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1월부터 올해 2월까지 약 3개월 반 동안 [혁명]을 주제로 독서 모임을 했었습니다.

그때 리스트업된 책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빽빽하네요. 권 수로 놓고 보면 11권이나 되지만, 작품 편 수로 보면 7편. 역사에 등장하는 다양한 '혁명'들을 고루 맛 볼 수 있게 작품 선택에 신경을 썼습니다. 그러다 보니 '맛 보기'에만 그친 감이 있습니다. 왜 이게 '혁명'이냐라는 질문도 심심찮게 받았죠. 특히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안나 카레니나>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혁명'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은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 혁명'입니다. 관련 문화 상품, 예술 작품도 많죠. 하지만 기존에 널리 알려지고 고착된 혁명의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깊이'를 포기하고 '폭'과 '다양함'을 택했습니다. 당시 제가 썼던 소개글(작품 선정의 변)은 아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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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북 막독 프로젝트 7기 :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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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과 한 단어의 진정한 만남에 기회가 필요할 때도 있다.
- 위화,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에서


여러분 각자에게 ‘혁명’이란 무엇인가요? 어떤 의미인가요?

혁명에 대한 정의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각자의 입장에 따라, 삶의 경험과 감정의 결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혁명하면 덮어놓고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입만 열었다 하면 혁명을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 혁명을, 체 게바라나 레닌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폭력 사태나 쿠데타를 혁명이라 우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혀 다른 관점에서 스마트폰의 등장을 혁명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인쇄술의 등장, 증기기관의 발명에도 역시 혁명이란 이름이 따라 붙곤 합니다.

다르게 풀자면 ‘혁명’이란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급격한 변화’ 또는 ‘밀어닥치는 흐름(물결)’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혁명은 우리들 각자에게 혁명에 동참할 거냐고 의사를 묻지 않습니다. 혁명은 폭력적이며 무차별적이며 비가역적입니다. 그것은 규모와 속도, 영향력의 측면에서 개인을 압도하며, 정치•경제 제도는 물론 일상의 관습을, 생각과 행동의 방식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바꿔놓습니다. 그 결과 개인의 정신과 신체에 무한한 열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강렬한 충격과 상처를 남겨놓기도 합니다. 이러한 변화와 충격 앞에서 우리들 각자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 걸까요. 적극적으로 물타기를 하는 것, 속절없이 휩쓸리는 것, 포기하고 체념하는 것, 혹은 좋았던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요.

혁명의 시대를 살아간 개인들의 이야기를 읽어보려 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역사의 소용돌이에 속절없이 휩쓸리고 갈팡질팡했는지, 그런 가운데서도 어떻게 저항의 거점을 구성했으며 희망의 실마리를 찾았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막독 7기 ‘혁명’>이 저 크고 무거워 보이는 단어인 ‘혁명’과 진정한 만남을 가질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 펭귄클래식
- 프랑스 혁명

슈테판 츠바이크, <마리 앙투아네트> 청미래
- 프랑스 혁명

에밀 졸라,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시공사
- 19세기 파리 소비 혁명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문학동네; 펭귄클래식; 민음사
- 러시아 농촌운동

미야베 미유키, <가모우 저택 사건> 북스피어
- 일본 2.26 사건

위화,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문학동네; <인생> 푸른숲
- 중국 문화대혁명 등

 

작품 선정 작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혁명'이라는 단어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게 되더군요. 소개글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개인의 힘으로는 맞설 수 없는 '거대한 물결' 내지는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 바로 '혁명'이라고 나름의 정의를 내렸습니다. 혁명이라고 하면 거의 자동반사적으로 정치적 차원만을 떠올리는데 여기서 벗어나게 된 게 고민의 결실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거대한 물결',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란 정의가 모호하고 포괄적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게 보자면 오늘날도 얼마든지 '혁명기'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보 혁명, 스마트 혁명, 신자유주의 혁명(?), 노동(유연화) 혁명(?), 자기계발 혁명 등. 이런 식으로 얼마든지 같다 붙일 수가 있는데, 이게 또 나름 대로 설득력이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들 자신이 매일 매일의 삶에서 '돌이킬 수 없는 흐름'에 휩쓸려 있다는 점을 피부로 느끼기고 있기도 합니다.

 

당시 [혁명] 최종 리스트에서 결국 빠지게 됐지만 아쉬움이 남는 책

코바야시 타끼지 <게 가공선>

 

 

 

 

 

 

 

 

 

 

 

리스트가 한없이 늘어나는 건 막아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일곱 편의 작품만을 선정했습니다만, 아쉬움도 많이 남았습니다. 특히 '프랑스 혁명'은 개인적으로 관련 책을 좀 더 읽고 싶었는데 일단은 '프랑스 혁명' 관련 책을 두 권을 선정했다는 걸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노명식,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책과함께, 2011). 따로 프랑스 혁명에 대해 공부를 좀 해보고 싶어서 구입해둔 책인데, 거의 못 읽었습니다. 사실 이 책은 예전(1997)에 나온 책을 개정판으로 낸 것인데, 그래서 그런지 서술 방식이나 문장이 좀 전형적이고 구태의연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이런 서술이 '객관적' 역사 서술일 터인데, 로버트 단턴 류의 재기발랄한 착상과 서로 관련 없어 보이는 요소들을 연결시키는 흥미진진한 서술 방식이 더 익숙해져서인지 잘 읽히질 않았습니다.  

 

최근(2013년 6월)에 출간된 <오늘 만나는 프랑스 혁명>도 눈여겨보고 있는데, 노명식 교수의 책과 더불어 읽어보려 합니다. 이번에는 느린 호흡으로 재도전!

 

 

그런데 바로 어제 (정말이지) '신기한' 책을 하나 발견, 프랑스 혁명에 대한 관심이 다시 생겨났습니다. 바로 아래의 책입니다.

 

 

 

 

 

 

 

 

 

 

 

 

 

 

(로베스피에르를 다뤘다는 점에서) 제목부터 끌리는데, 역사가도 아닌, 프랑스 작가도 아닌 한국 소설가가 '로베스피에르'를 소재로 글을 썼다는 게 무척 흥미롭습니다. 혹시 알레고리가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정말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이라고 합니다. 덧붙여 출판사 책소개에 따르면, 한국에서 프랑스 혁명을 소재로 쓴 소설을 최초라고 합니다. (뭐 이상하진 않네요.)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읽어볼만한 다른 책들은 다음의 것들이 있습니다.

 

 

 

 

 

 

 

 

 

 

 

 

 

 

 

로베스피에르는 <두 도시 이야기>나 <마리 앙투아네트>와 같은 책을 읽을 땐 그 존재감을 잘 느낄 수 없었던 인물입니다만, 어쨌든 프랑스 혁명의 '주역' 중의 '주역'이라고 하겠습니다. (<두 도시 이야기>는 픽션이라 역사적 실존 인물이 거의 등장을 하지 않고, <마리 앙투아네트>에서는 미라보 백작이 가장 존재감이 있는 편입니다.)

