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 딕 아셰트클래식 4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모리스 포미에 그림 / 작가정신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허먼 멜빌. 181981일생. 1891928일 사망. <모비 딕>의 저자. 그는 무지 큰 흰 고래가 나오는 좀 이상한, 그리고 쓸데없이 무지 두꺼운 소설을 1851, 그의 나이 만 서른둘에 출간한다.

 

 

멜빌은 <모비 딕>을 쓰기 전에도 많은 소설들을 썼다. 데뷔작인 <타이피>(1846)<오무>(1847), <마디>(1849), <흰 재킷>(1850) . 모두 선원 경험을 토대로 한 모험 소설들이었다. 이렇게 제목과 출간년도를 써놓아도 구해서 볼 길도 딱히 볼 일도 없는 이 소설들은 출간 당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모비 딕>은 아니었다

 

 

서른셋의 나이에 그는 끝장났다고 느꼈다. 그 자신이 특별한 것이 되리라 믿었던 책은 망했다. 미국과 영국의 평자들의 혹평을 받은 <모비 딕>은 출간 후 18개월 동안 2,300부가 팔렸다. 후속작 <피에르>는 출판된 후 35년 동안 단 2030부가 팔렸고, 평자들의 조롱을 받았다. 죽기 전까지 이 책으로 멜빌이 번 돈은 157달러에 불과했다.

 

그는 돈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돈이란 세계가 작가의 작품에 보내는 편지와도 같은 것일진대, 멜빌은 자신의 의심스러운 어두운 비전을 독자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예상과 마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51아마도 <모비 딕> 출간 직후에호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멜빌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돈은 날 엿먹이고 있고, 악마는 날 비웃고 있어요. 전 지쳐 쓰러지고 말겁니다. 너무 오래 써서 너덜너덜해진 육두구 강판처럼 말입니다. 제가 가장 쓰고 싶은 건 돈이 안 됩니다. 그렇지만 다른 방식으로는 쓸 수가 없어요. 제 작품들은 잡동사니 범벅이고 제 모든 책들은 이리저리 짜깁기한 누더기죠.”  - <빌리 버드 외>, 펭귄판 인트로덕션에서

 

 

생전에 멜빌이 얻은 문학적 명성은 초라했다. <모비 딕> 이후 그의 책은 잘 팔리지 않았다. 1857년부터 그는 실질적인 절필 상태에 들어간다. 그때부터 35년 동안, 그는 지방 세관에서 일용직(=일당을 받는 날품팔이)으로 근무하면서 생계를 꾸린다. 독자의 계속된 외면 속에서 그는 독자에 대한 환상을 버린다. 하지만 글쓰기를 완전히 그만 두지는 않는다. 멜빌은 세관에서 근무하는 틈틈이 장편 서사시 <클라렐>을 썼다(난해하고 방대하다고 알려져 있다), 1891년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중편 소설 <빌리 버드>의 초고가 발견되었다. 죽기 직전까지 소설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서른셋의 나이에 끝장났다고 느꼈다라고 했는데, 멜빌의 나이 서른 셋이면 1852년이다. <모비 딕>이 출판되고 1년이 지난 시점인 것이다. <모비 딕>보다 한 해 앞서 출판된 것은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 글자>였다. 19세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두 권의 작품이 1년 정도의 차이를 두고 연달아 쓰여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두 작품이 받은 대우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났다. 1804년 생인 호손은 멜빌보다 15살 연상인데, 멜빌은 그를 문학적 스승이자 친구로 생각했다. 호손 역시 상당 기간 동안 경제적 궁핍에 시달렸고, 그래서 젊은 시절에는 세관에서 몇 년 간 근무하기도 했지만, 나이 마흔여섯에 출간한 첫 장편소설 <주홍글자>의 출간과 성공 이후 나름 일이 잘 풀린다.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주홍글자>는 잘 팔리는 것은 물론 사람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화제작이 되었고, 호손 역시 화제의 인물이 된 것이다. 1853년 호손은 영국 영사로 임명되어 리버풀에서 4년 간 머물렀으며, 이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했다.

 

 

멜빌과 호손의 관계는 그 자체로 흥미롭다. 멜빌은 호손을 경애해마지 않았지만 호손은 그만큼의 경애를 멜빌에게 표현했던 것 같지 않다. <빌리 버드 외>서문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그들은 이웃이었고 만나기도 했지만 멜빌이 바란 것만큼 자주는 아니었다. 그러고 나서 호손은 (유럽으로) 떠나버리고 둘은 편지와 작품(<블라이드데일 로맨스><피에르>)을 서로 주고 받았다.”

 

 

 

요컨대 멜빌과 호손은 이웃이었지만 돈독한 이웃은 아니었던 듯하다. 둘의 관계가 정확히 어땠는지를 알려면 서간집을 보면 될 일이겠지만, 그것까지 구해서 살펴볼 여력은 없다... 해서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호손은 자신에게 절대적 지지를 보내고, 틈나는 대로 경의와 애정을 표하는 멜빌을, 자신이 분류하기에 애송이 대중 소설 작가에 지나지 않은 멜빌을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부유한 외가 덕택에 (생활은 어려웠으나) 나름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좋은 교육을 받은 호손이 보기에 멜빌은 바다와 적도의 섬들에서 제멋대로 굴러 먹다가 그 경험담을 팔아 작가랍시고 설치는 놈쯤으로 인식되었을지도 모른다. 멜빌은 호손의 소설들을 매우 감명깊게 읽었고, 호손 소설들이 내뿜는 '다크 포스'에 감동했고, 그런 감동을 호손에게 어필했고, 나아가 호손을 셰익스피어와 비견하기도 하는 등, 최고의 찬사를 보냈고 어떻게 보면 호들갑을 떨었지만, 호손은 멜빌을 그냥 친구정도로만 생각했지 친한 친구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주홍 글자>를 읽고, 또 책에 대한 뜨거운 반응을 보고 <모비 딕>을 써내려가는, “나도 뭔가 지금까지의 소설과는 전혀 다른 소설을 쓰겠다는 의욕에 불타 종이 위에 글씨를 휘갈기는 멜빌의 모습이 떠오른다. 실제로 멜빌은 <모비 딕>을 쓰는 동안 셰익스피어를 탐독했으며,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을 발견하고 또 묘사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대중들이 멜빌에게 기대한 것은 해양모험소설이었다. (그가 이전의 소설들에서 아직 써먹지 않은 소재인) 포경선에서의 생활을 다룬 <모비 딕>은 개고의 과정을 거치면서 원래의 모험담과는 다른 기묘한 작품으로 변모했는데, 여기에 평자들과 독자들은 모두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 이해할만도 한 것이 만약 <삼총사>를 읽는데, 갑자기 검술의 방식과 규칙에 대한 긴 설명이 튀어나오고 그게 또 다시 형이상학적 고찰로 이어진다고 한다면, 독자들은 십중팔구 이 부분을 건너뛰거나 책을 펴든지 얼마 되지 않아 책을 덮어버릴 것이다. 포경과 고래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물론, 그에 대한 형이상학적 고찰이 길게 이어지는 <모비 딕>은 당대 독자들이 보기에는 처음 몇 챕터를 읽다가 덮어두기 안성맞춤인 책이었다.

 

 

 

멜빌은 <모비 딕>에 대한 확신을 어느 정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상업적 성공은 장담할 수 없는 문제였지만, 작품을 허투로 쓰지는 않았다는 것만은 확신하고 있었을 것이다. 작품을 허투로 썼는지 정말 공들여 썼는지는, 다른 누군가가 말해주기 전에 작가 스스로 알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들은 <모비 딕>을 외면했고 멜빌은 대중작가로서 자신의 입지에 큰 타격을 입는다.

