁을 스치는 것 같은 상상을 하며 남몰래 벅찼다. 


스스로 들어간 요양원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그린 그림이라지.

고흐의 시야에 그림 속 마을은 존재하지 않았다.

상상 속 마을 정경인 셈이다. 


나중에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 이 그림을 포함해 

이런 내용을 전한다. 


Van Gogh described The Starry Night as an exaggeration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arrangement. He was aware that he had moved away from a realistic representation of nature by exaggerating and distorting its forms. However, he did not necessarily consider this a failure. Rather, he was exploring how simplification and exaggeration could express the essential character of nature more powerfully.

(원문에서 영역된 내용;

https://vangoghletters.org/vg/letters/let805/letter.html?utm_source=chatgpt.com


exaggeration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arrangement.

배치/구성의 관점에서 본 과장(정도 되려나)


그렇다면 저 그림 속 자연은

실제의 자연이 아니라 고흐를 통과한 자연이라 해야겠다.


미메시스.

현실을 그대로 옮기지 않고 재배치하기.


고흐가 실제 자연을 그대로 그리지 않고 ‘구성상의 과장’을 통해
자신이 경험한 자연을 만들었듯,
소설가 역시 현실을 선택하고 생략하고 변주하고 재배치해서
현실보다 더 선명한 ‘소설적 현실’을 만든다.


현실과 미메시스된 현실 사이에 생겨난 그 ‘차이’에서 걸작이 빚어지는 셈이고.


사실, 뮤지엄 내 전시된 숱한 걸작들은 보면서

그림 잘 그리는 사람들이 그대로 베껴 그리는 게 

그다지 어려울 것 같지 않아 보였다.


한 번 만들어진 예술품은 그 '한 번'에 불멸의 가치가 있는 거겠다.

그 '한 번'을 불멸의 가치로 만드는 게 과연 뭘까.


고흐가 현실과 재현 사이의 차이를 이용했다면,

르네 마그리트는 그 ‘차이 자체’를 작품의 주제로 만든 것 같다.


MoMA에서 본 신기한 장면.


고흐 그림 앞에서는 사람들이 몇 겹으로 둘러서 사진을 찍기 바빴다면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앞에서는 턱을 괴든, 고개를 기울이든,

짝다리를 하고 서 있다. 


아마 나하고 비슷한 생각들을 하면서.

도대체 이 사람 머릿속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원본 사진을 못 찍었다. 찍을 걸. 이건 '나무위키'에서 퍼온 사진/연인들(Les Amants), 1928)


르네 마그리트는 '상징화'를 싫어했다고 한다.

자신의 그림에 무엇이 숨어 있고 어떤 의미를 품었는지 쪼개 보는 걸 거부했다고.

정작 자신은 상징을 갖다 퍼부었으면서. 


그래서 나는,

두 사람 얼굴을 덮은 천의 의미가 어쩌고저쩌고, 는 생각하지 않고 

보려고 기를 썼다.

(혹시, 천을 벗기면 사람 얼굴 아닌 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금해서 못살겠다.

그래서 책을 주문했다.


르네 마그리트


현재 판매중인 르네 마그리트 관련 책은 이것뿐이다. 

 

소설을 더 소설답게 읽기 위해, 더 소설답게 쓰기 위해 

간접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그림 감상을 자주 하려 기쓰는 편이다. 


생각해 보면, 소설과 그림은 같은 질문 앞에 선다. 


현실을 얼마나 닮게 재현할 것인가가 아니라, 

현실과 어떤 차이를 만들어 

우리가 알던 현실을 어떻게 새롭게 보게 할 것인가. 

인간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아는 이 현실을 새롭게 보지 않고

우린, 어떻게 살아낼 수가 있을까.


이 현실 딱 그대로, 딱 요만큼만, 딱 이런 식으로.


가슴에 손을 얹고,

이래도 너무 괜찮다, 너무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로또 맞은 것보다 운이 좋은 사람일 것이다.


나는 예술 앞에 서서 자주 이런 질문을 한다.


예술은 혹시, 

지금 이 현실로는 살아내기 힘든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닐까. 

예술이 현실을 바꾸지는 못해도, 현실과 나 사이의 관계를 바꿔줄 수 있지 않을까.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 하는 질문이다.

오늘도 이러고 살아낼 수 있을까, 열 세번 정도 자문했으니까.


르네 마그리트를 읽고 나면 

이 질문이 좀더 선명해질 것 같다는 기대를 한다. 

답까지는 감히 바라지도 못하겠다.