 

한편, 아무리 로베스피에르가 프랑스 혁명의 '주역'이라고는 하나 이건 교과서에서 주입받은 지식에 불과합니다. 적극적 관심을 갖게 되려면 아무래도 다른 계기가 필요한데, 저에게는 그 다른 계기가 일본 TV 애니메이션 <베르사유의 장미>였습니다. 이 애니메이션은 만화가 원작인데, 만화가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평전을 많이 참조했다고 합니다. 물론 오스칼, 앙드레는 가상인물이지요.

 

TV 애니메이션에서는 오스칼이 로베스피에르와 조우하는 장면이 짤막하게(하지만 인상 깊게) 나옵니다. 그리고 생쥐스트가 무분별한 폭력의 화신으로 역시 짤막하게 등장하죠. 츠바이크의 원작에서는 로베스피에리나 생쥐스트는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츠바이크의 원작에서 꽤 비중 있게 다뤄지는 미라보 백작이 TV 애니메이션에서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프랑스 혁명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또 다른 중요 인물은 당통입니다. 거기에 서준환 소설 제목이 <로베스 피에르의 죽음>이어서 곧바로 떠오르는 소설은 게오르크 뷔히너의 <당통의 죽음>입니다.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 중 한 권으로 올 초에 출간이 됐습니다. 게오르크 뷔히너는 독일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게오르크 뷔히너 상'이 있어서 익숙한 이름인데, 생각해보면 신기하게도 이런 경우 대체로 수상자가 더 유명하고 정작 상이 이름을 따온 당사자는 별로 유명하지 않은 듯...... 프랑스의 '공쿠르 상'이 또 다른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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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미제라블>에 이어 <위대한 개츠비>가 열풍입니다만, 이러한 '대대적인' 열풍은 좀 부담스럽기도 하고 뭔가 객쩍기도 한 게 사실입니다. 남들 다 읽는 걸 마치 휩쓸리듯 읽는 건 싫다며 상기 작품들의 인기에 대해 (저처럼) 묘한 반감을 가진 독자들도 꽤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해서 최근의 대대적인 열풍과는 다소 무관한, 그렇지만 나름 대로 '핫'한,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주목할 만한' 세계문학들을 꼽아봤습니다.

 

'우왓, 드디어 이 책이 나왔구나!' 내지 '어머, 이건 사야해!'라는 반응을 반자동적으로 이끌어내는, 출간 사실 자체가 반가운, 욕심 같아서는 앞뒤 잴 것 없이 바로 지르고 싶은 책들이지만, 주머니 사정이나 개인적으로 정리해둔 '읽어야 할 책' 리스트의 빽빽함을 고려해서 구매를 미뤄둔 것들이 많습니다... (뭐 몇 권은 어쩔 수 없이 질러버렸습니다만...) 말하자면 저 나름 안간힘을 써 가며 '지름신 강림'을 막고 있는 책들입니다.

 

 

 

 

 

 

 

 

 

 

 

 

 

 

 

 

지난 4월, 독일 작가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1.2>가 북인더갭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왔습니다. 이 작품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더불어 '20세기 모더니즘 3대 걸작'으로 꼽힌다고 합니다. 이런 작품이 아직까지 국내에서 완간이 안 됐다는 사실--뭐 알고 보면 그런 경우가 꽤 많기도 합니다만--이 우선 놀랍습니다. 덧붙여, 누군지는 몰라도 이 세 작품을 '3대 걸작'이라는 이름으로 묶은 이는 참 심한 악취미의 소유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묶어 두면, 독자는 알게 모르게 한 작품을 읽으면 다른 두 작품도 읽어야 한다--적어도 구매는 같이 해두어야 한다--는 심적 압박을 받게 되니 말입니다... 좋은 마케팅 수단이라 하겠습니다.

 

<특성 없는 남자>는 카프카의 <소송>, 토마스 만의 <마의 산>과 엮이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역시 마케팅의 한 수단이기도 하겠습니다만) 출판사 책 소개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지난 1999년 독일의 『차이트』(Die Zeit)지에는 놀라운 발표가 실렸다. 독일의 대표적 지성 99명에게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독일어 소설을 설문한 결과, 카프카의 『소송』(2위), 토마스 만의 『마의 산』(3위)을 제치고 로베르트 무질의 소설 『특성 없는 남자』가 1위를 차지한 것이다.

 

이렇게 엮더라도 막막하기는 매한가지긴 합니다... 그렇지만 분량이나 난이도 면에서 따진다면 [프루스트-조이스-무질] 조합 보다는 [만-카프카-무질] 조합이 훨씬 덜 막막합니다. 시기나 장소적으로도 "'20세기 전반기'를 대표하는 '독일 작가' 3인방의 대표작이"라는 식으로 한정이 되니 좀더 집중해서 읽을 수도 있겠고, 집중해서 읽고 나면 뭔가 남는 것도 많을 것이라는 기대도 가져볼 수 있겠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마침 토마스 만의 <마의 산 1.2>(을유문화사)과 카프카의 <소송>(펭귄클래식)을 소장하고 있으니 올 여름은 독일 작가 3인과 함께 보내볼까... 생각을 해봅니다만, <특성 없는 남자>가 출간된 두 권으로 완간이 아니라는 게 함정.

 

뭐 작품 자체가 미완이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완간을 기대해봅니다.

 

이번에 출간된 『특성 없는 남자』 1, 2권은 1932년 베를린 로볼트사에서 출간된 소설 1권의 83장까지를 번역한 1차분이다. 옮긴이는 1천여페이지에 이르는 생전의 출간분을 앞으로 순차적으로 출간할 계획이라며 “유럽의 짧은 자유주의 이후에 발생한 파시즘을 예견한 이 소설이 신자유주의 이후의 암울한 시대를 헤쳐나가는 우리 독자들에게 뜻깊은 작품으로 다가가길 바란다”고 밝혔다.

 

 

 

 

 

 

 

 

 

 

 

 

 

 

 

 

 

 

4월에는 제가 좋아하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초조한 마음>(문학과지성사)도 나왔습니다. 몇 번 언급했었습니다만 한국에서 츠바이크의 작품은 (생각해보면 이상하게도) 이른바 '메이저급' 출판사에서 출간된 적이 거의 없습니다. (문학동네 세계문학 시리즈로 나온 <체스이야기, 낯선 여인의 편지>는 유일한 예외라 하겠습니다.) 메이저급 출판사의 노하우가 책 만듦새에 반영이 안 돼서 그런지 딱 보기에 구매욕을 자극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번역의 질이나 가독성을 고려한 깔끔한 편집 등의 측면에서 안심을 할 수 없다는 점 등이 한국에서 츠바이크의 상대적으로 '낮은 인기'의 원인이라 생각됩니다. 