 

 

작은 건물은 처음에 공사를 맡은 건축가들이 완성할 수 있지만, 웅장하고 참된 건물은 최후의 마무리를 후세의 손에 맡겨두는 법이다. 신이여, 내가 아무것도 완성하지 않도록 보살펴주소서! 이 책도 초고, 아니, 초고의 초고일 뿐이다. 오오, 시간과 체력과 돈과 인내를! (220)

 

 

 

신이여, 내가 아무것도 완성하지 않도록 보살펴주소서!”라고 멜빌은 <모비 딕>에서 쓰고 있다. “초고의 초고일 뿐이다라는 이슈메일의 말은 소설 <모비 딕>이 대중들 앞에서 처할 운명을 암시하는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모비 딕>을 두고, 이게 과연 소설인지, 그리고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미심쩍어 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걸작 <모비 딕>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실제로 읽은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모비 딕>이 고등학교 과정 필수 도서라고는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미국의 학생들 대부분은 이 작품을 지겨워할 것이기 때문이다.

 

 

심혈을 기울여 쓴 글이 결국 사람들에게 읽히지 않을 거라는 예감에 시달리면서도 멜빌은 글쓰기를 그만둘 수 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일종의 광기였으리라. <모비 딕>에서 멜빌은 에이해브 선장의 광기에 기대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게는 그 흰 고래가 바로 내 코앞까지 닥쳐온 벽일세. 때로는 그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건가. 그 녀석은 나를 제멋대로 휘두르며 괴롭히고 있어. 나는 녀석한테서 헤아릴 수 없는 악의를 본다네. 내가 증오하는 건 바로 그 헤아릴 수 없는 존재야 (246)

 

 

오오, 남들을 불타오르게 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남에게 불을 붙이려면 성냥 자체도 파괴되어야 한다! 나는 과감하게 내가 원하는 일을 했다. 앞으로도 나는 내가 원하는 일을 할 것이다. (252)

 

 

 

그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게 어쨌다는 거냐고 반문하는 것, 그리고 그 헤아릴 수 없는 존재를 인식하고 증오하는 것, 이것이 멜빌이 죽기 직전까지 글쓰기를 그만둘 수 없었던 이유일 것이다. 흰 고래=모비 딕을 코앞까지 닥쳐온 벽으로 느끼고 그것을 넘어서려는/넘어선다기 보다 정면으로 마주하고 꿰뚫으려는 저 절실한 마음, 곧바로 광기어린 집착과 증오로 이어지는 그 절실함은, 그러나 동시대 독자들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 러시아에서는 또 다른 집착남들인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가, 멜빌이 붙들린 것과 유사한 광기에 불들려, 분량이나 밀도 면에서 <모비 딕>에 뒤지지 않는 길고 긴 글을 써내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정신적 위기를 절감했고 쉬지 않고 뭔가를 써댐으로써, 자신이 경험하고 인식한 것을 자기 식대로 묘사하고 표현하고 또 주장함으로써 극복하고자 했다. 아니 최소한 견뎌내고자 했다. 차이가 있다면 러시아의 집착남들은 결국 날품팔이 노동자로 전락한 미국의 외로운 집착남보다는 동시대인들, 그리고 나아가 후세인들의 인정을 받았고, 그래서 아마도 짐작건대, '덜 외로웠을' 거란 점이다.

 

 

 

오늘날에도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았노라고 자처하는 이들은 많지만 멜빌의 영향을 받았노라고 자처하는 소설가나 문학인들은 거의 없다.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도 <모비 딕>이 화제에 오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만약 <모비 딕>은 거대한 괴물 흰 고래를 추적하고 잡는 모험이야기가 아니라, ‘포경과 고래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를 통해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드러내는 훌륭한 고찰이라고 설명한다하더라도 이에 대해 많은 이들은 고작 포경수술운운하는 시답잖은 농담을 시도할 것이다.

 

 

끝장났다고 느낀 1852년을 멜빌은 어떻게 보냈을까. 2013년 현재, 1852년의 멜빌과 비슷한 나이이며, 역시 나는/우리는/우리 모두는 끝장났다고 선언하고 싶은 유혹에 자주 시달리는 요즘의 나로서는 그게 문득 궁금해진다. 그리고 멜빌이 서른셋에 느꼈을, 그 이후에 점점 자주 느꼈을 외로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할 말을 잃게 된다. 우리 시대의 수많은 멜빌들을 떠올리면 더욱 할 말을 잃게 된다.

 

 

 

<모비 딕>의 비평적, 대중적 실패는 그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끝장났다고 생각한 바로 다음 해인 1853, 그는 <필경사 바틀비>라는 비극적이지만 유머로 가득 찬, 종잡을 수 없는, 그러나 꽤 매력적인 중편소설을 쓴다. 그런데 이 소설은 백오십 여 년이 지난 후에서야 재조명된다. 1857년, 마침내 그는 모든 대외적인 글쓰기 활동을 포기하고 절필 상태에 들어간다. 포기한 이후에도 그는 35년을 더 살았고 혼자서 글을 썼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후로, 내게 멜빌은 세계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품인 <모비 딕>과 <필경사 바틀비>의 작가가 아니라 모든 것이 끝장나고 모든 것을 포기한 후에도 생의 말년 35년 동안을 무명작가로 산 사람으로, '세계의 종말 이후를 담담히 살아간 사람'으로서 더 각별해졌다. 멜빌이 몸소 실행하고 보여준 '종말 이후의 삶과 글쓰기'를, 종말론적 서사와 공멸의 상상력이 널리 퍼진 이 시대에 어찌 각별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숙자 / 말없는사나이 [알라딘 특가]
존 포드 외 감독, 모린 오하라 외 출연 / 에이치디디브이디 / 200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르지오 레오네의 웨스턴을 좋아한다. 레오네의 웨스턴은 '변종 웨스턴'이라 여겨졌다.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졌다고 해서 '이탈리아 웨스턴' '스파게티/마카로니 웨스턴'이라고도 불렸다. 이런 명명을 한 사람들은 명칭 자체에 경멸의 의미를 담았다. 장르적 오리지날리티가 없는 이유로, 잘해봐야 '변종'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그러나 변종은 그 나름의 에너지와 활력을 가진다. 오리지널이 형성해온 권위를 통쾌하게 무너뜨리기도 한다. 특히 시대의 변천으로 인해 오리지널 장르의 정서와 기법이 더 이상 관객들에게 먹히지 않을 때, 순진한 낭만주의의 소산으로 받아들여질 때, 변종은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며, 그 영향력은 때로 사람들의 피부를 뚫고 스며들 정도가 된다. 그리하여 우리의 세상 인식 틀을, 더불어 감각 작용을 이전과는 판이하게 바꿔 놓는다.  

 

이런 영화는 한 번 보는 영화가 아니다. 반복해서 봐야 되는, 몇 번이고 자발적으로 보게 되는,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영화다. 영화에 잡아 먹힌 것이다. 60년대의 <007 시리즈>, 70년대의 이소룡 영화들이 그런 영화들이다. 90년대 한국에는 주윤발-장국영-왕가위로 대표되는 다양한 홍콩 영화들이 있었다.

