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키키 브라더스(CJ한국영화할인)
CJ 엔터테인먼트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와이키키 브라더스>

 

감독 임순례

출연 이얼, 황정민, 박원상, 오광록, 오지혜, 박해일, 문혜원

 

 

 

그새 시간이 많이 흘렀다. 엊그제 본 것 같은데 벌써 8년 전 영화다.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개봉한 2001년, 나는 대학을 졸업했고 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꿈 많은, 뭘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시절이었다. 문학이 좋았고, 음악이 좋았다. 이것들을 좋아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고 뭔가 그럴듯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그리 재미있지 않았던 것은. 영화의 주인공들은 삶에 찌들어 있었고 음악을 통해 뭔가 그럴듯한 일을 하고 있지도 않았다. 게다가 꿈꾸는 것마저 할 수 없는, 아니 자발적으로 그만두어 버린 것 같았다. 답답하고 우울하고 청승맞고 구질구질했다. 밴드 멤버들이 하나둘 무너져가면서 그러한 느낌은 강화되었다. 강수가 대마초에 취해 불안한 웃음을 흘릴 때, 정석이 칼을 맞고 신경질적 발작을 일으킬 때 그랬다. 그리고 성인 주점에서 성우가 손님의 강요에 의해 벌거벗고 기타 연주를 하며 노래를 부를 때 그러한 느낌은 절정에 달했다.

 

왜 이런 비관적인 영화를 만든 걸까. 궁금했다. 2001년에 나는 이 영화가 꿈이 생활과 현실에 의해 압사당하는 필연적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짐했던 것 같다. 쉽게 압사당하지 않을 거라고.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왔을까? 아마도 치기였으리라.

 

생각해보면, (지금도 그렇지만) 몰락하는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에 매료되어 있던 시절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와 다자이 오사무가 좋았다. 만약 압사당한다 하더라도 그들처럼 압사당한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어떤 몰락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령 자신의 몰락에 대해 타인 혹은 사회 탓을 하면서 구차하게 불만을 늘어놓거나 하지 않는 몰락은 아름답다. 지하생활자나 다자이의 궤변과 수다가 지루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최대한 삼가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독백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한다. 자신의 성격과 기질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가령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병든 인간이다. ... 아무래도 간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낙오자들의 변명이 아니다. 그렇게 여겨질 확률이 높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의 독백은 주관이 섞인 불만이나 자기 변명이 아니라 놀라운 자기 반성이다. 물론 일반적 의미에서의 반성과는 다르다. 일반적 의미의 반성이란, 그것을 수행함으로써 잘못과 오류를 뉘우치고 수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하생활자에게 반성은 자기 발전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는 결코 뉘우치지 않는다.

 

사실 변명이나 반성은 어떤 논리적 비약을 반드시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윤리적이지 않다. 나 자신의 개인적 몰락에 대한 원인으로 사회(타인)라는 심급을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회를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변명과 반성은 동일한 것이기도 하다. 둘 모두 자신의 불행의 원인을 자신이 기질과 사회의 요구가 불일치한 데서 찾는다. 단지 전자는 사회 탓을 더하고 후자는 자기 탓을 더한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지하생활자의 자기 반성이 변명도 일반적인 의미의 반성도 아닌 이유, 더불어 그가 낙오자가 아닌 이유는 자신의 기질에 대해 말할 뿐 사회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서 자신과 사회 모두를 객관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꿈을 지니고 있는 한, 그는 필연적으로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 낙오자가 되지 않으려면 세상과 타협하면서 꿈의 크기를 축소시켜야 한다. 그런데 꿈을 축소시키는 방법이 아무래도 기질상 서툰 이들이 있다. 그러면 말이 많아지고 불평과 불만으로 그 말을 채우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실은 그런 심정에서 소설을 썼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 첫머리의 "나는 병든 인간, 비열한 인간" 운운은 문자 그대로의 자기 고백으로 읽혀야 마땅할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은 몰락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개인의 내면과 당대 사회에서 진행되는 몰락을 객관화하는 데 성공했다.

 

다른 방법도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취한 방법을 참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소설이 아니라 영화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펜이 아니라 단지 비춰지는 그대로를 포착할 뿐인 카메라를 도구로 삼는 영화는 소설과 달리 내면을 보여줄 수 없으니까 말이다.