 

<초조한 마음>은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내고 있는 [대산세계문학 총서] 중 한 권으로 나왔습니다. 대산세계문학 총서는 국내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품, 알려지긴 했으나 아직 번역되고 있지 않은 작품 위주로 그 목록이 꾸려지고 있습니다(국내 초역의 비중이 70퍼센트 정도라고 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작품성이나 문학사적 의의는 충분하되 대중성은 좀 떨어지는 작품들인 거죠. <초조한 마음>도 대산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지 못했더라면 이런 좋은 만듦새, 디자인으로는 나오지 못했겠죠... (번역은 아직 확인을 못했습니다.)

 

 

한편, 만듦새와 디자인 면에서는 좀 '구린' 느낌이 들지만, 제가 아주 재밌게 읽었던, 그래서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 (번역도 나름 괜찮습니다) 츠바이크의 작품은 다음의 두 작품입니다.

 

 

 

 

 

 

 

 

 

 

 

 

 

 

 

 

2013년 상반기에는 왠지 파란색 표지의 세계문학 작품들을 자주 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초조한 마음>이 그렇고, 다음에 소개하는 작품이 그렇습니다. 가장 최근에 세계문학 전집 시장에 뛰어든 창비에서 가장 최근에 펴낸 (최근 이래 봤자 벌써 2월의 일입니다만...) <미하엘 콜하스>입니다. 작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는 카프카가 좋아한 작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창비에서 <미하엘 콜하스>라는 제목으로 펴낸 이 작품집은 이미 책세상에서 2005년에 <버려진 아이>라는 다른 단편을 표제작으로 해서 출간된 적이 있습니다. 즉 표제작이 다를 뿐 두 책은 같은 책의 번역본입니다. 다만 번역을 비교해보니 창비에서 새 번역본을 내면서 번역에 무척 신경을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책세상 판이 평이한 산문체인데 반해, 창비 판은 작가 특유의 문체를 살리기 위해 '민담체'라 부를 만한 독특한 문체를 사용하고 있고 번역어 선택에도 상당한 공을 들였습니다.

 

두 번역본을 비교해서 읽어본다면 소설에서 '문체'가 갖는 중요성을 자연히 알게 되리란 생각입니다.

  

 

 

 

 

 

오늘날 독일문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독일이 낳은 가장 위대하고 대담하고 야심 찬 문학가 (…) 둘도 없는 희곡작가였으며―둘도 없는 산문작가이자 소설가”(토마스 만)로 손꼽히는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Heinrich von Kleist, 1777~1811)의 중단편소설집 『미하엘 콜하스』가 창비세계문학 14번으로 출간됐다. 이 작품집은 표제작 「미하엘 콜하스」 외에 「O. 후작 부인」 「칠레의 지진」 「싼또도밍고 섬의 약혼」 「로까르노의 거지 노파」 「주워온 자식」 「성 체칠리아 또는 음악의 힘」 「결투」 등 클라이스트 중단편 여덟편 전체를 완역하여 묶어 냈다.


클라이스트 특유의 문체를 그대로 살리고자 문단 구분, 간접화법과 직접화법 등을 충실히 따라 옮기되, 잘 읽힐 수 있도록 세심하고 적확한 한국어 문장을 구사한 것이 이번 번역본의 특징이다. 방대한 분량의 중편소설 「미하엘 콜하스」의 경우, 등장인물 및 사건전개를 설명해주는 부록을 실어 작품의 이해를 도왔으며, 본문 뒤에는 50여 페이지에 이르는 작가의 생애 및 수록작 각각에 대한 깊이있는 해설을 덧붙였다.

 

 

 

5월에는 톨스토이의 <부활 1.2>이 문학동네에서 나왔습니다. <부활>의 판본은 (<안나 카레니나> 만큼은 아니지만) 다양합니다. 열린책들에서 2010년에 나온 게 있고, 민음사에서는 일찍이 2003년에 출간된 바 있네요.

 

참고로, 민음사 판의 역자인 박형규 교수는 '톨스토이 전문 번역가'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아주 오랜 기간 동안 꾸준히 톨스토이 작품들을 번역해내고 있습니다.

 

 

 

 

 

 

 

 

 

 

 

 

 

 

 

 

 

 

 

 

 

 

 

 

 

 

 

 

 

 

 

 

 

박형규 교수는 현재 뿌쉬낀하우스라는 출판사에서 '똘스또이 전집'을 펴내고 있기도 합니다... 만, 현재 출간된 것은 <안나 카레니나> 한 권 뿐... 이 책이 출간된 게 올 4월의 일인데, 현재(6월)까지 아직 다른 작품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네요. 기대하고 있는 것은 역시 <전쟁과 평화>입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뿌쉬낀하우스 판은 단 권이라 책 부피와 무게가 들고 다니며 읽기엔 곤란할 정도라는 점에 유의하시길...

 

 

 

 

 

 

 

 

 

 

 

 

 

 

 

러시아 문학에 관심이 있다면 역자 '박형규'로 검색해서 책을 살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안나 카레니나> 번역으로 미루어 보건대) 박형규 교수의 번역은 문장이 다소 긴 편이고 단어 선택이나 대화 번역이 옛스럽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믿고 읽을 만한 번역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전쟁과 평화>가 새로 번역돼서 나오는 게 늦어지고 있는데 (소문에 따르면 펭귄클래식에서 조만간 출간 예정이라고 합니다...) 박형규 교수가 번역한 범우사 판은 구해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책 만듦새, 디자인, 편집 등 외형적 측면에서 요즘의 '세련된' 독자들의 눈높이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

 

 

 

 

 

 

 

 

 

 

 

 

 

 

 

하지만 뿌쉬낀하우스에서 <전쟁과 평화>가 출간된다 하더라도 박형규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될 것이 거의 100퍼센트 확실하니 당장에 읽어보고 싶은 분은 범우사 판으로 읽어도 무방하겠습니다. (펭귄클래식에서 '조만간' 번역본이 출간된다고는 하나, 이 '조만간'이 과연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르니 말이지요...)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의 신간은 항상 유의해서 보게 됩니다. 모르긴 몰라도 현재 세계문학전집을 펴내고 있는 출판사들 중에서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가장 '공격적인' 출판사가 문학동네가 아닌가 싶습니다. 작품 출간 페이스가 빠르다는 점이 그렇고, 전집 구성의 측면에서도 기존 '세계문학'의 리스트 안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세계문학'들을 발굴해서 펴내고 있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테오도어 폰타네의 <에피 브리스트>, 라파예트 부인의 <클레브 공작 부인>, 닥터로우의 <래그 타임>, 존 더스패소스의 <맨하탄 트랜스퍼> 등이 그런 느낌을 들게 하는 작품들이었죠.