 

이런 영화들을 본 관객은 극장을 나선 후에도 여전히 영화에 사로잡힌 상태로 남아 있다. 영화 때문에 모든 게 달라진 것이다. 주변의 모든 게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들린다. 관객 자신도 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행동한다.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빈축을 사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누가 누가 더 영화 주인공 흉내를 잘 내나, 라는 식의 '흉내 배틀'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웨스턴들도 그런 영화에 속한다. 일단 레오네의 웨스턴은 그것을 보고 난 관객들로 하여금 (주인공들을 따라) '인상을 팍 쓰게' 만든다. 레오네의 '스파게티 웨스턴'은 동적 액션이 특징적인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움직임이 최대한 절제된 정적인 영화다. (게다가 템포도 느리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쓰도록 하겠다.) 인물의 움직임과 연기가 절제된 대신, 돋보이는 것은 연출, 카메라, 그리고 음악(+ 음향)이다. 가만 보면 레오네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별 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는다. 배우들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말을 타거나 걷거나 가만히 서 있거나 아니면 심지어 의자에 몸을 뻗고 누워 있거나 한다. 이게 지금 연기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실제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인터뷰를 통해,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과 함께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 작업을 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그땐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기분이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pmdAsL1n6q4 

<석양의 무법자> 마지막 결투 시퀀스

 

 

가만히 있는 배우들로부터 연기를 끌어내는 건 연출이다. 우선은 카메라가 가장 특징적인데 이 카메라는 자주 배우들의 신체를 클로즈업 한다. 인상을 팍 쓰고 있는 얼굴은 물론이고, 허리에 찬 총, 그 언저리에 걸쳐 있는 손, 모자 챙에 살짝 가려진 눈, 펄럭이는 외투, 입에 문 담배, 손에 든 돌과 같은 것을 클로즈업, 또는 줌인한다. 덕택에 배우들의 '인상 쓴' 표정과 함께 동작의 디테일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다. 이러한 카메라 워크에 잠재된 효과를 극대화하는 건 편집이다. 인상 쓴 얼굴, 총에 걸쳐진 손, 모자, 외투, 담배, 돌들을 적절한 타이밍상에 배치함으로써 영화는 (알고 보면) 딱히 별 것도 안 하고 인상만 쓰고 있는 세 명의 배우들로부터 엄청난 에너지와 상황의 긴장감을 이끌어낸다.

 

마지막으로 '음악(+음향)'이 있다. 여기서, 세르지오 레오네와 일찍부터 파트너쉽을 이루어 함께 작업한 음악가가 엔니오 모리꼬네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영화 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는 엄청난 에너지가 깃든 템포를 영화에 부여한다. (음악과 음향이 없다면) 그저 멀뚱히 서 있는 세 명의 배우지만, 이들은 그냥 서 있는 게 아니라 에너지 게이지를 맥스로 끌어올리고 있는 중이며, 잠시 후면 이렇게 쌓인 에너지를 한 순간에 터뜨릴 것이다, 라는 확신 어린 긴장감은 바로 (연출과 함께)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 덕분에 생기는 것이다. 그의 음악은 그 자체로 레오네표 '스파게티 웨스턴'을 보는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하다.

 

레오네의 웨스턴은 처음부터 끝까지 총질(총소리)이 난무하는 요즘 액션 영화와는 다르다. 레오네는 총을 아끼고 또 아껴둔다. 총격에 관한 모든 건 영화의(혹은 각 시퀀스의) 마지막에 가서, 그것도 30초에서 1분 사이의 한 순간에, 그것도 너무나 허망한 방식으로 보여진다. 긴장감에 휩싸여 기다리는 동안 제멋대로 부풀어 오른 관객의 기대를 배반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기억해둘 점은 총격 장면을 앞둔 몇 분 간의 그 뜸 들이고 폼 잡는 장면이 레오네 영화의 정수에 해당한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레오네의 웨스턴은 엄청 뜸을 들이는 영화이며, 엄청 '폼 잡는' 영화다. 이 영화는 아크로바틱한 신체 액션을 선보임으로써 인간 신체의 한계를 보여주는,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어떤 '통쾌함'이나 '처절함'의 미학을 핵심으로 하고 있지 않다. 기계화된 살상 무기 및 그것을 신체 일부처럼 자유자재로 다루는 주인공들이 선보이는 '살육의 향연'과도 거리를 두고 있다. '두두두두두두X100'이 아니라 '탕, 탕, 탕'인 것이다. 레오네의 웨스턴은 '폼 잡는 장면'에 많은 비중을 둔다. 어떤 상황에서든 폼 잡는 것을 결코 잊지 않고, 또 빼먹지 않는 주인공들을 우리는 레오네의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폼생폼사의 미학이랄까. 혹은 기다림의 미학.

 

'천천히 여유 있게 자기 할 건 다 하는 사내들'. 우리가 레오네의 영화를 보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사내들이다. '자기 할 건 다 하는 사내들'이라고 썼지만 실은 그 한다는 것이 대개 '폼 잡는 일'이라는 점을 알아둬야 한다. 이 사내들이 속한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에 대해서도 감을 잡을 필요가 있다. 웨스턴이란 장르 명칭에 이미 들어 있듯 레오네 영화의 배경은 '서부'다. 아직 법-질서가 들어오지 않은, 법-질서에 의해 재편되기 이전의 서부. 쉽게 말해 '약육강식'의 세계이며, 유일한 목표는 '황금'인 세계다. 바로 이 '황금'을 갖기 위해 거의 '고독한 늑대'와 다를 게 없는 거칠고 잔인한 사내들이 몰려와 서로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내들이 서로 맞닥뜨렸을 때 하는 일은 (여자도 없는데) 서로의 앞에서 '폼을 잡는' 일이다. 누가 더 폼을 잘 잡을 수 있나를 두고 배틀이라도 벌이는 듯.

 

이러한 '폼 배틀'을 두고, 상대의 '간을 보는' 것이라고 해석해볼 수도 있겠다. 한껏 여유를 부리는 폼 잡기는 실력 차를 강조함으로써 상대의 기를 죽이려는 것이기도 하고, 만만치 않은 상대의 경우에는 심리적 도발을 통해 평정심을 잃게 함으로써 곧 있을 결투에서 어떤 이점을 취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레오네의 주인공들은 여유를 부리긴 하지만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무리를 이루지 않고 혼자 다니기 때문에, 또한 공권력을 등에 업은 보안관도 아닌 '무법자outlaw'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주지할 것은 이들이 '여유를 부리면서도 긴장감을 잃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 게 아니라, 반대로 '긴장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끝까지 여유를 부린다'는 것이다. 정확히 레오네의 영화는 후자에 해당한다. 그 말이 그 말 같이 들리겠지만 이 차이는 크다.

 

예를 들어 보자. <내 이름은 노바디>(1973)--이 영화는 크레딧 상으로 보면 토니노 발레리라는 이탈리아 감독의 영화지만, 세르지오 레오네가 각본, 제작을 담당했다. 그리고 알려진 바에 따르면 크레딧에만 오르지 않았을 뿐, 공동 감독까지를 맡았다고 한다--에서 헨리 폰다는 이발소 의자에 누워 면도를 하는데, 면도날을 든 이발사에게 자기 목을 맡긴 상태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다. 밖에는 그를 습격하려는 일당들이 있고 여기 면도날을 들고 있는 이발사는 사실 그 일당 중의 한 명이다. 진짜 이발사는 이미 결박되어 창고에 감금되어 있다. 이상한 낌새를 챘지만 헨리 폰다는 여전히 면도를 즐긴다. 이발사 역을 맡은 악당이 면도 크림을 바르고 면도날을 헨리 폰다의 목으로 가져간다. 일촉즉발의 순간이다. 하지만 악당이 이상한 느낌에 자신의 엉덩이께를 내려다보는데 이미 헨리 폰다의 총이 그를 겨누고 있는 상태다. 그런 상태로 면도가 끝까지 진행된다. 드디어 헨리 폰다가 의자에서 일어나 면도가 잘 됐는지 거울을 들여다 볼 때, 바깥의 일당들이 총을 쏜다. 헨리 폰다는 아주 간결하게 몸만 살짝 틀어 총 몇 발을 쏜다. 일망타진. 상황이 끝나자 헨리 폰다는 턱을 쓰다듬으며 몇 발 걷다가 조끼 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이발소 돈통에 넣어둔다. 진짜 이발사가 해준 건 아니었지만 면도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옷들을 제대로 챙겨 입고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가다듬고, 분무형 스킨까지를 뿌린 후에야 천천히 이발소를 떠난다.

