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소설 읽는 노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23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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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 느는 게 삶의 지혜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실 노인은 삶의 지혜라는 말을 떠올릴 때마다 자신에게도 그런 미덕이 찾아오리라고 기대했고, 내심 그런 미덕이 주어지길 간절히 기원했다. 물론 그가 기대하는 미덕은 그를 과거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지혜이자 스스로 만든 덫에 빠지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지혜였다. 그런데 또다시 걸려들고 만 거야. 빌어먹을! 도대체 이번에는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지?(106)


나이가 좀 들었다고 할 만한 나이에 섰다. 나이가 들면 연륜이라는 게 생긴다고들 한다. 


연륜  [열륜]  
  • 1.

    명사 식물 나무의 줄기나 가지 따위를 가로로 자른 면에 나타나는 둥근 . 1년마다 하나씩 생기므로  나무의 나이를 알 수 있다.

  • 2.

    명사 동물 물고기의 나이를 알아볼  있는 줄무늬. 물고기의 비늘, 귓돌, 척추뼈에 있다.

  • 3.

    명사 여러  동안 쌓은 경험에 의하여 이루어진 숙련의 정도.


그러니까 '연륜'은 '나이테'의 한자어.


가만히 서 있는 것 같은 나무가, 언제 그리 자라 수십, 수백의 나이테를 품게 되는 걸까?

그 수십, 수백의 나이테가 생길 때마다 지혜도 품어지는 걸까.


그럴 것 같다.

나무만큼 또 지혜로운 존재가 있나 말이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나무는 살기 위해 이동도 한다든데. 지구상의 동물은 살기 위해 지혜를 필요로 한다. 오로지 살기 위해서다. 죽지 않기 위해서다. 


딱따구리가 아무 생각없이 나무를 쪼는 것 같아도 쪼기 전에 기준점을 미리 박아두는 것처럼



지구상의 동물 중 하나인 인간은 엊다가 지혜를 쓰기 위해 지혜를 모으는 건가.


세풀베다의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의 노인이 지혜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이러하다.

그를 과거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지혜이자 스스로 만든 덫에 빠지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지혜


과거의 자신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스스로 만든 덫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그는 과거가 좋은가보다. 과거의 자신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지혜가 필요하다 하니.

과거의 그는 스스로 만든 덫에 빠지지 않았던 것 같다.

나이 들어 '나이테'가 늘어났다면, 노인은 스스로 덫에 빠지지 않을 지혜도 늘었어야 한다.


연륜이 늘었는데도 스스로 덫에 빠진다면 연륜에 지혜가 품어지지 않은 걸테다.

살다보니 그렇다. 연륜은 '나이'테일 뿐.

지혜가 쥐뿔도 상관없다.


사람은 그냥 나이테만 늘어날 가능성이 높은 동물이다. 

지구상의 동식물은 나이테와 더불어 자신의 목숨을 지킬 간명한 지혜를 익혀간다.

머리가 좋고 나쁘고 관계없이, 지구상의 동식물은 그런 축복을 받았다.

숨만 붙어 있다면.


그런데 사람만큼은, 마냥 나이테만 늘어가지 않으려면 뭔가 해야 한다.

뭔가 한 사람들은, 그래서 그 종류와 성격과 크기와 깊이가 제각각 다른 지혜를 획득한다.


나의 지혜는 무엇인가.


나는 뭘하는데 필요한 지혜를,

엇따가 써먹을 지혜를 획득했나.


아니, 그런 게 있기나 한가.


노인이 지혜를 얻고 그걸 지키고자 선택한 방법은 '연애소설만 읽기'-.


내가 오늘 소설을 읽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생겼다.

그것도 지혜다.





