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에 관한 생각
김재훈 지음 / 책밥상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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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에 관한 책은 다 산다. 

애정에 더해 무슨 회한 같은 게 작용하는 것도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서재 책꽂이에 '피아노' 칸을 따로 마련할 것 까진.


체르니 30번 치다 말았어요. 


내 피아노 실력을 간명하게 전달할 수 있는 한 마디다.

 어지간한 가요나 팝송을 친다. 요즘은 일본 만화 주제가를 친다. 악보 없이는 한 줄도 못 친다. 죽은 지 백년 넘은 작곡가들의 곡을 하나도 못 친다. 한 두 줄 흉내는 낸다. 넘을 수 없는 벽을 금세 만난다. 그 벽 앞에서 늘 중얼거리게 된다. 

에잇, 저만 아는 천재들...


부제가 '버려진 피아노를 만지며'이다.


내게, 딱 이런 순간이 있었다.

내게서 버려지려는 피아노를, 만지던 순간이.


내 손가락이 한 번도 닿지 않았던 양끝 건반을 제일 먼저 눌렀다.

그쪽은 죽은 지 백 년 넘은 작곡가들이나 감당할 '신'의 구역이다.

건반 청소할 때나 닦개로 눌러봤을까...


음 같지도 않은 음이 났다.

굳이 따지자면,


제일 낮은 라

제일 높은 도


제일 높은 도에는 있어야 할 검은 건반이 없다.

반쪽짜리를 넣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뚜껑을 닫고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손으로 쓸어보았다.

손가락에 먼지가 묻어났다. 

옷방에 있던 수건으로 피아노 몸체를 닦았다.


누구 집에 가더라도, 날 잊지는 마.


이런 오그라드는 생각은 안 했다.


이 피아노로 처음 엘리제를 위하여,를 치고 

혼자 박수치고 뿌듯해하던 장면 같은 것도 떠올리진 않았다. 


나는 그때, 내 피아노가 처음으로 그냥 피아노로 보였다.

40만원짜리 중고 피아노.

건반 달린 물건.


그때 눈물이 났다.

거기 스민 기억이나 추억 같은 것과 연관 지을 때보다

그냥 물건으로 보인 피아노가 더 눈물 났다.


피아노의 소명은 누가 치면 소리를 내는 것.

'신의 구역'은 한 번도 쳐주지 못한 주인을 만나 가운데 쪽 건반만 반질거리게 

닳았지만, 내 피아노는 내게 온 제 소명을 다한 물건으로 남았다.


이제 물건의 숙명답게 어딘가로 팔려나가 또 누군가에게 건반을 내어줄 것이다.


그때는 백년 전에 죽은 작곡가들이 칠 수 있다고 장담한 신의구역,

그쪽 건반도 건드릴 수 있는 주인을 만나길.


사용자에 따라 쓰임이 달라지는 물건으로서의 효용도 누리길.

그래서 언젠가 너 또한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여한없이 최후를 맞길.


아주 유용한 물건으로 잘 쓰였다, 하길.


* 정말 쓸데없는 이야기겠지만, 만의 하나, 궁금할까봐,

  피아노 판 돈 40만원은 시어머니 호주머니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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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4-10-18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체르니 30번 치다 말았어요.
지금은 악보도 못보는 닝겡이 되고
말았지만요.

어려서는 헤비메탈만 음악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죠.
그러다가 클래식의 바다에 빠지게
되고는 고전 레코딩에 심취하여
서울의 시디샵을 돌던 시절도 있었
죠.

치지 못하니 듣는 것으로 만족...
가장 좋아하는 피아니스트는 디누
리파티, 샹송 후랑수와 그리고 코르
토 정도가 되겠습니다.

아, 빌헬름 켐프가 연주하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도 무척 좋아합니다.

젤소민아 2024-10-18 21:43   좋아요 1 | URL
레삭매냐남과 헤비메탈~. 어쩐지 어울립니다!
클래식과 헤비메탈을 넘나드는 크로스오버~.

알프레드 코르토!! 이분의 바하 아리아는 첫소절에 눈물 뻑...
오랜만에 또 들으러가야겠어요.

오늘 주신 피아니스트들 연주를 다 찾아서 들어보는 ‘아름다운‘ 하루로 삼고파요~
감사합니다!

stella.K 2024-10-18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민아님 결혼하셨어요? 전 몰랐네요.ㅎ
피아노하면 저죠. 피아노 배우기 싫어서 죽을 것 같았는데 그나마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 배우기 위해 꾸역꾸역 치다가 그만뒀는데 얼마나 좋던지. ㅎ 근데 저는 악보 보는 게 싫어서 왠만한건 귀로 듣고 맞거나 말거나 그냥 흉내는 내게되던데. 물론 지금은 그런 신경 다 죽었지만요. ㅠㅋ

젤소민아 2024-10-18 21:34   좋아요 0 | URL
그간 보아 오신 제 리뷰가 ‘결혼 전‘으로 보이셨단 거죠? 왜 기분 좋죠? ㅎㅎ
‘젊어보인다‘는 말 같기도 해서요. 젊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인가봐요~

그러고보니 저도 백년 전에 죽은 작곡가들의 작품을 치는 게 있네요??
엘리제를 위하여!! ㅋㅋ

언젠가 다른 에세이에서 제가 ‘엘리제를 위하여‘를 이렇게 표현한 기억이 있어요.

어디를 가더라도 돌아올 곳이 있는 나그네의 본향같은 곡...이라고요.
어떤 곡을 치더라도 ‘엘리제를 위하여‘는 ‘나그네의 본향‘처럼 감동적이고 안정감이 있는 것 같아요~.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텔라님. 요즘 스텔라님 읽으시는 책 보러 가야겠어요~


stella.K 2024-10-18 21:51   좋아요 1 | URL
오, 그런 표현을 쓰시다니!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하고.
그렇게 생각하면 월광소나타도 멋지지 않나요?
암튼 베토벤 아저씨는 위대한 것 같아요.^^

근데 정말이어요. 결혼 안한 줄.
거기엔 서재 프사도 한몫했겠죠?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