 

물론 많은 영화들은 내면을 보여주는 척한다. 할리우드에서라면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전형적 실패담으로 만들었을 확률이 높다. 꿈을 버리지 않은 이들이 세상에 도전하다 처참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영화 말미에 희미하지만 분명한 희망을 남기는 식으로 말이다. '너희들의 도전은 비록 실패했을 망정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영화는 극장의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정말 말 그대로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와이키키 브라더스>같은 영화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요새는 잘 나오지 않지만) 노래방에서 반쯤 벌거벗은 미녀들이 해변을 뛰어다니는 화면을 볼 때마다, (극히 드물겠지만) 버스를 운전하며 우는 마을버스 기사 아저씨를 볼 때마다, 이 영화는 다시 떠오를 것이다. 혹은 사는 게 힘들어 울고 싶을 때 이 영화는 다시 떠오를 것이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어설프다. 아름답게 몰락하는 방법이 있을 거라고 아직도 믿는다. 그 방법에 대해 자못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틀렸다. 아름답게 몰락하는 방법 따윈 없다. 물론 아름답게 사는 방법도 없다. 삶도 세상은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물론 이 말에 대해서는 섣부른 단정이라며 동의하지 않을 이도 많을 것이다. 아름다움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에 깃들어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꿈은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단정짓고 절망하는 대신 꿈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굳이 삶과 세상을 아름다움과 연결시키려는 우리의 태도에 대해 한번쯤은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태도에는 세상에 대한 불만과 불평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닌가? '아름다움은 우리 주변 사소한 것들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불만과 불평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포기하지 않는 꿈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고 말함으로써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꿈을 포기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정말이지 객관적으로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아름다움은 사소함 속에 깃들어 있다'라는 믿음이 얼마나 순진한 것인지를 정확하게 짚어주고 있는 영화라고도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성우가 늦은 오후 좁은 하숙방에서 작곡을 할 때, 개장 전의 업소에서 혼자 노래를 부를 때(그리고 그것을 인희가 지켜보고 있을 때)이다. 이 장면들을 통해 관객들은 성우가 꿈을 버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안도한다. 그러나 이 장면들에 이어지는 장면은 그러한 안도감에 균열을 낸다. 순간의 아름다움은 피칠갑한 정석의 난입과 뒤이은 발작에 의해, 친구 수철의 죽음을 알리는 문자에 의해 파괴된다.

 

관객이 영화에 기대하는 역할--즉 세상은 그래도 아름답다라는 환상을 부여하는 것--을 완전히 배반하는 이러한 장면 전개는 아마도 의도적인 것이리라. 그러나 만약 영화가 여기서 그쳐버렸다면 나는 실망했을 것이다. 영화 역시 답답하고 우울하고 청승맞고 구질구질한 영화에 그쳐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영화는 예상치 못한 순간 비관의 정서를 탈피한다. 그것도 극도로 답답하고 우울하고 청승맞고 구질구질한 상황에서 말이다. 

 

노래방에서 탈의를 강요당한 성우가 노래를 부르다 화면을 응시하면, 나체로 테이블 위에서 춤을 추는 남녀가 희미하게 보이고, 화면 속에는 비키니를 입은 금발 미녀가 해변을 뛰어다니고 있다. 그런데 그 화면은 곧 어린 시절의 성우와 친구들 장면으로 바뀐다.

 

