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활 - 2호 - 2013 10-11월호
말과활 편집부 지음 / 일곱번째숲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지금까지 인간이 찍었던 모든 사진들 중, 그 주인공이 세상을 떠난 후 수십 년이 지나서도 계속 유통되는 사진은 오직 이것 한 장뿐이다."

 

홍세화 씨가 발행인으로 있는 '종합 인문주의 정치 비평지'를 표방하는 <말과 활> 2호에서 무척 흥미로운 글을 발견했습니다. <체 게바라 사진의 기구하고 고달픈 오십 년>(김현호, 사진비평가)이란 제목의 글입니다.
 
저 멀리 어딘가를 응시하는 듯한(먼산?) 체 게바라의 사진(혹은 그것의 팝 아트 버전 이미지)은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갖자"라는 그의 말(로 간주되는 문구)과 더불어 우리에게 매우 익숙합니다. 2000년에 실천문학사에서 낸 붉은색 표지의 <체 게바라 평전>은 체(Che)의 이미지와 저 문구를 사용함으로써 베스트셀러가 됐고 큰 반향을 일으켰죠. 얼마 안 가 <혁명을 팝니다>와 같은 책들이 나와 혁명의 이상과 혁명가의 이미지를 제멋대로 전유하고 맥락 없이 소비하는 세태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만, 아직까지도 체의 사진은 비단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인종과 국경과 종교를 초월하는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글의 한 대목을 인용해보면 이렇습니다.

 

 

"이 사진이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은 괴이하다. '게릴레로 에로이코'(체의 사진을 찍은 사진작가가 사진에 붙인 이름, '영웅 게릴라'란 뜻)는 엄청난 수의 티셔츠와 포스터로 제작된다. 전세계의 거의 모든 곳에서 체 게바라 티셔츠는 여전히 잘 팔린다. 동티모르의 이슬람 원리주의 게릴라들과 북아일랜드의 가톨릭계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은 체 게베라 티셔츠를 입는다. 볼리비아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나 생전의 우고 차베스도 마찬가지였다.

 

얄궂게도 가자 지구 서안의 팔레스타인 인티파타들과 이스라엘 축구팀인 FC텔아비브 서포터들은 모두 게릴레로 에로이코를 자신들의 상징으로 사용한다. 체 게바라의 얼굴은 디에고 마라도나의 어깨와 마이크 타이슨의 배에 문신으로 새겨져 있으며, 지젤 번천의 비키니 수영복과 엘리자베스 헐리의 루이비통 가방에도 있다. 심지어 독재자의 아들 알 사디 카다피는 체 게바라의 얼굴을 호화 요트의 양쪽 옆면에 크게 그려넣기까지 했다. 스노보드, 보드카 병, 팬티, 머그컵, 와인 라벨, 지포 라이터, 담뱃갑, 콘돔, 열쇠고리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벨파스트와 베이루트, 베를린, 서울, 뉴욕, 리마, 홍콩, 네팔에 이르기까지 이 사진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든 곳에 살아서 움직인다."

 

가히 '혁명을 상업주의가 포획했다', '혁명이 패션으로 전락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범인은 역시나 상업자본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이글의 저자는 혁명과 혁명가를 찍은 수많은 사진 중 왜 이 사진만이 그렇게 포획당했는지, 오랫동안 살아남았는지를 묻습니다. 여기서부터 글이 재밌어집니다.

 

체의 사진을 찍은 사진가는 원래 패션사진가(지망생)이었다고 합니다. 알베르토 코르다라는 이름인데요. 그는 정식 사진 교육을 받지 않았고,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생일잔치나 세례식, 결혼식장을 돌아다니며 허락 없이 사진을 찍은 뒤 현상한 것을 들고 가서 흥정해파는 일로 생겨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코르다는 아바나 구시가지에 '메트로폴리나타'란 이름의 스튜디오를 여는데, 여기서 그는 쿠바의 젊고 예쁜 여성들을 모델로 미국 잡지에 실리는 것 같은 '패션사진'들을 찍었다고 합니다. 그가 롤모델로 삼은 인물은 당대 최고의 패션사진가로 꼽힌 뉴욕의 리처드 아베든이었다고 해요. 코르다는 혁명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거죠. 그보다는 패셔너블한 사진을 찍는 데 관심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1950년대의 쿠바에는 패셔너블한 모델도 별로 없었고, 패셔너블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반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코르다는 쿠바 혁명의 주역들인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 카밀로 시엔푸에고스를 만나게 되고 이들의 사진을 찍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은 "실제로 젊고 잘생긴, 그리고 멋진 미소를 지닌 청년들"이었죠. 체 게바라의 사진-이미지가 레닌이나 마오쩌둥, 호치민의 사진보다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는 그의 외모가 큰 몫을 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혁명 정권이 수립되었을 때 체 게바라의 나이는 불과 31세, 피델 카스트로의 나이는 33세였습니다. 코르다는 이 젊고 잘생긴 혁명가들의 사진을 "마치 패션쇼의 뒤편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셀러브리티들처럼 화사하게" 찍었습니다. 체 게바라의 사진이 하나의 패션 아이콘이 되고 패션 상품으로 무차별하게 소비될 수 있었던 데는 이런 맥락이 있었던 것입니다. 혁명이 패션으로 전락한 것이 아니라 혁명은 처음부터 패션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였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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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MINO>에 이어 또 하나의 '자극적인' 잡지가 나온 것 같아 기분이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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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anpark 2013-12-13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행작가 쟌 모리스가 체 게바라와 얽힌 두 가지 에피소드를 엮어 얘기했던 대목이 문득 떠오르네요...
체 티셔츠를 입고서도, 해맑은 표정으로 "근데 체 게바라가 누구에요?"라고 물었던 어느 젊은 히치하이커의 모습이 너무나 생생하게 그려지던 그 이야기.....ㅋ
시로군님 덕분에, 얼른 찾아서, 서재에 올리기로~^^&
 

