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바이크가 본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나누리 옮김 / 필맥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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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 자신을 문제로 삼으라"고 멋지게 말했듯이 자신에게,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대답을 구하는 인간은 자신을 더 분명하게 인식하고 통찰하기 위해 자기 인생의 길을 마치 지도처럼 펼쳐 보게 된다. 그는 다른 누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를 설명하고자 한다. 이때 갈림길이 나타난다. 이 갈림길은 어느 자서전에서나 볼 수 있다. 인생의 묘사인가 체험의 묘사인가, 타인을 위한 예증인가 자신을 위한 예증인가, 객관적이고 외적인 자서전인가 주관적이고 내적인 자서전인가, 즉 단순한 사실의 전달인가 자신에 대한 보고인가로 길이 나뉘는 것이다. 앞의 길이 언제나 대중을 향하는 경향을 띠고 교회나 책에서 볼 수 있는 고해처럼 상투적인 표현방식을 사용한다면, 뒤의 길은 독백하듯이 생각하는 것이어서 대부분 일기의 형식만으로 충분하다. 괴테, 스탕달, 톨스토이와 같이 정말로 복합적인 성격의 사람들만이 이 두 길의 완전한 통합을 시도했고, 그 결과로 자신을 영원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자아성찰은 그저 준비단계일 뿐이지 깊이 숙고하는 단계는 아직 아니다. 모든 사실은 그 자체로 그대로 있으면 진실로 유지되기가 쉽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려 할 때 비로소 예술가의 진짜 고난과 고통이 시작되고, 정직성이라는 영웅적인 태도가 요구된다. 형제애를 발휘해 인간의 일회성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 타인과 소통하고자 하는 본능적 충동이 우리를 몰아붙이지만, 그만큼이나 반대의 충동, 즉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에 대해 침묵하려는 의지가 기본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 보호와 침묵의 의지는 수치심을 통해 우리에게 말한다. [..] 인간의 수치심이 지닌 근본적인 비밀은,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는 본질적 특성을 드러내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가장 잔인한 모습과 불쾌한 모습을 노출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도록 한다는 데 있다. 읽는 사람이 조롱하는 미소를 지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자서전을 쓰는 사람이 가장 빠져들기 쉬운 위험한 유혹인 것이다.

 

- 슈테판 츠바이크,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 [서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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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깊이 읽기를 염두에 두고, 그러니까 '톨스토이' 때문에 읽기 시작했지만, [서문]이 오히려 인상 깊은 책입니다.


'톨스토이'에 관한 글은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 빛과 어둠의 두 초상>(자연사랑, 2001)에도 똑같이 실려 있습니다. 다만 번역은 다릅니다. 문단 구분도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카사노바...>는 본래 저자인 츠바이크가 카사노바-스탕탈-톨스토이로 이어지는 정신적, 예술적 발전 단계를 상정하고 쓴 책이기 때문에 필맥 출판사본을 읽는 게 합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다소 인위적 발췌 편집이긴 하지만) ['톨스토이' vs '도스토예프스키' = '빛' vs '어둠']의 구도 역시 무척 땡기는 구도이긴 합니다. 러시아 문학에서 둘이 차지하는 비중을 봐도 그렇고, 둘의 라이벌 관계를 감안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원래 슈테판 츠바이크는 전기(평전critical biography) 작가로 무척 유명하죠. 그런데 그 많은 평전들을 그저 무턱대고 써낸 것이 아니라 나름의 체계를 염두에 두고 썼습니다. 이 점이 다른 평전 작가와 그를 구분하는 점일 것입니다.

 

가령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는 [세계의 거장들/대가들(Baumeister der Welt)] 시리즈의 세 번째 권에 속합니다. 원제는 번역하면 '삶의 세 시인' 정도가 되겠네요. 하지만 국내 번역본에서는 이 제목을 빼고, 대신 '츠바이크가 본'이란 구절을 집어 넣었습니다. 국내에서 츠바이크에 대한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음을 감안한다면, 굳이 이렇게 제목을 변형시킬 필요가 있었나 싶어요. 하긴 뭐 '삶의 세 시인'이란 제목 역시 구매욕구를 상승시킬 만한 제목은 아닙니다만.......

 

 

참고로 [세계의 거장들] 시리즈의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카사노바...> [서문] 첫머리의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1권 <마신(데몬)과의 싸움(Der Kampf mit dem Damon)> : 횔덜린, 클라이스트, 니체

- 마성적인 힘에 쫓겨 자신과 현실세계를 뛰어넘어 무한의 세계로 들어선 유형


2권 <세 명의 거장들(Drei Meister)> : 발자크, 디킨스, 도스토예프스키

- 현존하는 현실 곁에 소설이라는 우주를 만들어 제2의 현실을 구축, 즉 '서사적으로 세계를 재창조한 사람'의 유형


3권 <삶의 세 시인(Drei Dichter ihres Lebens)> :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

- (대우주를 있는 그대로 그리기 보다) 자아의 소우주를 세계 속에 펼쳐나간 유형. '주관주의적 예술가' '자서전'이라는 예술 형식은 어떤 것인가를 탐색.  