그건 실현될 수 없는 욕망이란 걸 기특하게도 알겠다.


그는 현실에 없는 것을 만들어내기보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것들을 지독하게도 낯선 관계 속에 다시 놓는다. 


르네 마그리트를 읽고 나서는 

현실을 그대로 옮기는 일이 

오히려 진짜 현실을 놓치는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좋겠다.


소설도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무엇보다, 이 슬픔과 아픔이 진짜 현실로 들어가는 입구길 바라기에

이대로는 도저히 살아내지 못할 것 같은 미메시스 전의 현실을 빠져나가는 출구길 바라기에.


나는 그런 '경로'에 있을 뿐이라고 자신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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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6-09-23 12: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에게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은 생각보다 원본의 힘이 약했어요. 그러니까 인쇄본을 보든 원본을 보든 감흥의 차이가 딱히 없고, 무엇을 보든 처음 볼 때 제일 인상이 강하고 중요했어요. ^^
고흐의 그림은 인쇄본과 실제의 차이가 좀 많이 나죠. ㅎㅎ
저도 르네 마그리트 막 궁금해서 책 찾다가 이 책 샀는데, 이게 꽤 오래전인데 아직도 딱히 국내에 르네 마그리트 책이 없다니 그건 좀 안타깝네요.

젤소민아 2026-09-23 21:18   좋아요 1 | URL
오~~저와 비슷한 느낌이셨어요~저는 오죽하면 MoMA에 걸린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 사본인 줄 알...^^ 별 다름이 없어서겠죠. 그만큼 그의 그림은 그림 자체보다 ‘구성‘이 중요한 게 아닌지...거기에 혼이 빠져 다른 건 안 들어오는 듯한 느낌요. 한국에서도 이분 그림 인기 정말 많은데 관련 책은 정말 없더군요. 빨리 나오길 고대합니다~바람돌이님, 좋은 하루 되셔요~
 

Hope (2026) - IMDb


나홍진 감독의 <HOPE>를 보고 왔다.

호불호가 선명하게 갈린다고 해서 살짝 걱정했다. 

감독의 전작들을 꽤 즐거이 보았기에 부디 '호'이길 바라마지 않으며. 


마지막 회차다 보니 한밤중에 집에 왔다.

글쓰기엔 밤이 좋다. 바로 쓴다.


이 영화를 괴물 영화로 보아야 할까, 외계인 영화로 보아야 할까.

내 눈엔 어느 쪽도 아니었다. 내게 이 영화는 '재난 영화'로 보였다.


여기서 말하는 재난은 자연재해냐 인재냐 하는 식으로 

원인을 분류할 수 있는 재난이라기보다는

내가 이해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외부의 힘이 어느 날 갑자기 내 삶의 경계를 침범하는 사건이라 하겠다. 


여기서 중요하게 다가온 건,

그 힘의 정체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그것이 도래했을 때 인간이 어떻게 반응하느냐...


그래서 내게 <HOPE>의 중심 질문은 

‘괴물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재난이 닥쳤을 때 인간은 어떻게 사는가'로 읽혔다.


이 영화를 두 개의 세계로 나눠보고 싶다.


일상 VS 재난(의 세계)


생각할 거리를 주는 문학이나 영화 혹은 또다른 예술 형태가 잘 하는 일이다.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충돌시켜 하나의 세계를 다른 세계에 비춰보기.


특히, 소설이 그렇다.


<노인과 바다>는 마놀린(소년)이 동반하던 노인의 세계와 그가 떠난 세계를 나눈다.

두 세계를 공통적으로 흐르는 공간이 '바다'.

두 세계를 둘로 나누는 공간이 '더 먼 바다'이다.

'불운이 바닥을 친(스페인어로 '살라오'가 되어 버린) 노인과 더는 배를 같이 타지 말고는 부모의 명을 받고 소년은 노인을 떠난다. 그래서 노인은 '더 먼 바다'로 나가 

평소 잡기 힘들었던 청새치를 잡고 상어도 만난다. 







<마담 보바리>는 마담 보바리가 즐겨 있는 로맨스 소설의 안팎으로 나눌 수 있다.

<어린 왕자>는 B612를 떠나기 전과 후의 세계로 나뉘는 것 같고. 물론 또다른 앵글로 또 다르게 나눌 수도, 얼마든지 있다.

<변신>의 두 세계는 그 어떤 소설보다 선명하고 매력적이다.

그레고르 잠자의 방과 방 밖의 세계. 그레고르 잠자는 방 밖으로 나왔다가 죽는다.
