과학 소설의 대가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이 황금가지에서 '완전판'으로 곧 나온다고 합니다. 왕년의 아시모프 팬들은 공중제비를 세 바퀴 넘을 소식.

 

저는 이 책을 중학생일 때 탐독... 하려다가 결국 실패한 적이 있습니다. 그땐 분권이 되어 있어서 총 9권인가 그랬는데, 4권까진가 읽고 접었더랬죠. 지금 돌이켜보자니, <파운데이션> 완독 실패가 본격 과학소설 매니아가 되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이었던 듯. 아시모프의 또 다른 시리즈인 <로봇>은 몇 번씩 반복해가며 읽었는데.

 

<로봇...>에 비해 <파운데이션>은... 뭔가 어려웠어요. 대하소설과 같은 긴 책을 잘 읽지 못하는 성향이기도 하고. (이건 지금도 그래서 <안나 카레니나>는 읽지만, <레 미제라블>은 읽지 못 한다는...)

 

결국 ('본격'이란 수식어를 붙이기엔 좀 모자란) 베르베르의 <개미>로 갈아탔고, 한참 후에 (역시 '본격'이라기엔 모자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읽은 게 제 SF 독서경험의 8할이랄까... 어디가서 명함도 못 내밀 SF 독서력입니다. 하지만 <로봇> 시리즈는 무척 재밌게 읽어서, 고등학생일 때도 읽고, 대학생이 된 이후로도 몇 번 더 읽었어요. 특히 <로봇> 시리즈의 1권부터 4권까지는 '압권'이라 할만치 재밌습니다. (5-6권은 나중에--<파운데이션>을 쓰고난 이후 시점에--써서 그런지 좀 허황된 구석이 있습니다...)


 

그나저나 예전에 두 시리즈를 출간한 '현대정보문화사'라는 출판사는 어떻게 된 거지? 찾아보니 번역자가 같군요. 예전 번역본을 출판사만 옮겨 재출간한 것이네요. 덕분에 표지나 제책은 상당히 좋아진 것 같은데, 어쩌면 그맛에 완독할 수 있을지도...

 

 

 

 

 

 

 

 

 

 

 

 

 

 

 

 

 

 

 

 

 

 

 

 

 

 

 

 

위의 <로봇>은 2001년에 재출간된 판본이고, 제가 중학생일 때 읽은 것은 아래의 판본입니다.

 

아래 판본은 1992년에 출간된 것이라 당연히 지금은 절판되었습니다만, 표지 이미지가 있네요. 추억 돋게 시리.

 

 

 

 

 

 

 

 

 

 

 

 

 

 

 

 

 

시리즈 물은 일단 분량이 많아 읽는 게 부담이 되긴 합니다만, 이게 내 취향에 딱 들어맞아 재밌을 경우엔 무한한 즐거움과 만족감의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특정 작가의 '전작'을 읽을 때도 동일한 즐거움과 만족감을 느낄 수가 있죠. 하지만 한국에서 그걸 만끽하기란 참 어려운 일.

 

최근 에밀 졸라와 슈테판 츠바이크에 꽂혔는데 이들의 '전작'을 읽을 날이 과연 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밀 졸라는 20권에 달한다는 '루공-마카르 총서'를 썼는데 이게 절반도 채 번역이 안 되어 있고,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가 쓴 평전들이 제법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여기저기에서 산발적으로 나오는 바람에 편집의 일관성이 없습니다. 이건 뭐 에밀 졸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책은 내용도 중요하고, (번역서일 경우) 번역자의 역량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출판사-편집자의 역량일 텐데, 여기서 일관성을 기대할 수 없으니 '전집' 또는 '전작'을 읽는 맛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열린책들의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이나 '폴 오스터' 전집, '움베르트 에코' 전집, 책세상의 '카뮈' '릴케' 전집, 솔 출판사의 '카프카 전집' 등이 그나마 한 출판사가 한 작가를 '책임진' 경우이긴 합니다. 하지만 이런 '전집 발간' 시도는 요즘 들어선 통 이뤄지고 있지 않습니다. 출판계의 전반적 불황 때문이기도 하겠고, 출판 정책에 대한 전국민적 무관심, 인터넷 서점의 출판 시장 패권 장악으로 인한 '제살 깎아먹기'식 경쟁의 일반화 때문이기도 하겠습니다...