 

그러던 문학동네가 100권을 찍고 난 후에는 톨스토이, 헤세, 나보코프, 포크너 등 기존 '세계문학' 카테고리로 돌아가는 듯해서 좀 아쉬웠는데(그 와중에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 출간은 반가웠습니다만), 최근에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 <모래그릇 1.2>을 세계문학전집의 108번째 권으로 펴냄으로써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마쓰모토 세이초라고 하면, 아직까지는 국내 독자들에게 낯선 이름이겠지만 일본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 사카모토 료마 등과 더불어 '국민 작가'의 반열에 올라선 작가입니다. '사회파 미스터리'의 거장으로 불리기도 하죠. 미스터리(추리소설)란 본래 기발한 범죄의 트릭과 탐정의 개성에 의존하는 등 오락물의 성격이 강한 편인데, 마쓰모토 세이초는 뭣보다 '동기'의 묘사에 중점을 두면서 추리소설에 '사회성'을 추가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미스터리'의 새로운 경향으로서 '사회파 미스터리'라는 흐름을 만들어내고 주도한 작가인 것이죠.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들은 이전에도 간헐적으로 번역 출간이 됐었는데, 주로 추리 소설을 펴내는 동서문화사에서 몇 편 출간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세이초 월드]라는 이름 아래, 체계를 갖춰 시리즈로 출간되기 시작한 게 불과 작년(2012년)의 일입니다. 미야베 미유키, S.S. 반 다인 등의 추리 소설을 전문적으로 펴내고 있던 북스피어 출판사와 역사비평사의 임프린트(?)인 모비딕 출판사가 의기투합, 번갈아가며 세이초 작품을 펴내고 있고, 현재까지 <짐승의 길>, <일본의 밤과 안개> 등 총 6편의 작품(권 수로는 8권)이 출간되었습니다. 세이초 작품 세계를 체계적으로 소개한다는 나름 야심찬 기획입니다만, 아직까지 판매량은 그리 높지 않은 듯.

 

 

 

 

 

 

 

 

 

 

 

 

 

 

 

 

 

 

 

 

 

 

 

 

 

 

 

 

 

 

 

 

 

한데, 같은 작가의 같은 작품이라도 어떤 맥락에서 읽게 되느냐의 문제는 나름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세이초의 작품을 [동서문화사 미스터리 걸작선] 중 한 권으로 읽는 것은 [세이초 월드] 시리즈 중 한 권으로 읽는 것과 다르고, [문학동네 세계문학 전집] 중 한 권으로 읽는 것과 또 다른 느낌일 수가 있는 거죠.

 

추리소설은 SF와 더불어 장르 소설의 양대 산맥이랄 수 있겠는데, 세계문학전집 리스트에는 거의 오른 적이 없었죠. (출판사 이름처럼 '세계문학'이란 범주에 대해 가장 '열린' 태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열린책들에서 셜록 홈스 시리즈 중 한 권이라든지, S.S. 반 다인의 <비숍 살인 사건>이라든지, 대실 해밋의 <몰타의 매> 등을 세계문학 시리즈로 출간한 적은 있었습니다만.

 

마쓰모토 세이초의 <모래그릇> 출간을 신선한 사건으로 볼 수 있는 이유는 이런 것도 있습니다. 세이초가 '고전 작가'라 부르기엔 가까운 시기에 활동한--2차 대전 이후 시기에 활동한--'현대' 작가라는 점, 그리고 노벨상 내지는 (순문학에 주어지는 상인) 아쿠타가와상을 받지 않은 '일본 작가'라는 점. (물론 세이초는 초기작 <어느 고쿠라 일기 전>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습니다만, 전반적으로 순문학 작가로 여겨지는 작가는 아닙니다.) 

 

이런 작품이 세계문학전집 리스트에 올랐다는 사실만으로도 굉장히 신선한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각 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 리스트를 잘 살펴보면 일본 작가의 작품이 있는 경우는 (2차 대전 이전의) 근대 작가이거나 노벨상을 수상했거나 한 작가들(나쓰메 소세키, 가와바타 야스나리, 오에 겐자부로, 다자이 오사무 등)로 한정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학동네만이 이런 경향에서 벗어나 이즈미 교카나 이노우에 야스시, 메도루마 슌 등 다수의 일본 작가들을 전집 목록에 넣은 바 있습니다. 하지만 '순문학 작가'로 간주되는 이들에 비해 '대체로 대중 작가로 간주되는'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을 리스트에 넣은 건 여전히 흥미롭습니다.

 

일본 소설을 전집 리스트에 많이 넣고 있는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의 행보와 관련하여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2009년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가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어 히트했다는 사실입니다. <1Q84>는 '1억엔'이라는 기록적인 선인세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었는데요, 어쨌든 <1Q84>는 결과적으로 손익분기점을 훌쩍 넘는 판매고를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2009년 12월부터 문학동네가 세계문학전집을 펴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출판사 내에서는 "하루키 팔아 세계문학전집 낸다"는 말이 나돌았다고도 합니다...

 

뭐 확실한 증거는 없고 소문과 정황 증거뿐입니다만, 실제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구성에서 일본 소설 비중이 상당히 높다는 사실을 고려하면--그리고 최근의 <모래그릇> 출간을 고려하더라도--이러한 뒷얘기는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리기도 합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세이초의 작품이 '세계문학 전집' 리스트에 올라감으로써 '세계문학' 범주의 외연이 크게 확장된 셈입니다. 어쩌면 조만간 무라카미 하루키의 초기작이나 대표작을 전집 리스트에서 보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세이초 이야기를 했으니 세이초의 '장녀'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미야베 미유키(팬들은 '미미 여사'라고도 부르죠)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겠지요. 마침 신작이 두 권이나 나왔습니다. 앞서 (모비딕과 함께) [세이초월드]를 발간하고 있다고 소개한 북스피어에서 <진상 1.2>이란 작품이 출간되었고, <솔로몬의 위증>(문학동네) 역시 곧 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야베 미유키 역시 '사회파 추리소설가'로 알려져 있지요. 이런 점에서 세이초의 후계자란 평가를 듣고 있습니다. 일본에 이어 한국에서도 영화화되어 꽤 인기를 끈 <화차>(문학동네, 2012), 90년대 일본의 부동산 버블 문제를 다룬 나오키 문학상 수상작 <이유>(청어람미디어, 2005)가 제가 읽어본 이른바 '사회파 추리소설'에 해당하는 작품입니다. 그 외에 <모방범>(문학동네, 2012) 등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만, 분량이 많아 좀 부담이 됩니다. 뭐... 미미 여사든 세이초든 워낙에 다작을 한 작가들인지라 주요 작품만 찾아 읽는다고 해도 ㅎㄷㄷ...

 

ㅎㄷㄷ 하는 와중에 재밌게 읽은 미미 여사의 소설로는 1930년대 중반 2.26 사건을 다룬 역사 SF 소설 <가모우 저택 사건 1.2>(북스피어, 2008)이 있습니다.