여기서 성우는 현실도피를 하고 있지도 (만약 현실도피라면 회상 장면이 이어졌을 것이다), 꿈을 이루지 못한 자신의 인생을 회한이라는 정서로 물들이고 있지도 않다. (영화 속 다른 인물들이 "우리/내가 왜 이렇게 됐지?"라고 말하는 반면, 성우는 한번도 그런 말을 하고 있지 않다.) 나체일지언정, 노래에는 관심도 없는 속물들 사이에서일지언정, 그는 어쨌든 지금도 계속 연주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한 때 진리라고 믿어왔던 것을, 숭고한 것으로 여겼던 것을 쉽게 내던지는 데 익숙하다. 적어도 현실에,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그렇게 말하고, 또 그런 말을 듣고 버럭 화를 냈던 이들도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말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술이라도 취했다면 거기에 (아무도 믿지 않을, 그 말을 하는 자신도 믿지 않을) 기나긴 변명들이 덧붙는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안다. 다만 그런 것이 부질없는 짓임을 나는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8년 만에 다시 보면서 얼마간 깨닫게 되었다.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취해있을 시간에 살아있으라. 말할 시간에 연주하라. 현실 탓을 하면서 꿈을 버리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몰두하는 대신 꿈과 관련된 일을 단 한 조각이라도 실행에 옮기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죄와 벌 - 상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8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8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죄와 벌>을 쓸 당시, '아마도' 노름 빚에 시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방탕한 행동과 그 일의 근본적 원인이랄 수 있는 내면의 탐욕과 방종은 가린 채, 초인에 관한 개똥철학을 내놓는다. 그는 물론 그 스스로의 입으로 직접 그 개똥철학을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철학은 소설 속 등장인물을 통해 설파된다. 이는 그의 간교함 또는 소심함의 소치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그를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라스콜리니코프라는 이름을 지닌 소설 속 등장인물은 얼마 간의 돈을 얻기 위해 짐승같은 전당포 노파를 죽인다. 그는 명백한 살인범이지만, 그가 살인을 저지른 논리는 꽤나 '매혹적인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니체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데... (흐음- 니체라... 니체를 들먹거려 나 자신의 저급한 매혹됨을 얼마 간이나마 숨겨보자는 속셈, 그래 인정한다.)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던 라스콜리니코프를 사로잡은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인간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민망한 전당포 노파 같은 인간, 그리고 인간을 위한, 나아가 인류를 위한 어떤 위대한 철학을 지닌 젊은 청년 중 누구에게 더 돈이, 아니 한 끼의 따뜻한 식사가, 아픈 어머니를 위한 약값과 입원비가 필요한가? 누가 더 살 가치가 있는 것일까? 깊게 생각할 것도 없다. 대답은 뻔한 것이다. 생명은 모두 소중한 것이니까, 라는 개똥철학 앞에서라면 말이다.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을 때, 그것이 쓰여진 19세기 중반이 부르주아 문화가 정점을 지나 타락의 내리막길을 걷고 있던(역설적으로 타락이 진행되고 있던 바로 그 순간들이 정점이었다) 시기라는 점을 적극 고려해야 할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보들레르는 그러한 타락을 맨 먼저 감지한 사람들이었다. 한 사람은 문화의 중심지인 파리 출신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문화적으로 변두리에 속하는 러시아 출신이었지만 이런 차이는 무의미한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이 활동하던 때보다 대략 50여년 후의 릴케가 <말테의 수기> 첫 머리에서 적절히 묘사하고 있듯이, 도시란 그 본질에 있어서 크게 다르지 않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차이는 '파리', 그리고 '뻬쩨르부르그'라는 이름 뿐일지도 모른다. 도시에서, '이윤추구'라는 동기 이외에 서로 같은 경험이라곤 단 하나도 공유하지 않은 온갖 사람들이 모인 도시에서, 도스토예프스키와 보들레르는 정신적, 육체적 타락상을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목격할 수도, 또 그들 스스로 경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목격한 바와 경험한 바를 '객관화'하여 묘사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인 이들, 소위 작가라는 이들이, 부르주아 문화의 몰락을 감지하고 그것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19세기의 문학이란 동어반복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이보게, 지금 우리 가라앉고 있잖나!" 그렇다고 해도 문학 앞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있을 것이다. 첫째, 몰락의 핵심 요소를 찾아내는 것. 둘째, 문학이 몰락에 대응하는 독특한 방식을 파악하는 것.

 

  작가는(혹은 문학이라는 추상명사는) 시대를 초월하려는 의지를 가진 자(것)이면서 동시에 '시대의 소산'이라고 말한다면 꽤나 일반적인 진술에 속할 것이지만 이 일반적 역설을 가만히 곱씹어 볼 필요는 있으리라.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이 어떤 위대한 통찰이라기보다 끈질긴 자기변명이라고 생각한다. 혹여 (니체의 '초인'을 들먹이면서) '초월에의 의지'에 방점을 둔다고 하더라도,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은 '무모한 꿈' 같은 것이다. 그는 스스로 살인을 저지를 만한 인물을 결코 아니었을 터, 그에게 필요한 것은 칼이나 도끼가 아니라 '종이paper'였다. 자신의 욕망을 마음대로 그려낼 수 있는 종이 말이다. '시대의 소산'이라는 측면에 방점을 둔다면, 그의 문학은 몰락에 대한 '(소극적 의미에서) 증언'과 '(적극적 의미에서) 반응'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자체 몰락을 촉진하고 또 피드백하는 요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인간의 도덕적 몰락을 매혹적으로 묘사할 줄 알았다. 이것이 라스콜리니코프의 도끼질을 매혹적이라 느끼는 근본적 이유다. 그 결과, 그의 소설에서 이를테면 '몰락에 대한 극복 의지'를 발견하기란 힘들게 되고 만다. 반대로 그는 몰락 그 자체의 과정에 집중한다. 몰락을 아름답게 묘사하는 것(물론 이는 이후의 월터 페이터, 오스카 와일드 등 유미주의자들에게서 두드러지는 점일 터이나), 즉 몰락의 문학적 형상화는 몰락을 역사의 당위로 여기게 만든다.

