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 복수 3부작 박스세트 (복수는 나의 것 + 친절한 금자씨 + 올드보이, 7disc)
박찬욱 감독, 최민식 외 출연 / 엔터원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본격 이영애 결혼 기념 재탕 리뷰 
 

  이런 영화를 볼 땐, 고개는 약간 쳐들고, 눈은 상대를 얕보듯 살짝 시선을 내리깔고, 다리는 외로 꼬고, 가볍게 의자 팔걸이에 걸쳐진 손은 이따금씩 생각났다는 듯 하늘하늘 흔들어 주는, 그런 자세로 봐야 하지 않을까, 하고 영화가 시작하기 전, 잠시 생각했습니다. 아무래도 오프닝 시퀀스가 무지막지하게 아아띠스띡artistic하면서도 빤따아스띡fantastic하게 시작해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이제 와선 그런 생각도 드네요.




  박찬욱의 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영화는 삘이 좋았습니다. 평론가 출신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제이에스에이>에서 ‘부치지 않은 편지’가 흐를 때, 완전히, 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많이, 매료되었습니다. 그가 찍은 또 다른 영화 제목이 <달은 해가 꾸는 꿈>이라는 사실을 알고 더욱 더 매료되었습니다. 달은, 해가 꾸는 꿈, 이라, 오호라, 과연, 그렇군. 나는 무릎을 탁 치며, 자리에서 분연히 일어나, 제자리에서 한바퀴 돌았습니다. 그 정도 예의는 갖춰야 할 것 같았습니다. 이 사람, 우리 시대의 거장이 될 것 같다. 그런 예감이 백열전구처럼 머리를 휘익 스쳤습니다. 요즘은 뭐 삼파장 램프가 대세입니다만.




  <복수는 나의 것>을 보고 나는 생각하기를, 우리 찬욱씨가(이제부터 찬욱씨라고 부르는 이유는, <친절한 금자씨>에서 이금자가 제과점 청년에게 그냥 ‘금자씨’라고 부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일지도 모릅니다) 한국 영화에서 나타낼 수 있는 하나의 극단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하드보일드한 영상같으니라고... 그이 하드보일드한 영상들은 곧 쿨한 것과 일맥상통한 어떤 인상들을 나에게 심어주었고, 아아, 게다가 이 영화, 흥행에 실패하고 만 것입니다. 흥행에 실패한 어떤 영화들은 쉽사리 컬트(숭배의 대상)의 반열에 오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찬욱씨의 최고의 영화로 꼽기로 해버렸습니다. 이 영화 왜 이렇게 잔인해, 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즐겨 한 마디 했습니다. <제이에스에이>보다 백 배 낫지 않냐? 나의 허영심은 이렇게 채워졌습니다.




  <올드 보이>는 지난 일 년간 하나의 현상, 이었습니다. 신드롬에 가까운 열풍이 이 영화를 둘러싸고 불었습니다. 흰색과 검은색, 그리고 보라색 위주로 물든(물론 핏빛은 제외하구요) 이 차가운 색감의 영화를 둘러싸고 뜨거운 바람이 불었다는 것은, 어쩌면 찬욱씨의 운이 억세게 좋았던 것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누구와는 다르게 그의 사주는 엄청나게 좋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사실, 솔직히, 그가 부럽습니다. 나는 찬욱씨가 부럽고, 부러운 나머지 약간 질투마저 납니다. 이번에 <금자씨>에서도 사실, 감탄을 많이 했습니다. 내가 언젠가 써먹을려고 생각해두었던 그런 설정들을 자유자재로, 그만의 스타일 속여 녹여, 구사하고 있는 그가 부러웠습니다. 이와이 순지의 영화 <스왈로우 테일 버터플라이>를 보면, 일본 경찰이 일본어를 못하는 사람을 통역을 통해 심문하고, 고문을 가하는 장면이 나오는 데요. 그런 설정을 언젠가 써먹어 봐야 겠다, 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이런, 이게 뭡니까. 우리 찬욱씨가...... 선수를 쳐 버리고 만 겁니다. 멋집니다.




