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혹시라도, 요즘 중고등학생들이 우연한 기회에 <우체국>을 읽는다면 아마도 이렇게 한 마디 내뱉지 않을까 싶습니다.

 

쩔어!”

 

(앞에다 요즘 학생들이 강조를 하기 위해 흔히 쓰는 속어를 한 마디 덧붙이면 부코스키가 좀 더 흐뭇해할 것 같습니다만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그런데 쩔어!”라는 짧은 독후감상은 여러 모로 적절한 감상인 듯합니다.

 

일단 <우체국>의 작가 찰스 부코스키와 그의 분신으로 보이는 주인공 헨리 치나스키가 굉장히 쩌는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쩐다'라는 표현은 일단 매력적이다, 멋지다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실제로 부코스키는 전 세계에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죠. 뭐 별 매력을 못 느끼는 독자도 있겠습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하지만 이런 반응을 보이는 독자라도 쩔어!’라는 표현에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작가가 자신의 저속함을 한없이 노골적이고 뻔뻔한방식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헨리 치나스키란 인물은 여느 소설에서 흔히 마주치기 힘든 캐릭터임은 분명합니다. 무엇보다 그는 항상 요즘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 그대로 쩔어 지내는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세 가지에 대해 그렇습니다. 여자, , 경마. 아차, 한 가지를 빼먹을 뻔했네요. 그건 바로 ’입니.

 

여기 한 편의 저속한 소설이 있습니다.

 

아니 우리가 읽은 게 과연 소설인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서 이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뭐 이딴 게 소설이라고!”라는 반응 역시 있을 수 있는 것이니까요.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게 소설이라면 개나 소나 다 쓰겠네!” 그런데 어쩌면 이러한 반응이야말로 찰스 부코스키의 매력을 아주 잘 드러내는, 왜 그가 전 세계에 수많은 추종자들 거느리고 있는지 그 이유를 잘 설명해주는 반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 쓸 수 있습니다. 심지어 좌우명(정확하게는 묘비명이지만 좌우명이라고 봐도 괜찮을 것입니다)노력하지 마라인 사람도 썼으니 말입니다. 소설의 이론을 섭렵하지 않아도, 오늘날 인기 있는, 혹은 주목 받는 소설들을 훑어보고 참조하지 않아도, 글쓰기 전문인을 양성하는 국문과나 문예창작과를 나오지 않아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관심사가 오로지 여자, , 경마뿐인 부코스키라는 작자도 썼는데요 뭘. 그러니까 부코스키가 소설 마지막에 적고 있듯, 어느 날 문득, 아침이 되고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의식했다면, 그리고 때마침 아마 소설을 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쓸 수 있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방대한 자료 조사를 하지 않아도, 마라톤으로 체력을 관리하며 정해진 시간 동안은 반드시 몇 매 이상의 글을 쓴다는 프로 작가적 마인드가 없어도, 정치적 올바름이나 인권 감수성에 대한 개념은 개를 줬어도, 현실에 대한, 소외 받는 존재들에 대한 작가적 고민이 없어도, (욕은 좀 먹겠지만) 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이야기를 솔직하게 (혹은 뻔뻔하게) 쓰면 되는 겁니다. 뭐랄까, 안심이 되고 조금쯤 자신감도 생깁니다. 어쩌면 어쭙잖은 힐링 효과일 수도 있겠습니다.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온 (소설인지 뭔지 모를) 무언가를 읽었습니다. 여성 잡지에 실린 싸구려 소설 같기도 한 이 소설, 돈과 시간을 들여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읽어버리고 만 지금도 헷갈리는 것도, 고백건대, 사실입니다.