 

일반 독자 입장에서야 "어쨌든 싸게 좋은 책 읽을 수 있으면 장땡" 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계속 이런 식이라면 '전작' 읽기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기회도 현저히 줄어들겠죠. 독자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정책적 노력을 기울여야 할 텐데 여기에 관심 있는 정책입안자가 한 명도 없다는 게 현실...

 

위기감이 공유되고, 여론이 형성된다면야 정책입안자도 신경을 안 쓸 수 없겠지만, 아직까지 그런 기미는 안 보이는 듯합니다. 출판이든 독서 문화든 전적으로 시장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고 있고, 잘 나가는 책만 더 잘 나가는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현암사에서는 '나쓰메 소세키' 전집을 발간하기도 했습니다만. http://blog.aladin.co.kr/705623165/6595053

 

그리고 민음사에서는 밀란 쿤데라 전집을 냈군요... 쿤데라는 물론 훌륭한 작가지만, 지금껏 워낙에 민음사 작가로 자리매김 된 감이 있어서(+팔리기도 많이 팔려서) '우려먹기'라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만. 황금가지도 민음사 계열이니 '우려먹기'는 이 쪽의 종특인 것인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으로 바꿔서 자사 세계문학 전집 목록에 올려놓는 등, 민음사는 글 잘쓰고 잘 팔리는 작가 '우려먹기'에 일가견이 있는 듯. 뭐 좋은 책도 많이 내는 출판사이긴 하지만, 책 가격의 7-80%에 해당하는 신간적립금을 마구 투척하는 등 출판생태계를 교란하는 데도 앞장서는 곳이어서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합니다...

 

이렇듯, 전집 출간 시도가 전무한 건 아닙니다. <파운데이션> '완전판' 출간 소식과 같이 전집 출간 소식은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편입니다. 다만 전집 출간이 이뤄지는 경우 대다수가 장르문학이라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할 점.

 

최근의 시도 중에서는 필립 K. 딕(폴라북스), 대실 해밋(황금가지) 전집 출간이 인상적이었고, 마쓰모토 세이초(북스피어+모비딕)도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애거서 크리스티도 황금가지에서 얼마 전에 (드디어!) 전집이 완간되었죠.

 

 

 

 

 

 

 

 

 

 

 

 

 

 

 

 

 

 

 

나오다 중단된 상태이긴 합니다만, 시공사의 '귀족 탐정 피터 윔지 시리즈'도 있네요. 피터 윔지는 '추리소설 황금기'에 활약한 영국 추리 작가 도로시 세이어스의 주인공입니다. 홈스, 포와로, 브라운 신부에 밀려 지명도가 한참 낮습니다만, 앞서 언급된 세 탐정이 지겨운 분들에게는 신선한 자극이 될 듯. 하지만 3권까지 나오다 중단된 상태고, '시공사'에서 이 시리즈를 더 낼 수 있을까는 의문...

 

 

 

 

 

 

 

 

 

 

 

 

 

 

 

 

 

 

 

더불어 '피니스아프리카에'라는 (이름도 어려운) 출판사에서는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를 내고 있습니다. 사건을 해결하는 게 평범한 경찰들--87분서 소속 경찰들--이란 점에서 본격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경찰 소설(?)이라 부를 수 있을 텐데, 저는 얼마 전 <킹의 몸값>을 무척 재밌게 읽었습니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이 책을 읽고 영화 <천국과 지옥>을 만들었다죠. 구로사와의 필모를 대충이나마 알고 있는 저로서는 <킹의 몸값>이란 경찰소설과 구로사와 감독이 잘 연결이 안 돼서 이걸 어떻게 영화화했나 궁금해서 영화도 확인해 봤습니다. 놀랍게도 그냥 모티브만 따온 게 아니라 (전반부는) <킹의 몸값>의 설정과 줄거리를 그대로 따르고 있더라는.

 

구로사와 감독이 영화화까지 할 정도니 좋은 소설, 이라고 하면 '권위에의 호소'라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겠지만, 뭐 구로사와 감독의 영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읽은 순수한(?) 독자인 제가 재미(+단순한 재미를 넘어선 어떤 의미까지)를 보증합니다...(보증이 안 되려나...;;)

 

 

 

 

 

 

 

 

 

 

 

 

 

 

 

 

 

 

 

이렇게 나름대로 활발하다고 할 수 있는 장르문학 쪽의 전집 출간 상황과는 달리, 순문학 쪽은 요즘 주요 출판사들이 모두 뛰어들어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세계문학 전집] 때문에, 한 작가의 '전작' 출간이 오히려 어려워진 상황이 된 듯합니다. 작가의 대표작이 [세계문학 전집] 목록에 1권, 잘하면 2권 출간되는 식이고, 그나마 중복 출판이 많아 독자로서는 번역본 선택에 나름 공을 들여야 하는 상황.

 

장르문학에서만 전집 출간 시도가 간헐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장르문학은 (순문학보다는) '재미' 있다"는 고정관념 덕에, 혹은 높은 충성도를 보이고 때로는 전도사를 자처하기도는 '한 줌의 열성팬'들 덕에 손익분기점을 넘길 정도의 판매량은 기대할 수 있는 것일까요?

