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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정원 - 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
김용석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10월
평점 :
눈에 보이는 사물과 존재를 '다르게' 보려는 시도가 문학이라면 그것들을 '깊이 있게' 보려는 시도가 철학이지 않을까. 그런 시도들이 꼭 결연하게 구분되어야 하는 건 아닐 것이다. 문학하는 사람이 철학을 할 수도 있고 철학하는 사람이 문학을 할 수도 있다. 하나의 이야기를 놓고 그걸 문학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철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 책을 읽으며 그게 사실은 별 차이 없을 수도 있고 동시에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좀 특이한 경험을 했다. 어떤 이야기를 헤집고 다르게 보고 깊이 있게 보려는 시도는 분석, 다시 말해 '비평'에 근접한다. 이 책을 딱히 비평서라 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비평서 아닌 에세이라 할 수도 없다.
비평서와 에세이 중간 쯤이라고 해 두자.
비평서와 에세이 중간 쯤의 어떤 책은 이런 느낌을 주는구나, 싶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쐐기벌레를 저자가 응시하는 지점에서 꽤 한참을 머물렀다.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것은 바로 '변화의 문제'이다. 쐐기벌레도 '변신'을 겪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변태(metamorphosis)의 과정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어야 할지 모른다. 자신을 쐐기벌레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궁극적으로 나비로서 살아야 할 존재이므로 나비라고 해야 할까? 이렇게 변힌 없이는 생명체로 온전히 살아갈 수도 없는 존재가 단지 몸 크기가 변화해서 고민하는 앨리스를 다르쳐 묻고 있다니! 역설적이지 않은가? (21p)
쐐기벌레는 궁극적으로 나비가 될 존재이나 당장은 결코 예쁘다고 할 수도, 내키는 대로 자유로이 활보할 수 있는 적당한 길이, 갯수의 다리도 갖지 못한 존재에 불과하다. 궁극적으로는 '나비'라는 저의 운명을 아직은 확실히 알지 못하는 채, 쐐기벌레가 몸의 크기가 자꾸 변하는 앨리스에게 "너는 누구냐?"고 묻는 대목.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철학자의 시선이다.
자기가 누군지도 잘 모르면서, 자신의 정체성이 미처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는 타인에게 "너는 누구냐?"고 자꾸 묻는다. 고로, 우린 이상한 나라에 사는 쐐기벌레다. 앨리스이기 이전에 쐐기벌레다. 앨리스에게로 맞췄던 스포트라이트를 쐐기벌레로 가져와 보니 그 벌레는 앨리스보다 이전에 정체성에 관해 무진장 고민하고 있던 존재였다. 고민하지 않았다면 앨리스라는 타자를 구태여 '질타'하는 수고를 할 필요 없다.
앨리스가 누구에게든 자신만만하게 큰소리칠 때는 자신의 원래 크기로 돤전히 돌아와 타자를 압도할 때다.(22p)
이제 그곳을 나와 익숙한 현실 세계에서 자기 정체성을 되찾고 그것을 안정되게 유지함으로써 무척 '편안해'졌지만, 어쩌면 또 무료한 일상이 앨리스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22p)
앨리스는 몸의 크기를 바꿔가며 정체성을 찾으려는 모험을 떠났었다. 그리고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별 대단히 엄청나게 달라진 현실(미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래 전에, 또 오랫동안 앨리스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정체성을 찾으려 안달할 게 틀림없다. 나 역시 정체성 고민을 했고 지금도 한다. 예전과 지금 달라진 게 있다면, 예전에는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는 데 집중한 데 비해, 지금은 정체성을 찾을 필요는 있으나 정체성을 찾았다고 해서 무언가가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특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체성을 찾는 위업을 달성했다 해도 돌아온 현실이 앨리스처럼, 언니의 무르팍이라면, 그걸로 족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덧붙여 또 한 가지 고민이 늘어났다.
나의 정체성은 내 안에서 찾아야 하는가, 타자와의 관계에서 찾아야 하는가.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을 다시 펼쳐 들어야 할 것 같다.
내 정체성을 찾는 것은 나이지만 그 정체성을 완성하는 것은 타자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쐐기벌레가 앨리스에게 한 질문은 사실, 그 노력의 발로인 지도 모른다.
너는 누구냐.
내 정체성을 좀 완성해 다오, 라고.
내 정체성 찾기 혹은 확립은 나 혼자만 할 게 아니라 타자의 연루와 영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을 들게 해 준 소설을 잇달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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