 

의의를 부여해보죠. 합리성과 효율성이란 이름 아래 개성을 말살하고 인간성을 황폐화시키는 현대의 물질·기계문명에 대한 반항과 비판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그리스인 조르바1950년대 미국의 비트(Beat) 제너레이션,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등장한 6-70년대 히피 세대의 감성이런저런 사회운동들성혁명 또는 성해방비타협적 정신일체의 권위에 대한 저항80년대 한국에서 시도된 민중문학 노동자문학…… . 그만 두겠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칫하면 정신이 이상해질 정도의 일입니다. 왜 사람은 책을 성실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왜 책에 쓰여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요? 왜 읽고서 옳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채 정보라는 필터를 꽂아 무해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일까요? 아시겠지요. 미쳐버리기 때문입니다. [...] 카프카나 횔덜린이나 아르토의 책을 읽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을 완전히 알아버렸다면, 우리는 아마 제정신으로는 있을 수 없을 겁니다. 서점이나 도서관이라는 얼핏 평온해 보이는 곳이 바로 어설프게 읽으면 발광해버리는 사람들이 빽빽 들어찬, 거의 화약고나 탄약고 같은 끔찍한 장소라고 느낄 수 있는 감성을 단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37-8.

 

한 작가를 가로지르는 종횡의 맥락, 역사적·장소적 맥락을 살핌으로써 작가의 작업에 의의를 부여하고 작가의 문학사적 위치를 자리매김하는 건 분명 필요한 일이겠지만, 동시에 작가와 그의 작품을 어떤 한계 속에, 안전장치 속에, 차곡차곡 정리해서 책장에 가둬버리는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사사키 아타루 식으로 말하자면 “‘정보라는 필터를 꽂아 무해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일입니다.

 

 

문학은, 읽고 쓴다는 것은, 사실 굉장히 해로운 것입니다. 진지한 독서는 정신적 혼란을 초래합니다. 어설프게 읽었다가는 미쳐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안전장치입니다. 책에 너무 진지하게 빠져들지 않도록 제동을 걸어 줄 안전장치입니다. 책을 읽고 나서 뭔가 그럴듯한 의미를 부여해서 '이 책은 좋은 책'이라 자리매김하는 작업이 곧 안전장치 역할을 합니다. '좋은 책'이라... <우체국>에 적용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이런 이야기도 해볼 수 있겠습니다. 일생 동안, 우리를 보호해줄 안전장치를 보장 받자면 좋은 사람’(무해한 사람=“해치지 않아요.”)이 되어야다른 사람들로부터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받아야—합니.

 

존스톤 씨는 우체국에 30년이나 근무했어!”

그게 대체 이 일과 무슨 상관입니까?”

말했잖아, 존스톤 씨는 좋은 사람이라고!” (15)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그 사람들 모두 한 번 정도는 다 그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G.G.착한 사람이야.’ 하지만 이 착한 아저씨가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는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54)

 

, 그럼 이제 여러분은 훌륭한 직업을 갖게 되었습니다. 항상 깔끔하게 행동하기만 하면 앞으로 남은 일생 동안 안전장치가 생기는 겁니다.”

안전장치라니? 감옥에 가도 안전장치는 있다. 27제곱미터 넓이의 공간을 쓰면서 집세나 각종 공과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소득세도 없고 양육비도 낼 필요 없다. 자동차 번호판 요금도 내지 않고 교통 범칙금도 내지 않고 음주 운전으로 체포되지도 않는다. 의료 진료는 무료. 비슷한 취미를 가진 친구들끼리 동료애도 쌓고. 교회도 다니고. 호모들도 만나고. 죽으면 장례도 공짜. (83)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이란 곧 무해한 사람이란 것입니다. 그것을 보장해주는 게 ‘훌륭한 직업=안전장치라는 건 오늘날의 상식입니다. 상식을 따르자면, 훌륭한 직업을 갖고 남들로부터 좋은 사람(=무해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로 설정될 법합니다. 하지만 뻔뻔한 치나스키는 안전장치는 감옥에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할 만도 한 것이 평생보장 안전장치를 갖게 되는 대신 지불해야 하는 대가도 만만찮기 때문입니다. 치나스키의 우체국 시절 동료 G.G.는 자신이 집배원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오랫동안 봉사에 헌신해온’ 인물입니다. 그런데, G.G.20대부터 60대 후반까지 일했지만, 결국에 남는 건 일에 대한 혐오’밖에 없습니. G.G.를 보며 헨리 치나스키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우직한 말’, ‘어느 날 갑자기 멈춰 버린 낡은 차를 떠올립니다. 서슴없이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그의 인생은 그리 멋지지 않았지만 이제는 아예 똥 덩어리가 되어 버렸다.(53)” 똥덩어리라니, 치나스키 이 사람, 이거... 남의 삶을 너무 함부로, 과장해서, 단정해서 말하는 건 아닐까요?