 

 

 

 

 

 

 

 

 

 

 

 

 

 

 

 

 

 

 

 

 

 

 

 

 

 

 

 

 

 

 

미미 여사는 한국에서도 나름 탄탄한 팬층을 거느리고 있고 <모방범> <화차> 등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스승' 격인 마쓰모토 세이초는 그닥 알려지지 않은, 뭐랄까 좀 불균형한 모양새입니다. 

 

마쓰모토 세이초와 미미 여사의 연결 고리가 확연히 드러난 책으로는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북스피어, 2009)가 있습니다. 미야베 미유키가 책임 편집을 맡아 수록 작품을 골랐고, 작품들을 주제별로 묶었으며, 친절하고 간단한 해설/감상까지 곁들였습니다. 만듦새도 괜찮고 수록된 작품들이 하나 같이 재미 있어서, 상중하 세 권을 갖추고 있으면, 뭐랄까, 한 달 치 식량을 쌓아놓은 듯, 꽤 든든한 느낌을 주는 컬렉션입니다.

 

 

 

 

 

 

 

 

 

 

 

 

 

 

 

 

처음에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와 함께 '3대 모더니즘 걸작'으로 꼽힌다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언급했었는데요, 작년에 민음사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2 : 스완네 집 쪽으로>가 나온 이후, 올해 5월 펭귄클래식에서도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 스완 댁 쪽으로>란 제목으로 출간이 됐습니다. 덕분에 '골라 볼 수 있는' 재미/사치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만, 완간은 아닌지라 마음 먹고 통독을 하려면 조금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펭귄에서 나온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는 페이퍼백이 아닌 하드 커버로 나왔고, 북커버도 블랙 펭귄 디자인이 아닌 새로운 디자인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가격이 다소 '쎈' 편이지만 <스완네 집 쪽으로>(펭귄 판에서는 <스완 댁 쪽으로>로 번역)를 1, 2로 분권하지 않고 한 권 합본으로 냈다는 점에서 그렇게 '쎈' 편은 아니라 하겠습니다. 뭐 이렇게 생각해야 치미는 소장 욕구/강림하는 지름신을 영접할 수 있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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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혜윰 2013-06-07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몰랐던 작품 알고 갑니다. 찜해둬야겠어요^^

시로군 2013-06-07 19:55   좋아요 0 | URL
지름신 강림에 유의하시길.. ^^;;

천사 2016-09-17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식으로 서평을 쓴다면 한 편 쓸 때마다 보양식을 드셔야 할 거 같은데... 거저 먹는 거 같아 가책이 드네요... 감사합니다.

시로군 2016-12-12 16:41   좋아요 0 | URL
에고. 아닙니다. 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뒤늦게 댓글을 다네요..^^;;)
 
우체국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혹시라도, 요즘 중고등학생들이 우연한 기회에 <우체국>을 읽는다면 아마도 이렇게 한 마디 내뱉지 않을까 싶습니다.

 

쩔어!”

 

(앞에다 요즘 학생들이 강조를 하기 위해 흔히 쓰는 속어를 한 마디 덧붙이면 부코스키가 좀 더 흐뭇해할 것 같습니다만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그런데 쩔어!”라는 짧은 독후감상은 여러 모로 적절한 감상인 듯합니다.

 

일단 <우체국>의 작가 찰스 부코스키와 그의 분신으로 보이는 주인공 헨리 치나스키가 굉장히 쩌는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쩐다'라는 표현은 일단 매력적이다, 멋지다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실제로 부코스키는 전 세계에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죠. 뭐 별 매력을 못 느끼는 독자도 있겠습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하지만 이런 반응을 보이는 독자라도 쩔어!’라는 표현에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작가가 자신의 저속함을 한없이 노골적이고 뻔뻔한방식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헨리 치나스키란 인물은 여느 소설에서 흔히 마주치기 힘든 캐릭터임은 분명합니다. 무엇보다 그는 항상 요즘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 그대로 쩔어 지내는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세 가지에 대해 그렇습니다. 여자, , 경마. 아차, 한 가지를 빼먹을 뻔했네요. 그건 바로 ’입니.

 

여기 한 편의 저속한 소설이 있습니다.

 

아니 우리가 읽은 게 과연 소설인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서 이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뭐 이딴 게 소설이라고!”라는 반응 역시 있을 수 있는 것이니까요.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게 소설이라면 개나 소나 다 쓰겠네!” 그런데 어쩌면 이러한 반응이야말로 찰스 부코스키의 매력을 아주 잘 드러내는, 왜 그가 전 세계에 수많은 추종자들 거느리고 있는지 그 이유를 잘 설명해주는 반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 쓸 수 있습니다. 심지어 좌우명(정확하게는 묘비명이지만 좌우명이라고 봐도 괜찮을 것입니다)노력하지 마라인 사람도 썼으니 말입니다. 소설의 이론을 섭렵하지 않아도, 오늘날 인기 있는, 혹은 주목 받는 소설들을 훑어보고 참조하지 않아도, 글쓰기 전문인을 양성하는 국문과나 문예창작과를 나오지 않아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관심사가 오로지 여자, , 경마뿐인 부코스키라는 작자도 썼는데요 뭘. 그러니까 부코스키가 소설 마지막에 적고 있듯, 어느 날 문득, 아침이 되고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의식했다면, 그리고 때마침 아마 소설을 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쓸 수 있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방대한 자료 조사를 하지 않아도, 마라톤으로 체력을 관리하며 정해진 시간 동안은 반드시 몇 매 이상의 글을 쓴다는 프로 작가적 마인드가 없어도, 정치적 올바름이나 인권 감수성에 대한 개념은 개를 줬어도, 현실에 대한, 소외 받는 존재들에 대한 작가적 고민이 없어도, (욕은 좀 먹겠지만) 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이야기를 솔직하게 (혹은 뻔뻔하게) 쓰면 되는 겁니다. 뭐랄까, 안심이 되고 조금쯤 자신감도 생깁니다. 어쩌면 어쭙잖은 힐링 효과일 수도 있겠습니다.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온 (소설인지 뭔지 모를) 무언가를 읽었습니다. 여성 잡지에 실린 싸구려 소설 같기도 한 이 소설, 돈과 시간을 들여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읽어버리고 만 지금도 헷갈리는 것도, 고백건대, 사실입니다.