 

http://www.youtube.com/watch?v=rVaq2kAlSLY&feature=player_embedded

<무숙자>(<내 이름은 노바디>) 오프닝 시퀀스 : 헨리 폰다 면도 장면

 

 

이런 식으로 레오네의 주인공들은 상황을 지배한다. 어떤 돌발 상황에서든 당황하는 법도 초조해하는 법도 없이 자기 페이스를 잃지 않는다. 앞서의 '이발소' 시퀀스에서는 장면 내내 째깍째깍 시계 바늘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해 레오네+모리꼬네가 자주 사용하는 음향 기법이다. 하지만 이때 긴장감을 느끼는 것은 관객들뿐이다. 화면 속에서는 누구도 긴장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긴장을 하긴 하지만 긴장감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좀 더 정확을 기하자면, 적어도 긴장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몸을 덜덜 떤다든지, 실수로 총을 쏜다든지 해서 판을 중간에 엎어버리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인공인 헨리 폰다도 여유를 과시하지만, 바깥의 악당도 말 등에 솔질을 하며, 면도를 하는 악당도 집중해서 면도를 한다. 천천히, 여유 있게, 나름 대로 품위를 지켜 가며 말이다. 이런 장면을 보면 다음과 같은 느낌이 든다. 아, 이들이야말로 진정 '시간을 지배하는 자'들이로구나.

 

레오네의 주인공들은 항상 위험에 처해 있는 형편이고, 자신들에게 가해지는/다가오는 위험/위협의 배후에 어떤 힘이 작동하고 있는지를 잘 모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유를 잃지 않는다. 일례로 레오네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이--말을 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달리는 모습을 보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레오네 영화의 주인공들은 대개 뚜벅 뚜벅 소리를 내며 천천히 걷는다. 현실적 차원에서 본다면 이는 적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려줄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행위다. 딱히 벽에 붙어 걷거나 주위를 쉴새없이 살피거나 소리를 죽이지도 않고 커다란 실내나 복도 한 가운데를 유유자적하게 걷는다. 두리번거리기는 하는데, 그건 딱히 적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그저 딴청을 부리는 것처럼 보인다. 전혀 긴장감 없이 위험의 복판으로 들어온 셈이다. 하지만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레오네의 영화에서 불안해지는 건 관객뿐이다) 시야각이 넓은지,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는지 주인공은 잠깐 사이에 자신의 발달된 '촉'으로 적의 위치와 수를 파악한다. 뚜벅 뚜벅 이후에 아주 잠깐 총소리가 몇 방 들리고, 상황은 정리된다. 이처럼, 이들은 '공간을 지배하는 자'들이기도 하다.

 

다시 아까의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시계 바늘 소리와 구두 발자국 소리는 흥미로운 대비를 이룬다. 일단 둘 다 영화의 템포, 혹은 페이스(pace)와 연관되는 요소라는 점을 기억해야 하겠다. 그런데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시계 바늘 소리는 짧은 총격전 이후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디제시스 바깥의 음향이었던 셈인데, 이제 시계 소리 대신 구두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이것은 디제시스 내의 음향이다. 어찌 보면 관객은 시계 소리라는 음향 효과에 낚여 괜히 긴장한 셈이다. 그리고 총격전 이후 구두 발자국 소리는 시계 바늘 소리가 만들어낸 영화의 템포를 현저히 완화시킨다. 영화의 템포가 재조정 된 것이다. 헨리 폰다는 느리게 발 소리를 내며 걸어 다니면서 자기가 할 일--여유를 과시하며 폼 잡는 일--을 한다. 말하자면 그는 자기 '페이스'가 무엇보다 중요한 인물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헨리 폰다는 가차 없이 등속도로 흐르는 '세월-시계 소리-템포'를 자기 '페이스'로 끌어들이고 흡수하여 컨트롤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시대가 저물고 있는 마당에, (기차 시간표와 함께) '기차'가 서부로 들어오는 마당에,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새로운 무기들이 등장한 마당에, 계획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수많은 적들이 자신을 노리는 와중에, 여전히 '폼을 있는 대로 다 잡는' 여유를 부릴 수 있을 것인가? 그러한 여유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인 자신의 '낭만적'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전설의 레전드'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존 웨인과 더불어 웨스턴의 대표 스타였던 헨리 폰다는 <내 이름은 노바디>를 마지막으로 웨스턴을 영원히 떠난다. 출연 시 나이가 70세에 가까운 나이였으니 나이 탓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다른 장르 영화 출연은 계속 했다.) 어쨌든 1973년 헨리 폰다의 <내 이름은 노바디> 출연과 그 직후의 (웨스턴에서의) 은퇴는 이 해를 기점으로 '한 시대가 저물었다'라는 느낌을 강하게 전달한다. [이런 느낌은 물론 (역시 헨리 폰다가 출연했고 역시 세르지오 레오네가 감독한) 1968년 작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나 샘 페킨파의 <관계의 종말>에서도 느껴지는 것이기도 하다.] 

 

1970년대 초 황혼을 맞은 시대는 바로 이렇게 묘사할 수 있는 시대다. 낭만적 형태의 '마이 페이스'와 '마이 웨이'가 가능했던 시대. 다른 뭣보다도 '폼'과 '멋'이 우선시되었던 시대. 시계의 템포가 우리 일상을 지금보다는 덜 규율하던 시대. 국가의 행정망과 자본의 유통, 판매, 홍보망이 지금 보단 훨씬 느슨해서 국민 모두가 거기에 포획되지는 않았던 시대. 나를 둘러싸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완전히는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고, 누군가의 도움으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시대. 담배 하나 입에 물고 질겅거리는 것이나 옷을 펄럭이는 것,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내려놓는 동작만으로도 '폼'을 잡을 수 있었던 시대.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지금은 현란한 액션과 빠른 편집, 그리고 거대한 스케일이 아니면 관객의 눈을 잡아두기 힘든 시대다. 싸움 전의 5-10분 동안 폼 잡는 시간은 지루한 것으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오늘날 관객이 원하는 것은 5-10분 내내 쉬지 않고 이어지는 정신 없는 액션 씬이다. 시계 초침의 템포 보다 더 빠른 자극적인 감각을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감각은 영화관을 나오는 순간, 거의 완전히 휘발되어 버린다. 액션 영화의 OST들이 전하는 빠른 비트는 '페이스'와는 거의 무관하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페이스를 무참히 망가뜨려 놓는다. 때문에 두시간 반 동안 액션 영화를 보고 나면 완전히 지쳐 버리는 것도 당연하다. 오늘날 액션 영화는 우리 피부 표면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많은 생채기를 남겨 놓으며, 바디 블로와 같은 타격을 가해 우리를 그로기 상태로 몰아넣는다.

 

영화를 보는 다양한 방식과 관점이 있겠지만, 나는 영화를 (다른 무엇보다) '그저 즐기기 위해' 본다(해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화는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즐김의 대상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현실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본다. 그리고 나는 (일반의 생각과는 달리) 이 '도피' 행위에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도피' 행위는 그 자체로 적극적 행위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스크린과 화면 속에 나만의 영역과 지분을 확보, 구축해둘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현실로부터 보다 더 적극적으로 도피할 필요가 있다.