 

지나간 11년이 머리를 뚫고 지났다. 이 일이 사람을 갉아 먹는 것을 봐왔다. 사람들은 흐늘흐늘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도지 우체국에 지미 포츠라는 직원이 있었다. 내가 처음왔을 때 지미는 흰 티셔츠를 입은 건장한 사내였다. 이제 그때 그 사람은 사라졌다. 그는 바닥에 가능한 한 가까이 붙어 앉아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로 버티고 있었다. 너무 피곤해서 이발도 못 했고 3년 동안 똑같은 바지를 입었다. 일주일에 두 번 셔츠를 갈아입었고, 아주 천천히 걸었다. 우체국이 그를 살해한 것이다. 그는 쉰다섯 살이었다. 퇴직까지는 7년이 남아 있었다.

난 못 버틸 거야.” 지미는 내게 말했다.

사람들은 녹아 버리거나 살이 뒤룩뒤룩 쪘다. 특히 엉덩이와 배가 비대해졌다. 줄곧 스툴에 앉아 있어야 하고 같은 동작과 걸음걸이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됐다. 어지럼증이 생기고 팔, , 가슴, 안 쑤시는 데가 없었다. 일하려면 좀 쉬어야 하기 때문에 낮에는 종일 잠만 잤다. 주말에는 일을 잊기 위해 술을 마셨다. 여기 올 때는 84킬로그램이었다. 지금은 101킬로그램이었다. 고작 오른 팔만 움직일 뿐이니까. (219-220)

 

그래요, 섣부른 단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치나스키에 따르면, 일은 사람을 갉아먹고 흐늘흐늘 녹아내리게 만듭니다. 일은 읽고 쓰는 것만큼이나 (어쩌면 그 이상으로) 사람을 미칠 지경으로 몰아넣습니다.

 

저녁인지 점심인지 먹은 후(열두 시간씩 근무를 한 후에는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된다) 나는 말했다. “이봐, 자기. 미안하지만, 이 일 때문에 내가 미쳐 가고 있다는 거 모르겠어? 저기, 그냥 포기하자. 그저 빈둥빈둥 누워서 섹스나 하고 산책이나 하고 얘기는 조금만 하자. 동물원에 가는 거야. 동물을 구경하자. 차를 타고 내려가서 바다를 구경하는 거야. 45분밖에 안 걸려. 오락실에 가서 게임도 하고. 경마장이나 미술관, 권투 경기에 가자. 친구도 사귀고. 웃자고. 이렇게 살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거야. 이러다 죽는다고.”

안 돼, 행크. 우리는 보여 줘야만 해. 아빠랑 할아버지에게 보여 줘야만 한다고…….” // 텍사스 시골 촌년이 할 만한 말이었다. // 나는 포기해 버렸다. (93)

 

공정을 기하기 위해, 치나스키의 근무 조건과 일의 특성을 잘 분석해볼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밤에, 12시간(+3H)을 근무합니다. 배달 업무든 우편 사무든, 쉴 틈이 거의 없는심지어 식사할 시간도 없는, 단순 반복 작업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하겠습니다. 직장에서는 동료애가 싹틀 여지도 별로 없어 보입니다. 서로는 서로를 감시하거나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남들을 감시하고 괴롭히면서 때로 은밀한 쾌감도 느끼지만, 결국은 다 같이 녹아내립니다. 보다 높은 효율성과 정확성을 위해 배달 구역 구분표를 외우기도 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택배 업무와 유사하다고 보면 될까요. 그렇다면 모든 직업에 대해 일반화하기란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만약 치나스키가 스펙이 좀 더 좋았더라면, 하는 가정에서 출발하여 이런 저런 상상을 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체국'에 취직하기 전, 헨리 치나스키는 직장을 백 개는 넘게 거친’ ‘떠돌이 막일꾼(=팩토텀)’이었습니다. 그가 이런 저런 불평들을 하면서도 11년 동안이나 우체국에 붙어 있었던 건 그나마 우체국 일이 쉬운 편에 속한 때문이라고 짐작해볼 수도 있습니다. 그는 좀 예민한 편인 것 같습니다. 항상 아프고 환각에 들뜬 채 숙취에 찌든 몸(19)” 상태이니 그럴만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주변에는 유독 미친 사람들—정확히 말하자면 '그를 미치게 만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의 목소리는 똑같았다. 어디에서 우편물을 배달하든 간에 항상 같은 이야기를 듣고 또 듣는다.