 

1권에서 다루는 인물들이 걸어간 길이 '무한 세계'로 이어진다면, 2권에서의 길은 '현실 세계'로 이어집니다. 3권에서의 길은 '자기 자신'에게도 이어지게 됩니다. 어쨌거나, 이런 저런 이유로 츠바이크는 3이라는 숫자를 좋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뤄지는 작가들의 면면이 화려한 가운데, 1권이 특히 끌립니다. 하지만 국내에는 아직 번역이 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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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리 1 : 재능있는 리플리 리플리 1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홍성영 옮김 / 그책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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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리 시리즈의 전체가 드디어 번역 출간 되는군요. 1권부터 5권까지 다 출간된 것은 아니고 우선 1-3권만 나왔습니다.

1권 <재능 있는 리플리> 2권 <지하의 리플리> 3권 <리플리의 게임>까지가 일단 나온 것이죠.

<리플리를 쫓는 소년> <리플리 언더 워터>라는 제목을 갖고 있는 4권과 5권은 내년에 출간 예정이라고 합니다.

출간 기념 이벤트도 하네요.

 

 

 

 

 

 

시리즈의 첫편인 <재능 있는 리플리(The Talented Mr. Repley)>(1955)는 그 명성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동서문화사(네. '바로 그' 출판사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에서 나온 <태양은 가득히>로만 읽을 수 있었죠.

 

 

그 한참 전에도 다른 출판사에서 <태양은 가득히>라는 같은 제목으로 출간이 되기도 했었습니다.

이 <태양은 가득히>라는 제목은 <리플리>를 원작으로 삼은 프랑스 영화(르네 클레망 감독, 1960)의 제목을 따른 것이지요.

영화의 주인공 알랭 들롱의 영향력을 감안하면, 한국에서 <리플리>는 일종의 '영화 소설'로 읽혀온 셈입니다.

 

 

1999년 앤소니 밍겔라 감독의 <재능 있는 리플리>가 개봉하면서 <리플리>는 원래의 제목을, 그리고 하이스미스라는 걸출한 작가의 소설이라는 원래의 자리를 되찾은 셈이지만, 영화의 인기에도 불구하고(크게 흥행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새로운 번역본이 출간이 되지 않아 국내 추리소설 팬들(혹은 하이스미스 팬들)의 갈증은 해소되지 못했습니다.

 

 

민음사에서 하이스미스 단편선을 내놓으면서 가뭄에 단비 역할을 했습니다만, <리플리> 시리즈가 빠진 하이스미스는 앙꼬 없는 찐빵...

열혈 추리팬들로서는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할 조건이 마련된 셈이었던 것... (뭐 저는 그정도 열혈 팬은 아니었습니다)

 

 

리플리 시리즈의 각 권 출간 년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재능 있는 리플리> 1955

<지하의 리플리> 1970

<리플리의 게임> 1974

<리플리를 쫓는 소년> 1980

<리플리 언더 워터> 1991

 

대략 40여 년에 걸쳐 집필된 시리즈인 셈입니다.

 

 

시리즈가 연속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고 각 권 마다 상당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 출간됐다는 사실,

특히 1편이 출간되고 15년이나 지나서야 비로소 2편이 출간된 것이 눈에 띄네요.

 

 

여기서 한 가지 추정해보게 되는 것은 애초에 하이스미스는 리플리를 시리즈물로 만들 생각이 없었는데,

리플리라는 캐릭터의 인기와 매력이 워낙 높아 2편을 내게 된 것이 아닌가.

다른 작품들도 (4년, 6년, 11년이란 시간적 격차로 미루어 볼 때) 마찬가지 상황에서 쓰여진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본다면 작가가 캐릭터를 창조하고 장악한 게 아니라 그 반대인 셈입니다.

작가가 창조해낸 캐릭터가 그 인기와 매력을 무기로 작가를 장악하고 글쓰기를 계속하도록 추동한 경우랄까요.

이렇게 살아 움직이는, 그 자신의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캐릭터를 창조하는 건 모든 작가들의 꿈일 겁니다.

 

그는 물건 갖기를 좋아했다. 많은 물건을 갖는 게 아니고, 자신이 가지고 싶어 했던 물건 중 오랜 시간에 걸쳐 고른 물건을 특히 좋아했다. 그런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자존심이 길러진다. 문제는 겉모양이 아니고 품질이며, 그 품질을 소중히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그는 자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자각되고, 존재한다는 것이 기쁨이 되었다. 다만 톰에게 기쁨을 준다는 것뿐이었으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존재하고 있다. 세상에는 비록 돈이 있어도 자기가 어떻게 존재해야 할 것인가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들에게는 돈이 필요 없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종류는 알 수 없지만 보증이다.

(<태양은 가득히>, 동서문화사, 313-4)

 

 

제가 개인적으로 번역 비교를 해보고 싶은 대목은 위의 대목입니다. 소설을 읽을 때 '베스트 컷'으로 꼽은 대목이기도 하지요.

