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아키라 <란>(1985). 99년에 영화세미나를 하면서 구로사와 감독 작품을 몇 편 봤는데, <란>은 왠지 보지 못했었다. 그리고 바로 어제, <라쇼몽> <카게무샤> <요짐보> <7인의 사무라이>에 이어 <란>을, 그 존재를 처음 알게 된 때로부터 무려 14년이 흐른 후에야 보게 됐다.

 

 

 

 

 

 

 

 

 

 

 

 

 

 

 

 

 

 일단 영화를 보면서 '놀라울 정도로 선이 굵고 에너지가 넘치는 영화'라는 느낌을 받았다. 전투 장면은 정신을 잃을 정도로 스피디하다. 주요 전투 장면이 두 개가 있는데, 첫 번째 장면은 음향 효과 없이 BGM만 깔았다. 그런 채로 5분 정도 지속된다. 청각을 배제한 채 시각적 스펙터클만을 강조한 것이다. 성의 내부와 외부를 오가는, 그리고 (인물의 내면을 드러내는) 풀 숏, 미디엄 숏, 클로즈업 숏 및 (바깥의 전투 상황을 보여주는) 롱 숏을 오가는 편집이 일품이다. 이런 공간적 대비 및 쇼트 수준의 대비에 색채까지 대비를 이루며 쉽게 잊기 힘든 강렬함을 전달한다. 전투 장면에서 음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감안할 때 정말이지 놀라운 성취라 하겠다. 두 번째 장면은 음향 효과를 넣었는데, 총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정신 없이 귀를 파고 든다. 이때도 롱 숏과 풀 숏, 미디엄 숏, 클로즈업 숏들이 서로 대비를 이루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란>은 셰익스피어 비극 <리어 왕>을 느슨하게 각색loose adaptation한 영화다. 과거 일본이 배경이고 세 딸들 대신 아들들이 등장한다. 거기에 <맥베스>의 악녀 맥베스 부인 캐릭터까지 등장하는데, 두 이야기를 한 영화 속에 담아냈는데도 전혀 무리수로 여겨지지 않는다. 대개 문학 작품을 영화화하면 원작에 못 미친다고들, 원작의 풍부한 의미를 손상시킨다고들 하는데, <란>은 무려 셰익스피어의 비극 두 편을 동시에 참조하면서도 그 나름의 개성과 풍부한 의미를 창출해냈다. 구로사와를 왜 거장이라 하는지, 조지 루카스와 스필버그, 마틴 스콜세지 등이 어째서 틈날 때마다 구로사와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내는지 새삼 이해가 됐다.


 

조만간 기회가 된다면, 구로사와의 <란>과 더불어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 <맥베스>를 읽는 모임을 꾸리고 싶다. 구색을 맞추려면 <햄릿> <오셀로>도 커리에 포함 시키면 좋겠지. <오셀로>는 오손 웰즈가 감독, 주연을 맡은 영화가 있다. <햄릿>은 로렌스 올리비에의 영화가 있고. 다만 이들 작품이 (나름 훌륭한 영화들이긴 해도) 구로사와의 영화에 비해 개성 내지 창조성이 떨어진다는 건 사실이다. 아무래도 셰익스피어란 이름에, 서양의 빛나는 고전에 먹칠을 해선 안 된다는 부담감 내지 강박이 이들 영화에서는 느껴진다. 어떻게 하면 원작을 훼손하지 않고 화면 옮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욕 먹지 않을 수 있을까가 웰즈와 올리비에의 고민이었다면, 일본인인 구로사와에게 그런 건 고민거리가 아니다. 전자들이 동질화의 욕망, 원본을 향한 지향에 어쩔 수 없이 붙들려 있다면, 구로사와는 그런 것에 붙들려 있지 않다. 하여 무수한 차이들이 발생한다. 그 결과 '차이의 향연'이라 부를만한 게 가능해진다. 관객은 2시간 40분 남짓한 러닝 타임 동안 그 향연에 흠뻑 빠진다.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한 것이다.

이러한 영화적 경험이 우리에게 주는 이점은, 셰익스피어의 비극이 다루는 주제인 운명, 역사, 신, 정치, 인간 욕망, 인간 심리 등 이른바 '큰 주제'에 대해, 보다 깊이 있는 고민을, 그것도 이전에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그저 책으로만 읽었을 때와는 달리, 훨씬 피부에 와닿는 방식으로 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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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작품은 아무래도 판본이 무척 많은데, 어떤 번역본으로 읽어야할지 고르는 것만 해도 큰 일이다....... 일단은 을유문화사에서 출간한 <리어 왕, 맥베스>가 좋지 않을까 싶다. 두 편이 한 권에 수록되어 있다는 장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꼭 그때문만이 아니라,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을유문화사의 책들은 번역이 항상 일정 퀼리티 이상이라는 점을 감안한 결과다.

 

개인적으로는 시인 김정환의 셰익스피어 번역을 좋아하는 편이긴 하다. 아침이슬 출판사에서 계속 출간되고 있는 모양이다. 김정환 번역은 (나름의 단점은 있지만) 무엇보다도 셰익스피어 작품이 지니는 '희곡적 특성'을 잘 살려놓았다는 장점이 있다. 번역자가 (번역의 한계를 딛고) 대사의 운율을 살리기 위해 번역어 선택에 많은 공을 들였다는 게 느껴진다.

 

한편, 펭귄출판사 번역본은 앞에 수록된 전문 학자의 해설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열린책들과 시공사 번역은 아직 확인하진 않았지만, 최근 번역본들이라 나중에라도 확인을 해봐야겠다 싶어 리스트에 올려두었다........

 

이른바 메이저 출판사에서 기존 번역이 있음에도 새로운 번역본을 내놓는 경우(중복 출판)가 많은데, 이게 좀 낭비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지만, 이런 새로운 번역본에 의해 기존 번역본의 단점이 보완되는 측면--오역을 바로 잡는 등--도 없진 않다. 또한 기존 판본들과 차별화를 시도하느라 새로운 번역 원칙을 두기도 하고, 각주나 해설에 각별히 신경을 쓰기도 한다. 결국 하나의 판본만을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전공자도 아니면서 여러 판본을 비교하며 읽는다는 건 현실적으로 힘든 일이기도 하다. 번역 비평이 지금보다 좀더 활성화되길 바라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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