 

순문학과 장르문학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쨌든 양자 간의 균형이 좀 맞춰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시장성'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선 안 되지 않을까요? 각 출판사에서 역량을 집중하고 있는 [세계문학 전집] 덕에 세계문학의 스펙트럼이 넓어진 건 사실입니다만, 그와 더불어 한 작가의 '전작'을 내는 시도가 지금보다는 좀더 많아져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독자 입장에서야 가장 잘 쓴 '대표작' 한 권 읽는 게 경제적이긴 하겠습니다만, 그러다 보니 어떤 작가의 '졸작'과 '태작', '잊혀진 작품', '거의 흑역사에 해당하는 작품'을 읽는 재미는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세계문학사상 큰 발자취를 남긴 '위대한' 작가일지라도 '감추고 싶은' 과거가 있기 마련인데, 이걸 확인하는 재미와 의미가 쏠쏠하죠. 작가가 어떤 지난한 '과정'을 거쳐 작품 활동을 해오고 작품 세계를 구축해왔는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대표작만 봐서는 이런 건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작가라도 처음부터 '완전체'가 아니라는 사실은 '완전판 전집'을 봐야만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한 작가의 작품 세계 전체를 조망한다는 건, 다른 어떤 (무식한) 인내심 돋는 독서 경험 보다 값진, 이를테면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다 읽는" 삽질스런 독서 경험하고는 비할 수 없는 독서 경험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해당 작가의 전작을 담은 '전집'이 나오지 않는 한, 어떤 계기로든 '전집' 출간 붐이 일지 않는 한, 이런 값진 경험은 언제까지나 전공자들의 전유물로 남을 수밖에 없을 듯.(전공자들이 실제로 '전작'을 읽는지는 논외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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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최근에 번역 출간된 로맹 가리의 소설 <레이디 L>을 읽었습니다. 로맹 가리의 소설들은 제각기 다른 매력을 갖고 있는데, <레이디 L>은 그 중에서도 좀 색다르게 읽히는 맛이 있습니다. 그저 소설로 읽어도 무척 재밌는 편입니다만, 19세기말의 정치적 맥락들이 그려져 있고, 문화와 예술에 대한 남다른 취향 또한 중간 중간 언급되고 있어서 얼마간 주의 집중을 요하는 작품입니다. 

 

특히 이 소설에는 아나키스트들이 등장합니다. 아나키스트 = 무정부주의자 = 테러집단,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소설에는 테러집단에 가깝게 묘사되어 있긴 합니다만). 아나키스트들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인류애'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이게 다분히 낭만적, 이상주의적 색채를 띄고 있다는 게 한계로 지적되긴 합니다만(소설에서도 그렇죠).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아나키스트로 꼽히고 있는 인물은 신채호 정도입니다. (김구의 라이벌로 꼽히는) 김원봉 같은 인물도 있지만 일반에 잘 알려지 있진 않죠. 그리고 톨스토이 역시 아나키스트 계보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독서 모임에서 사용한 <레이디 L> 발제문의 일부인데, 참고삼아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나키스트란 누구인가? 아나키스트는 대개 ‘무정부주의자’라는 다소 과격한 뉘앙스를 지닌 단어로 번역되며, 때로는 테러리스트와 동의어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런 성격을 띤 아나키스트 분파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것은 아나키스트의 한 성격만을 보여줄 뿐이다. 소설 <레이디 L>에서 아르망 드니가 보이는 모습은 과격 테러리스트의 모습이지만, 아르망과 대립되는 것으로 묘사되는 ‘아나키스트 왕자’ 크로포트킨은 “민중은 권력에 쉽게 굴복하지만 그렇다고 권력을 숭배하지는 않는다”며, 민중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보다 온건한 태도를 취했다. 
 

서구 아나키스트의 계보는 윌리엄 고드윈, 푸르동, 바쿠닌, 크로포트킨, 톨스토이로 이어진다. 오늘날 알려진 아나키스트로는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가 있다. 19세기 초중반부터 형성된 아나키즘은 19세기말에서 1920년대까지 활동의 전성기를 맞는다. 이 기간은 전 세계적으로 민족-국가가 본격적으로 성립하던 시기이며, ‘민족-국가’의 이름으로 엄청난 (영토/식민지) 전쟁이 벌어진 시기이자 민족-국가 형성을 위한 여러 신화와 전통을 발명한 시기, 그리고 또 민족-국가의 형태를 둘러싸고 여러 실험들이 벌어진 시기다.

 

18-19세기에는 산업혁명, 도시화로 인해 사람살이의 형태가 점차 근대적인 것으로 변모한다. 봉건 시대 농촌 공동체와는 다른 산업 시대의 도시 공동체가 구성되고 있었던 것. 교통의 발달로 인한 이동의 자유는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한 곳에(주로 도시-공장-일자리가 있는 곳) 모여 살게 했다. 자연히, 이렇게 모인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어울려 살 것인가 하는 공동체 형성의 문제가 대두된다. 또한 정체성의 문제가 대두된다. 한 마을에서 태어나면 죽을 때까지 그 마을을 떠나지 않았고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있었던 봉건 사회와는 달리, 근대 사회에서는 나를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의 문제, 즉 ‘자기소개’가 중요해진다.