(에리히 프롬의 스테디 셀러) <소유냐, 존재냐>가 떠오르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어떤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 사실에 대한 자각, 즉 소유/소유에 대한 자각이 존재를 보증해준다는 것인데, 이만큼 현대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체의 존재방식을 잘 표현한 대목도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비주체의 존재 방식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있지도 않습니다. 소비(그리고 소비를 통해 얻게 되는 물건/사물)는 존재를 보증해줄 뿐더러 존재를 풍요롭게(기쁘게, 충만하게) 해주기도 합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물건을 고르는 것, 물건의 겉모양이 아니라 그 품질을 사랑하는 것은 자존심(자존감)을 길러준다는 것이지요. 무분별한 소비가 아니라 스마트한 소비, 감성이 스민 소비인 셈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공감이 가는 대목이었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소유와 존재를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고 있는데, 사실 소유와 존재는 서로 분리불가능하게 얽혀 있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을 위의 인용 대목은 말해줍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톰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요. 톰의 욕망과 환상, 그리고 '돈을 쓸 줄 모르는 사람' '소비를 존재와 연결시킬 줄 모르는 사람'을 자신과 구분하는 톰의 이분법은 결국 범죄로 이어지고, 자기 기만과 정체성의 혼란/분열로 이어지니까요. 디키를 똑같이 흉내 내는 톰은 디키일까요 톰일까요.

 

 

톰은 타인으로 위장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이, 위장하려고 하는 인물의 분위기와 기질을 먼저 익히는 일과 그 분위기와 기질에 어울리는 얼굴 표정을 수반해 나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밖의 일은 자연스럽게 그것에 맞추어 나가면 된다. (169)

 

 

톰은 고독감은 느꼈어도 쓸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 전 세계가 그의 청중이 되어 그를 주목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 때문에 그는 무척 긴장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만에 하나라도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저지르면 파멸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절대로 실수를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에게는 독특하고 순수한 분위기가 있다고 느꼈다. 그것은 명배우가 무대에서 중요한 역을 연기할 때 갖는,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역은, 다른 누가 하더라도 이 이상 멋지게 연기할 수 없다'는 확신과 같았다. (175-6)

 

 

리플리는 마치 게임을 하듯,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듯 디키를 연기하고 거기에서 희열을 느낍니다. 그는 자신이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완벽히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삶의 에너지와 자부심을 길어올립니다. 언제 들킬지 모르는 위험한 게임이기에 그의 스물네 시간은 언제나 긴장감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지만, 그런 긴장감 자체가 에너지로 작용하며, 리플리에게 무한한 즐거움을 안겨줍니다.

 

 

리플리는 두 개의 정체성을 능수능란하게 오가야 하며 각각의 정체성과 각각이 놓인 상황을 완벽히 통제해야 합니다. 그는 12역을 담당하는 배우이자 총감독이 되어야 합니다. 감독이 주연 배우를 맡는 경우가 간혹 있는 것으로 미루어 어렵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은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영화가 아니라 현실입니다. 리플리 본인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이 상황이 리플리에 의해 연출된 것임을 알지 못합니다. 즉 누구도 리플리의 의도를 알지 못하며,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마치 스탭과 조연배우들의 도움 없이 혼자 영화를 만드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렇게 보면 리플리가 벌인 일은 단 한 사람의 연기력과 연출력으로 세계 전체와 맞서는 일, 세계 전체를 기만하는 일인 셈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자신의 운명에, 그리고 그 운명을 결정한 신에게 도전합니다.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정확한 계산연기, 그리고 '상상'에 능한 리플리는 아슬아슬하게 이 모든 일을 해냅니다. 결국 그는 디키가 되는 데 성공하고, 그 연후에는 디키가 가진 것만 고스란히 빼먹고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합니다. 돈만 많고 쓸 줄 모르는 무분별한 소비자를 죽이고 돈만 빼앗아 (본인이 염원해마지 않았던) 스마트한 소비자로서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한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후에 리플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이점이 궁금했었는데, 이제 시리즈 전체가 출간이 되니 곧 그 궁금증을 풀 수 있겠지요. 일단은 1권과 2권부터 읽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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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로주점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3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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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특히 19세기 리얼리즘 소설)들을 읽다보면, 문득 짜증이 치밀 때가 있다. 주인공이 위기에 처했는데 우연의 개입으로 그것을 극복하는 대목이 그렇다. 예를 들자면 사고무친에 굶어죽게 된 올리버 트위스트를 착한 신사가 나타나 돕는다든가 하는 설정 같은 것(디킨스 씨 죄송합니다).

 

현실에서는 결코 그런 우연(행운)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짜증이 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 비현실적 우연, 죽이는 타이밍, 사람 냄새 안 나는 천사 캐릭터들 덕분에 독자는 소설을 계속해서 흥미진진하게 읽어 나갈 수 있기도 하다. 선한/순수한/근면성실한 주인공이 맥없이 죽어버린다면, 큰일이다. 세상이 그렇게 미쳐 돌아간다면 누가 삶의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

소설의 초반부에서 독자는 주인공이 어떤 미덕을 지녔는지, 닥치는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 미덕을 어떻게 꿋꿋이 지켜내는지를 파악한다. 그리고 소설의 후반부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그 미덕이 나름의 정당한 대가를 받게 될지를 자못 흥미진진하게 지켜본다. ‘정당한 대가라는 당위가 앞서다 보니, 어느 정도의 우연은 용서가 된다.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은 이러한 소설 구성의 암묵적 공식을 무참히 깨는 소설이다. 인물들이 지니고 있는 미덕은, 환경적 요인과 우연한 사고 앞에서 순식간에(또는 서서히) 빛이 바랜다. 충격적인 점은 주인공이 내적 깨달음을 얻거나 자기반성을 하기도 하고, 숱한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서도 지키고자 하는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기도 하지만(심지어 천사 캐릭터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그것이 예정된 몰락과 죽음을 막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마치 밀물 때의 파도가 잠시 뒤로 물러서는 듯하지만 서서히 해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켜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몰락은 필연적이다.