 

  오늘날의 시점에서 음미해볼 만한 점은 (당연하게도!) 아직도 인간의 몰락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문학의 죽음 내지는 종언'이 심심치 않게 회자됨에도 불구, 문학이 헤엄치고 뛰놀 물 웅덩이는 아직 깊고 넓다. 그것은 더러운 물 웅덩이가 아니라 넓고 깊고 푸른 대양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몰락'을 의식적으로 인식하는 한(그 몰락을 애도하든 반기든, 혹은 완전히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몽상가들 - 완전 무삭제판, 태원 5월 할인행사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 마이클 피트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은 영화를 통해 혁명이 가능하리라는 믿음이 결국 하나의 몽상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영화를 통해 사회를 바꾼다고? 당치도 않은. 영화는 사회는 고사하고 인간의 관습, 고정관념마저도 바꾸어 놓지 못한다는 것을 베르톨루치는 고전 영화를 삶보다 더 중요시하는 시네필들의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 

 

영화를 보고, 숭배하고 그것을 흉내냄으로써 현실의 관습과 고정관념을 조롱하고 전복시키려는 그들의 행동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귀결된다. 영화와 삶이 일치된 세계. 그들은 영화를 통해 혁명으로 이어질 행동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방에 붙여진 마오의 사진이 그것을 대변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족적 세계를 구축해놓고 그 안에 머문다.

 

자족적 세계라고 했지만 그 세계는 불안정한 세계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 소울메이트이기도 한 쌍둥이 남매와 그들 사이에 초대된, 혹은 끼어든 미국인 청년. 이 셋은 안정적인 오이디푸스 삼각형을 구축하지 못한다. 한편 그들이 구축한 자족적 세계란 사실 아버지의 집, 아버지의 서명이 담긴 수표가 없다면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사실 역시 우리는 고려해야 한다. 세 청춘남녀들의 행동은 진정 급진적 의미를 갖지 못한다. 단지 영화를 흉내낸 것, 혁명을 흉내낸 몸짓에 다름 아니다. 

 

도대체 가족주의를 깨지 못하고서야 공산주의란 게, 혁명이란 게 가능한가? 이 질문은 근대적 가족 관념이 부르주아적 의미의 소유 개념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는 점을 적극 고려할 때 유효할 것이다. 일찍이 엥겔스는 이 문제를 회피했다. 그는 공산주의에 대한 널리 퍼진 오해 중 하나가 생산 수단만이 아니라 여성(아내)까지 공유한다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말이다.

 

엥겔스가 회피한 이 문제는 1960년대에 다시 대두된다. 1960년대, 신좌파들과 히피들은 혁명과 사랑을 동일시했다. 그들은 바리케이드 뒤에서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든 채 키스한다. 그러나 두 남자가 한 여성을 공유하는 게, 혹은 그 반대 역시, 가능한가? 키스하는 커플은 질투심 가득한 눈들에 둘러싸여 있었을 것이다. 어제 나와 키스한 이가 오늘은 다른 이와 키스하는 것을 본 이들 역시 질투심에 휩싸였을 것이다. 사랑은 항상 질투를 내포한다. 이렇게만 보더라도, 사랑은 근대적 관념이 확실하다.

 

인간은 '소유'를 통해 인간이 된다. '소유'는 근대 주체가 스스로를 인식하는 가장 기본적 행위이다. '소유'가 없다면 모든 것은 모호해지고 만다. 이름, 재산, 여자, 명성, 각종 브랜드, 문화 상품들, 취향, 지식 등등을 '갖고 있지' 않는다면 인간은 그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망 속에 위치하지 못한다. 주체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관계망에 어떻게든 맞춰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체의 의지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맞춰나가려는 의지가 없더라도, 오히려 그 관계망을 벗어나려 하더라도, 주체는 어느덧 관계망에 포섭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영화 초반의 지포 라이터 장면을 통해 베르톨루치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주체를 규정하는, 인간을 주체로 만드는 이 사회적 관계망을 완전히 거부하려 들 때 인간은 혼란에 빠지고 희미해진다. 단적인 실례로 히피들은 마약을 상용했다. 혁명은 오직 내가 나 자신을 잊을 때만, 몽롱한 상태,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공산주의는 약의 힘을 빌어 달성될 수 있다. 물론 농담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보다 섬세한 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자족적 세계에 날아들어온 하나의 돌. 이것은 세 남녀를 현실 세계로, 혁명의 한 복판으로 이끌어낸다. 그러나 갈등은 남아 있다. 미국인 청년은 프랑스인 남매를 말리고 프랑스인 남매는 그런 미국인을 뿌리친다. 에뒤뜨 피아프의 <나는 후회하지 않아요>가 어지러운 거리 장면 위로 들리면 엔딩 크레딧이 아래에서 위로 거꾸로 올라간다.