 

이리하여 19-20세기에는 근대 사회가 직면한 이 두 가지 문제, 즉 공동체 형성과 정체성의 문제를 둘러싸고 여러 논의가 있게 된다. 그 중에서도 ‘민족’ 개념을 중심으로 한 ‘국가’라는 공동체가 지배적인 형식으로 대두하게 된다. 이러한 흐름에 주도적으로 관여한 이들이 기존의 절대왕권 세력 및 귀족들과 결탁한 산업부르주아들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지속적인 팽창과 (소수 정체성의) 흡수를 특징으로 하는 민족-국가 형성의 흐름은 나중에 제국주의로 이어져 두 차례의 세계대전의 원인이 된다. 다른 한편 이 주도적인 흐름에 반대하거나 그 문제점을 지적하며 대안을 들고 나온 이들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사회주의와 아나키즘 운동을 꼽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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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L>을 읽고 아나키스트에 대해 관심이 생기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읽어볼만한 책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최근에 번역 출간된 그래픽 노블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이미지프레임, 2013)입니다. (영웅이 아닌) 어느 한 평범한 아나키스트의 일대기를 담담하게 다룬 책입니다. 아들의 입장에서 아나키스트로 살았던 아버지를 바라보는 책이기도 합니다.

 

 

 

 

 

 

 

 

 

 

 

 

 

 

 

2. 아나키스트 운동의 분수령이 된 사건으로 스페인 내전(1936-39)을 꼽을 수 있습니다. 19세기 후반부터 1920년대까지 활발했던 아나키스트 운동은 스페인 내전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이후 쇠락의 길을 걷게 되죠. 개인의 자유를 최우선의 가치로 삼은 아나키즘 세력이 당시 새롭게 발흥한 파시즘과 국가 사회주의, 즉 히틀러의 독일과 스탈린의 소련에 의한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가운데 끼어 사멸한 것으로도 볼 수 있겠습니다. 여튼, 스페인 내전 하면 헤밍웨이와 조지 오웰을 빼놓을 수 없죠. 스페인 내전이 배경인 둘의 작품은 각각,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그리고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입니다.

 

 

 

 

 

 

 

 

 

 

 

 

 

 

 

 

 

헤밍웨이와 친분이 있었던 사진가 로버트 카파의 유명한 사진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 역시 그 배경이 되는 사건이 스페인 내전입니다. 로버트 카파 전은 세종문화회관에서 10월 말까지 열리니까 한 번 다녀오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헤밍웨이나 조지 오웰의 소설을 한 손에 들고 말이지요. ^^

 

http://www.robertcapa.co.kr/

 

 

 

3. 스페인 내전을 본격적으로 다룬 책으로는 (제목도 외우기 쉬운) <스페인 내전 -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교양인, 2009)이 있습니다. 부제가 무척 적절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런가 하면 소설가 이병주가 1980년에 스페인을 돌아보고 쓴 스페인 기행문 <스페인 내전의 비극>(바이북스, 2013)도 최근에 출간되었습니다.

 

 

 

 

 

 

 

 

 

 

 

 

 

 

 

4. 아나키즘에 관한 책으로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오랫동안 아나키즘 관련 논의 및 인물을 소개해온 박홍규와 하승우의 책을 읽어볼만 합니다. 믿을 수 있는 번역가인 김정아가 번역한 <아나키즘, 대안의 상상력>(돌베개, 2004)도 읽어볼만 하지만, 이 책은 품절이군요...

 

 

 

 

 

 

 

 

 

 

 

 

 

 

 

 

5. 학술서적을 읽는 건 엄두가 안 난다고 한다면 다음의 책을 읽어볼만 합니다. <역사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가 쓴 평전 <미하일 바쿠닌>(이매진, 2012)입니다.

 

이 책에서 카는 '영국' 역사학자답게(왜 '영국인'인 게 중요한지는 <레이디 L>을 읽어보시면 짐작이 가실 듯), 러시아의 대표적 아나키스트인 바쿠닌을 집중 비판합니다. 그러면서 바쿠닌과 동시기에 활발히 활동한 또 다른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에 대해서는 옹호하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레이디 L>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은 바쿠닌보다는 크로포트킨이죠. 소설에서 비현실적 낭만주의자로 묘사되면서 풍자의 대상이 되긴 합니다만, 이 사람, 별명이 무려 '아나키스트 왕자'라는.....

