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할머니를 능가하는 초특급 할머니'

 

이런 말을 듣는 할머니가 이 세상에 있다니?!

 

팬분들은 잘 알고 계시겠지만, 이 말은 다름 아닌 추리소설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의 주인공 중 한 명인 미스 마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게 크리스티의 팬들이 붙인 별명이 아니라 소설 속에 정말로 등장하는 표현이라는 게 함정.

 

이 대목은 황금가지판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권 <살인을 예고합니다(A Murder Is Announced)>(1950) 116페이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 경찰 서장 라이즈데일은 미스 마플로부터 편지를 받고 그 내용을 전직 경찰청장 헨리 클리서링 경에게 말해줍니다. 라이즈데일은 미스 마플을 잘 모르므로 그저 '나이 많은 숙녀'로부터 편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자네한테 보여 줄 게 있네, 헨리."

서장이 말했다.

"뭔가?"

"어느 나이 많은 숙녀가 자필로 쓴 편지. 로열 온천 호텔에 묵고 있다는데 이번 치핑 클레그혼 사건과 관련해서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는군.(Authentic letter from an old pussy. Staying at the Royal Spa Hotel. Something she thinks we might like to know in connection with the Chipping Cleghorn business.)"

"나이 많은 숙녀라고?"

헨리 경이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 봐, 내가 뭐라던가? 나이 많은 숙녀들은 모르는게 없다니까? 게다가 유명한 속담하고는 다르게 좋은 게 좋은 거다,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그 숙녀는 어떤 정보를 알고 있다던가?(The old pussies," said Sir Henry triumphantly. "What did I tell you? They hear everything. They see everything. And, unlike the famous adage, they speak all evil. What's this particular one got hold of?)"

라이즈데일은 편지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우리 할머니하고 글씨가 비슷하군. 잉크 적신 거미가 기어간 것처럼 비뚤비뚤한 건 둘째 치고 사방에 밑줄을 그어 놨어. 우리의 소중한 시간을 뺏을 생각은 없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어쩌고저쩌고 이런 말들이 대부분이야. 이름이 뭐지? 제인, 뭔데...... 머플인가? 아니, 마플이로군 제인 마플."

 

편지를 보낸 이가 다름 아닌 미스 마플임을 알게 된 헨리 경의 반응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로 여기에 예의 '초특급 할머니'란 표현이 나오죠.

"오, 주여! 이게 꿈인가 생신가? 이 세상에 단 한 명뿐이자 별 네 개를 주어도 아깝지 않은 바로 그 숙녀! 모든 할머니를 능가하는 초특급 할머니! 세인트 메리 미드에서 평화롭게 지내시는 줄 알았더니 마침 살인사건이 벌어진 때에 맞춰줘서 메던헴 웰스에 나타나 주셨군. 마플 양을 위해서 다시 한번 살인이 예고된 셈이야."

 

아무래도 역자가 심한 의역을 하지 않았나 하는 의혹을 품고, '초특급 할머니'의 영어 원문을 찾아봤습니다.

"Ye gods and little fishes," said Sir Henry, "can it be? George, it's my own particular, one and only four-starred pussy. The super-pussy of all old pussies. And she has managed somehow to be at Medenham Wells, instead of peacefully at home in St. Mary Mead, just at the right time to be mixed up in a murder. Once more a murder is announced--for the benefit and enjoyment of Miss Marple."

 

찾아보니 '초특급 할머니'는 'super-pussy'를 번역한 것이었네요. '푸시(pussy)' 또는 '올드 푸시(old pussy)라는 말은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한 저속한 표현으로 자주 사용된다고 합니다. 어린이들 사이에서는 '(암)고양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도 쓰인다고 하네요. '고양이=여성(나이가 많고 세상 물정(+ 남자)을 알 만큼 아는, 순진하지 않은 여성)'인 셈입니다. 한국어에서나 영어에서나 짐승(한국에선 특히나 개)에 빗대 사람을 지칭하면 성적 뉘앙스와 비하하는 의도가 담긴 저속한 표현이 되는 듯합니다.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에서는 남성들이나 젊은 여성들이 '나이가 많은 여성들'을 부를 때 이 pussy/old pussy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때는 외설적이거나 성적인 의미가 담겨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올드 푸시'라고 하면 "시간이 많아 남 얘기하길 좋아하고 자신의 잣대로 남들을 평가하길 좋아하는 나이 많은 여성"을 의미합니다. 아니면 그냥 단순히 사고방식이 구식인 나이 많은 여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 식대로 하자면 '꼰대'?) 동의어는 '올드 캣(Old Cat)'. 여기서도 pussy는 그닥 좋은 의미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위의 인용에서 헨리 클리서링 경이 미스 마플을 두고 '올드 푸시/수퍼 푸시'라 부를 때, 이 단어에는 범죄 해결에 탁월한 능력을 지닌 '나이 많은 숙녀(old pussy)'들에 대한 흐뭇한 마음과 열광적인 칭찬(팬심?)이 담겨 있습니다.