 

베르톨루치는 (영화를 통해) 혁명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세대다. 몇 십 년 후 만든 영화 <몽상가들>에서 그는 그러한 믿음이 순진한 것이었음을 인정한다. 혁명을 믿었던 젊은 시절의 행동들은 한때의 '치기' 같은 것이 된다. 그러나 <몽상가들>이 말하는 것이 그게 전부인 것은 아니다. 베르톨루치는 순진한 혁명가들의 젊은 날을 돌아보며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거리 앞에서 누군가는 망설이고 있고 누군가는 뛰어드는 장면에서 멈춘다. 여기서 크레딧이 위로 올라가는 것은 정말이지 의미심장하다. 오늘날 우리는 "혁명이 불가능하다"라는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있다. 현재는 물론이고, 과거에도 그랬으니까. 우리 선배들은 모두 실패했으니까. 그러나 그러한 결론은 당연히 섣부른 것이고 섣부름을 넘어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혁명을 어린 시절의 치기와 동일한 것으로 여길 수는 없다.

 

거리(혁명) 앞에서 혁명에 대한 회의를 보이는 사람과 망설임 없이 무작정 뛰어드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거기에서 멈춤으로써, 그리고 크레딧을 거꾸로 올림으로써 감독은 우리에게 지금(혁명에 치기와 동일하게 여겨지는)이 바로 진지하게 과거를 돌아보아야 할 시점이라고 제안한다. 이러한 제안은 혁명을 자신의 볼거리로만 대하는 데 익숙해진 오늘날 특히 울림이 큰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혁명을 재현한 영화, 혁명가를 다룬 책이 절찬리에 상영되고 베스트셀러가 되는 오늘날, 혁명은 흥미진진한 볼거리에 다름 아니다. 게다가 우리는 영화를 통해 혁명이 가능하지 않음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세대에 속한다. 아니 애초에 그런 가능성 자체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우리에게 영화는 그것이 무슨 소재를 다루고 있든, 하나의 오락거리이며, 잘해봐야 문화자본이다. 물론 몇몇 시네필에게는 숭고한 예술일 수도 있을 것이고 수집가에게는 소중한 수집 대상일 수도 있다. 오늘날 영화의 존재 방식은 이 범주 안에서 구성된다. 오락과 자본, 예술과 취향 사이. 이런 시기에 베르톨루치는 영화와 혁명 간의 관계를 생각해보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낡은 오래된, 시대착오적인 질문이다. 그러나 꼭 필요한 질문이기도 하다. 영화가 우리 삶에 어떤 식으로든 의미 있는 것이라면 이 문제를 회피할 수는 없다. 영화를 통해 혁명이 불가능하다면 정확히 왜 불가능한지라도 우리는 물어야 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구도 렘브란트의 천재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사실상 그에 대한 비판은 그의 천재성이라는 문제를 제쳐 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비판은 주문화에만 의존하여 먹고 사는 화가에게는 불행하게도 치명적인 것이었다. 사람들은 렘브란트가 '자신의 욕구에만 충실한 그림'을 그린다고 비난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기대한 것은 한 점의 집단초상화였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예술 작품을 그렸다. 그는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객들은 렘브란트의 천재성이 아니라 실제와 똑같은 이미지에 대가를 지불했다. 초상화는 모델과 똑같아야 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자신의 내면, 파악하기 힘든 본질, 그리고 변형된 사물을 그리고 있었다. 오히려 렘브란트의 몇몇 제자들이 더 대중의 환영을 받았다.

 

- 파스칼 보나푸, <렘브란트, 빛과 혼의 화가>

 

 

렘브란트의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그에 따른 불행은 그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살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만약 그가 르네상스기의 이탈리아에서 살았더라면 상황은 아주 달랐을 것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야경>(1642)은, 지금이야 물론 '불후의 명작'으로 간주되지만 실은 일정한 보수를 받고 그린 집단 초상화이다. 물론 화가에게 보수가 지급되는 것은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당연한 일이며, <야경>의 그림 값인 1600플로린은 서른 넷의 젊은 화가에게는 어마어마하게 큰 돈 이었지만, 17세기 네덜란드에는 렘브란트 말고도 초상화가가 많았다. 베르메르, 호흐, 얀 스텐, 테르보르흐 등 널리 알려진 네덜란드 장르화(일상 생활을 소재로 한 17세기 네덜란드의 대표적 화풍)의 대가들 역시 대부분 초상화를 그려 생활비를 충당했다. 미켈란젤로가 성 베드로 성당의 천장화를 그리는 것과 렘브란트가 집단 초상화를 그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 할 수 있다. 신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었기에 그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작업에 매진할 수 있었던 시대는 이미 지나버린 것이다.