늦게 왔네요?”

매일 오는 집배원 아저씨는 어디 있우?”

안녕, 우체부 아저씨!”

아저씨, 아저씨! 이거 여기 오는 우편물 아니에요!”

거리는 미치광이와 맹추들로 가득했다. 대부분 좋은 집에서 살았고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서 뭘 하면 그렇게 먹고 놀 수 있는지 궁금했다. 자기 우편함에 편지를 넣지 못 하게 하는 남자도 있었다. 그는 차도에 서서 내가 오는 것을 두세 블록 전부터 쳐다보고 있다가 내가 가까이 가면 한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순로를 배달해 본 적이 있는 다른 직원들에게 물어보았다.

거기 서서 손 내미는 남자는 도대체 왜 그러는 거래?”

거기 서서 손 내미는 남자가 누군데?”

그들도 다들 목소리가 똑같았다. (38-39)

 

 

치나스키는 거리는 미치광이와 맹추들로 가득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자신이 미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구분표를 외운답시고 모든 걸 섹스와 나이에 연관시켜외우는 건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니죠. 이런 대목도 있습니다.

 

, 그렇다면의사는 종이를 돌려준다. ‘이런 걸 외우고 싶지 않다는 게 미친 건 아니죠. 외려 이걸 외우고 싶다면 미쳤다고 해야 할 겁니다. 상담료는 25달러입니다.’ (132)

 

실제 의사의 말이 아니라 자가 분석이라는 게 함정이긴 합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치나스키가 극도로 자기중심적인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치나스키의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는 발언은 되는 대로 살아온 인생’ ‘존재 자체가 잉여인 처지에 대한 (어디까지나 자기입장에서의) 변명이나 자기합리화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어렸을 적부터 해온 대로 <우체국>에서 뭔가 교훈에 해당하는 걸 끄집어내보려는 노력을 기울여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해설을 참조하면 반복적 노동에 대한 혐오’,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이 이 소설에는 담겨 있다. 나도 모르게 한 마디가 툭 튀어나옵니다. 빌어먹을. 귀에 닳도록 들어온 소리. 들을 때마다 한 귀로 흘러들어와 다른 귀로 빠져나간 소리.

 

여기서 한 가지. 치나스키가 ○○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주의해야 합니다. 그는 혁명가도 노동운동가도 아닙니다. 그는 노동 조건에 대해 불평은 하지만 뭔가 근본적인 잘못을 비판하거나 제도를 개혁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느니 차라리 욕을 실컷 해주거나 무단결근을 하거나 아예 회사를 그만둬버립니다. 앗차, 사실 이런 식이어서는 곤란합니다. 노동 조건이나 관료주의에 물든 사회 분위기가 잘못되어 있다는 건 충분히 알겠지만, 이런 제멋대로의 방식혼자 미꾸라지처럼 도망치는 방식이어서는 누구라도 편들어주기가 쉽지 않으니 말입니다. 우리의 주인공 치나스키는 이런 저런 주의운동에 대해 경멸어린, 시니컬한 태도를 취합니다. ‘작가 워크숍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태도를 취합니다(그 자신 작가이면서도). 중요한 점은 부코스키는 신념에 차 뭔가를 주장하기 위해, 자신이 옳다고 믿는 뭔가를 입증하기 위해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많은 문학종사자들처럼) 글쓰기 자체를 숭고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의 글쓰기에는 어떤 것이든 윤리라고 부를 만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의 글을 통해 독자들의 눈앞에 생생하게 드러나는 건 술과 섹스 때문에 정신이 너덜너덜해진, 그러면서도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작가의 모습입니다. 그의 글에서는 타인에 대한 관심이나 기대가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사회주변부의 잉여로서 그는 그저 혼자서 마냥 쩔어 있는’ 것입니다. 그의 소설에는 (요즘 소설들이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연대관계 맺음에 대한 고민도 없습니다. 자기반성도, 어떠한 종류의 깨달음도 없습니다. 그는 아주 일관성 있게, 언제나 변함없이 술과, 여자와, 경마에 쩔어 있을 뿐입니다. 일례로 그는 언제 어느 상황에서나 여자들에게 한 눈을 파는데, 가만 보고 있노라면 감탄이 나올 정도입니다.