 

에밀 졸라는 <목로주점>에서 삶의 희망을 모두 잃어버린,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보여준다. 그런 세상의 흐름에 속절없이 휩쓸려 오직 살아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 된삶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도 의지도 수단도 신념도 없기에 그저 죽음을 조금씩 연기하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목적이 된파리 노동자들의 삶을 보여준다. 오죽하면 빅토르 위고마저 졸라가 노동자들의 비참하고 비천한 삶의 흉측한 상처를 제멋대로 드러내 보여준다며 유감을 표명했을까.

 

타락과 몰락의 과정을, 그 비참함을 묘사함에 있어 <목로주점>은 갈 데까지 간다. 때문에, 문득 짜증이 치민다거나 하진 않는다. 디킨스 류의 소설에 지친 독자들에겐 오아시스 같은 소설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딱히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디킨스 류의 소설이 그리워진 달까. 짜증을 냈던 스스로의 오만을 돌이켜보게 된달까.

 

희망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닐 것이다. 아무리 우연의 개입으로 인한 것이라 할지라도, 비현실적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희망은 필요하다. 하지만 우연과 환상에 의한 희망은 거짓 희망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거짓 희망이 만연한 사회일까요, 아직은 진짜 희망이 존재하는 사회일까.

 

잘 팔리는 소설이나 시청률 높은 드라마(또는 예능 프로)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을 읽거나 드라마를 보다가 문득 짜증이 치미는 경우가 잦았다면 그 역시 어떤 지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연과 환상의 도움이 없이는 희망을 구성할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음을 징후적으로 드러내는 지표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오늘날 우리 대다수의 실제 삶이 <목로주점>의 주인공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운 생각이 든다.

 

치미는 짜증을(혹은 분노를) 감내해가면서, 말도 안 되는 우연과 개드립들을 용서해가면서 책과 드라마에, 예능 프로에 하염없이빠져든 경험이 있는가? (고백하자면 나는 많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가까스로살아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인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상에서 종종 쓰이는 표현 중에 바닥을 친다는 표현이 있다. 육체적인 것이든 경제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매우 힘든 일을 겪고 나면 바닥을 치고다시 올라간다는 위로 내지 자기 위안의 의미가 내포된 표현이다. 하지만 <목로주점>은 그러한 위로가 기만임을, 바닥 밑에 또 다른 바닥이, 끝 모를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선한 마음으로도 굳센 의지로도 근면 성실로도 이 바닥/심연으로의 추락을 막을 수 없다.

 

기억할 점은 에밀 졸라의 이야기는 <목로주점>에서 완결되는 게 아니라 스무 권에 달하는 루공-마카르 총서라는 거대한 별자리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때문에 <목로주점>에 이어 (<목로주점>의 주인공 제르베즈 마카르의 자손들이 등장하는) <나나> <작품> <제르미날>을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 특히 관심이 가는 것은 <제르미날>이다. ‘작품해설에 따르면 <제르미날>, 자신들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하여 민중-노동자들의 비난을 받은 <목로주점>과 달리, 민중-노동자들의 진심어린 환호를 받았다고 하니 말이다. <목로주점>에서 가까스로의 삶의 밑바닥을 보여준 졸라가 <제르미날>에서는 어떤 식으로 기만적 희망이 아닌 진실한 희망을 구성해냈을지가 궁금하다. 읽을 만한 번역본이 아직 출간되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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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일족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5
모리 오가이 지음, 권태민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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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모리 오가이(1862-1922)는 나쓰메 소세키(1867-1916)와 더불어 ‘일본 근대문학’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굵직한' 작가다. 그런데 ‘근대문학’에서 ‘근대’라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 <아베 일족>과 같은 작품을 읽다보면 자연히 의문이 생긴다. 소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예스러운 표현과 구성이 그렇거니와 이야기 자체가 ‘옛날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딱히 주인공이라 부를만한 인물이 없고 내면 묘사가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는 점은 현대 독자의 감정이입을 방해한다. 이건 근대소설이라기보다 '역사 소품'에 더 가까운 작품이 아닌가?

 

<아베 일족>은 폐쇄적이고 자기충족적 세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베 일족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지위와 녹봉, 그리고 명예율에 따라 질서가 견고하게 자리 잡은 세계 속에 존재한다. 이 세계는 외부를 상상할 수 없는 세계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넘쳐나는 인력과 에너지를 발산할 외부-바깥이 없으므로, (잉여)인력은 (잉여인력 스스로의 손으로) 제거되며, 에너지는 내부를, 내부 구성원 서로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한다. 자살이라는 죽음의 형식은 명예(체면)라는 가치로 수렴되고 숭고함을 얻는다. 그러나 모든 ‘죽음’이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다. 언제, 어떻게 죽느냐 그 절차가 중요하다.

 

주군이 죽으면 따라죽는 ‘순사’라는 죽음의 형식에는 현실적이고 사회학적인 맥락이 존재한다. 순사는 구세력와 신세력 간의 권력다툼이라는 사회적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는 역할을 하며, 노인을 부양하는 데 소요되는 사회적 비용을 없애는 역할을 한다. 또한 집안의 자손에게 지위와 녹봉이 고스란히 상속된다는 점에서 보면, 순사는 상속 제도이자 일종의 ‘생명보험’이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한 폐쇄적인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에너지가 통제된다.

