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슬픔 아시아 문학선 1
바오 닌 지음, 하재홍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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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실로 넓고, 깊고, 풍요롭고, 활기찬 것 같아도 결국엔 여전히 무언가 빠져 있는 듯한, 부족한 듯한, 그래서 누구나 죽음에 이르면 갚지 못한 부채나 의무 같은 것이 마음에 휘감기고 엉겨 붙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161p)


아침에 눈 뜨면 의욕이 솟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것 같다. '아침'을 굉장히 의욕적인 시간으로 여긴다. 

내겐 아니다. 


아침이면,

오늘도 일해야 하는구나. 먹어야 하는구나. 말해야 하는구나. 


나는 어쩌면 내 삶에 부채나 의무 같은 걸 느끼는구나.


전쟁의 슬픔을 겪은 끼엔의 부채나 의무 같은 것에 비하면야 그 질감과 양감이 턱도 없이 작고 초라하겠지만.


난 어떤 삶의 부채나 의무 같은 게 있어 아침마다 무거운 발을 침대 밑으로 떨구고 바닥을 밟고 천근같은 몸을 일으켜 세워야 하는 걸까. 나를 일으키는 건 삶의 의지가 아닌 것 같다. 그냥 삶, 자체인 것 같다. 삶이 알아서, 이어 잠자고 싶어하는 날 깨워 일으키는 것 같다.  


손이 알아서 칫솔을 집어 이를 닦고 비누칠해서 얼굴을 닦고.

이젠 예뻐지기 위해 하는 화장이 아니라 '노화'를 가리는 말 그대로 'make UP'을 하고.


'전쟁의 슬픔'의 끼엔에겐 선명한 삶의 부채나 의무가 있다.

전쟁에서 이유도 모르고 죽어간 자들의 혼령을 위로하는 일.

그들의 죽음에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관심 좀 가지라고 알리는 일.

죽어간 자들의 묻힌 유골을 캐내어 이름과 정체를 찾아주는 일


바로, 소설을 쓰는 일.


끼엔이 소설을 쓰는 이유는 부채갚음이다.


그 부채는 끼엔의 유익을 향해 있지 않다. 

끼엔은 그 일을 할 의무가 없다.

그냥 끼엔을 찾아왔다.


열명 정찰대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기에.


유일하게 살아남아 숨이 붙었다는 이유로 끼엔은 부채를 스스로 짊어졌다.


나도 소설을 쓴다.

부채의식 같은 건 없었다. 당연히, 부채갚음도 없었다.


이 소설의 뒤로 갈수록 끼엔이 소설을 쓰는 이유는 사실, 그를 향해 있었음이 드러난다.

더 읽어봐야 그 확연한 정체를 만질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지금은 


누구나 죽음에 이르면 갚지 못한 부채나 의무 같은 것이 마음에 휘감기고 엉겨 붙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부채나 의무 같은 것이 마음에 휘감기고 엉겨 붙는 것을 느끼게 되는 일이다.


죽음에 이르면,이 아니라 죽음에 가까이 가고 있으면,의 자세로.


지금 살아 있는 자들은 어쨌든 모두 죽음에 다가들고 있는 걸 테니까.

오늘 하루 만큼 더 가까이.


뱀들은 사는 게 지겨운지 전혀 꿈틀거리지 않고 몸을 길게 쭉 늘어뜨렸다. - P268

과거는 최후가 없고 과거는 우정, 형제애, 동지애, 그리고 일반적으로 불멸의 인간성과 더불어 영원히 정절을 유지한다. -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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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1-24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궁금했는데 젤소민아님 리뷰 보니 더 읽고 싶어지네요.
부채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삶의 슬픔이 느껴집니다.