 

그럼 애 아빠는?”

로이랑은 이혼했어. 쓸모 하나 없는 개새끼. 빈둥빈둥 놀면서 술이나 마시고 경마밖에 안 했지.”

저런.” (151)

 

어쩌면 페이는 세상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침착한 그녀가 자랑스러웠다. 더러운 접시를 씻지 않고 놔둔 것과 <뉴요커>나 보며 빈둥댄 것과 작가 워크숍이나 다닌 것 모두를 용서하기로 했다. 이 나이든 여자는 무관심한 세상에서 또 하나의 외로운 존재일 뿐이었다. (192)

 

저런이라고 치나스키가 말할 때 우리는 그의 뻔뻔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건 약과예요. “무관심한 세상에서 또 하나의 외로운 존재라고 뭔가 심금을 울릴 듯한 표현을 써놨지만, 잠시 후 그는 피부색이 거무스름한 간호사에게 한 눈을 팝니다....... ‘저런!’

 

부코스키의 글쓰기는 어떤 면에서 생활글쓰기에 가깝습니다. 사생활의 단면들과 자신의 속내를 여과 없이 그대로 옮겼다는 점에서 이상적인 생활글쓰기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부코스키 식 글쓰기는 노력하지 않습니다. ‘있어 보이려고노력하지 않습니다. 달리 말해 ‘문학이나 소설에 걸맞은 글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문학은 원래 먹고 사는 데 도움이 안 되는 잉여적인 것이라지만, 부코스키의 글은 문학중에서도 잉여에 속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그의 글을 읽는 독자들은 불편함을 느낍니다. ‘문학 작품을 읽는다는 기분이 잘 안 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편함과 동시에 통쾌함도 느낍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부코스키가 자신의 시선을 사회로 돌리지 않고, 어떤 (작가라면 모름지기 지니도록 노력해야 할) 공평무사한 시선, 세상을 꿰뚫는 통찰력을 가지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의 시선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 아닙니다. 오직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생활과 관심사에 집중된 시선이고(그 관심사란 건 앞서 말했다시피 여자(섹스), 술, 경마입니다.), 미래가 아닌 현재에 집중된 시선입니다. 말하자면 한계가 뚜렷한, 협소하고 편향된 시선입니다. 부코스키는 뭔가 의미 있는 글을 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자기 글을 좋은 글이라고 말해줄 것을 바라고 쓰지도 않았습니다. 이 사회의 문제와 치부를 건드리고 거기에 뼈아픈 일침을 가하기 위해 쓰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글은 오히려 '자기 자신의' 치부를 드러냅니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이 드러내 놓은 것들조차 딱히 치부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합니다. 그는 그런 것들을 뻔뻔하게 쓰고 자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에게 묘한 통쾌함과 안도감을 줍니다.

 

이러한 통쾌함과 안도감이 무엇으로 이어질지는 모르겠습니다. 문학을 사랑한다고 자부하는 많은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그냥 통쾌하고 말 일이 아니라고, 문학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뭔가 반감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문학은 어떠어떠한 것'이라는 규정에는 문학은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한다, 라는 일종의 '의미에 대한 강박'이 스며든 것 같아 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글쎄요, 부코스키의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둘 수도 있겠습니다. 그대로 이어나가든, 뭔가 새로운 것으로 잇든 간에 말이지요. 하지만 한 가지, 뭐가 됐든 뭔가 의미 있(어 보이)는 것 이어야만 한다는 강박으로부턴 좀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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