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바이크가 본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나누리 옮김 / 필맥 / 200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 자신을 문제로 삼으라"고 멋지게 말했듯이 자신에게,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대답을 구하는 인간은 자신을 더 분명하게 인식하고 통찰하기 위해 자기 인생의 길을 마치 지도처럼 펼쳐 보게 된다. 그는 다른 누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를 설명하고자 한다. 이때 갈림길이 나타난다. 이 갈림길은 어느 자서전에서나 볼 수 있다. 인생의 묘사인가 체험의 묘사인가, 타인을 위한 예증인가 자신을 위한 예증인가, 객관적이고 외적인 자서전인가 주관적이고 내적인 자서전인가, 즉 단순한 사실의 전달인가 자신에 대한 보고인가로 길이 나뉘는 것이다. 앞의 길이 언제나 대중을 향하는 경향을 띠고 교회나 책에서 볼 수 있는 고해처럼 상투적인 표현방식을 사용한다면, 뒤의 길은 독백하듯이 생각하는 것이어서 대부분 일기의 형식만으로 충분하다. 괴테, 스탕달, 톨스토이와 같이 정말로 복합적인 성격의 사람들만이 이 두 길의 완전한 통합을 시도했고, 그 결과로 자신을 영원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자아성찰은 그저 준비단계일 뿐이지 깊이 숙고하는 단계는 아직 아니다. 모든 사실은 그 자체로 그대로 있으면 진실로 유지되기가 쉽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려 할 때 비로소 예술가의 진짜 고난과 고통이 시작되고, 정직성이라는 영웅적인 태도가 요구된다. 형제애를 발휘해 인간의 일회성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 타인과 소통하고자 하는 본능적 충동이 우리를 몰아붙이지만, 그만큼이나 반대의 충동, 즉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에 대해 침묵하려는 의지가 기본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 보호와 침묵의 의지는 수치심을 통해 우리에게 말한다. [..] 인간의 수치심이 지닌 근본적인 비밀은,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는 본질적 특성을 드러내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가장 잔인한 모습과 불쾌한 모습을 노출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도록 한다는 데 있다. 읽는 사람이 조롱하는 미소를 지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자서전을 쓰는 사람이 가장 빠져들기 쉬운 위험한 유혹인 것이다.

 

- 슈테판 츠바이크,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 [서문] 중

 

 

---------------------------------------------------------

 

<안나 카레니나> 깊이 읽기를 염두에 두고, 그러니까 '톨스토이' 때문에 읽기 시작했지만, [서문]이 오히려 인상 깊은 책입니다.


'톨스토이'에 관한 글은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 빛과 어둠의 두 초상>(자연사랑, 2001)에도 똑같이 실려 있습니다. 다만 번역은 다릅니다. 문단 구분도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카사노바...>는 본래 저자인 츠바이크가 카사노바-스탕탈-톨스토이로 이어지는 정신적, 예술적 발전 단계를 상정하고 쓴 책이기 때문에 필맥 출판사본을 읽는 게 합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다소 인위적 발췌 편집이긴 하지만) ['톨스토이' vs '도스토예프스키' = '빛' vs '어둠']의 구도 역시 무척 땡기는 구도이긴 합니다. 러시아 문학에서 둘이 차지하는 비중을 봐도 그렇고, 둘의 라이벌 관계를 감안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원래 슈테판 츠바이크는 전기(평전critical biography) 작가로 무척 유명하죠. 그런데 그 많은 평전들을 그저 무턱대고 써낸 것이 아니라 나름의 체계를 염두에 두고 썼습니다. 이 점이 다른 평전 작가와 그를 구분하는 점일 것입니다.

 

가령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는 [세계의 거장들/대가들(Baumeister der Welt)] 시리즈의 세 번째 권에 속합니다. 원제는 번역하면 '삶의 세 시인' 정도가 되겠네요. 하지만 국내 번역본에서는 이 제목을 빼고, 대신 '츠바이크가 본'이란 구절을 집어 넣었습니다. 국내에서 츠바이크에 대한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음을 감안한다면, 굳이 이렇게 제목을 변형시킬 필요가 있었나 싶어요. 하긴 뭐 '삶의 세 시인'이란 제목 역시 구매욕구를 상승시킬 만한 제목은 아닙니다만.......

 

 

참고로 [세계의 거장들] 시리즈의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카사노바...> [서문] 첫머리의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1권 <마신(데몬)과의 싸움(Der Kampf mit dem Damon)> : 횔덜린, 클라이스트, 니체

- 마성적인 힘에 쫓겨 자신과 현실세계를 뛰어넘어 무한의 세계로 들어선 유형


2권 <세 명의 거장들(Drei Meister)> : 발자크, 디킨스, 도스토예프스키

- 현존하는 현실 곁에 소설이라는 우주를 만들어 제2의 현실을 구축, 즉 '서사적으로 세계를 재창조한 사람'의 유형


3권 <삶의 세 시인(Drei Dichter ihres Lebens)> :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

- (대우주를 있는 그대로 그리기 보다) 자아의 소우주를 세계 속에 펼쳐나간 유형. '주관주의적 예술가' '자서전'이라는 예술 형식은 어떤 것인가를 탐색.  

 

1권에서 다루는 인물들이 걸어간 길이 '무한 세계'로 이어진다면, 2권에서의 길은 '현실 세계'로 이어집니다. 3권에서의 길은 '자기 자신'에게도 이어지게 됩니다. 어쨌거나, 이런 저런 이유로 츠바이크는 3이라는 숫자를 좋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뤄지는 작가들의 면면이 화려한 가운데, 1권이 특히 끌립니다. 하지만 국내에는 아직 번역이 되지 않았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