 

의의를 부여해보죠. 합리성과 효율성이란 이름 아래 개성을 말살하고 인간성을 황폐화시키는 현대의 물질·기계문명에 대한 반항과 비판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그리스인 조르바1950년대 미국의 비트(Beat) 제너레이션,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등장한 6-70년대 히피 세대의 감성이런저런 사회운동들성혁명 또는 성해방비타협적 정신일체의 권위에 대한 저항80년대 한국에서 시도된 민중문학 노동자문학…… . 그만 두겠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칫하면 정신이 이상해질 정도의 일입니다. 왜 사람은 책을 성실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왜 책에 쓰여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요? 왜 읽고서 옳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채 정보라는 필터를 꽂아 무해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일까요? 아시겠지요. 미쳐버리기 때문입니다. [...] 카프카나 횔덜린이나 아르토의 책을 읽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을 완전히 알아버렸다면, 우리는 아마 제정신으로는 있을 수 없을 겁니다. 서점이나 도서관이라는 얼핏 평온해 보이는 곳이 바로 어설프게 읽으면 발광해버리는 사람들이 빽빽 들어찬, 거의 화약고나 탄약고 같은 끔찍한 장소라고 느낄 수 있는 감성을 단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37-8.

 

한 작가를 가로지르는 종횡의 맥락, 역사적·장소적 맥락을 살핌으로써 작가의 작업에 의의를 부여하고 작가의 문학사적 위치를 자리매김하는 건 분명 필요한 일이겠지만, 동시에 작가와 그의 작품을 어떤 한계 속에, 안전장치 속에, 차곡차곡 정리해서 책장에 가둬버리는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사사키 아타루 식으로 말하자면 “‘정보라는 필터를 꽂아 무해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일입니다.

 

 

문학은, 읽고 쓴다는 것은, 사실 굉장히 해로운 것입니다. 진지한 독서는 정신적 혼란을 초래합니다. 어설프게 읽었다가는 미쳐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안전장치입니다. 책에 너무 진지하게 빠져들지 않도록 제동을 걸어 줄 안전장치입니다. 책을 읽고 나서 뭔가 그럴듯한 의미를 부여해서 '이 책은 좋은 책'이라 자리매김하는 작업이 곧 안전장치 역할을 합니다. '좋은 책'이라... <우체국>에 적용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이런 이야기도 해볼 수 있겠습니다. 일생 동안, 우리를 보호해줄 안전장치를 보장 받자면 좋은 사람’(무해한 사람=“해치지 않아요.”)이 되어야다른 사람들로부터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받아야—합니.

 

존스톤 씨는 우체국에 30년이나 근무했어!”

그게 대체 이 일과 무슨 상관입니까?”

말했잖아, 존스톤 씨는 좋은 사람이라고!” (15)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그 사람들 모두 한 번 정도는 다 그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G.G.착한 사람이야.’ 하지만 이 착한 아저씨가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는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54)

 

, 그럼 이제 여러분은 훌륭한 직업을 갖게 되었습니다. 항상 깔끔하게 행동하기만 하면 앞으로 남은 일생 동안 안전장치가 생기는 겁니다.”

안전장치라니? 감옥에 가도 안전장치는 있다. 27제곱미터 넓이의 공간을 쓰면서 집세나 각종 공과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소득세도 없고 양육비도 낼 필요 없다. 자동차 번호판 요금도 내지 않고 교통 범칙금도 내지 않고 음주 운전으로 체포되지도 않는다. 의료 진료는 무료. 비슷한 취미를 가진 친구들끼리 동료애도 쌓고. 교회도 다니고. 호모들도 만나고. 죽으면 장례도 공짜. (83)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이란 곧 무해한 사람이란 것입니다. 그것을 보장해주는 게 ‘훌륭한 직업=안전장치라는 건 오늘날의 상식입니다. 상식을 따르자면, 훌륭한 직업을 갖고 남들로부터 좋은 사람(=무해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로 설정될 법합니다. 하지만 뻔뻔한 치나스키는 안전장치는 감옥에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할 만도 한 것이 평생보장 안전장치를 갖게 되는 대신 지불해야 하는 대가도 만만찮기 때문입니다. 치나스키의 우체국 시절 동료 G.G.는 자신이 집배원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오랫동안 봉사에 헌신해온’ 인물입니다. 그런데, G.G.20대부터 60대 후반까지 일했지만, 결국에 남는 건 일에 대한 혐오’밖에 없습니. G.G.를 보며 헨리 치나스키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우직한 말’, ‘어느 날 갑자기 멈춰 버린 낡은 차를 떠올립니다. 서슴없이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그의 인생은 그리 멋지지 않았지만 이제는 아예 똥 덩어리가 되어 버렸다.(53)” 똥덩어리라니, 치나스키 이 사람, 이거... 남의 삶을 너무 함부로, 과장해서, 단정해서 말하는 건 아닐까요?

 

지나간 11년이 머리를 뚫고 지났다. 이 일이 사람을 갉아 먹는 것을 봐왔다. 사람들은 흐늘흐늘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도지 우체국에 지미 포츠라는 직원이 있었다. 내가 처음왔을 때 지미는 흰 티셔츠를 입은 건장한 사내였다. 이제 그때 그 사람은 사라졌다. 그는 바닥에 가능한 한 가까이 붙어 앉아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로 버티고 있었다. 너무 피곤해서 이발도 못 했고 3년 동안 똑같은 바지를 입었다. 일주일에 두 번 셔츠를 갈아입었고, 아주 천천히 걸었다. 우체국이 그를 살해한 것이다. 그는 쉰다섯 살이었다. 퇴직까지는 7년이 남아 있었다.

난 못 버틸 거야.” 지미는 내게 말했다.

사람들은 녹아 버리거나 살이 뒤룩뒤룩 쪘다. 특히 엉덩이와 배가 비대해졌다. 줄곧 스툴에 앉아 있어야 하고 같은 동작과 걸음걸이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됐다. 어지럼증이 생기고 팔, , 가슴, 안 쑤시는 데가 없었다. 일하려면 좀 쉬어야 하기 때문에 낮에는 종일 잠만 잤다. 주말에는 일을 잊기 위해 술을 마셨다. 여기 올 때는 84킬로그램이었다. 지금은 101킬로그램이었다. 고작 오른 팔만 움직일 뿐이니까. (219-220)

 

그래요, 섣부른 단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치나스키에 따르면, 일은 사람을 갉아먹고 흐늘흐늘 녹아내리게 만듭니다. 일은 읽고 쓰는 것만큼이나 (어쩌면 그 이상으로) 사람을 미칠 지경으로 몰아넣습니다.

 

저녁인지 점심인지 먹은 후(열두 시간씩 근무를 한 후에는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된다) 나는 말했다. “이봐, 자기. 미안하지만, 이 일 때문에 내가 미쳐 가고 있다는 거 모르겠어? 저기, 그냥 포기하자. 그저 빈둥빈둥 누워서 섹스나 하고 산책이나 하고 얘기는 조금만 하자. 동물원에 가는 거야. 동물을 구경하자. 차를 타고 내려가서 바다를 구경하는 거야. 45분밖에 안 걸려. 오락실에 가서 게임도 하고. 경마장이나 미술관, 권투 경기에 가자. 친구도 사귀고. 웃자고. 이렇게 살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거야. 이러다 죽는다고.”