 

그러나 아무리 폐쇄적인 사회라 할지라도 틈은 생기게 마련이다. 이 틈을 우리는 ‘개인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모리 오가이는 <아베 일족>에서 ‘개인성’이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서술한다. 일견, 위계질서가 확고하고 그에 따라 각자가 있어야할 자리 및 각자가 행해야할 행동이 명확히 정해진 사회에서 ‘개인성’은 존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순사’라는 건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적 억압이자 폭력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다분하지만 <아베 일족>에 등장하는 인물 중 누구도 ‘순사’ 자체의 대의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적 규범을 철저히 내면화하고 있으며, 이는 다시 사회 질서를 굳건히 하는 데 기여한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틈은 발생한다.

 

틈이 발생할 여지는 ‘(할복)자살’이라는 죽음의 방식과 거기에 뒤따르는 가치인 ‘명예(체면)’에 내재해 있다. 이로부터 개인성이 싹튼다. 왜냐면 명예는 사회적인 가치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가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일족의 수장 아베 야이치에몬 미치노부는 일단 사회적으로(사람들이 인정하는) 명예로운 죽음을 맞을 수 없게 되자, 개인적 차원에서의 명예를 추구한다. 그의 아들 곤베에 역시 사회적 차원에서 체면이 손상되었다고 느끼자, 개인적 차원에서의 명예회복을 노리고 상투를 잘라 선대 주군의 위패 앞에 바치는 돌출 행동을 한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행동은 사회에 맞서 자기 자신을—개인성을—드러내는 행위가 된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대목은 이 모든 일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는 주군 다다토시의 ‘심정 묘사’다.

  

… 다다토시의 마음속에는 후계자인 아들 미쓰히사를 위해서 그들이 살아남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절실했다. 또 이런 사람들을 자신을 따라 죽게 하는 게 얼마나 잔혹한 일인지를 생각했다. 그러나 몸이 찢기는 듯한 아픔을 느끼면서도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허락한다”는 말을 한 것은, 달리 도리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22)

여기서 주군 다다토시는 ‘순사’라는 개념을 개인들 각각의 죽음으로 나누어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각각의 죽음에 대해 “몸이 찢기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그 자신, 죽음을 앞둔 상태이기도 하다). 순사는 일종의 사회 제도지만 그것이 구축되는 데 일조한 건 수많은 개인의 죽음들이다. 이렇게 보면 죽음 역시 사회적인 측면과 개인적인 측면을 지닌다. 물론 죽음이란 결국에는 당사자 개인이 오롯이 감당해야 하고 겪어야하는 사태겠지만, 누군가의 죽음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추모비를 세운다. 또한 (용산, 쌍용차의 경우에서 보듯) 죽음을 둘러싸고 상징 투쟁이 벌어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다른 한편 주목할 점은 모든 죽음 중에서도 자살에는 개인의 선택과 의지가 크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할복'이라는 자살 형식은 흥미로운 데가 있다. 할복은 겉보기에는 개인의 의지를 강조한다. 그러나 <아베 일족>에서 묘사되는 할복의 구체적 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스로 배를 가르는 것은 일종의 퍼포먼스다. 결정적으로 숨통을 끊는 것은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동시에 확실히 죽이기 위해—뒤에서 할복자의 목을 베는, 뒷마무리담당 무사인 것이다. 요컨대 할복이란 개인의 의지와 사회적 요구가 이상적으로 합치된 죽음의 형식이라 하겠다.

 

그런데 아베 야이치에몬의 할복은 조금 다르다. 거기서는 개인의 의지가 보다 확실히 드러난다. 왜냐하면 그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으며, 그 스스로 배를 가르고 목을 베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누가 봐도 순사 자격이 있는 인물이었음에도, 순사를 허락받지 못했다. 왜 그만 다른 대우를 받은 걸까. 이에 대해 모리 오가이는 다음과 같이 암시를 남기고 있다.

  

처음 다다토시는 그저 그에게 반대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뿐이었는데, 나중에 그가 스스로의 의지로 일한다는 것을 알고는 미워졌다. 그러나 현명한 다다토시는 야이치에몬을 미워하면서도, 그가 왜 그렇게 행동하게 된 건지 생각해보고, 결국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반대하는 버릇을 고쳐보려고 했지만 달이 흐르고 해가 지남에 따라 점차 고치기 어려워졌다. (30-31)

다다토시는 아베 야이치에몬을 미워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스스로의 의지로” 일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는 주어진 일만 수행하는 사회적 요구에 충실히 복무하는 개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주군에게 말씀드리고 할 일을 말씀드리지 않고”하는, “그러나 할 일은 정확하게 해서 비난할 여지가 없는”(30) 예외적 개인이었던 것이다.