 

영화를 즐긴다는 것은 영화를 아무 생각없이 보는 것과는 다르다. 영화는 우리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나아가 그 '다른 세상'을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눈과 귀를, 오감을 최대한 열어두어야 한다. 물론 그러한 체험은 정교하게 프로그래밍된 '영화적 환상'을 통해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지만, 그것이 곧 '환상'에 매몰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안전 거리가 확보된 '환상 체험'과 그 거리가 확 줄어든, 혹은 거리 두기가 불가능해지는 '영화적 체험'은 다르다. 물론 우리들 대부분은 스크린의 물리적 현존을 알고서 영화를 본다. 하지만 어떤 영화는 우리가 확보했다고 생각하는 안전 거리를 무화시키면서, 우리의 피부를 뚫고 들어오기도 하는 것이다. 때로 우리는 영화를 보다가 전율을 느끼곤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스크린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스크린 밖으로 나와 관객석에 앉아 있는 우리의 피부를, 이른바 현실 감각과 방어 기제를, 살아오며 길들인 감각 작용들을 좀 느린 페이스이지만 분명하게 뚫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마치 한의학에서의 침처럼, 그러한 '영화적 체험'은 우리의 막힌 '혈'을 뚫는다.

 

레오네와 웨스턴, 헨리 폰다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시대는 이미 지났지만, 그들의 영화가 영화제에서, 아카이브나 예술영화관이 마련한 회고전에서 계속 반복 상영되는 한(더불어 유투브에서 반복 재생할 수 있는 한), '천천히 여유 있게 자기 할 거 다 하는 사내'들이 선보인 '폼생폼사'의 미학과 '기다림/뜸들임'의 미학은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장담할 수 있는 건, 대중 문화 전반에서 (빠른) 템포가 우세한 요즘이지만, '(나만의) 페이스'를 찾고자 하는 개인들의 열망과 노력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시간에 쫓겨 불안과 초조함 속에서 매일의 일상을 보낸다. 여가가 주어진다고는 하지만 여가마저도 스케일이 크고 속도감 있는 영화를 보며 보내거나 빠른 비트의 아이돌 가수의 뮤직비디오를 보며 보내는 식이다. 이런 것들을 보는 장소도, 요즘은 극장이나 공연장, 심지어 집의 TV 앞에서가 아니라 출퇴근시 이동을 하는 도중에 만원버스나 지하철에서 스마트 기기들을 통해서 본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지배하기는커녕, 협소하디 협소한 공간에서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가운데, 그럼에도 여전히 시간에 쫓겨 가며, 찍어내듯 만들어진 문화상품들을 즐긴다. 그렇게 처절하게라도 해야 '자기 할 거 다 하면서도 문화에도 밝은 사람'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천천히 여유 있게'가 빠져 있다. '폼 잡고 뜸들이는 것'도 빠져 있다(스마트 기기 덕(?)에 뜸들이는 시간이 대폭 줄었고, 만원 버스에서 손바닥 만한 화면을 들여다보는 건 아무래도 '폼'과는 거리가 멀다). 보다 중요한 점은 우리의 감각이 '자본'이 만들어낸 문화상품에 '포획'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국가와 자본의 바깥을 상상할 힘을 잃었다. 70년대 후반-80년대의 미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외로운 늑대 =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은) 외부의 무법자'이면서도 인간미와 여유를 가진, 그리고 폼에 많은 의미를 둔 인물은 80년대 이후 더 이상 할리우드 영화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뭐 현실 차원에서 보면, 6-70년대에도 미국 서부는 이미 개척이 완료된 공간이긴 했다. 그런데 이는 상상력의 문제이고, 상상력에 양분을 제공하는 사회의 전반적 분위기와 연관된다. 아직 개척이 완료되지 않은 '무법적' 공간으로서 과거 서부를 상상하여 영화의 배경으로 삼는다는 기획은 60-70년대에도 어디까지나 영화니까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영화에서도 그런 기획 자체가, 그런 상상력 자체가 상품성, 사업성이 없다고 여겨진다(내용과 스타일의 올드함도 올드함이지만, 템포가 너무 느려서 오늘날 빠른 영화들에 익숙해진 관객이 잘 받아들이지 못할 거라는 얘기가 있다고 한다). 이미 웨스턴은 별 인기가 없다. 심지어 그것이 지닌 장르로서의 수명을 다했다고들 말하는 이들도 있다. (사실 '웨스턴적 상상력'은 이미 죽었다고 볼 수 있다. 요즘 할리우드에서 지배적인 것은 '좀비적 상상력'(디스토피아적 상상력) '테리리즘적 상상력' '수퍼히어로적 상상력'이다.)

 

하지만 지금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영화만이 생명력을 지녔다고 말할 수는 감히 없을 것이다. 오래된 '고전' 영화는 우리에게 많은 걸 일깨워주며,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잊혀진 '영화적 체험'을 가능하게 해준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웨스턴은 우리에게 '시공간을 지배하는 자'가 된 듯한 '영화적 체험'을 가능하게 해준다. 전율이 흐를 정도로 생생한 이런 영화적 체험이 주는 재미를 어떻게 쉽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6-70년대의 옛날 영화들로 때로 '도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욱이 그러한 도피 체험이, 점점 더 빨라지는 템포가 나를 지배하고 내 감각을 마비시키는 오늘날의 상황 속에서 '나의 페이스'와 '나의 감각'을 되찾는 데 생각외로 꽤 도움이 됨을 알았음에야.

 

 

http://www.youtube.com/watch?v=WCkWG2xkAsc&feature=player_embedded

<무숙자>(<내 이름은 노바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베이비 길들이기 - [초특가판] 고전 10종
하워드 혹스 감독, 캐리 그란트 외 출연 / 맥스엔터테인먼트 / 200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이 양육(Bringing Up Baby)> 또는 <베이비 길들이기>(하워드 호크스, 1938). 영화 내용상 후자가 더 적절한 제목이다. '베이비'가 '아기'로 번역되는 보통 명사가 아니고 누군가의 이름(고유명사)이기 때문이다. 아니, 실은 사람 아기도 아니고 '표범'의 이름이다. 그렇다. 이 영화에는 '펫 표범'이 등장한다. '펫 표범'은 표범이 고양이과 동물이란 사실을 여실히 보여 준다. (위 동영상 참조)

 

 

<베이비 길들이기>는 정신 없이 오가는 만담조 대사의 주고 받음과 그만큼 정신 없는 상황 전개가 특징인 '스크루볼 코미디'다. 슬랩스틱이 적절히 가미되어 있어서 말 그대로 쉴새 없이 웃을 수 있다. 개봉 당시 최초로 아카데미 5개 부문 상을 휩쓴 프랭크 카프라의 <어느 날 밤에 생긴 일>(1934)이 스크루볼 코미디의 대표격이긴 한데, <베이비 길들이기> 역시 못지 않게 재밌다. 템포가 더 빠르고(더 정신 없고), 설정이나 캐릭터도 더 신선한 맛이 있다. 4년 사이에 이 장르도 진화했고, <베이비 길들이기>에 이르러 정점을 찍은 듯 보인다.

 

 

많은 로맨틱 코미디가 그렇듯, 이 영화도 주인공이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고) 돈과 사랑을 동시에 거머쥐며 끝난다. 문제는 거기까지 가는 과정인데, 주인공의 계산된 이성적 노력은 모두 다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상황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택한 임기응변이나 자포자기적 행동이 '대박 반전'으로 이어진다.