젤소민아 2023-01-24 22:52   좋아요 0 | URL
와, 올리자마자 이리 댓글을 주셨네요~~바오닌의 단편, ‘물결의 비밀‘을 읽어 보셨는지요. 그 단편 보면 무조건 반합니다~~ㅎㅎ 그래서 이 소설에 관해 잘 모르지만 작가 보고 무조건 샀어요. 한 페이지가 잘 안 넘어갑니다. 너무 묵직해요. 어렵진 않은데 이리 묵직하게 써낼 수 있는 능력. 정말 대단한 작가 같아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초반 20분은 비교도 안 되게 전쟁의 참상이 적나라합니다. 각오는 하셔야 할 거여요 ㅠㅠ
 
사랑하는 소년이 얼음 밑에 살아서 시간의흐름 시인선 1
한정원 지음 / 시간의흐름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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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해. 울다가 웃으면 어른된다//첫문장에서 피식, 웃다가, 찔끔. 뭐야, 나 어른 맞네. 이런, 잛고 단순하고 밋밋한데, 강력한 문장은 어찌 만드는 거지? 잘쓴 글은 앞문장이 뒷문장을 이미 품는 식인데, 이 시인은 앞이 뒤를 품고 바로 등돌리는 식. 근데 그 등이 서러운 식. 서러운데 좋은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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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슬픔 아시아 문학선 1
바오 닌 지음, 하재홍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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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 소설 뭔가. 어느 문장도 버릴 게 없다. 몇 문장은 좀 쉬어가야 하는데. ‘물결의 비밀‘에서 이미 알아본 필력과 사유지만, 이다지도 글을 잘 쓸 줄은 몰랐다. 죽었다 깨어나도 못 쓰고 죽을 문장들이 마침표처럼 많다. 전쟁을 겪은 소설가의 슬픔은 서럽다 못해, 찬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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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맨 2023-11-23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전쟁의 슬픔‘을 번역한 하재홍입니다. ‘전쟁의 슬픔‘을 잘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바오 닌 작가께서 번역 추천한 소설 ‘나 그리고 그들‘이 최근에 나왔습니다. 아주 독특한 소설입니다. 한번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젤소민아 2023-11-23 00:29   좋아요 0 | URL
와~~~번역자님이시군요~~베트남어를 한글로 옮기신 거죠~영광입니다~. 저도 영어를 한글로 옮기는 일을 합니다. ㅎㅎ 바오 닌의 문장은 곧 번역자님의 문장이기도 하지요~~그런 멋진 문장을 접하게 해주셔서 이 기회에 감사드립니다.
[나 그리고 그들]을 장바구니에 바로 넣었습니다~건필하시길요~~

vnroute 2023-11-25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영어 번역을 하고 계시군요. 반갑습니다. ‘나 그리고 그들‘ 구매까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젤소민아님께서 추천하시는 책 꼭 읽어보도록 할게요. 좋은 책 많이 번역하시고, 본인의 글도 많이 쓰시길 바랍니다.^^
 
길 위의 집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18
이혜경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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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가 1개? 내 눈을 의심했다. ‘길 위의 집‘이 가진 비범한 반전을 모르는 이가 더 많다는 이야긴가? 이 소설의 반전은 결말에 있지 않다. 서두에...있다. 책을 덮고 나면 살짝 떨리는 손가락으로 서두를 다시 펼치게 된다. 그때, 완전히 다르게 다가드는 텍스트. 놀라지 못했다면 눈치 못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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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소설 읽는 노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23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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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 느는 게 삶의 지혜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실 노인은 삶의 지혜라는 말을 떠올릴 때마다 자신에게도 그런 미덕이 찾아오리라고 기대했고, 내심 그런 미덕이 주어지길 간절히 기원했다. 물론 그가 기대하는 미덕은 그를 과거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지혜이자 스스로 만든 덫에 빠지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지혜였다. 그런데 또다시 걸려들고 만 거야. 빌어먹을! 도대체 이번에는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지?(106)


나이가 좀 들었다고 할 만한 나이에 섰다. 나이가 들면 연륜이라는 게 생긴다고들 한다. 


연륜  [열륜]  
  • 1.

    명사 식물 나무의 줄기나 가지 따위를 가로로 자른 면에 나타나는 둥근 . 1년마다 하나씩 생기므로  나무의 나이를 알 수 있다.

  • 2.

    명사 동물 물고기의 나이를 알아볼  있는 줄무늬. 물고기의 비늘, 귓돌, 척추뼈에 있다.

  • 3.

    명사 여러  동안 쌓은 경험에 의하여 이루어진 숙련의 정도.


그러니까 '연륜'은 '나이테'의 한자어.


가만히 서 있는 것 같은 나무가, 언제 그리 자라 수십, 수백의 나이테를 품게 되는 걸까?