안 돼, 행크. 우리는 보여 줘야만 해. 아빠랑 할아버지에게 보여 줘야만 한다고…….” // 텍사스 시골 촌년이 할 만한 말이었다. // 나는 포기해 버렸다. (93)

 

공정을 기하기 위해, 치나스키의 근무 조건과 일의 특성을 잘 분석해볼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밤에, 12시간(+3H)을 근무합니다. 배달 업무든 우편 사무든, 쉴 틈이 거의 없는심지어 식사할 시간도 없는, 단순 반복 작업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하겠습니다. 직장에서는 동료애가 싹틀 여지도 별로 없어 보입니다. 서로는 서로를 감시하거나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남들을 감시하고 괴롭히면서 때로 은밀한 쾌감도 느끼지만, 결국은 다 같이 녹아내립니다. 보다 높은 효율성과 정확성을 위해 배달 구역 구분표를 외우기도 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택배 업무와 유사하다고 보면 될까요. 그렇다면 모든 직업에 대해 일반화하기란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만약 치나스키가 스펙이 좀 더 좋았더라면, 하는 가정에서 출발하여 이런 저런 상상을 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체국'에 취직하기 전, 헨리 치나스키는 직장을 백 개는 넘게 거친’ ‘떠돌이 막일꾼(=팩토텀)’이었습니다. 그가 이런 저런 불평들을 하면서도 11년 동안이나 우체국에 붙어 있었던 건 그나마 우체국 일이 쉬운 편에 속한 때문이라고 짐작해볼 수도 있습니다. 그는 좀 예민한 편인 것 같습니다. 항상 아프고 환각에 들뜬 채 숙취에 찌든 몸(19)” 상태이니 그럴만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주변에는 유독 미친 사람들—정확히 말하자면 '그를 미치게 만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의 목소리는 똑같았다. 어디에서 우편물을 배달하든 간에 항상 같은 이야기를 듣고 또 듣는다.

늦게 왔네요?”

매일 오는 집배원 아저씨는 어디 있우?”

안녕, 우체부 아저씨!”

아저씨, 아저씨! 이거 여기 오는 우편물 아니에요!”

거리는 미치광이와 맹추들로 가득했다. 대부분 좋은 집에서 살았고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서 뭘 하면 그렇게 먹고 놀 수 있는지 궁금했다. 자기 우편함에 편지를 넣지 못 하게 하는 남자도 있었다. 그는 차도에 서서 내가 오는 것을 두세 블록 전부터 쳐다보고 있다가 내가 가까이 가면 한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순로를 배달해 본 적이 있는 다른 직원들에게 물어보았다.

거기 서서 손 내미는 남자는 도대체 왜 그러는 거래?”

거기 서서 손 내미는 남자가 누군데?”

그들도 다들 목소리가 똑같았다. (38-39)

 

 

치나스키는 거리는 미치광이와 맹추들로 가득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자신이 미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구분표를 외운답시고 모든 걸 섹스와 나이에 연관시켜외우는 건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니죠. 이런 대목도 있습니다.

 

, 그렇다면의사는 종이를 돌려준다. ‘이런 걸 외우고 싶지 않다는 게 미친 건 아니죠. 외려 이걸 외우고 싶다면 미쳤다고 해야 할 겁니다. 상담료는 25달러입니다.’ (132)

 

실제 의사의 말이 아니라 자가 분석이라는 게 함정이긴 합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치나스키가 극도로 자기중심적인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치나스키의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는 발언은 되는 대로 살아온 인생’ ‘존재 자체가 잉여인 처지에 대한 (어디까지나 자기입장에서의) 변명이나 자기합리화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어렸을 적부터 해온 대로 <우체국>에서 뭔가 교훈에 해당하는 걸 끄집어내보려는 노력을 기울여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해설을 참조하면 반복적 노동에 대한 혐오’,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이 이 소설에는 담겨 있다. 나도 모르게 한 마디가 툭 튀어나옵니다. 빌어먹을. 귀에 닳도록 들어온 소리. 들을 때마다 한 귀로 흘러들어와 다른 귀로 빠져나간 소리.

 

여기서 한 가지. 치나스키가 ○○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주의해야 합니다. 그는 혁명가도 노동운동가도 아닙니다. 그는 노동 조건에 대해 불평은 하지만 뭔가 근본적인 잘못을 비판하거나 제도를 개혁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느니 차라리 욕을 실컷 해주거나 무단결근을 하거나 아예 회사를 그만둬버립니다. 앗차, 사실 이런 식이어서는 곤란합니다. 노동 조건이나 관료주의에 물든 사회 분위기가 잘못되어 있다는 건 충분히 알겠지만, 이런 제멋대로의 방식혼자 미꾸라지처럼 도망치는 방식이어서는 누구라도 편들어주기가 쉽지 않으니 말입니다. 우리의 주인공 치나스키는 이런 저런 주의운동에 대해 경멸어린, 시니컬한 태도를 취합니다. ‘작가 워크숍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태도를 취합니다(그 자신 작가이면서도). 중요한 점은 부코스키는 신념에 차 뭔가를 주장하기 위해, 자신이 옳다고 믿는 뭔가를 입증하기 위해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많은 문학종사자들처럼) 글쓰기 자체를 숭고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의 글쓰기에는 어떤 것이든 윤리라고 부를 만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의 글을 통해 독자들의 눈앞에 생생하게 드러나는 건 술과 섹스 때문에 정신이 너덜너덜해진, 그러면서도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작가의 모습입니다. 그의 글에서는 타인에 대한 관심이나 기대가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사회주변부의 잉여로서 그는 그저 혼자서 마냥 쩔어 있는’ 것입니다. 그의 소설에는 (요즘 소설들이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연대관계 맺음에 대한 고민도 없습니다. 자기반성도, 어떠한 종류의 깨달음도 없습니다. 그는 아주 일관성 있게, 언제나 변함없이 술과, 여자와, 경마에 쩔어 있을 뿐입니다. 일례로 그는 언제 어느 상황에서나 여자들에게 한 눈을 파는데, 가만 보고 있노라면 감탄이 나올 정도입니다.

 

그럼 애 아빠는?”

로이랑은 이혼했어. 쓸모 하나 없는 개새끼. 빈둥빈둥 놀면서 술이나 마시고 경마밖에 안 했지.”

저런.” (151)

 

어쩌면 페이는 세상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침착한 그녀가 자랑스러웠다. 더러운 접시를 씻지 않고 놔둔 것과 <뉴요커>나 보며 빈둥댄 것과 작가 워크숍이나 다닌 것 모두를 용서하기로 했다. 이 나이든 여자는 무관심한 세상에서 또 하나의 외로운 존재일 뿐이었다. (192)

 

저런이라고 치나스키가 말할 때 우리는 그의 뻔뻔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건 약과예요. “무관심한 세상에서 또 하나의 외로운 존재라고 뭔가 심금을 울릴 듯한 표현을 써놨지만, 잠시 후 그는 피부색이 거무스름한 간호사에게 한 눈을 팝니다....... ‘저런!’