영화로 돌아가자.


<HOPE>의 두 세계는 일상 vs 재난상황


재난은 일상을 파괴하기 위해 침입하지만, 

이 영화에서 비록 건물은 파괴되어도

일상은 그렇게 쉽게 파괴되지 않는다. 

(이쯤에서 '노인과 바다'의 명문장이 떠오른다. 

[인간은 파괴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 혹시 이것과 일맥상통하나?)


영화는 외계 괴물을 상대하는 극단적 상황을 보여주면서 

사소하고 시시하며 때로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생활의 순간들을 계속 끼워 넣는다.


사람들은 재난 중에도 먹고, 수다 떨고, 똥을 눈다. 


재난이 벌어졌다고 해서 인간이 갑자기 ‘재난속 인간’으로 급변하지 못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다가 오래전 <개그콘서트>의 ‘생활의 발견’이 떠올랐다. 


연인이 헤어지는 위기의 순간에도 

중국집에 음식 주문하면서 단무지를 챙기고, 쿠폰을 찾아 나와 건넨다.


다소 과감하게 단순화하는 듯하지만, 

그 코미디 코너의 발상을 거대한 SF 재난의 규모로 확장하면 

<HOPE>의 한 단면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국은 거대하지만, 

파국을 겪는 인간의 몸은 여전히 생활의 단위로 움직인다는 면에서.


같은 맥락에서, <HOPE>는 재난을 거대담론으로 ‘상승’시키기보다

그것을 생활의 차원으로 ‘하강’시키는 게 매력적이다.


'괴물' 중에도 사이즈가 제일 큰 '우주적' 존재를 활용하면서 '하강'이라니.


그 거대한 재난과 비루한 일상 사이의 낙차가 

이 영화 고유의 유머와 공포를 동시에 만들어내는 게 아닌가...


영화의 공간도 한몫한다.


다닥다닥 붙은 점포는 끝없이 이어지는데 가게에 사람은 하나도 없다.

모두 가게 안 깊숙한 공간에 있다가 오발로 죽음을 맞기도 하고

괴물에게 이미 당해 처참한 시신이 되어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이 어째, 살아있는 사람을 만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혹시 가게 간판을 눈 여겨 보았는가.

뭐 하나 겹치는 가게가 없다. 

그 작은 마을에서 업종은 어찌 그리도 다양하던지.



그 일상을 영위하던 사람이 사라졌는데 일상은 지독하게 남는 구도. 


이 영화에서 또 눈에 띈 것이 '지연'이다.


영화는 좀처럼 괴물의 모습을 온전히 내놓지 않는다.

초반에 지루해 죽겠다,는 평이 많이 나오게 생겼다.

지루함은 당연했다.


그런데 바로 이 지루한 기다림이 

영화가 만들어낸 공포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괴물을 보여주지 않는 시간 동안 

관객인 나는, 

어쩌면 기획 단계의 감독 못지 않게 수많은 괴물의 형상을 만들어냈으니까.


이 '지연'의 방식을 활용할 때, 즉, 공포를 보여주는 데 있어,

특히 범석(황정민)과 목격자들의 대비가 인상적이었다. 


목격자들은 이미 보았다. 

영화는 괴물을 등장시키기 전에 괴물에 대한 ‘말’을 먼저 돌아다니게 한다.

범석은 보지 못했고 그들의 말을 들었을 뿐이다. 


상당 시간 카메라는 범석의 시선과 그가 처한 조건에 관객을 묶어둔다.


범석이 모르는 만큼 관객도 모르고, 

범석이 보지 못하는 만큼 관객도 보지 못한다.


지연이 길다 보니 이런 질문을 할 짬이 생겼다.


괴물을 직접 본 사람과, 

못 보고 이야기만 들은 사람 가운데 누가 더 무서울까.


아마 둘 다. 

다른 건 공포의 종류일 뿐.


본 사람은 구체적인 공포를 소유한다.

괴물의 형태와 크기와 움직임을 안다.


보지 못한 사람은 무정형의 공포를 소유한다.

어디까지 상상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하나는 이미지에 붙잡힌 공포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지가 없어 무한히 팽창할 수 있는 공포이다.


그래서 <HOPE>의 초반부에서 중요한 것은 

괴물을 얼마나 늦게 보여주느냐만이 아니라, 

‘이미 본 자’와 ‘들은 자’ 사이에 공포를 어떻게 나누느냐가 아닐까.


후반부로 갈수록 외계 존재가 구체화되면서 영화의 성격이 좀 달라진다.