그 수십, 수백의 나이테가 생길 때마다 지혜도 품어지는 걸까.


그럴 것 같다.

나무만큼 또 지혜로운 존재가 있나 말이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나무는 살기 위해 이동도 한다든데. 지구상의 동물은 살기 위해 지혜를 필요로 한다. 오로지 살기 위해서다. 죽지 않기 위해서다. 


딱따구리가 아무 생각없이 나무를 쪼는 것 같아도 쪼기 전에 기준점을 미리 박아두는 것처럼



지구상의 동물 중 하나인 인간은 엊다가 지혜를 쓰기 위해 지혜를 모으는 건가.


세풀베다의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의 노인이 지혜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이러하다.

그를 과거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지혜이자 스스로 만든 덫에 빠지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지혜


과거의 자신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스스로 만든 덫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그는 과거가 좋은가보다. 과거의 자신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지혜가 필요하다 하니.

과거의 그는 스스로 만든 덫에 빠지지 않았던 것 같다.

나이 들어 '나이테'가 늘어났다면, 노인은 스스로 덫에 빠지지 않을 지혜도 늘었어야 한다.


연륜이 늘었는데도 스스로 덫에 빠진다면 연륜에 지혜가 품어지지 않은 걸테다.

살다보니 그렇다. 연륜은 '나이'테일 뿐.

지혜가 쥐뿔도 상관없다.


사람은 그냥 나이테만 늘어날 가능성이 높은 동물이다. 

지구상의 동식물은 나이테와 더불어 자신의 목숨을 지킬 간명한 지혜를 익혀간다.

머리가 좋고 나쁘고 관계없이, 지구상의 동식물은 그런 축복을 받았다.

숨만 붙어 있다면.


그런데 사람만큼은, 마냥 나이테만 늘어가지 않으려면 뭔가 해야 한다.

뭔가 한 사람들은, 그래서 그 종류와 성격과 크기와 깊이가 제각각 다른 지혜를 획득한다.


나의 지혜는 무엇인가.


나는 뭘하는데 필요한 지혜를,

엇따가 써먹을 지혜를 획득했나.


아니, 그런 게 있기나 한가.


노인이 지혜를 얻고 그걸 지키고자 선택한 방법은 '연애소설만 읽기'-.


내가 오늘 소설을 읽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생겼다.

그것도 지혜다.





하늘에는 당나귀 배처럼 불룩한 먹장구름이 무겁게 드리워져 있고, 밀림을 휩싸고 도는 끈끈하고 칙칙한 공기가 금방이라도 들이닥칠 폭풍우를 예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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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2023-01-10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은 들어본 소설이네요.ㅎ 중남미 소설을 자주 접하지 못한 것 같아요. 요즘 제가 소설을 많이 읽지 못하는데 문득 소설을 읽고 싶어집니다.
뭔가 자신의 지혜를 쌓기 위해 한가지 쯤 생각해보면 좋을 소설 같네요.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젤소민아님.^^

젤소민아 2023-01-10 12:53   좋아요 1 | URL
연애소설 읽는 노인,은 ‘노인과 바다‘에 많이 비견되는 작품이여요~~
노인이 자연의 피조물과 대결을 벌인다는 구도가 일던 그렇고요~.

중남미 소설 특유의 이국적인 문체와 배경묘사가 멋지죠.

강추합니다, 모나리자님~. ㅎㅎ 들러주셔서 감사해요!

새파랑 2023-01-10 1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old and wise 아니겠습니까? ㅋ 지혜는 책을 읽는 이유중 가장 큰것 같아요~!!

젤소민아 2023-01-10 12:54   좋아요 2 | URL
그렇죠!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서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그 말의 진의는 아직도 꿰뚫지 못헀고요. 댓글 감사해요 새파랑님!

파이버 2023-01-10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생각해봐도 아리송한 느낌이네요 @_@

젤소민아 2023-01-11 12:13   좋아요 1 | URL
그건 소설을 읽으셔야 알 수 있어요~~노인은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섬에서 연애소설 기다리는 게 유일한 낙이랍니다. 노인에게는 아내가 살아있었고 기운 넘치던 과거의 ‘나‘가 그리운 거고요~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이 선택한 방법이 ‘연애소설 읽기‘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