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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 길들이기 - [초특가판] 고전 10종
하워드 혹스 감독, 캐리 그란트 외 출연 / 맥스엔터테인먼트 / 2007년 4월
평점 :
<아이 양육(Bringing Up Baby)> 또는 <베이비 길들이기>(하워드 호크스, 1938). 영화 내용상 후자가 더 적절한 제목이다. '베이비'가 '아기'로 번역되는 보통 명사가 아니고 누군가의 이름(고유명사)이기 때문이다. 아니, 실은 사람 아기도 아니고 '표범'의 이름이다. 그렇다. 이 영화에는 '펫 표범'이 등장한다. '펫 표범'은 표범이 고양이과 동물이란 사실을 여실히 보여 준다. (위 동영상 참조)
<베이비 길들이기>는 정신 없이 오가는 만담조 대사의 주고 받음과 그만큼 정신 없는 상황 전개가 특징인 '스크루볼 코미디'다. 슬랩스틱이 적절히 가미되어 있어서 말 그대로 쉴새 없이 웃을 수 있다. 개봉 당시 최초로 아카데미 5개 부문 상을 휩쓴 프랭크 카프라의 <어느 날 밤에 생긴 일>(1934)이 스크루볼 코미디의 대표격이긴 한데, <베이비 길들이기> 역시 못지 않게 재밌다. 템포가 더 빠르고(더 정신 없고), 설정이나 캐릭터도 더 신선한 맛이 있다. 4년 사이에 이 장르도 진화했고, <베이비 길들이기>에 이르러 정점을 찍은 듯 보인다.
많은 로맨틱 코미디가 그렇듯, 이 영화도 주인공이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고) 돈과 사랑을 동시에 거머쥐며 끝난다. 문제는 거기까지 가는 과정인데, 주인공의 계산된 이성적 노력은 모두 다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상황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택한 임기응변이나 자포자기적 행동이 '대박 반전'으로 이어진다.
미래를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계획된 행동보다 임기응변이 낫다. 애써 계획을 마련해놓고 혹시라도 계획대로 되지 않을까 불안에 떠는 것보다는 갑작스럽게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그때 그때 태도를 바꿔가며 대처하는 게 나은 것이다. 멋모르고 '나만의 원칙/신념/생활방식' 같은 걸 고수하다가는 큰코 다치기 십상.
임기응변이라고 했는데, 스크루볼 코미디의 경우는 스릴러, 액션 영화의 주인공들이 선보이는 임기응변과는 사뭇 다르다. 스릴러, 액션 영화의 주인공들은 이른바 '능력자'들이다. 지금은 일반인이지만 한때 '특수요원'이었다든가 하는 식. 그들에겐 나름의 행동 원칙과 신념이 있다. 대개 '불의를 참을 수 없다'라든지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든지 '가족(주로 딸)을 보호해야 한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요즘은 이 장르도 진화해서 '나라도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식의 원칙 아래 주인공들이 활약을 펼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변화는 '국가'나 '가족'을 생각할 겨를이 없어진, 오직 '나 자신의 생존'이 최우선 과제가 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스크루볼 코미디의 임기응변은 '내려놓기=자포자기'로 요약할 수 있다. 스릴러, 액션 영화의 주인공들이 '절대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태도를 보이는 것과는 정반대라 하겠다. 영화의 주인공 캐리 그랜트는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자신의 계획을 하나씩 포기(당)한다. 박물관 기부금 백만 달러를 얻으려는 계획을 포기(당)하고, 약혼녀와의 결혼을 포기(당)하고, 급기야 자기의 정체성마저 포기(당)한다. 미친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전문 사기꾼으로 오인받아 유치장에 갇히기도 한다. 꽤 익숙한 상황이라고 느끼는 것도 당연한데, 이러한 상황은 스릴러, 액션 영화에서도 자주 제시하는 일종의 단골 설정이기도 하다.
<베이비 길들이기>의 캐리 그랜트 캐릭터는 히치콕의 스릴러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캐리 그랜트를 떠올리게 한다. 두 영화 모두에서 캐리 그랜트는 자기가 전체를 파악하고 있지 않은 어떤 상황에 휘말리게 된다. 다른 사람으로 오인된다는 것도 공통적이다.