 

'근대문학'의 한 특징이 ‘개인성’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베 일족>은, 모리 오가이가 옛 역사 이야기에서 개인성이 발현된 사례를 발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아베 일족>은 개인성이 드러나는 순간을 극히 절제된 표현으로 묘사한다. 독자는 작가의 암시를 쉽게 눈치챌 수 없다. 더군다나 등장인물 누구도 (예외적 개인이긴 할지언정) 영웅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대개 역사 속 인물들이 소설에 등장할 때면 초인적인 영웅이거나 온갖 미덕을 다 갖춘 성인처럼 묘사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모리 오가이의 독보적인 성취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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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 복수 3부작 박스세트 (복수는 나의 것 + 친절한 금자씨 + 올드보이, 7disc)
박찬욱 감독, 최민식 외 출연 / 엔터원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본격 이영애 결혼 기념 재탕 리뷰 
 

  이런 영화를 볼 땐, 고개는 약간 쳐들고, 눈은 상대를 얕보듯 살짝 시선을 내리깔고, 다리는 외로 꼬고, 가볍게 의자 팔걸이에 걸쳐진 손은 이따금씩 생각났다는 듯 하늘하늘 흔들어 주는, 그런 자세로 봐야 하지 않을까, 하고 영화가 시작하기 전, 잠시 생각했습니다. 아무래도 오프닝 시퀀스가 무지막지하게 아아띠스띡artistic하면서도 빤따아스띡fantastic하게 시작해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이제 와선 그런 생각도 드네요.




  박찬욱의 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영화는 삘이 좋았습니다. 평론가 출신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제이에스에이>에서 ‘부치지 않은 편지’가 흐를 때, 완전히, 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많이, 매료되었습니다. 그가 찍은 또 다른 영화 제목이 <달은 해가 꾸는 꿈>이라는 사실을 알고 더욱 더 매료되었습니다. 달은, 해가 꾸는 꿈, 이라, 오호라, 과연, 그렇군. 나는 무릎을 탁 치며, 자리에서 분연히 일어나, 제자리에서 한바퀴 돌았습니다. 그 정도 예의는 갖춰야 할 것 같았습니다. 이 사람, 우리 시대의 거장이 될 것 같다. 그런 예감이 백열전구처럼 머리를 휘익 스쳤습니다. 요즘은 뭐 삼파장 램프가 대세입니다만.




  <복수는 나의 것>을 보고 나는 생각하기를, 우리 찬욱씨가(이제부터 찬욱씨라고 부르는 이유는, <친절한 금자씨>에서 이금자가 제과점 청년에게 그냥 ‘금자씨’라고 부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일지도 모릅니다) 한국 영화에서 나타낼 수 있는 하나의 극단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하드보일드한 영상같으니라고... 그이 하드보일드한 영상들은 곧 쿨한 것과 일맥상통한 어떤 인상들을 나에게 심어주었고, 아아, 게다가 이 영화, 흥행에 실패하고 만 것입니다. 흥행에 실패한 어떤 영화들은 쉽사리 컬트(숭배의 대상)의 반열에 오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찬욱씨의 최고의 영화로 꼽기로 해버렸습니다. 이 영화 왜 이렇게 잔인해, 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즐겨 한 마디 했습니다. <제이에스에이>보다 백 배 낫지 않냐? 나의 허영심은 이렇게 채워졌습니다.




  <올드 보이>는 지난 일 년간 하나의 현상, 이었습니다. 신드롬에 가까운 열풍이 이 영화를 둘러싸고 불었습니다. 흰색과 검은색, 그리고 보라색 위주로 물든(물론 핏빛은 제외하구요) 이 차가운 색감의 영화를 둘러싸고 뜨거운 바람이 불었다는 것은, 어쩌면 찬욱씨의 운이 억세게 좋았던 것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누구와는 다르게 그의 사주는 엄청나게 좋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사실, 솔직히, 그가 부럽습니다. 나는 찬욱씨가 부럽고, 부러운 나머지 약간 질투마저 납니다. 이번에 <금자씨>에서도 사실, 감탄을 많이 했습니다. 내가 언젠가 써먹을려고 생각해두었던 그런 설정들을 자유자재로, 그만의 스타일 속여 녹여, 구사하고 있는 그가 부러웠습니다. 이와이 순지의 영화 <스왈로우 테일 버터플라이>를 보면, 일본 경찰이 일본어를 못하는 사람을 통역을 통해 심문하고, 고문을 가하는 장면이 나오는 데요. 그런 설정을 언젠가 써먹어 봐야 겠다, 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이런, 이게 뭡니까. 우리 찬욱씨가...... 선수를 쳐 버리고 만 겁니다. 멋집니다.




  그의 영화를 두고, 의견이 분분한가 봅니다. 이건 사기다. 아니다. 이건 예술이다. 사기건 예술이건 간에, 아니, 그냥 사기라고 칩시다. 그렇다고 해도 이정도로만 치면, 충분히 용서할만하지 않을까요?




  사실, 나는 그의 스타일이 마음에 듭니다. 그는 확연히 스타일 위주입니다. 스타일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죠. 그게 무슨 스타일이냐구요? 아, 이거 참, 스타일 구기네, 이렇게 말할 때의 그 스타일하고는 약간 다른 그런 것이죠. 어떤 영화가 생각이 나네요. 부산의 깡패들이 나오는 조폭 영화의 대표작 이라 할 수 있는 영화인데, 거기서 주인공 깡패가 어렸을 때 친구였던 다른 조직의 깡패를 죽인 혐의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뭔가 수를 쓰면 빠져나갈 수도 있는데도 혐의를 순순히 인정하고 말죠. 왜 그랬느냐는 또 다른 친구의 질문에 그는 대답합니다. ‘쪽팔려서.’