 

 

미래를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계획된 행동보다 임기응변이 낫다. 애써 계획을 마련해놓고 혹시라도 계획대로 되지 않을까 불안에 떠는 것보다는 갑작스럽게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그때 그때 태도를 바꿔가며 대처하는 게 나은 것이다. 멋모르고 '나만의 원칙/신념/생활방식' 같은 걸 고수하다가는 큰코 다치기 십상.

 

 

임기응변이라고 했는데, 스크루볼 코미디의 경우는 스릴러, 액션 영화의 주인공들이 선보이는 임기응변과는 사뭇 다르다. 스릴러, 액션 영화의 주인공들은 이른바 '능력자'들이다. 지금은 일반인이지만 한때 '특수요원'이었다든가 하는 식. 그들에겐 나름의 행동 원칙과 신념이 있다. 대개 '불의를 참을 수 없다'라든지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든지 '가족(주로 딸)을 보호해야 한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요즘은 이 장르도 진화해서 '나라도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식의 원칙 아래 주인공들이 활약을 펼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변화는 '국가'나 '가족'을 생각할 겨를이 없어진, 오직 '나 자신의 생존'이 최우선 과제가 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스크루볼 코미디의 임기응변은 '내려놓기=자포자기'로 요약할 수 있다. 스릴러, 액션 영화의 주인공들이 '절대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태도를 보이는 것과는 정반대라 하겠다. 영화의 주인공 캐리 그랜트는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자신의 계획을 하나씩 포기(당)한다. 박물관 기부금 백만 달러를 얻으려는 계획을 포기(당)하고, 약혼녀와의 결혼을 포기(당)하고, 급기야 자기의 정체성마저 포기(당)한다. 미친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전문 사기꾼으로 오인받아 유치장에 갇히기도 한다. 꽤 익숙한 상황이라고 느끼는 것도 당연한데, 이러한 상황은 스릴러, 액션 영화에서도 자주 제시하는 일종의 단골 설정이기도 하다.

 

 

<베이비 길들이기>의 캐리 그랜트 캐릭터는 히치콕의 스릴러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캐리 그랜트를 떠올리게 한다. 두 영화 모두에서 캐리 그랜트는 자기가 전체를 파악하고 있지 않은 어떤 상황에 휘말리게 된다. 다른 사람으로 오인된다는 것도 공통적이다.

 

 

스릴러, 액션 영화도 스크루볼 코미디도 '전모를 파악할 수 없는 어떤 음모'에 휘말린다는 설정에 기반을 두고 전개된다. 계획은 쉽게 어그러지고 상황은 내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이건 영화에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이미 그런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베이비 길들이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여주인공 캐서린 헵번의 캐릭터이다. (여담인데, 또 다른 헵번인 오드리 헵번은 오랫동안 팬이었지만, 캐서린 헵번의 영화는 이번에 처음 봤다.) 이 영화에서 캐서린 헵번은 정신 없는 '좌충우돌' 캐릭터를 선보인다. 영화에서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제멋대로' 행동한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캐리 그랜트와 결혼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무작정 들이댄다. 그러면서 캐리 그랜트의 계획을 깡그리 망쳐 놓는 것은 물론 공공 질서와 사적 소유권을 어지럽히며, 급기야는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정체성마저 포기하게(내려놓게) 만든다. '민폐 캐릭터' 중에서도 가히 최강이라 할만하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거의 '제정신'을 내려놓은 것처럼 보인다.

 

 

물론 스크루볼 코미디답게도 그녀의 이런 '극악무도한' 민폐질은 나중에 그녀가 다름 아닌 '물주'의 조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리고 캐리 그랜트가 원하던 '기부금 백만 달러'를 확보해줌으로써 정당화된다.

 

 

스크루볼 코미디는 1930년대 초(대공황 직후)에 등장하여 2차 대전이 끝나기 직전까지 기간 동안 큰 인기를 끌었다. 돈의 가치가 땅에 떨어지고, 주식과 채권이 휴지 조각이 되고, 잘 다니던 직장에서 잘려 한 순간에 실업자로 전락하는 등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떤 '붕 뜬' 시대적 상황을 이 장르는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에 '한없이 가벼운 즉흥성'과 '자포자기적 유머'로 맞서는 것이다. 자포자기적 태도가 깔려 있다는 점에서 '시대와 맞선다'라는 표현이 과연 적절한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 어쩌면 그들에겐 '한없이 가벼운 즉흥성'과 '자포자기적 유머'말고는 다른 대안적 삶이 방식이 허락되지도 않았고, 상상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을 수도 있다.

 


스크루볼 코미디는 '엉망진창 코미디'라고 번역할 수 있겠다. 스크루볼 코미디가 제시하는 세계는 엉망진창 세계다. 오래 공들인 계획도, 사회 질서도, 나 자신의 직업도 정체성도 일순간에 무너지거나 부정당할 수 있다. 말하자면 스크루볼 코미디의 세계는 그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는 세계, 가까운 미래조차도 계획할 수 없는 세계다. 이러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방법은 계획이나 신념이 무너졌다고 해서 좌절하지 않고, (캐서린 헵번의 캐릭터가 보여주듯) 애초에 모든 것을, '제정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오직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진다는 명분 아래) 다른 건 돌아보지 않고 일직선으로 맹렬히, 유쾌, 상쾌, 통쾌하게 질주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많은 '멘토'들의 다양한 조언은 결국 이러한 삶의 방식의 권유로 수렴하는 게 아닌가 싶다.

 

 

1930-40년대에는 스크루볼 코미디가 인기를 끌었지만, 40년대 중반 즈음부터 50년대 후반까지는 스릴러와 (한층 어두운) 필름 느와르가 유행한다. 설정은 동일하지만 유행한 장르는 달랐던 것이다. 오늘날 스크루볼 코미디는 텔레비전 시트콤의 형태로 아직 존재하지만, 아무래도 지배적인 장르는 스릴러, 액션이다. 스크루볼 코미디는 현실이 아무리 '엉망진창'이라 하더라도 낙관적 희망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를 품고 있고, '자포자기적 정서'를 '유머'로 승화시키며, 그것이 선보이는 '난리법석'을 통해 관객들에게 어떤 '활력'을 전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게 먹히지 않는 시기도 분명 있는 것이다. 

 

 

 

 

-

이 영화에는 두 마리의 표범이 나온다. 하나는 길들여진, 그래서 위험하지 않은 '펫 표범'이고 다른 하나는 서커스단에서 사람을 해친, 길들여지는 데 실패한 난폭한 표범이다. 우리는 과연 (우리 안의) 표범을 길들일 수 있을까. 이미 정글과 같은 생존 경쟁의 장으로 변해버린 사회에서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고, 난폭하게 굴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정글의 법칙'을 거부하며, 혹은 적절히 컨트롤하며(길들여가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영화의 결말에서 두 마리의 표범은 모두 포획된다. 길들여진 '펫 표범'은 원 주인에게 돌아가고, 난폭한 표범은 목표 달성을 위해 제정신을 이미 오래 전에 내려놓은, 그 결과 '표범보다 난폭해진' 캐서린 헵번에게 잡혀 질질 끌려온다. 그녀처럼 우리 역시 제정신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 사실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표범과 더불어 살아왔으며, 각자 자신의 안에 표범 한 마리쯤은 키워왔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길들이고 제압하는 데 성공했느냐의 문제는 다른 문제일 것이다. 설령 어느 정도 길들이는 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표범을 길들이려는 가운데 우리 역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표범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난폭하게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로사와 아키라 <란>(1985). 99년에 영화세미나를 하면서 구로사와 감독 작품을 몇 편 봤는데, <란>은 왠지 보지 못했었다. 그리고 바로 어제, <라쇼몽> <카게무샤> <요짐보> <7인의 사무라이>에 이어 <란>을, 그 존재를 처음 알게 된 때로부터 무려 14년이 흐른 후에야 보게 됐다.