하늘에는 당나귀 배처럼 불룩한 먹장구름이 무겁게 드리워져 있고, 밀림을 휩싸고 도는 끈끈하고 칙칙한 공기가 금방이라도 들이닥칠 폭풍우를 예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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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2023-01-10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은 들어본 소설이네요.ㅎ 중남미 소설을 자주 접하지 못한 것 같아요. 요즘 제가 소설을 많이 읽지 못하는데 문득 소설을 읽고 싶어집니다.
뭔가 자신의 지혜를 쌓기 위해 한가지 쯤 생각해보면 좋을 소설 같네요.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젤소민아님.^^

젤소민아 2023-01-10 12:53   좋아요 1 | URL
연애소설 읽는 노인,은 ‘노인과 바다‘에 많이 비견되는 작품이여요~~
노인이 자연의 피조물과 대결을 벌인다는 구도가 일던 그렇고요~.

중남미 소설 특유의 이국적인 문체와 배경묘사가 멋지죠.

강추합니다, 모나리자님~. ㅎㅎ 들러주셔서 감사해요!

새파랑 2023-01-10 1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old and wise 아니겠습니까? ㅋ 지혜는 책을 읽는 이유중 가장 큰것 같아요~!!

젤소민아 2023-01-10 12:54   좋아요 2 | URL
그렇죠!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서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그 말의 진의는 아직도 꿰뚫지 못헀고요. 댓글 감사해요 새파랑님!

파이버 2023-01-10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생각해봐도 아리송한 느낌이네요 @_@

젤소민아 2023-01-11 12:13   좋아요 1 | URL
그건 소설을 읽으셔야 알 수 있어요~~노인은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섬에서 연애소설 기다리는 게 유일한 낙이랍니다. 노인에게는 아내가 살아있었고 기운 넘치던 과거의 ‘나‘가 그리운 거고요~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이 선택한 방법이 ‘연애소설 읽기‘인 것 같아요~
 
천사는 오후 3시에 커피를 마신다 - 운문과 산문이 만나는 느리게 읽는 책
김겸섭 지음 / 토기장이(토기장이주니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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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좋은데...성글...다. 좋다가 그만두게 되는 건 좋다 마는 거. 그럼, 허탈하다. 이런 좋은 그림, 시, 소설의 조각들은 좀 천천히 가야는데, 종이가 너무 빨리 넘어가잖아...아쉽다 쩝. 옴마, 부제가 느리게 읽는 책‘이다. 너무 빨리 읽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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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모노클 읻다 시인선 14
사가와 치카 지음, 정수윤 옮김 / 읻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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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뭐지? 미리 보기로 딱 세 편의 시를 읽었는데, 시를 읽은 느낌이 아니라 마시는 것 같은 느낌은 뭐지. 적당히 뜨거운 온도의 차를 마시듯, 배 아래가 뜨끈한 이 느낌은 뭐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고, 그 뜻을 꼭 알고 싶다는 이 느낌은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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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a 2023-01-07 0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너무 멋진 감상이에요!
정수윤 번역가님이 번역하신 다른 시집들도 느낌이 매우 좋던데 궁금해지네요.^^

젤소민아 2023-01-07 07:27   좋아요 0 | URL
아, 이참에 찾아볼게요. 정보 감사합니다~~~자주 들러주세요~~
 
서툴지만 푸른 빛
안수향 지음 / Lik-it(라이킷)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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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임 없는 사진으로 움직이는 여행을 말하는 사람들. 여행에세이에 빠질 수 없는 게 사진이라면 이왕이면 사진을 잘 찍은 사람의 여행에세이가 좋다. 이 사람, 사진 참 잘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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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정원 - 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
김용석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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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는 사물과 존재를 '다르게' 보려는 시도가 문학이라면 그것들을 '깊이 있게' 보려는 시도가 철학이지 않을까. 그런 시도들이 꼭 결연하게 구분되어야 하는 건 아닐 것이다. 문학하는 사람이 철학을 할 수도 있고 철학하는 사람이 문학을 할 수도 있다. 하나의 이야기를 놓고 그걸 문학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철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 책을 읽으며 그게 사실은 별 차이 없을 수도 있고 동시에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좀 특이한 경험을 했다. 어떤 이야기를 헤집고 다르게 보고 깊이 있게 보려는 시도는 분석, 다시 말해 '비평'에 근접한다. 이 책을 딱히 비평서라 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비평서 아닌 에세이라 할 수도 없다. 