  아아, 쪽팔려서. 명언입니다. 물론 위에 언급된 영화와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의 스타일입니다만, 어느덧 우리는 스타일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겁니다. 폼생폼사의 위대한 시기가 도래했습니다. 찬욱씨는 칸에서 상을 탈 수밖에 없는 그런 사주를 타고난 겁니다. 그는 위대한 시기에 걸맞는 사주를 타고나 이제 세계 속의 위대한 한국인 감독이 될 겁니다. 사실, <올드보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스타일의 예고편에 불과한 거죠. 그 이전으로 소급해 들어가 <복수는 나의 것>을 보죠. 거기에서 ‘스타일’은 아직 부차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증거로 우리는 송강호와 신하균이 연기하는 주인공들의 감정선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비록 신하균이 ‘녹색 머리의 벙어리’로 나온다 해도 말이죠. 신하균이 신장을 도둑맞고 텅 빈 폐건물에서 배가 갈린 채 홀로 뒹굴며 신음할 때, 배두나가 엽기적인 전기 고문을 받고 잔인하게 살해당할 때도, 우리는 최소한 얼굴을 찌푸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온갖 만화적(사실 만화에서 출발했으니 당연하겠지만)이고 엽기적이고 잔인한 설정들로 치장되어있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반윤리적이고 반도덕적인 반전과 주제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사악한 주제를 담고 있는 <올드 보이>도 사실 스타일적인 측면에서는 최민식의 ‘레게 파마’를 오버하는 부분은 별로 없습니다. 굳이 있다면 유지태가 쓸 데 없이 메뚜기 자세로 요가나 하는 정도? 허리가 무지 아팠다던데....... 말하자면 찬욱씨는 이 때만해도 선을 그을 줄 알았다는 거죠. 요기, 요기, 이 ‘레게 파마’ 이것까지가 선이야. 더 이상 넘어가지 말자구. 아아, 그러나, 어떡합니까, ‘레게 파마’ 그 자체로 센세이션인 것을. 아티스틱하고 판타스틱한 것을. 사람들은 열광하고 말았습니다. <올드 보이>에서 ‘진짜 주제’가 뭔지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스타일, 스타일이 중요합니다. 일찍이 왕가위가 보여준 것을, 타란티노가 보여준 것을 우리의 찬욱씨는 마치 애국이라도 하듯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 선보임으로써 우리 대중들의 환호와 외국의 유수한 평론가들의 갈채를 한번에 얻어버린 겁니다. 그의 사주가 궁금할 따름입니다. 그의 영화는 어느 덧 컬트의 수준을 가볍게 뛰어넘어 진정한 ‘숭배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금자씨>에서 찬욱씨는 또 다른 도약을 합니다. 그는 이제 아주 가볍게 우리가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나풀나풀 날아다닙니다. 그의 사주가 궁금할뿐더러, 이제 그의 머릿속을 갈라서 헤집어 보고 싶은 욕망이 뭉클뭉클 솟아오를 지경입니다. 영화에서, 이영애가 ‘개새’ 비슷한 어떤 것을 끌고 가서 죽입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진짜로 빛이 나기도 합니다. 정말이지 스타일 죽이는 어떤 총을 만들어 준 사내는 팔에 정말이지 멋진 문신을 하고 있습니다. 보다 직접적으로, 이영애의 입을 빌려, 감독은 말합니다. ‘무조건 아름다워야 해.’ 그래서 한겨울에 얇디얇은 땡땡이 옷을 입고 커다란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 설정도 해봅니다. 허무함을 바탕색으로 하고 있는 알록달록 퇴폐미가 하늘을 찌릅니다. 지하 하숙방은 어울리지 않는 세련된 얼룩무늬 벽지가 발라져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올드 보이>의 감금방도, 보라색 선물상자도, 그러했습니다만. 하지만 정말 마음에 드는 것은 20세 유괴범 금자를 취조하는 공간입니다. 그 공간은 지하 하숙방과 달리 엄청나게 사실적인 그런 공간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찬욱씨는 균형 감각도 뛰어난 것 같습니다. 자신의 넘치는 재능을 제어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인 겁니다. 살인이 마치 반상회처럼, 하나의 파티처럼 벌어지는 폐교의 교실이라는 공간도 그렇습니다. 아아, 생각하면 할수록, 입술사이로 감탄사만이 비어져 나옵니다. 찬욱씨의 장기랄 수 있는 스틸 사진을 연상케 하는 정지된 화면들 역시 여전히 놀랍습니다. 매우 일본적인 화면들이긴 하지만.