 

 

 

 

 

 

 

 

 

 

 

 

 

 

 

 

 

 일단 영화를 보면서 '놀라울 정도로 선이 굵고 에너지가 넘치는 영화'라는 느낌을 받았다. 전투 장면은 정신을 잃을 정도로 스피디하다. 주요 전투 장면이 두 개가 있는데, 첫 번째 장면은 음향 효과 없이 BGM만 깔았다. 그런 채로 5분 정도 지속된다. 청각을 배제한 채 시각적 스펙터클만을 강조한 것이다. 성의 내부와 외부를 오가는, 그리고 (인물의 내면을 드러내는) 풀 숏, 미디엄 숏, 클로즈업 숏 및 (바깥의 전투 상황을 보여주는) 롱 숏을 오가는 편집이 일품이다. 이런 공간적 대비 및 쇼트 수준의 대비에 색채까지 대비를 이루며 쉽게 잊기 힘든 강렬함을 전달한다. 전투 장면에서 음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감안할 때 정말이지 놀라운 성취라 하겠다. 두 번째 장면은 음향 효과를 넣었는데, 총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정신 없이 귀를 파고 든다. 이때도 롱 숏과 풀 숏, 미디엄 숏, 클로즈업 숏들이 서로 대비를 이루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란>은 셰익스피어 비극 <리어 왕>을 느슨하게 각색loose adaptation한 영화다. 과거 일본이 배경이고 세 딸들 대신 아들들이 등장한다. 거기에 <맥베스>의 악녀 맥베스 부인 캐릭터까지 등장하는데, 두 이야기를 한 영화 속에 담아냈는데도 전혀 무리수로 여겨지지 않는다. 대개 문학 작품을 영화화하면 원작에 못 미친다고들, 원작의 풍부한 의미를 손상시킨다고들 하는데, <란>은 무려 셰익스피어의 비극 두 편을 동시에 참조하면서도 그 나름의 개성과 풍부한 의미를 창출해냈다. 구로사와를 왜 거장이라 하는지, 조지 루카스와 스필버그, 마틴 스콜세지 등이 어째서 틈날 때마다 구로사와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내는지 새삼 이해가 됐다.


 

조만간 기회가 된다면, 구로사와의 <란>과 더불어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 <맥베스>를 읽는 모임을 꾸리고 싶다. 구색을 맞추려면 <햄릿> <오셀로>도 커리에 포함 시키면 좋겠지. <오셀로>는 오손 웰즈가 감독, 주연을 맡은 영화가 있다. <햄릿>은 로렌스 올리비에의 영화가 있고. 다만 이들 작품이 (나름 훌륭한 영화들이긴 해도) 구로사와의 영화에 비해 개성 내지 창조성이 떨어진다는 건 사실이다. 아무래도 셰익스피어란 이름에, 서양의 빛나는 고전에 먹칠을 해선 안 된다는 부담감 내지 강박이 이들 영화에서는 느껴진다. 어떻게 하면 원작을 훼손하지 않고 화면 옮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욕 먹지 않을 수 있을까가 웰즈와 올리비에의 고민이었다면, 일본인인 구로사와에게 그런 건 고민거리가 아니다. 전자들이 동질화의 욕망, 원본을 향한 지향에 어쩔 수 없이 붙들려 있다면, 구로사와는 그런 것에 붙들려 있지 않다. 하여 무수한 차이들이 발생한다. 그 결과 '차이의 향연'이라 부를만한 게 가능해진다. 관객은 2시간 40분 남짓한 러닝 타임 동안 그 향연에 흠뻑 빠진다.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한 것이다.

이러한 영화적 경험이 우리에게 주는 이점은, 셰익스피어의 비극이 다루는 주제인 운명, 역사, 신, 정치, 인간 욕망, 인간 심리 등 이른바 '큰 주제'에 대해, 보다 깊이 있는 고민을, 그것도 이전에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그저 책으로만 읽었을 때와는 달리, 훨씬 피부에 와닿는 방식으로 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

셰익스피어 작품은 아무래도 판본이 무척 많은데, 어떤 번역본으로 읽어야할지 고르는 것만 해도 큰 일이다....... 일단은 을유문화사에서 출간한 <리어 왕, 맥베스>가 좋지 않을까 싶다. 두 편이 한 권에 수록되어 있다는 장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꼭 그때문만이 아니라,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을유문화사의 책들은 번역이 항상 일정 퀼리티 이상이라는 점을 감안한 결과다.

 

개인적으로는 시인 김정환의 셰익스피어 번역을 좋아하는 편이긴 하다. 아침이슬 출판사에서 계속 출간되고 있는 모양이다. 김정환 번역은 (나름의 단점은 있지만) 무엇보다도 셰익스피어 작품이 지니는 '희곡적 특성'을 잘 살려놓았다는 장점이 있다. 번역자가 (번역의 한계를 딛고) 대사의 운율을 살리기 위해 번역어 선택에 많은 공을 들였다는 게 느껴진다.

 

한편, 펭귄출판사 번역본은 앞에 수록된 전문 학자의 해설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열린책들과 시공사 번역은 아직 확인하진 않았지만, 최근 번역본들이라 나중에라도 확인을 해봐야겠다 싶어 리스트에 올려두었다........

 

이른바 메이저 출판사에서 기존 번역이 있음에도 새로운 번역본을 내놓는 경우(중복 출판)가 많은데, 이게 좀 낭비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지만, 이런 새로운 번역본에 의해 기존 번역본의 단점이 보완되는 측면--오역을 바로 잡는 등--도 없진 않다. 또한 기존 판본들과 차별화를 시도하느라 새로운 번역 원칙을 두기도 하고, 각주나 해설에 각별히 신경을 쓰기도 한다. 결국 하나의 판본만을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전공자도 아니면서 여러 판본을 비교하며 읽는다는 건 현실적으로 힘든 일이기도 하다. 번역 비평이 지금보다 좀더 활성화되길 바라는 이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든 할머니를 능가하는 초특급 할머니'

 

이런 말을 듣는 할머니가 이 세상에 있다니?!

 

팬분들은 잘 알고 계시겠지만, 이 말은 다름 아닌 추리소설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의 주인공 중 한 명인 미스 마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게 크리스티의 팬들이 붙인 별명이 아니라 소설 속에 정말로 등장하는 표현이라는 게 함정.

 

이 대목은 황금가지판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권 <살인을 예고합니다(A Murder Is Announced)>(1950) 116페이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 경찰 서장 라이즈데일은 미스 마플로부터 편지를 받고 그 내용을 전직 경찰청장 헨리 클리서링 경에게 말해줍니다. 라이즈데일은 미스 마플을 잘 모르므로 그저 '나이 많은 숙녀'로부터 편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자네한테 보여 줄 게 있네, 헨리."

서장이 말했다.

"뭔가?"

"어느 나이 많은 숙녀가 자필로 쓴 편지. 로열 온천 호텔에 묵고 있다는데 이번 치핑 클레그혼 사건과 관련해서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는군.(Authentic letter from an old pussy. Staying at the Royal Spa Hotel. Something she thinks we might like to know in connection with the Chipping Cleghorn business.)"

"나이 많은 숙녀라고?"

헨리 경이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 봐, 내가 뭐라던가? 나이 많은 숙녀들은 모르는게 없다니까? 게다가 유명한 속담하고는 다르게 좋은 게 좋은 거다,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그 숙녀는 어떤 정보를 알고 있다던가?(The old pussies," said Sir Henry triumphantly. "What did I tell you? They hear everything. They see everything. And, unlike the famous adage, they speak all evil. What's this particular one got hold of?)"