 

17세기 네덜란드는 정치적, 종교적 분쟁의 중심지였다. 그 시기는 네덜란드가 경제적 번영을 누린 시기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스페인, 영국, 프랑스 등 유럽의 대국과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인 시기이기도 하다. 경제적 번영과 전쟁이라는 양극단의 현실 사이에서 네덜란드인들은 살았다. 그리고 그들은 '일상'을 예찬했다. 경제적 풍요로움과 전쟁(죽음)에 대한 공포 사이에서 그들은 (종교 등을 통해) 현실을 초월하려하기 보다 현실을 수긍하고자 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예술에 반영되어 새로운 주제와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야경>의 중심 인물인) 바닝 코크는 암스테르담 정치계의 거물로 경비 부대를 지휘했다. 그는 볼크트 오부르란든 시장의 딸과 결혼했으며, 대단한 재력가였다. 그는 퓌르메르란트 영지를 사들였으며, 그 뒤에 자크 2세로부터 작위를 받은 뒤 시장이 된다. <야경>은 특별한 역사적 사건과 관련이 있다. 1637년 프랑스의 여왕 마리 드 메디시스가 암스테르담을 방문하자 전 경비대가 동원되어 성대한 환영행사를 한다. 이때 코크는 명성이 자자한 이 경비 부대의 지휘를 맡는다. 그는 이 영예로운 일을 영원히 기리고 싶어 렘브란트에게 자신의 부대가 집결해서 행진명령을 기다리는 순간을 그려달라고 주문한다.

 

네덜란드 군인조합은 초창기에 성직자와 군주들에게 의장대를 공급했으며, 이들의 후원에 입입어 차츰 눈에 띄게 번창해나갔다. 군인조합은 도시의 명사들 가운데서 모집했으며, 공공 치안을 담당했다. 각 조합별로 집회장소와 훈련장이 따로 있었다. 일 년에 한 번씩 사격대회가 열렸다. ... 지휘관과 부관의 지위는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기수는 인물이 가장 훤칠하고 촉망받는 젊은이 가운데서 뽑았다. ... 경비대의 고위직들은 자신의 직분에 대한 추억을 길이 전하려고 흔히 군복 차림의 초상화를 그려 소속 조합에 기증하여 회의실을 장식했다.

 

단체 초상화는 구성에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대개 한 줄이나 두 줄로 나란히 세운 인물들을 무릎 위부터 보여주었고 모든 인물들이 다 들어가게 가로로 긴 캔버스를 사용했고, 반쯤 펴진 깃발의 사선만이 그림이 활기를 불어넣는 유일한 요소였다. 화가가 바뀌어도 인물의 외모와 자세만 달라졌다.

 

렘브란트는 전통에 구애받을 화가는 아니었다. ... 전통적 단체초상화에서 나타나는 사진을 찍는 듯한 자세가 이 작품에서는 동작으로 바뀐다. ... <야경>은 연출 장면을 담고 있는, 단체초상화라기보다 역사화에 가까운 그림이다. ...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의 중앙 전시실에는 <야경> 이 한 작품만을 걸어두고 오직 여기에만 불빛을 비추려고 미술관 전체의 조명을 어둡게 해두었다. ... <야경>은 마치 공연예술처럼 상연된다. ... 이처럼 소란스럽고 현란한 작품은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 장-루이, 페리에, <시선의 모험>

 

 

페리에는 <야경>을 당대의 여타 집단초상화와 비교하면서 그 위대함을 입증한다. 구성과 인물의 동작 묘사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요소가 <야경>의 위대함을 보증할 수 있을까? "소란스럽고 현란한 작품"이란 평가는, "생동감"이라는 찬사를 염두에 두고 쓴 설명이라고 여겨지지만, 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찬사와는 거리가 먼 설명이지 않은가?  

 

아니나다를까, 19세기 프랑스의 화가이자 영향력 있는 미술 비평가인 외젠 프로망탱은 <옛 거장들>이란 책에서 <야경>의 구성과 인물 묘사 등에 대해 혹평을 하고 있다.

 

 

이 그림은 놀랍고도 당혹스럽다. 이 그림은 우리에게 강요할 뿐, 우리를 압도하는 매력이라곤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첫눈에 이 그림은 비위를 거스른다. 우리 시각은 분명한 형태와 맑은 사유, 그리고 분명하게 규정된 대상을 선호한다. 그러나 이 그림은 익숙한 논리와 정직함을 공격한다. 이 그림의 무엇인가가 이성과 마찬가지로 상상은 반쪽짜리이고, 우리의 마음에 가장 쉽게 설득되는 것은 오랜 습관에 종속된 것이며 논증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것은 반드시 그림의 오류라고는 할 수 없는 여러 원인과 관련된다. 여기에는 혐오스러운 빛이 있다.