비평서와 에세이 중간 쯤이라고 해 두자. 

비평서와 에세이 중간 쯤의 어떤 책은 이런 느낌을 주는구나, 싶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쐐기벌레를 저자가 응시하는 지점에서 꽤 한참을 머물렀다.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것은 바로 '변화의 문제'이다. 쐐기벌레도 '변신'을 겪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변태(metamorphosis)의 과정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어야 할지 모른다. 자신을 쐐기벌레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궁극적으로 나비로서 살아야 할 존재이므로 나비라고 해야 할까? 이렇게 변힌 없이는 생명체로 온전히 살아갈 수도 없는 존재가 단지 몸 크기가 변화해서 고민하는 앨리스를 다르쳐 묻고 있다니! 역설적이지 않은가? (21p)


쐐기벌레는 궁극적으로 나비가 될 존재이나 당장은 결코 예쁘다고 할 수도, 내키는 대로 자유로이 활보할 수 있는 적당한 길이, 갯수의 다리도 갖지 못한 존재에 불과하다. 궁극적으로는 '나비'라는 저의 운명을 아직은 확실히 알지 못하는 채, 쐐기벌레가 몸의 크기가 자꾸 변하는 앨리스에게 "너는 누구냐?"고 묻는 대목.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철학자의 시선이다.


자기가 누군지도 잘 모르면서, 자신의 정체성이 미처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는 타인에게 "너는 누구냐?"고 자꾸 묻는다. 고로, 우린 이상한 나라에 사는 쐐기벌레다. 앨리스이기 이전에 쐐기벌레다. 앨리스에게로 맞췄던 스포트라이트를 쐐기벌레로 가져와 보니 그 벌레는 앨리스보다 이전에 정체성에 관해 무진장 고민하고 있던 존재였다. 고민하지 않았다면 앨리스라는 타자를 구태여 '질타'하는 수고를 할 필요 없다. 

앨리스가 누구에게든 자신만만하게 큰소리칠 때는 자신의 원래 크기로 돤전히 돌아와 타자를 압도할 때다.(22p)

이제 그곳을 나와 익숙한 현실 세계에서 자기 정체성을 되찾고 그것을 안정되게 유지함으로써 무척 '편안해'졌지만, 어쩌면 또 무료한 일상이 앨리스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22p)


앨리스는 몸의 크기를 바꿔가며 정체성을 찾으려는 모험을 떠났었다. 그리고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별 대단히 엄청나게 달라진 현실(미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래 전에, 또 오랫동안 앨리스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정체성을 찾으려 안달할 게 틀림없다. 나 역시 정체성 고민을 했고 지금도 한다. 예전과 지금 달라진 게 있다면, 예전에는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는 데 집중한 데 비해, 지금은 정체성을 찾을 필요는 있으나 정체성을 찾았다고 해서 무언가가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특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체성을 찾는 위업을 달성했다 해도 돌아온 현실이 앨리스처럼, 언니의 무르팍이라면, 그걸로 족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덧붙여 또 한 가지 고민이 늘어났다.


나의 정체성은 내 안에서 찾아야 하는가, 타자와의 관계에서 찾아야 하는가.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을 다시 펼쳐 들어야 할 것 같다. 

내 정체성을 찾는 것은 나이지만 그 정체성을 완성하는 것은 타자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쐐기벌레가 앨리스에게 한 질문은 사실, 그 노력의 발로인 지도 모른다.


너는 누구냐.


내 정체성을 좀 완성해 다오, 라고.


내 정체성 찾기 혹은 확립은 나 혼자만 할 게 아니라 타자의 연루와 영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을 들게 해 준 소설을 잇달아 떠올리며.



정체성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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