라이즈데일은 편지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우리 할머니하고 글씨가 비슷하군. 잉크 적신 거미가 기어간 것처럼 비뚤비뚤한 건 둘째 치고 사방에 밑줄을 그어 놨어. 우리의 소중한 시간을 뺏을 생각은 없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어쩌고저쩌고 이런 말들이 대부분이야. 이름이 뭐지? 제인, 뭔데...... 머플인가? 아니, 마플이로군 제인 마플."

 

편지를 보낸 이가 다름 아닌 미스 마플임을 알게 된 헨리 경의 반응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로 여기에 예의 '초특급 할머니'란 표현이 나오죠.

"오, 주여! 이게 꿈인가 생신가? 이 세상에 단 한 명뿐이자 별 네 개를 주어도 아깝지 않은 바로 그 숙녀! 모든 할머니를 능가하는 초특급 할머니! 세인트 메리 미드에서 평화롭게 지내시는 줄 알았더니 마침 살인사건이 벌어진 때에 맞춰줘서 메던헴 웰스에 나타나 주셨군. 마플 양을 위해서 다시 한번 살인이 예고된 셈이야."

 

아무래도 역자가 심한 의역을 하지 않았나 하는 의혹을 품고, '초특급 할머니'의 영어 원문을 찾아봤습니다.

"Ye gods and little fishes," said Sir Henry, "can it be? George, it's my own particular, one and only four-starred pussy. The super-pussy of all old pussies. And she has managed somehow to be at Medenham Wells, instead of peacefully at home in St. Mary Mead, just at the right time to be mixed up in a murder. Once more a murder is announced--for the benefit and enjoyment of Miss Marple."

 

찾아보니 '초특급 할머니'는 'super-pussy'를 번역한 것이었네요. '푸시(pussy)' 또는 '올드 푸시(old pussy)라는 말은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한 저속한 표현으로 자주 사용된다고 합니다. 어린이들 사이에서는 '(암)고양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도 쓰인다고 하네요. '고양이=여성(나이가 많고 세상 물정(+ 남자)을 알 만큼 아는, 순진하지 않은 여성)'인 셈입니다. 한국어에서나 영어에서나 짐승(한국에선 특히나 개)에 빗대 사람을 지칭하면 성적 뉘앙스와 비하하는 의도가 담긴 저속한 표현이 되는 듯합니다.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에서는 남성들이나 젊은 여성들이 '나이가 많은 여성들'을 부를 때 이 pussy/old pussy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때는 외설적이거나 성적인 의미가 담겨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올드 푸시'라고 하면 "시간이 많아 남 얘기하길 좋아하고 자신의 잣대로 남들을 평가하길 좋아하는 나이 많은 여성"을 의미합니다. 아니면 그냥 단순히 사고방식이 구식인 나이 많은 여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 식대로 하자면 '꼰대'?) 동의어는 '올드 캣(Old Cat)'. 여기서도 pussy는 그닥 좋은 의미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위의 인용에서 헨리 클리서링 경이 미스 마플을 두고 '올드 푸시/수퍼 푸시'라 부를 때, 이 단어에는 범죄 해결에 탁월한 능력을 지닌 '나이 많은 숙녀(old pussy)'들에 대한 흐뭇한 마음과 열광적인 칭찬(팬심?)이 담겨 있습니다.


미스 제인 마플은 크리스티의 1930년 작 <목사관 살인사건>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초기 작품들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1940년대에는 단 두 편의 작품에만 등장합니다. 하지만 1950-60년대에 7편의 작품에 등장하면서, 크리스티의 탐정 캐릭터 중에서 (에르퀼 포와로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됩니다. (* 지금까지의 내용은 James Zemboy, The Detective Novels of Agatha Christie : A Reader's Guide, p. 422를 참조하면서 썼습니다.)

 

이 pussy라는 단어는 국내번역본에서는 '나이 많은 숙녀' 또는 '할머니'로 번역되었습니다. 당연히 성적인 의미도 비하하려는 의도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더불어 pussy란 표현에 담긴 어떤 (팬심이라 부를 만한) '애정', (경외심과는 다른 의미의) '찬사' 역시 느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글쎄요, 요즘 식으로 하자면 "캐쩌는 할머니" 정도의 표현이 아닐까 싶은데, 이런 유행어/속어를 쓸 수는 없겠죠. 헨리 경 정도의 나이와 사회적 입장이 있는 사람이 '캐쩔어'라는 표현을 쓴다고 상상하기도 함듭니다.

한편 pussy란 표현에는 (경멸까진 아니더라도) 얕보는 태도가 담긴 건 맞습니다. lady대신 pussy라는 단어를 쓴 건 미스 마플이 일단 여성이고, 또 아마추어 탐정에 불과하고 사회적 지위도 높지 않은 데다 남편도 없는 시골 마을 할머니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 경찰/마을 사람들은 미스 마플을 '참견쟁이'라고 부르며 귀찮아하기도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보면 아까 살펴본 '올드 푸시'의 정의, "시간이 많아 남 얘기하길 좋아하고 자신의 잣대로 남들을 평가하길 좋아하는 나이 많은 여성"라는 정의에 딱 들어맞는 셈입니다.

 

어쨌든 '초특급 할머니'란 별명에 끌려 (도대체 몇 권이나 되는지 알 수 없는)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들 중에서 미스 마플이 등장하는 것들만 골라 놓았습니다. 앞으로 천천히 읽어보려 합니다. 총 14편에 불과(?)해서 도전해볼만 합니다...

 

특히 소리소문 없이 지난 5월 황금가지에서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9권을 추가로 펴내면서 전집 출간이 무려 5년만에(!) 재개됐는데요. 이중 무려 4권(<마술 살인> <버트럼 호텔에서> <복수의 여신> <잠자는 살인>)이 미스 마플이 등장하는 작품이라는, 마플 팬들에겐 더없이 반가운 소식 전합니다...

 

미스 마플이 등장하는 작품은 아래와 같습니다.

(* 제목과 전집 번호는 황금가지판 기준)

 

1. <목사관의 살인> (The Murder at the Vicarage / 1930) - 전집 24
2. <열세 가지 수수께끼> (The Thirteen Problems / 1932) - 전집 6
3. <서재의 시체> (The Body in the Library / 1942) - 전집 27
4. <움직이는 손가락> (The Moving Finger / 1942) - 전집 10
5. <살인을 예고합니다>(예고 살인, A Murder Is Announced / 1950) - 전집 7
6. <마술 살인> (They do it with Mirrors / 1952) - 전집 65
7. <주머니 속의 죽음> (A Pocket Full of Rye / 1953) - 황금가지판 미출간 (해문출판사판은 있음)
8. <패딩턴발 4시 50분> (4:50 from Paddington / 1957) - 전집 49
9. <깨어진 거울> (The Mirror Crack'd from Side to Side) / 1962) - 전집 53
10.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 (A Caribbean Mystery / 1964) - 전집 58
11. <버트램 호텔에서> (At Bertram's Hotel / 1965) - 전집 68
12. <복수의 여신> (Nemesis / 1971) - 전집 70
13. <잠자는 살인> (Sleeping Murder / 1976) - 전집 73
14. <마플 양의 마지막 사건> (Miss Marple's Final Cases and Two Other Stories / 1979) - 국내미출간

 

-

처음 크리스티를 읽는다면 <살인을 예고합니다> <열세 가지 수수께끼> <움직이는 손가락>을 추천합니다. 재미있어요.

특히 <살인을 예고합니다>는 현재(다 읽질 못했으니) 저의 훼이보릿.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