 

 

 

 

 

 

 

 

 

 

 

 

 

 

 

 

6. 로맹 가리가 왜 하필 아나키스트를 소재로 소설을 썼는가, 그것이 궁금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많은 작가들이 개인의 '절대적 자유'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작가들이라면 아나키즘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갖고 발을 담글 수밖에 없지 않나 싶습니다. 더군다나 로맹 가리는 두 번째 부인 진 세버그가 인종차별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어서(그녀는 일찍부터 FBI의 감시를 받았고, FBI 개입 의혹이 있는 의문사를 당했습니다) 아나키즘을 비롯한 여러 사회 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비록 <레이디 L>에서는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풍자와 희화화가 확연하지만, 그건 아나키스트들을 비웃는 것이라기 보다 자기 안에 자리하고 있는 아나키스트적 성향, 이상주의적 성향에 대한 진지한 성찰로 보입니다.

 

로맹 가리는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작가로도 유명합니다. '평전이 있다면 한 번 읽어보고 싶다...' 는 생각을 하신 분도 있을 듯한데, 로맹 가리 평전, 네, 번역 출간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도 두 권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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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 소식 몇 가지. 분야를 망라하진 않았고, 제 관심사 위주로 새로운 번역본 출간 소식을 정리해봤습니다. '관심사 위주'라고 했는데, 요즘은 일부러 관심사에 제한을 두려 하고 있기도 합니다. 늘어만 가는 장바구니의 무게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가을을 두고 '독서의 계절'이라고는 하지만, 놀러가기 좋고 먹을 것도 많은(더불어 식욕도 왕성해지는) 계절이라 사실은 책이 제일 안 팔려서 일부러 '독서의 계절'이라 부른다는 말도 있습니다. 놀고 먹는 데 쓸 돈을 아껴 책 읽기에 쓰라는 말을 하면 좀 고리타분한 설교로 들리겠지만, 요즘 날씨가 놀러가기도 좋지만 책 읽기에도 좋은 날씨인 건 확실합니다... 9월엔 추석 연휴가 있고, 10월 초에도 휴일이 있어서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미뤄두었던 '대작'들이나 '전집'들을 이 기회에 읽으면 어떨까 싶은데요, 바로 이 '대작'과 '전집'에 해당하는 작품들의 출간 소식이 있어 알려드립니다.

 

 

 

1. 허먼 멜빌 <모비 딕>의 새 번역본(열린책들)이 나왔습니다. 번역가로서 명성이 높은 김석희 번역본(작가정신, 2010)과 비교해보는 재미가 쏠쏠할 듯합니다. 작가정신 판본은 본문에 멋진 삽화가 실려 있어서 구매욕을 자극하는 판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삽화가 정작 소설 내용과 따로 노는 바람에 약간 실망하기도 했다는-

 

작가정신 판본은 판형이 큰 데다 단권이어서 들고 다니면서 읽기엔 무리가 많이 따랐죠. 열린책들 세계문학은 판형이 작고, 두 권이어서 들고 다니며 읽기가 훨씬 용이할 듯합니다. 대신 열린책들 세계문학 전집의 특징인, 좁은 줄간격, 좁은 여백, 글자가 빽빽히 들어차 있는 느낌은 극복해야 할 요소겠군요.

 

열린책들 판본은 아직 실물을 확인하진 못했습니다. 다만 작가정신에서 '이슈메일'이라고 표기되었던 주인공의 이름을 '이슈마엘'이라 표기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띕니다. '에이해브' 선장의 이름은 두 판본의 표기가 같네요(기존 번역본들에서는 '에이허브'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2. 최근 일본 근대문학의 대표 작가 중 한 명이자 탐미주의의 거장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들이 잇달아 출간되었습니다. <만,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문학동네, 2012), <미친 사랑>(시공사, 2013), <열쇠>(창비, 2013).

 

서로 다른 출판사의 세계문학 전집 리스트에 올라 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지금까지 대표작을 중복 출판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모두 다른 작품이라는 점도 인상적입니다. 그 동안 일본 근대 문학 작가들은 나쓰메 소세키, 다자이 오사무, 그리고 두 명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가와바타 야스나리, 오에 겐자부로) 정도만 소개가 됐었는데, 다니자키 준이치로도 나름 본격적으로 소개가 된 셈입니다.

 

국내에 소개된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다른 작품은 <세설>(열린책들, 2007)이 있습니다. <미친 사랑>은 예전에 <치인의 사랑>(책사랑, 2003)이란 제목으로 출간된 적이 있었죠. 다니자키의 산문집 <그늘에 대하여>(눌와, 2005)도 널리 읽힌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일찍이 1990년대에 <음예예찬>이란 제목으로 소개되기도 했죠.

 

 

 

 

 

 

 

 

 

 

 

 

 

 

 

 

 

 

 

 

 

 

 

 

 

 

 

 

 

 

 

 

 

 

 

3. 현암사에서 나쓰메 소세키 전집을 출간하기 시작했다는 반가운 소식입니다. 다른 한편으론 아쉽기도 한데, 나쓰메 소세키는 지금까지 꽤 많은 작품들이 소개된 편이라 중복 출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나쓰메 소세키 전집이 나온다고 하니, (나쓰메 소세키와 더불어 일본 근대 문학의 쌍벽으로 꼽히는) 모리 오가이 전집은 대체 언제쯤 나올 수 있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도 소개가 되는 마당에 모리 오가이는 어째서 소개가 안 되고 있는 것인지... 그렇게나 상품성이 없는 것인지... 뭐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모리 오가이를 잘 아는 건 아니고, <아베 일족> <무희> <기러기> 등 대표작 몇 편을 읽었을 뿐입니다만, 워낙 인상적으로 읽은 터라 잘 모르는 입장에서 기대감(+아쉬움)만 키우고 있는 상황입니다.