  그의 영화를 두고, 의견이 분분한가 봅니다. 이건 사기다. 아니다. 이건 예술이다. 사기건 예술이건 간에, 아니, 그냥 사기라고 칩시다. 그렇다고 해도 이정도로만 치면, 충분히 용서할만하지 않을까요?




  사실, 나는 그의 스타일이 마음에 듭니다. 그는 확연히 스타일 위주입니다. 스타일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죠. 그게 무슨 스타일이냐구요? 아, 이거 참, 스타일 구기네, 이렇게 말할 때의 그 스타일하고는 약간 다른 그런 것이죠. 어떤 영화가 생각이 나네요. 부산의 깡패들이 나오는 조폭 영화의 대표작 이라 할 수 있는 영화인데, 거기서 주인공 깡패가 어렸을 때 친구였던 다른 조직의 깡패를 죽인 혐의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뭔가 수를 쓰면 빠져나갈 수도 있는데도 혐의를 순순히 인정하고 말죠. 왜 그랬느냐는 또 다른 친구의 질문에 그는 대답합니다. ‘쪽팔려서.’




  아아, 쪽팔려서. 명언입니다. 물론 위에 언급된 영화와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의 스타일입니다만, 어느덧 우리는 스타일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겁니다. 폼생폼사의 위대한 시기가 도래했습니다. 찬욱씨는 칸에서 상을 탈 수밖에 없는 그런 사주를 타고난 겁니다. 그는 위대한 시기에 걸맞는 사주를 타고나 이제 세계 속의 위대한 한국인 감독이 될 겁니다. 사실, <올드보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스타일의 예고편에 불과한 거죠. 그 이전으로 소급해 들어가 <복수는 나의 것>을 보죠. 거기에서 ‘스타일’은 아직 부차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증거로 우리는 송강호와 신하균이 연기하는 주인공들의 감정선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비록 신하균이 ‘녹색 머리의 벙어리’로 나온다 해도 말이죠. 신하균이 신장을 도둑맞고 텅 빈 폐건물에서 배가 갈린 채 홀로 뒹굴며 신음할 때, 배두나가 엽기적인 전기 고문을 받고 잔인하게 살해당할 때도, 우리는 최소한 얼굴을 찌푸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온갖 만화적(사실 만화에서 출발했으니 당연하겠지만)이고 엽기적이고 잔인한 설정들로 치장되어있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반윤리적이고 반도덕적인 반전과 주제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사악한 주제를 담고 있는 <올드 보이>도 사실 스타일적인 측면에서는 최민식의 ‘레게 파마’를 오버하는 부분은 별로 없습니다. 굳이 있다면 유지태가 쓸 데 없이 메뚜기 자세로 요가나 하는 정도? 허리가 무지 아팠다던데....... 말하자면 찬욱씨는 이 때만해도 선을 그을 줄 알았다는 거죠. 요기, 요기, 이 ‘레게 파마’ 이것까지가 선이야. 더 이상 넘어가지 말자구. 아아, 그러나, 어떡합니까, ‘레게 파마’ 그 자체로 센세이션인 것을. 아티스틱하고 판타스틱한 것을. 사람들은 열광하고 말았습니다. <올드 보이>에서 ‘진짜 주제’가 뭔지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스타일, 스타일이 중요합니다. 일찍이 왕가위가 보여준 것을, 타란티노가 보여준 것을 우리의 찬욱씨는 마치 애국이라도 하듯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 선보임으로써 우리 대중들의 환호와 외국의 유수한 평론가들의 갈채를 한번에 얻어버린 겁니다. 그의 사주가 궁금할 따름입니다. 그의 영화는 어느 덧 컬트의 수준을 가볍게 뛰어넘어 진정한 ‘숭배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금자씨>에서 찬욱씨는 또 다른 도약을 합니다. 그는 이제 아주 가볍게 우리가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나풀나풀 날아다닙니다. 그의 사주가 궁금할뿐더러, 이제 그의 머릿속을 갈라서 헤집어 보고 싶은 욕망이 뭉클뭉클 솟아오를 지경입니다. 영화에서, 이영애가 ‘개새’ 비슷한 어떤 것을 끌고 가서 죽입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진짜로 빛이 나기도 합니다. 정말이지 스타일 죽이는 어떤 총을 만들어 준 사내는 팔에 정말이지 멋진 문신을 하고 있습니다. 보다 직접적으로, 이영애의 입을 빌려, 감독은 말합니다. ‘무조건 아름다워야 해.’ 그래서 한겨울에 얇디얇은 땡땡이 옷을 입고 커다란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 설정도 해봅니다. 허무함을 바탕색으로 하고 있는 알록달록 퇴폐미가 하늘을 찌릅니다. 지하 하숙방은 어울리지 않는 세련된 얼룩무늬 벽지가 발라져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올드 보이>의 감금방도, 보라색 선물상자도, 그러했습니다만. 하지만 정말 마음에 드는 것은 20세 유괴범 금자를 취조하는 공간입니다. 그 공간은 지하 하숙방과 달리 엄청나게 사실적인 그런 공간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찬욱씨는 균형 감각도 뛰어난 것 같습니다. 자신의 넘치는 재능을 제어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인 겁니다. 살인이 마치 반상회처럼, 하나의 파티처럼 벌어지는 폐교의 교실이라는 공간도 그렇습니다. 아아, 생각하면 할수록, 입술사이로 감탄사만이 비어져 나옵니다. 찬욱씨의 장기랄 수 있는 스틸 사진을 연상케 하는 정지된 화면들 역시 여전히 놀랍습니다. 매우 일본적인 화면들이긴 하지만.