  두서 없이 늘어놓다 보니, 하고 싶은 말을 하나 빼 먹었네요. 요는, <금자씨>는 이야기적인 측면에서 찬욱씨의 이전 두 영화보다 더 설득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타일적인 측면에서는 훨씬 더 무책임하다는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혹시, 행간에서 읽었습니까? 하하...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몇십 년을 계획한, 그리고 복수가 성공하자 죽어버린 <올드 보이>의 유지태는 사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캐릭터입니다. 그래서 그는 마치 변명처럼 말해야 합니다. 모래알이든, 큰 돌이든 물에 가라앉는 것은 같다나요. ‘비범한 미친놈’이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아가는’ 데 급급한 ‘보통사람’에게 복수를 하는 어이없는 형국입니다. 그래서 15년간의 감금기간이 필요했던 겁니다. 복수란 대개 자신과 급이 같은 인물에 대해서 행할 수 있는 것이죠. 상대방이 모르는 복수는 복수가 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15년간 감금을 통해 ‘보통사람’은 ‘비범한’ 프로타고니스트로 업그레이드 되어야만 하는 겁니다. 걸출한 안타고니스트에 어울리는. 반면에, <금자씨>의 복수의 대상은 커다란 사회악이며 미친 정신병자입니다. 뭔가 따로 설정을 하지 않아도 복수를 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복수의 과정도 한 절대적인 개인에 의해 집전되지 않습니다. 금자씨는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지만, 그것은 주변 사람들을 적절히 활용할 줄 아는 데서 비롯되는, 그럼으로써 더욱 돋보이는 그런 카리스마입니다. 영화의 전체 흐름을 관통하는 ‘금자씨의 복수’라는 하나의 중심적인 결을 타고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엮어집니다. 복수의 준비과정이 그렇게 이루어지고, 또한 복수의 실행과정이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영화의 구조가, 그리고 복수의 과정이, 마치 하나의 거대한 나무와도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땅 속으로 넓게 퍼진 뿌리, 그리고 튼실한 몸통, 그리고 몸통 위로 아름답게 펼쳐진 가지와 이파리, 아아, 그것들이 알맞은 세기의 바람에 흩날린다고 생각해 보세요. 나는 탄성을 내지릅니다. 비닐에 고인 저 피, 아~ 아름다워라.




  문제는, ‘개새’를 비롯한, 스타일입니다. 사실, ‘개새’가 아닌 ‘개사람’인데, 그런 직유적인 이미지는 아무래도 좀 거친 느낌을 주죠. 구성의 세련됨에 비해 좀 거칠다 싶은 장면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습니다. ‘식탁 섹스’ 장면도 좀 거칠죠. 이름이 삐죽삐죽 삐져나오는 설정은 좋았습니다만. 웃음이 삐죽삐죽 비어져 나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왜 웃음이 나오느냐, 이 말이죠. 대다수의 관객은 또 함정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쓴웃음이 비어져 나오는데 쓴웃음인 대로 그냥 웃고 넘겨버리고 맙니다. 원래, 부르기가 무지하게 어색한 ‘생일 축가’를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서 어색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부르는 장면을 통해 찬욱씨는 결정적으로 입장 표명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보세요. 여러분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란 게 이래요. 이렇게도 뻘쭘하고 어색하게 살고 있는 거예요. 자, 내가 약간의 키치적인 수법들을 동원해 그걸 조금 비틀어 봤어요. 어때요, 충격적이라구요? 엽기적이라구요? 역겹다구요? 동의할 수 없다구요? 아주 약간 비틀어봤을 뿐인데요? 여러분이 평소에 생일 축가를 어떤 식으로 부르는 지 생각해 보세요. 어느 패밀리 레스토랑을 가면, 직원들이 우습기 짝이 없는 복장을 하고 불러준다는 그 생일 축가를 생각해 보세요. 어색해진 분위기를 감당 못하고 참석자 모두는 얼굴이 빨개지고 말죠. 어라, 어색하네? 왜 이래? 아냐, 이래선 안 돼. 급기야,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한바탕 어색한 웃음이 자리를 휩쓸고, 잠시 ‘천사가 지나가는 바람에 고요했던’ 자리엔 또 다시 명랑함과 즐거움이 깃들죠. 어색함은 어느새 잊혀지고 맙니다. 그것은 본질적인 게 아니니까요. 우리가 생일 파티 자리에 제격이라고 여겼던 게 아니니까요. 마찬가지로 우리는 <금자씨>를 보고 웃습니다. 웃음 한 구석에 불편함이 깃들어있습니다만 애써 무시합니다. 찬욱씨는 역시 멋져. 이젠 우리에게 웃음까지 선사하네. 이제 또 무슨 영화제에서 상을 탈려나? 그의 이름이 포털 싸이트의 검색어 순위에 오르고, 어느덧 정보의 바다는 박씨 천하가 됩니다. 박주영, 박지성, 박세리, 박찬호... 사실, <복수는 나의 것>이 나에게 훌륭했던 이유는, 영화를 보며 얼굴을 ‘마음껏’ 일그러뜨릴 수 있어서였습니다. <금자씨>에서는 미안하지만, 그게 안 됩니다. 몇몇 장면에서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어이가 없어서요. 그렇지만, 미안할 건 없겠죠? <금자씨>는 흥행가도를 질주하고 있고, 당분간 찬욱씨의 좋은 운도 계속될 것처럼 보이니까요.




  끝으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건 찬욱씨에 대한 질투심이 어려 있는 글입니다. 찬욱씨가 영화 첫 머리에서 금자씨의 입을 빌려 했던 충고를 받아들여, 이제 쓸 데 없는 질투는 그만두고 ‘나나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한 편, ‘금자씨’의 눈화장은 너무 심한 것이 아니었나, ‘금자야, 너 눈 화장이 그게 뭐니~’라는 최민식의 느끼한 한마디는 너무나도 시의 적절한 멘트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드는 것입니다.




  ‘찬욱씨, 거 스타일이 그게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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