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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일족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5
모리 오가이 지음, 권태민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국내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모리 오가이(1862-1922)는 나쓰메 소세키(1867-1916)와 더불어 ‘일본 근대문학’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굵직한' 작가다. 그런데 ‘근대문학’에서 ‘근대’라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 <아베 일족>과 같은 작품을 읽다보면 자연히 의문이 생긴다. 소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예스러운 표현과 구성이 그렇거니와 이야기 자체가 ‘옛날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딱히 주인공이라 부를만한 인물이 없고 내면 묘사가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는 점은 현대 독자의 감정이입을 방해한다. 이건 근대소설이라기보다 '역사 소품'에 더 가까운 작품이 아닌가?
<아베 일족>은 폐쇄적이고 자기충족적 세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베 일족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지위와 녹봉, 그리고 명예율에 따라 질서가 견고하게 자리 잡은 세계 속에 존재한다. 이 세계는 외부를 상상할 수 없는 세계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넘쳐나는 인력과 에너지를 발산할 외부-바깥이 없으므로, (잉여)인력은 (잉여인력 스스로의 손으로) 제거되며, 에너지는 내부를, 내부 구성원 서로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한다. 자살이라는 죽음의 형식은 명예(체면)라는 가치로 수렴되고 숭고함을 얻는다. 그러나 모든 ‘죽음’이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다. 언제, 어떻게 죽느냐 그 절차가 중요하다.
주군이 죽으면 따라죽는 ‘순사’라는 죽음의 형식에는 현실적이고 사회학적인 맥락이 존재한다. 순사는 구세력와 신세력 간의 권력다툼이라는 사회적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는 역할을 하며, 노인을 부양하는 데 소요되는 사회적 비용을 없애는 역할을 한다. 또한 집안의 자손에게 지위와 녹봉이 고스란히 상속된다는 점에서 보면, 순사는 상속 제도이자 일종의 ‘생명보험’이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한 폐쇄적인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에너지가 통제된다.
그러나 아무리 폐쇄적인 사회라 할지라도 틈은 생기게 마련이다. 이 틈을 우리는 ‘개인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모리 오가이는 <아베 일족>에서 ‘개인성’이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서술한다. 일견, 위계질서가 확고하고 그에 따라 각자가 있어야할 자리 및 각자가 행해야할 행동이 명확히 정해진 사회에서 ‘개인성’은 존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순사’라는 건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적 억압이자 폭력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다분하지만 <아베 일족>에 등장하는 인물 중 누구도 ‘순사’ 자체의 대의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적 규범을 철저히 내면화하고 있으며, 이는 다시 사회 질서를 굳건히 하는 데 기여한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틈은 발생한다.
틈이 발생할 여지는 ‘(할복)자살’이라는 죽음의 방식과 거기에 뒤따르는 가치인 ‘명예(체면)’에 내재해 있다. 이로부터 개인성이 싹튼다. 왜냐면 명예는 사회적인 가치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가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일족의 수장 아베 야이치에몬 미치노부는 일단 사회적으로(사람들이 인정하는) 명예로운 죽음을 맞을 수 없게 되자, 개인적 차원에서의 명예를 추구한다. 그의 아들 곤베에 역시 사회적 차원에서 체면이 손상되었다고 느끼자, 개인적 차원에서의 명예회복을 노리고 상투를 잘라 선대 주군의 위패 앞에 바치는 돌출 행동을 한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행동은 사회에 맞서 자기 자신을—개인성을—드러내는 행위가 된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대목은 이 모든 일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는 주군 다다토시의 ‘심정 묘사’다.
… 다다토시의 마음속에는 후계자인 아들 미쓰히사를 위해서 그들이 살아남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절실했다. 또 이런 사람들을 자신을 따라 죽게 하는 게 얼마나 잔혹한 일인지를 생각했다. 그러나 몸이 찢기는 듯한 아픔을 느끼면서도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허락한다”는 말을 한 것은, 달리 도리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22)
여기서 주군 다다토시는 ‘순사’라는 개념을 개인들 각각의 죽음으로 나누어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각각의 죽음에 대해 “몸이 찢기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그 자신, 죽음을 앞둔 상태이기도 하다). 순사는 일종의 사회 제도지만 그것이 구축되는 데 일조한 건 수많은 개인의 죽음들이다. 이렇게 보면 죽음 역시 사회적인 측면과 개인적인 측면을 지닌다. 물론 죽음이란 결국에는 당사자 개인이 오롯이 감당해야 하고 겪어야하는 사태겠지만, 누군가의 죽음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추모비를 세운다. 또한 (용산, 쌍용차의 경우에서 보듯) 죽음을 둘러싸고 상징 투쟁이 벌어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다른 한편 주목할 점은 모든 죽음 중에서도 자살에는 개인의 선택과 의지가 크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할복'이라는 자살 형식은 흥미로운 데가 있다. 할복은 겉보기에는 개인의 의지를 강조한다. 그러나 <아베 일족>에서 묘사되는 할복의 구체적 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스로 배를 가르는 것은 일종의 퍼포먼스다. 결정적으로 숨통을 끊는 것은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동시에 확실히 죽이기 위해—뒤에서 할복자의 목을 베는, 뒷마무리담당 무사인 것이다. 요컨대 할복이란 개인의 의지와 사회적 요구가 이상적으로 합치된 죽음의 형식이라 하겠다.
그런데 아베 야이치에몬의 할복은 조금 다르다. 거기서는 개인의 의지가 보다 확실히 드러난다. 왜냐하면 그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으며, 그 스스로 배를 가르고 목을 베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누가 봐도 순사 자격이 있는 인물이었음에도, 순사를 허락받지 못했다. 왜 그만 다른 대우를 받은 걸까. 이에 대해 모리 오가이는 다음과 같이 암시를 남기고 있다.
처음 다다토시는 그저 그에게 반대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뿐이었는데, 나중에 그가 스스로의 의지로 일한다는 것을 알고는 미워졌다. 그러나 현명한 다다토시는 야이치에몬을 미워하면서도, 그가 왜 그렇게 행동하게 된 건지 생각해보고, 결국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반대하는 버릇을 고쳐보려고 했지만 달이 흐르고 해가 지남에 따라 점차 고치기 어려워졌다. (30-31)
다다토시는 아베 야이치에몬을 미워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스스로의 의지로” 일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는 주어진 일만 수행하는 사회적 요구에 충실히 복무하는 개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주군에게 말씀드리고 할 일을 말씀드리지 않고”하는, “그러나 할 일은 정확하게 해서 비난할 여지가 없는”(30) 예외적 개인이었던 것이다.
'근대문학'의 한 특징이 ‘개인성’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베 일족>은, 모리 오가이가 옛 역사 이야기에서 개인성이 발현된 사례를 발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아베 일족>은 개인성이 드러나는 순간을 극히 절제된 표현으로 묘사한다. 독자는 작가의 암시를 쉽게 눈치챌 수 없다. 더군다나 등장인물 누구도 (예외적 개인이긴 할지언정) 영웅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대개 역사 속 인물들이 소설에 등장할 때면 초인적인 영웅이거나 온갖 미덕을 다 갖춘 성인처럼 묘사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모리 오가이의 독보적인 성취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