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로주점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3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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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특히 19세기 리얼리즘 소설)들을 읽다보면, 문득 짜증이 치밀 때가 있다. 주인공이 위기에 처했는데 우연의 개입으로 그것을 극복하는 대목이 그렇다. 예를 들자면 사고무친에 굶어죽게 된 올리버 트위스트를 착한 신사가 나타나 돕는다든가 하는 설정 같은 것(디킨스 씨 죄송합니다).

 

현실에서는 결코 그런 우연(행운)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짜증이 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 비현실적 우연, 죽이는 타이밍, 사람 냄새 안 나는 천사 캐릭터들 덕분에 독자는 소설을 계속해서 흥미진진하게 읽어 나갈 수 있기도 하다. 선한/순수한/근면성실한 주인공이 맥없이 죽어버린다면, 큰일이다. 세상이 그렇게 미쳐 돌아간다면 누가 삶의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

소설의 초반부에서 독자는 주인공이 어떤 미덕을 지녔는지, 닥치는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 미덕을 어떻게 꿋꿋이 지켜내는지를 파악한다. 그리고 소설의 후반부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그 미덕이 나름의 정당한 대가를 받게 될지를 자못 흥미진진하게 지켜본다. ‘정당한 대가라는 당위가 앞서다 보니, 어느 정도의 우연은 용서가 된다.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은 이러한 소설 구성의 암묵적 공식을 무참히 깨는 소설이다. 인물들이 지니고 있는 미덕은, 환경적 요인과 우연한 사고 앞에서 순식간에(또는 서서히) 빛이 바랜다. 충격적인 점은 주인공이 내적 깨달음을 얻거나 자기반성을 하기도 하고, 숱한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서도 지키고자 하는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기도 하지만(심지어 천사 캐릭터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그것이 예정된 몰락과 죽음을 막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마치 밀물 때의 파도가 잠시 뒤로 물러서는 듯하지만 서서히 해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켜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몰락은 필연적이다.

 

에밀 졸라는 <목로주점>에서 삶의 희망을 모두 잃어버린,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보여준다. 그런 세상의 흐름에 속절없이 휩쓸려 오직 살아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 된삶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도 의지도 수단도 신념도 없기에 그저 죽음을 조금씩 연기하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목적이 된파리 노동자들의 삶을 보여준다. 오죽하면 빅토르 위고마저 졸라가 노동자들의 비참하고 비천한 삶의 흉측한 상처를 제멋대로 드러내 보여준다며 유감을 표명했을까.

 

타락과 몰락의 과정을, 그 비참함을 묘사함에 있어 <목로주점>은 갈 데까지 간다. 때문에, 문득 짜증이 치민다거나 하진 않는다. 디킨스 류의 소설에 지친 독자들에겐 오아시스 같은 소설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딱히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디킨스 류의 소설이 그리워진 달까. 짜증을 냈던 스스로의 오만을 돌이켜보게 된달까.

 

희망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닐 것이다. 아무리 우연의 개입으로 인한 것이라 할지라도, 비현실적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희망은 필요하다. 하지만 우연과 환상에 의한 희망은 거짓 희망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거짓 희망이 만연한 사회일까요, 아직은 진짜 희망이 존재하는 사회일까.

 

잘 팔리는 소설이나 시청률 높은 드라마(또는 예능 프로)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을 읽거나 드라마를 보다가 문득 짜증이 치미는 경우가 잦았다면 그 역시 어떤 지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연과 환상의 도움이 없이는 희망을 구성할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음을 징후적으로 드러내는 지표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오늘날 우리 대다수의 실제 삶이 <목로주점>의 주인공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운 생각이 든다.

 

치미는 짜증을(혹은 분노를) 감내해가면서, 말도 안 되는 우연과 개드립들을 용서해가면서 책과 드라마에, 예능 프로에 하염없이빠져든 경험이 있는가? (고백하자면 나는 많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가까스로살아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인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상에서 종종 쓰이는 표현 중에 바닥을 친다는 표현이 있다. 육체적인 것이든 경제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매우 힘든 일을 겪고 나면 바닥을 치고다시 올라간다는 위로 내지 자기 위안의 의미가 내포된 표현이다. 하지만 <목로주점>은 그러한 위로가 기만임을, 바닥 밑에 또 다른 바닥이, 끝 모를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선한 마음으로도 굳센 의지로도 근면 성실로도 이 바닥/심연으로의 추락을 막을 수 없다.

 

기억할 점은 에밀 졸라의 이야기는 <목로주점>에서 완결되는 게 아니라 스무 권에 달하는 루공-마카르 총서라는 거대한 별자리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때문에 <목로주점>에 이어 (<목로주점>의 주인공 제르베즈 마카르의 자손들이 등장하는) <나나> <작품> <제르미날>을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 특히 관심이 가는 것은 <제르미날>이다. ‘작품해설에 따르면 <제르미날>, 자신들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하여 민중-노동자들의 비난을 받은 <목로주점>과 달리, 민중-노동자들의 진심어린 환호를 받았다고 하니 말이다. <목로주점>에서 가까스로의 삶의 밑바닥을 보여준 졸라가 <제르미날>에서는 어떤 식으로 기만적 희망이 아닌 진실한 희망을 구성해냈을지가 궁금하다. 읽을 만한 번역본이 아직 출간되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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