  두서 없이 늘어놓다 보니, 하고 싶은 말을 하나 빼 먹었네요. 요는, <금자씨>는 이야기적인 측면에서 찬욱씨의 이전 두 영화보다 더 설득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타일적인 측면에서는 훨씬 더 무책임하다는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혹시, 행간에서 읽었습니까? 하하...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몇십 년을 계획한, 그리고 복수가 성공하자 죽어버린 <올드 보이>의 유지태는 사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캐릭터입니다. 그래서 그는 마치 변명처럼 말해야 합니다. 모래알이든, 큰 돌이든 물에 가라앉는 것은 같다나요. ‘비범한 미친놈’이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아가는’ 데 급급한 ‘보통사람’에게 복수를 하는 어이없는 형국입니다. 그래서 15년간의 감금기간이 필요했던 겁니다. 복수란 대개 자신과 급이 같은 인물에 대해서 행할 수 있는 것이죠. 상대방이 모르는 복수는 복수가 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15년간 감금을 통해 ‘보통사람’은 ‘비범한’ 프로타고니스트로 업그레이드 되어야만 하는 겁니다. 걸출한 안타고니스트에 어울리는. 반면에, <금자씨>의 복수의 대상은 커다란 사회악이며 미친 정신병자입니다. 뭔가 따로 설정을 하지 않아도 복수를 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복수의 과정도 한 절대적인 개인에 의해 집전되지 않습니다. 금자씨는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지만, 그것은 주변 사람들을 적절히 활용할 줄 아는 데서 비롯되는, 그럼으로써 더욱 돋보이는 그런 카리스마입니다. 영화의 전체 흐름을 관통하는 ‘금자씨의 복수’라는 하나의 중심적인 결을 타고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엮어집니다. 복수의 준비과정이 그렇게 이루어지고, 또한 복수의 실행과정이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영화의 구조가, 그리고 복수의 과정이, 마치 하나의 거대한 나무와도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땅 속으로 넓게 퍼진 뿌리, 그리고 튼실한 몸통, 그리고 몸통 위로 아름답게 펼쳐진 가지와 이파리, 아아, 그것들이 알맞은 세기의 바람에 흩날린다고 생각해 보세요. 나는 탄성을 내지릅니다. 비닐에 고인 저 피, 아~ 아름다워라.