 

 

 

 

 

 

 

 

 

 

 

 

 

 

 

 

 

중복 출판이긴 하지만, 역시 <도련님>과 같은 작품을 믿을 만한 번역가(송태욱)의 번역으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반갑습니다. 총 14권이 출간될 예정이고 완간은 2015년이라고 합니다. 2013년 9월 현재, 전집 1차분 네 권이 출간된 상황입니다.

 

일본 근대 문학의 출발, ‘소설이 없던 시절의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는 근현대 일본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20세기의 대문호, 일본의 셰익스피어 등으로 불린다. 일본에서는 1984년에서 2004년까지 1천 엔권 지폐에 그의 초상이 사용되었고, 이와나미쇼텐에서 1907년 소세키 전집이 간행된 이후 시대를 달리하며 새로운 모습으로 발간되어 현재까지 끊임없이 사랑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은 여러 출판사에서 대표작에 치우쳐 중복 출간되어 있었는데, 이번에 출간되는 소세키 소설 전집은 12년 동안 집중적으로 써내려간 소세키의 작품세계를 재조명하며 ‘지금의 번역’으로 만날 수 있는 국내 첫 전집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도련님』, 『풀베개』, 『태풍』 네 권을 시작으로, 우리 교과서에 실려 널리 알려진 작품뿐 아니라 소세키의 연보에서도 가끔 빠져 있는 숨어 있던 소설까지 온전히 담았다. 소세키는 길지 않은 창작 기간 동안 한시, 하이쿠, 수필, 소설 등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작품을 썼다. 그 작품 각각이 개성 있게 분출하는 분위기, 내용에 따른 문체 변주의 독특함 등 소세키의 작품을 고전이라 일컬음에 이론은 없을 것이다.
“필요 없는 문장은 단 한 줄도 없다”며 소세키의 문체를 생생한 우리말로 잘 살린 송태욱의 꼼꼼한 번역에 소세키 단편소설 전집을 완역한 노재명의 소세키에 대한 깊은 이해가 더해져, ‘우리 시대 소세키 번역’으로 거듭났다. 또한 소세키의 작품을 온전히 풀어놓으며 지금 여기에 되살리는 작업은 송태욱(『고양이』 외 11권).노재명(『태풍』 및 『그 후』)의 라이프워크이기도 하다.


나쓰메 소세키의 첫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부터 위궤양과 신경쇠약으로 고통 받으며 마지막까지 써내려간 『명암』까지, 총 14권의 장편소설을 선보일 예정이며 완간은 2015년이다.

 

 

문학평론가, 소설가의 '소세키 독후감'이 각 권 말미에 실려 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풀베개>를 소세키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데, '독후감'은 어떨지 궁금합니다. 소설가 백가흠은 <힌트는 도련님>이란 단편을 쓴 적도 있는데, 이번에 <도련님>의 '독후감'을 맡아 썼습니다. 재밌네요. <태풍>은 소세키의 장편 중에서는 다른 작품들의 유명세에 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인데 신형철 문학평론가가 '독후감'을 맡아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국내 첫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이 가진 특징 중 하나는 각 권 말미에 우리 문학가들의 ‘소세키 독후감’이다. 시인 장석주가 읽은 “고양이”의 고군분투, 소설가 백가흠이 말하는 우리 시대의 『도련님』, 문학평론가 황호덕이 꼽은 『풀베개』의 연민,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찾은 『태풍』의 문학론.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이 그들만의 소세키를 ‘해설 아닌 해설’의 자유로운 형식으로 담아 한국 독자들의 소세키 읽기에 즐거움을 더했다.

 

 

나쓰메 소세키는 그저 작품만 읽고 접어두기엔 그 존재감과 무게감이 상당한 작가라, 소개서의 도움을 받고 싶은 독자도 많을 것 같습니다. 로쟈가 소개하는 소세키 소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store.aladin.co.kr/mramor/Item/8932316783/6584966 

 

 

소세키에 관한 소개서로는 시바타 쇼지의 <무라카미 하루키 & 나쓰메 소세키 다시 읽기>(늘봄, 2013)가 최근에 나온 책이다. 학술서를 제외하면 그밖에 강상중 교수의 <고민하는 힘>(사계절, 2009), 고모리 요이치의 <나는 소세키로소이다>(이매진, 2006)를 참고할 수 있는데, 고모리 요이치의 책은 절판된 상태다. 전집도 나오는 김에 재출간되면 좋겠다...

 

 

이와 더불어 최근에 제가 리뷰에 올린 <[도련님]의 시대>(세미콜론, 2012)도 일독할만합니다. 일단 만화책이지만 그저 가볍게 읽히는 책은 아닙니다... 하지만 노력을 기울여 읽고 나면 작가 나쓰메 소세키에 대한 이해는 물론 일본 근대 문학이 어떤 시대적 상황 속에서 등장했는지까지를 자연스레 알 수 있게 됩니다.