여기서 내 개인적 호불호가 작동했다. 


한 우주선을 타고 도착한 존재들이 왜 그리 이질적인 형상을 하고 있는지, 

곱씹어보고 싶은 부분.


그것이 종의 다양성인지, 변이인지, 역할의 차이인지, 

혹은 이후 세계관을 확장하기 위한 장치인지 

이 한 편만으로는 잘 모르겠다.


인간을 닮은(얼굴/팔다리/여자의 가슴 등) 외모적 특성,

언어를 부여하는 방식에서는 <아바타>를 비롯한 

기존 SF의 기억이 강하게 소환되었다. 


나는 사실, 여기가 제일 아쉬웠다.


<HOPE>가 초반에 만들어낸 낯섦을 다소 익숙한 SF의 문법으로 되돌려놓는 것 같아서다.


미지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미지가 오히려 작아지는 것 같은 역설이랄까.


보이지 않았을 때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던 존재가 

형상과 언어를 얻는 순간,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다른 영화들의 공식과 이미지들과 비교질이 시작되었다.


결말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더 크다.


후속편을 염두에 둔 설정 및 스토리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한 편의 영화는 한 편 안에서 최소한 하나의 '운동'을 끝내는 게 좋을 것 같다.


관객/시청자/독자의 모든 질문에 답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미스터리를 남기고, 세계를 열어두어도 된다.

그러나 서사는 열려 있을 수 있으나

작품의 '운동'까지 미완이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


<HOPE>의 결말은 다음 이야기를 위한 문을 여는 데 너무 많은 힘을 쓰면서, 

지금 막 본 이 한 편이 무엇을 닫았는지는 상대적으로 희미한 듯했다.


물론, 감독 나름의 중요한 '의도'가 있겠지 싶다.

그러나 의도되었다는 사실과 그것이 한 편의 영화로서 만족스럽다는 평가는 

별개의 문제일 테니.


<HOPE>의 리뷰 결말은 'HOPE'로 닫고 싶다.

제목 그대로 ‘희망(hope)’이 재난 아래에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는가, 말이다.


이 영화의 '희망'은 거창하고 거룩한 영웅적 행위나 위업에 있지 않다.

오히려 재난이 삶을 압도하는 순간에도 

떠들고, 실수하고, 먹고, 싸우고, 용변을 보고, 

서로를 걱정하는 그 사소한 일상의 지속 속에 있다.


이 영화를 통해,

어쩌면 재난의 진정한 반대말은 ‘구원’이 아니라 ‘일상’​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하긴, 우리 삶에 예기지 못한 '재난'이 병이나 시련의 형태로 도래했을 때,

우린 얼마나 '일상'을 그리워하게 되는가 말이다.


이 영화는

재난이 일상을 중단시키려 기를 써도 인간은 끊임없이 일상으로 돌아가려 한다,

뭐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일상의 관성이랄까.


<HOPE>에서 말하는 '희망'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재난 속에서 우리가 그렇게도 갈구하는 일상은

사실, 재난 속에서도 완전히 사라진 적이 없다는 것.


물론, 나는 재난 앞에서 일상을 그대로 영위할 자신은 없다.

재난을 맞은 사람답게 무너져 내리고 말 것이다.

지금도 그러고 있는 상황인지 모르고. (아마 십중팔구는 그럴 것이다)


그래도 <HOPE>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해봤으니

앞으로 맞는 재난 속에서 그나마 일상의 조각을 줍게 되진 않을까.


해술 노인이 괴물 앞에서도 똥을 누듯이,

성기가 괴물 앞에서도 고구마(감자였나?)를 먹듯이,

도망 중에 숨이 차올라도 할 말은 할 수 있듯이.


그렇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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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9-21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프 한국평은 불호가 많은데 미국이나 외국은 호평이많다고 하네요.

젤소민아 2026-09-22 13:22   좋아요 0 | URL
전 아주~~~~~호입니다~. 카스피님도 보셨는지요~

젤소민아 2026-10-08 0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 페이퍼 자축합니다~감사합니다~
 
소설의 운명
서영채 / 문학동네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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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읽고 소설의 역사와 소설의 철학과 소설의 사명을 배웠다. 전적으로 이책에만 은혜입은 건 아니지만 소설가가 될 수 있었던 것에 이 책이 끼친 영향은 몹시 크다. 리뷰가 하나도 없고, 2700원에 중고책으로 팔린다는 건 가슴칠 일이나, 이렇게 팔릴 때 빨리 소장하시길. 소설이 궁금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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