 

번역 상의 오류가 들어있는 것일까? 무슨 의미인지 파악되지 않는다. 페리에의 묘사를 참조한다면, 프로망탱은 <야경>의 소란함, 현란함, 산만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즉 렘브란트의 관습에 반하는 구성(반쪽짜리 상상)과 원근법, 그리고 '빛'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는 논조다. 비판은 계속된다. 

 

<야경>은 수수께끼 같은 작품이다. 이 점은 이 그림에 커다란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듯이 이 작품의 위대함은 구도가 아니다. 작품의 주제를 직접 선정했던 것도 아니었고, 작품 착수 방식은 첫 소묘에서부터 그의 능동적 행동이나 명료성을 한 단계 고양시킬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지 않았다. 그 결과, 장면은 불확실하고 행동은 비현실적이며, 관심이 초점은 매우 분산되어 있다. 첫 소묘에서부터 결함이 있었던 탓에 그림이 이해되고 배치되고 효과를 산출하는 방법에 처음부터 우유부단함이 깃들어 있었다. 결국 전체적인 구도에는 진실된 면이나 회화적인 독창성이 없는 셈이다. ... 인물들은 비례에 맞지 않는다. ... 초상화의 관점에서 인물들 하나하나를 봐도 성공적이라 말하기는 힘들다.

 

얼굴은 인간의 혈색을 표현했다기보다 겉치레로 칠했다는 인상을 준다. 얼굴들은 붉은색이나 포두줏빛을 띠거나 아니면 창백하다. 하지만 이 창백함마저도 벨라스케스가 그의 인물에 부여한 실제적인 창백함이 아니다. 더욱이 프란스 할스가 인물의 기질을 표현하기 위해 인물 하나하나에 피색, 노란색, 회색, 보라색을 미묘하게 배합한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 ... 색채는 정확하지도 표현적이지도 않다.

 

프로망탱은 <야경>의 구성, 인물 묘사에 이어 색채까지도 비판한다. 그러나 색채에 관한 그의 논의는 면밀히 읽을 필요가 있다. 어느 순간 프로망탱은 어조를 바꾸어 <야경>의 부정할 수 없는 가치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빛'이다.

 

진실은 이렇다. 그림의 중앙에 위치한 빛을 표현해야만 하는 이 인물에 렘브란트는 빛을 입힌 것이다. 명도 처리는 매우 능숙하게, 색채의 처리는 매우 부주의하게 말이다. 여기에서 컬러리스트로서 렘브란트가 드러난다. 추상적인 빛은 없다. 빛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빛은 반사되거나 흡수되는 자신의 본성에 따라 다양하게 비춰지고 발산되는 색채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매우 어두운 색조도 밝은 빛을 발할 수 있고, 또한 매우 밝은 색조도 그렇지 못할 수가 있다. 컬러리스트에게 빛의 표현은 오로지 그것을 어떤 색으로 묘사하느냐에 달려있으며, 이것은 빛과 색을 하나로 만드는 명암의 농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나 <야경>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명암의 농도는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것과 같이 빛 속으로 사라졌다. 그림자는 검고 빛은 희다. 모든 것은 밝거나 어둡거나 둘 중 하나이다.

 

드디어 이 그림의 부정할 수 없는 가치를 논할 순서이다. ... 나는 렘브란트가 사물을 바라보는 고유한 방법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키아로스쿠로라 불리는 기법이다. 어느 누구도 이 기법을 그렇게 지속적이고 독창적으로 사용하지 못했다. ... 가장 가리워진 동시에 가장 생략된, 그리고 가장 암시적인 이 기법... 이것은 잘 포착되지 않는 사물에 매력을 부여하고 기묘함을 자극하며, 지적인 사유에 우아함을 더해준다. 이것은 느낌과 감성, 불확실한 것, 규정하기 힘든 것, 무한한 것, 그리고 꿈과 이상과 함께하는 것이다.

 

실제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보고, 느끼고, 묘사하는 이 기법의 결과물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세계는 언제나 모습을 달리하기 때문에 선은 사그라지거나 없어져 버리고 색은 증발해버린다. 더 이상 엄격한 윤곽선에 가두어져 있지 않은 모델링(대상의 입체감을 표현하는 일)에서 붓질은 덜 명료해지고 표면에는 물결이 일어난다. 그리고 숙달되고 민감한 손에 그것은 가장 사실적이고 확신에 가득 찬 모습을 지니게 된다. 온갖 기교를 지닌 그 손은 이중의 생명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부여한다. 그 하나는 실제에서 부여받은 샘명이고, 다른 하나는 감정의 전달에 근원을 둔 생명이다. 여기에는 캔버스에 깊이와 거리를 부여하고, 가깝게 하거나, 위장하거나, 분명히 묘사하거나, 진실을 상상 속에 묻어버리는 여러 방법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키아로스쿠로라 불리는 예술이다.