스릴러, 액션 영화도 스크루볼 코미디도 '전모를 파악할 수 없는 어떤 음모'에 휘말린다는 설정에 기반을 두고 전개된다. 계획은 쉽게 어그러지고 상황은 내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이건 영화에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이미 그런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베이비 길들이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여주인공 캐서린 헵번의 캐릭터이다. (여담인데, 또 다른 헵번인 오드리 헵번은 오랫동안 팬이었지만, 캐서린 헵번의 영화는 이번에 처음 봤다.) 이 영화에서 캐서린 헵번은 정신 없는 '좌충우돌' 캐릭터를 선보인다. 영화에서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제멋대로' 행동한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캐리 그랜트와 결혼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무작정 들이댄다. 그러면서 캐리 그랜트의 계획을 깡그리 망쳐 놓는 것은 물론 공공 질서와 사적 소유권을 어지럽히며, 급기야는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정체성마저 포기하게(내려놓게) 만든다. '민폐 캐릭터' 중에서도 가히 최강이라 할만하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거의 '제정신'을 내려놓은 것처럼 보인다.
물론 스크루볼 코미디답게도 그녀의 이런 '극악무도한' 민폐질은 나중에 그녀가 다름 아닌 '물주'의 조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리고 캐리 그랜트가 원하던 '기부금 백만 달러'를 확보해줌으로써 정당화된다.
스크루볼 코미디는 1930년대 초(대공황 직후)에 등장하여 2차 대전이 끝나기 직전까지 기간 동안 큰 인기를 끌었다. 돈의 가치가 땅에 떨어지고, 주식과 채권이 휴지 조각이 되고, 잘 다니던 직장에서 잘려 한 순간에 실업자로 전락하는 등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떤 '붕 뜬' 시대적 상황을 이 장르는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에 '한없이 가벼운 즉흥성'과 '자포자기적 유머'로 맞서는 것이다. 자포자기적 태도가 깔려 있다는 점에서 '시대와 맞선다'라는 표현이 과연 적절한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 어쩌면 그들에겐 '한없이 가벼운 즉흥성'과 '자포자기적 유머'말고는 다른 대안적 삶이 방식이 허락되지도 않았고, 상상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을 수도 있다.
스크루볼 코미디는 '엉망진창 코미디'라고 번역할 수 있겠다. 스크루볼 코미디가 제시하는 세계는 엉망진창 세계다. 오래 공들인 계획도, 사회 질서도, 나 자신의 직업도 정체성도 일순간에 무너지거나 부정당할 수 있다. 말하자면 스크루볼 코미디의 세계는 그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는 세계, 가까운 미래조차도 계획할 수 없는 세계다. 이러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방법은 계획이나 신념이 무너졌다고 해서 좌절하지 않고, (캐서린 헵번의 캐릭터가 보여주듯) 애초에 모든 것을, '제정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오직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진다는 명분 아래) 다른 건 돌아보지 않고 일직선으로 맹렬히, 유쾌, 상쾌, 통쾌하게 질주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많은 '멘토'들의 다양한 조언은 결국 이러한 삶의 방식의 권유로 수렴하는 게 아닌가 싶다.
1930-40년대에는 스크루볼 코미디가 인기를 끌었지만, 40년대 중반 즈음부터 50년대 후반까지는 스릴러와 (한층 어두운) 필름 느와르가 유행한다. 설정은 동일하지만 유행한 장르는 달랐던 것이다. 오늘날 스크루볼 코미디는 텔레비전 시트콤의 형태로 아직 존재하지만, 아무래도 지배적인 장르는 스릴러, 액션이다. 스크루볼 코미디는 현실이 아무리 '엉망진창'이라 하더라도 낙관적 희망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를 품고 있고, '자포자기적 정서'를 '유머'로 승화시키며, 그것이 선보이는 '난리법석'을 통해 관객들에게 어떤 '활력'을 전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게 먹히지 않는 시기도 분명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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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는 두 마리의 표범이 나온다. 하나는 길들여진, 그래서 위험하지 않은 '펫 표범'이고 다른 하나는 서커스단에서 사람을 해친, 길들여지는 데 실패한 난폭한 표범이다. 우리는 과연 (우리 안의) 표범을 길들일 수 있을까. 이미 정글과 같은 생존 경쟁의 장으로 변해버린 사회에서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고, 난폭하게 굴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정글의 법칙'을 거부하며, 혹은 적절히 컨트롤하며(길들여가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영화의 결말에서 두 마리의 표범은 모두 포획된다. 길들여진 '펫 표범'은 원 주인에게 돌아가고, 난폭한 표범은 목표 달성을 위해 제정신을 이미 오래 전에 내려놓은, 그 결과 '표범보다 난폭해진' 캐서린 헵번에게 잡혀 질질 끌려온다. 그녀처럼 우리 역시 제정신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 사실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표범과 더불어 살아왔으며, 각자 자신의 안에 표범 한 마리쯤은 키워왔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길들이고 제압하는 데 성공했느냐의 문제는 다른 문제일 것이다. 설령 어느 정도 길들이는 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표범을 길들이려는 가운데 우리 역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표범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난폭하게 변해버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