 

http://store.aladin.co.kr/705623165/Item/8983714549/6587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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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의 시대 1 - 나쓰메 소세키 편 세미콜론 코믹스
다니구치 지로 그림, 세키카와 나쓰오 글, 오주원 옮김 / 세미콜론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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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38년(1905년)

소세키 나쓰메 긴노스케. 이때 나이 만 38세 10개월.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 강사 연봉 800엔....
제1고등학교 영문학 강사 연봉 700엔.
매달 120엔이 넘는 큰돈이 들어오지만...

참고로 메이지 40년 이와테 현 시부타미 진죠 소학교 대리교사였던
다쿠보쿠 이시카와 하지메(시인)의 월급은 8엔에 지나지 않았다.

(나쓰메 소세키는) 이런저런 이유로
생활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느껴 이해부터
메이지 대학에도 출강해 월급 30엔을 받고 있었다.

"돈이 궁하진 않아. 어차피 <호토토기스>에 실을 거네.
다카하마 군이 잘 봐준다고 해도 1매 당 50전이 고작이겠지."

- 다니구치 지로 그림, 세키가와 나쓰오 글, <[도련님]의 시대 : 나쓰메 소세키>

* <[도련님]의 시대>의 시작부분인데 처음부터 돈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게 인상적. 돈 이야기는 작품 중간 중간에 계속해서 언급된다. 소세키는 돈 문제에 신경을 많이 썼다. 소세키의 작품 세계와 막스 베버의 이론을 다루는 강상중의 <고민하는 힘>을 보면 소세키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돈 문제를 다룬다고 한다. <도련님>도 예외는 아니다. <도련님>은 중학교 교사로서 월급 40엔을 받았던 도련님이 철도기사로 직업을 바꾸면서 월급을 얼마를 받게 되었는지를 알려주며 끝난다.

* 만화를 쭉 읽다보면 라프카디오 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스 태생 아일랜드인인 그는 미국에서 신문기자 생활을 하다 일본으로 건너와 중학교 교사 생활을 한다. 메이지 29년(1896년) 그는 도쿄제국대학 강사로 초청을 받아 월급 400엔을 받는다.

헌은 서양인이지만 일본을, 특히 옛 일본을 좋아했다. 그가 일본에 귀화한 이유이기도 한데, 결과적으로 이점은 그에게 약점으로 작용한다. 당시 일본은 '신시대'를 부르짖고 있었던 것. 메이지 36년(1903년) 제국대학에서는 헌에게 강사 월급을 200엔으로 줄이기로 했다며 양해를 구한다. '유학하고 돌아온 일본인 선생'을 고용해야 하는데 대학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유학하고 돌아온 일본인 선생'은 다름 아닌 나쓰메 소세키였다.

* 나쓰메 소세키의 월급이 이것저것 합해 120-150엔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헌의 월급 400엔은 상당히 많은 편이다. 절반인 200엔도 소세키의 월급보다 많다. 하지만 처의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헌에게 이 감봉은 타격이 컸던 것 같다. 대학의 자리를 뺏긴다는 것도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신시대'의 일본에는, 일본을 좋아해서 귀화까지 한 이 사내가 있을 자리가 더 이상 없었다.

* 헌의 학생들은 유임 운동을 벌이며 신임 강사 나쓰메 소세키의 수업을 보이콧 하기도 하지만, 헌은 자리에서 물러난 지 3년 후 협십증으로 죽는다.

* 이 일로 나쓰메 소세키는 많은 내적 갈등을 겪었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국비로 영국 유학을 다녀온 영문학자 나쓰메 역시 서구를 싫어했다. 무턱대고 서구를 모방하려는 '신시대' 일본도 싫어했다. 하지만 그에게 월급 120엔을 받을 수 있는 자리를 허락한 것은 '신시대' 일본이었다.

* 나쓰메는 평생 신경증을 앓았고 주사가 심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성공 이후, 그는 대학 강사를 그만두고 전업작가가 된다.

* 돈 생각을 많이 하는 요즘이다. 매달 내가 버는 돈은 터무니 없이 적다. 그래서 생활에 어려움을 느낀다. 헌처럼 부양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 나 하나 먹고 사는 게 힘들다. 뭐 나만 그런 것도 아니겠지. 이렇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진 않는다. '모두가 먹고 살기 힘들었던' 60-70년대에는 그럴 수 있었던 것 같지만.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생존에, 먹고사니즘에 매달려 있다는 게 끔찍하게 여겨진다.

돈을 벌 수 있는 일자리는 시대의 성격, 시대의 지향에 의해 규정되고 만들어진다. 메이지 38년의 일본은 '신시대'를 지향했고 그러한 지향에 맞는 이들이 일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2010년대의 한국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 것일까.

참고 사항으로만 언급되지만 나쓰메 소세키의 월급이 120-150엔일 때,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월급은 8엔이었다. 무시할 수 없는 격차다. 이사카와의 생활은 어땠을까. 그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았고, 또 시를 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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