 

그가 빛에만 중요성을 부여했던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을까? 아니었을까? 또는 그림의 주제는 그것을 요구하고 허용했을까, 아니면 거부했을까? 만약 전자라면 작품은 작품이 지닌 정신의 결과이다. 이 경우 작품은 숭배되어야 한다. 후자라면 작품은 불확실한 것이 된다. 작품은 언제나 논란의 대상이 될 것이고 잘못 이해되어질 것이다.

 

사물의 빛과 어둠을 통해서만 주제를 묘사했던 렘브란트의 경향에 비추어 볼 때, <야경>에... 더 이상의 비밀은 존재하지 않는다.

 

- 외젠 프로망탱, <옛 거장들>

 

 

프로망탱은 먼저 화가로서 <야경>의 기교적 측면을 평가한다. 이 측면에서의 평가는 혹평에 가까운 것이 되고 말았지만, 그는 <야경>의 위대함을 '빛'이라는 측면에서 발견해낸다. 렘브란트는 집단초상화를 그리면서 관습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빛', 정확히 말하면 어둠을 통해 빛을 표현하는 키아로스쿠로 기법이었다. 돈을 받고 초상화를 그리면서 고객의 요구에 따르지 않고 "사물을 고유한 방식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화폭에 담아내고자하는 회화적 실험을 했던 것이다.

 

초상화는 인물을 사실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다. 초상화는 인물의 본성(미덕)을 표현해야 한다. 용기, 절제, 고상함, 순결 따위의 미덕을 말이다. 그러므로 항상 초상화 속에서 인물들은 경직된 자세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렘브란트의 <야경>은 초상화가 아니다. 그렇다면, 역사화인가? 그것도 단정할 수는 없다. 아니면, 프로망탱이 말하듯,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느낌과 생각을 표현한" 예술인가? 역시 단정할 수 없다. '예술적 천재'를 상정하는 낭만주의 시기를 거친 프로망탱의 사후적 의미 부여라는 느낌이 강하다. 

 

어쨌건, 지금까지 <야경>에 대한 논의를 살펴봄으로써 렘브란트의 고민, 문제의식은 그 윤곽이나마 약간 드러낸 셈이다. 빛과 어둠에 대한 집착은 세계를 바라보는 렘브란트의 독창적인 시선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양미술사>에서 곰브리치의 분류를 따르자면, 렘브란트는 '아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을 그리는 화가다. 그는 대상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것을 화폭에 담고자 했다. 변화를, 변화무쌍한 일상 생활의 한 순간을 정지한 형태로 그려내는 것, 그 순간 형태를 규정/제한하는 윤곽선은 사라지고 대상은 어둠 속에서 하나의 빛이 된다. 종교화나 역사화가 아닌 초상화에서, 즉 세속에서 초월의 계기가 생성된다. 일상은 환상과 결부된다. 물론 이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렘브란트는 빛과 어둠이라는 양 극단에의 모색을 통해 그것을 표현해낸다.


3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일상 예찬- 17세기 네덜란드 회화 다시 보기
츠베탕 토도로프 지음, 이은진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3년 10월
22,000원 → 19,8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00원(5% 적립)
2009년 02월 03일에 저장
절판
시선의 모험
장-루이 페리에 지음, 염명순 옮김 / 한길아트 / 2005년 1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5월 21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9년 02월 03일에 저장

렘브란트 : 빛과 혼의 화가
파스칼 보나푸 지음 / 시공사 / 1996년 5월
7,000원 → 6,300원(10%할인) / 마일리지 350원(5% 적립)
2009년 02월 03일에 저장
품절



3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36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꿈의 세계와 파국- 대중 유토피아의 소멸
수잔 벅 모스 지음, 윤일성.김주영 옮김 / 경성대학교출판부 / 2008년 2월
30,000원 → 30,000원(0%할인) / 마일리지 1,5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5월 22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9년 02월 01일에 저장

The Origin of German Tragic Drama (Paperback)
Benjamin, Walter / Verso Books / 2009년 6월
41,060원 → 33,660원(18%할인) / 마일리지 1,69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09년 02월 01일에 저장

Walter Benjamin : Or, Towards a Revolutionary Criticism (Paperback)
Eagleton, Terry / Verso Books / 2009년 6월
34,570원 → 28,340원(18%할인) / 마일리지 1,42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5월 31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9년 02월 01일에 저장

A Companion to the Works of Walter Benjamin (Hardcover)
Rolf J. Goebel / Camden House / 2009년 10월
215,620원 → 194,050원(10%할인) / 마일리지 5,830원(3% 적립)
*지금 주문하면 "5월 24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9년 02월 01일에 저장



36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