 

부코스키의 글쓰기는 어떤 면에서 생활글쓰기에 가깝습니다. 사생활의 단면들과 자신의 속내를 여과 없이 그대로 옮겼다는 점에서 이상적인 생활글쓰기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부코스키 식 글쓰기는 노력하지 않습니다. ‘있어 보이려고노력하지 않습니다. 달리 말해 ‘문학이나 소설에 걸맞은 글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문학은 원래 먹고 사는 데 도움이 안 되는 잉여적인 것이라지만, 부코스키의 글은 문학중에서도 잉여에 속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그의 글을 읽는 독자들은 불편함을 느낍니다. ‘문학 작품을 읽는다는 기분이 잘 안 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편함과 동시에 통쾌함도 느낍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부코스키가 자신의 시선을 사회로 돌리지 않고, 어떤 (작가라면 모름지기 지니도록 노력해야 할) 공평무사한 시선, 세상을 꿰뚫는 통찰력을 가지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의 시선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 아닙니다. 오직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생활과 관심사에 집중된 시선이고(그 관심사란 건 앞서 말했다시피 여자(섹스), 술, 경마입니다.), 미래가 아닌 현재에 집중된 시선입니다. 말하자면 한계가 뚜렷한, 협소하고 편향된 시선입니다. 부코스키는 뭔가 의미 있는 글을 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자기 글을 좋은 글이라고 말해줄 것을 바라고 쓰지도 않았습니다. 이 사회의 문제와 치부를 건드리고 거기에 뼈아픈 일침을 가하기 위해 쓰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글은 오히려 '자기 자신의' 치부를 드러냅니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이 드러내 놓은 것들조차 딱히 치부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합니다. 그는 그런 것들을 뻔뻔하게 쓰고 자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에게 묘한 통쾌함과 안도감을 줍니다.

 

이러한 통쾌함과 안도감이 무엇으로 이어질지는 모르겠습니다. 문학을 사랑한다고 자부하는 많은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그냥 통쾌하고 말 일이 아니라고, 문학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뭔가 반감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문학은 어떠어떠한 것'이라는 규정에는 문학은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한다, 라는 일종의 '의미에 대한 강박'이 스며든 것 같아 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글쎄요, 부코스키의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둘 수도 있겠습니다. 그대로 이어나가든, 뭔가 새로운 것으로 잇든 간에 말이지요. 하지만 한 가지, 뭐가 됐든 뭔가 의미 있(어 보이)는 것 이어야만 한다는 강박으로부턴 좀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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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2009.

열린책들. 2011.

 

 

 

 

 

 

 

 

 

 

 

 

 

 

 

 

 

문예출판사. 2008.

문학동네. 2011.

서울대학교출판부. 2011.

 

 

 

 

 

 

 

 

 

 

 

 

 

 

 

 

 

토마스 하디, <테스> 백석 옮김. 서정시학. 2013.

 

백석이 옮긴 <테스>가 출간됐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테스>를 한 번 읽어보려던 차에, 책이 나왔네요. 백석은 왜 하필 <테스>를 번역했나, <테스>의 어떤 점에 중점을 두고 번역했나, 번역어 선택에 있어 어떤 기준을 갖고 있었나 등을 체크하며 읽어봐야겠습니다.

 

 

 

 

 

 

 

 

 

 

 

 

 

 

 

 

 

근대 문인들이 번역한 세계문학 작품으로는 페이퍼하우스에서 출간한 에밀 가보리오의 <르루주 사건>, 코난 도일의 <붉은 실> 등이 있습니다.

 

 

엮은이 박진영으로 검색하면 다른 번안 소설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번역과 번안은 다르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는 있겠습니다. 원작에 대한 충실도는 번역이 높죠. 번안은 원작의 내용과 줄거리, 즉 뼈대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인명, 지명, 풍속 등은 시대나 장소에 맞게 바꾼 것입니다. 말하자면 '로컬라이징'을 한 것이 번안인 것인데, 원작의 의도가 당대 현실에 비추어 어떻게 변형되고 재해석되는지를 살펴보는 게 재밌습니다.

 

 

 

 

 

 

 

 

 

 

 

 

 

 

 

 

 

 

 

 

 

 

 

 

 

 

 

 

 

<애사>는 <레 미제라블>의 번안 소설이고 <해왕성>은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번안 소설입니다.

 

 

 

근대 초기 세계문학 작품의 번역, 번안에 대한 논의는 위의 책들을 엮은 박진영의 책들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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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쇼의 <카프카에서 카프카로>가 나온 김에 카프카 관련 논의들이 실린 책을 정리해둡니다.

 

 

 

 

 

 

 

 

 

 

 

 

 

 

 

 

 

 

 

 

 

 

 

 

 

 

 

 

 

 

카프카의 편지를 모은 책들도 꽤 나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플로베르 서간집도 나왔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는데, 살아 생전엔 출간이 안 될지도.

 

생각해보면 신기한 게, 어째서 한국 독자들은 카프카의 내면이나 인간 관계에 대해서는 그렇게 궁금해하면서도 여타 작가들(플로베르를 포함해서)의 사적 측면에 대해서는 별로 궁금해하지 않는 걸까요?

 

 

 

 

 

 

 

 

 

 

 

 

 

 

 

 

 

 

 

아무래도 가장 유명한 것은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일 텐데, 카프카가 쓴 이 편지들은 결코 아버지가 받아 읽어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카프카는 편지를 쓰고 나서 어머니에게 먼저 보여줬는데, 어머니는 편지를 읽고 다시 카프카에게 돌려줬다고 하죠. 그러니까 명목상의 수신자와 진정한 수신자가 따로 있었던 셈인데, 이런 식의 메시지 전달 방식, 즉 발신인에서 수신인으로 곧바로 전달되는 게 아니라, 매개자를 통해 우회적으로 전달되는(사실은 전달되지 못하게 하는 게 목적이라고 볼 수도 있는) 방식은 카프카 작품을 관통하는 모티프라고 하겠습니다.

 

 

 

 

 

 

 

 

 

 

 

 

 

 

 

 

 

엘리아스 카네티가 쓴 <카프카의 또 다른 소송Kafka's Other Trial>은 1980년대에 <카프카의 고독한 방황>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된 적이 있는데, 지금은 물론 구할 수가 없습니다. 이 책에서 카네티는 첫 번째 약혼녀인 펠리체 바우어에게 보낸 편지를 분석하는데, 제목에서 카프카가 펠리체에게 쓴 편지의 성격을 명확히 말하고 있습니다. 즉 카프카가 연인 펠리체에게 보낸 편지들은 연애 편지라기보다는 일련의 '소송'이었다, 라는 것입니다.

 

 

카프카 평전은 아래의 책들을 읽어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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