  문제는, ‘개새’를 비롯한, 스타일입니다. 사실, ‘개새’가 아닌 ‘개사람’인데, 그런 직유적인 이미지는 아무래도 좀 거친 느낌을 주죠. 구성의 세련됨에 비해 좀 거칠다 싶은 장면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습니다. ‘식탁 섹스’ 장면도 좀 거칠죠. 이름이 삐죽삐죽 삐져나오는 설정은 좋았습니다만. 웃음이 삐죽삐죽 비어져 나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왜 웃음이 나오느냐, 이 말이죠. 대다수의 관객은 또 함정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쓴웃음이 비어져 나오는데 쓴웃음인 대로 그냥 웃고 넘겨버리고 맙니다. 원래, 부르기가 무지하게 어색한 ‘생일 축가’를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서 어색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부르는 장면을 통해 찬욱씨는 결정적으로 입장 표명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보세요. 여러분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란 게 이래요. 이렇게도 뻘쭘하고 어색하게 살고 있는 거예요. 자, 내가 약간의 키치적인 수법들을 동원해 그걸 조금 비틀어 봤어요. 어때요, 충격적이라구요? 엽기적이라구요? 역겹다구요? 동의할 수 없다구요? 아주 약간 비틀어봤을 뿐인데요? 여러분이 평소에 생일 축가를 어떤 식으로 부르는 지 생각해 보세요. 어느 패밀리 레스토랑을 가면, 직원들이 우습기 짝이 없는 복장을 하고 불러준다는 그 생일 축가를 생각해 보세요. 어색해진 분위기를 감당 못하고 참석자 모두는 얼굴이 빨개지고 말죠. 어라, 어색하네? 왜 이래? 아냐, 이래선 안 돼. 급기야,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한바탕 어색한 웃음이 자리를 휩쓸고, 잠시 ‘천사가 지나가는 바람에 고요했던’ 자리엔 또 다시 명랑함과 즐거움이 깃들죠. 어색함은 어느새 잊혀지고 맙니다. 그것은 본질적인 게 아니니까요. 우리가 생일 파티 자리에 제격이라고 여겼던 게 아니니까요. 마찬가지로 우리는 <금자씨>를 보고 웃습니다. 웃음 한 구석에 불편함이 깃들어있습니다만 애써 무시합니다. 찬욱씨는 역시 멋져. 이젠 우리에게 웃음까지 선사하네. 이제 또 무슨 영화제에서 상을 탈려나? 그의 이름이 포털 싸이트의 검색어 순위에 오르고, 어느덧 정보의 바다는 박씨 천하가 됩니다. 박주영, 박지성, 박세리, 박찬호... 사실, <복수는 나의 것>이 나에게 훌륭했던 이유는, 영화를 보며 얼굴을 ‘마음껏’ 일그러뜨릴 수 있어서였습니다. <금자씨>에서는 미안하지만, 그게 안 됩니다. 몇몇 장면에서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어이가 없어서요. 그렇지만, 미안할 건 없겠죠? <금자씨>는 흥행가도를 질주하고 있고, 당분간 찬욱씨의 좋은 운도 계속될 것처럼 보이니까요.




  끝으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건 찬욱씨에 대한 질투심이 어려 있는 글입니다. 찬욱씨가 영화 첫 머리에서 금자씨의 입을 빌려 했던 충고를 받아들여, 이제 쓸 데 없는 질투는 그만두고 ‘나나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한 편, ‘금자씨’의 눈화장은 너무 심한 것이 아니었나, ‘금자야, 너 눈 화장이 그게 뭐니~’라는 최민식의 느끼한 한마디는 너무나도 시의 적절한 멘트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드는 것입니다.




  ‘찬욱씨, 거 스타일이 그게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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