미스 제인 마플은 크리스티의 1930년 작 <목사관 살인사건>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초기 작품들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1940년대에는 단 두 편의 작품에만 등장합니다. 하지만 1950-60년대에 7편의 작품에 등장하면서, 크리스티의 탐정 캐릭터 중에서 (에르퀼 포와로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됩니다. (* 지금까지의 내용은 James Zemboy, The Detective Novels of Agatha Christie : A Reader's Guide, p. 422를 참조하면서 썼습니다.)

 

이 pussy라는 단어는 국내번역본에서는 '나이 많은 숙녀' 또는 '할머니'로 번역되었습니다. 당연히 성적인 의미도 비하하려는 의도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더불어 pussy란 표현에 담긴 어떤 (팬심이라 부를 만한) '애정', (경외심과는 다른 의미의) '찬사' 역시 느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글쎄요, 요즘 식으로 하자면 "캐쩌는 할머니" 정도의 표현이 아닐까 싶은데, 이런 유행어/속어를 쓸 수는 없겠죠. 헨리 경 정도의 나이와 사회적 입장이 있는 사람이 '캐쩔어'라는 표현을 쓴다고 상상하기도 함듭니다.

한편 pussy란 표현에는 (경멸까진 아니더라도) 얕보는 태도가 담긴 건 맞습니다. lady대신 pussy라는 단어를 쓴 건 미스 마플이 일단 여성이고, 또 아마추어 탐정에 불과하고 사회적 지위도 높지 않은 데다 남편도 없는 시골 마을 할머니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 경찰/마을 사람들은 미스 마플을 '참견쟁이'라고 부르며 귀찮아하기도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보면 아까 살펴본 '올드 푸시'의 정의, "시간이 많아 남 얘기하길 좋아하고 자신의 잣대로 남들을 평가하길 좋아하는 나이 많은 여성"라는 정의에 딱 들어맞는 셈입니다.

 

어쨌든 '초특급 할머니'란 별명에 끌려 (도대체 몇 권이나 되는지 알 수 없는)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들 중에서 미스 마플이 등장하는 것들만 골라 놓았습니다. 앞으로 천천히 읽어보려 합니다. 총 14편에 불과(?)해서 도전해볼만 합니다...

 

특히 소리소문 없이 지난 5월 황금가지에서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9권을 추가로 펴내면서 전집 출간이 무려 5년만에(!) 재개됐는데요. 이중 무려 4권(<마술 살인> <버트럼 호텔에서> <복수의 여신> <잠자는 살인>)이 미스 마플이 등장하는 작품이라는, 마플 팬들에겐 더없이 반가운 소식 전합니다...

 

미스 마플이 등장하는 작품은 아래와 같습니다.

(* 제목과 전집 번호는 황금가지판 기준)

 

1. <목사관의 살인> (The Murder at the Vicarage / 1930) - 전집 24
2. <열세 가지 수수께끼> (The Thirteen Problems / 1932) - 전집 6
3. <서재의 시체> (The Body in the Library / 1942) - 전집 27
4. <움직이는 손가락> (The Moving Finger / 1942) - 전집 10
5. <살인을 예고합니다>(예고 살인, A Murder Is Announced / 1950) - 전집 7
6. <마술 살인> (They do it with Mirrors / 1952) - 전집 65
7. <주머니 속의 죽음> (A Pocket Full of Rye / 1953) - 황금가지판 미출간 (해문출판사판은 있음)
8. <패딩턴발 4시 50분> (4:50 from Paddington / 1957) - 전집 49
9. <깨어진 거울> (The Mirror Crack'd from Side to Side) / 1962) - 전집 53
10.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 (A Caribbean Mystery / 1964) - 전집 58
11. <버트램 호텔에서> (At Bertram's Hotel / 1965) - 전집 68
12. <복수의 여신> (Nemesis / 1971) - 전집 70
13. <잠자는 살인> (Sleeping Murder / 1976) - 전집 73
14. <마플 양의 마지막 사건> (Miss Marple's Final Cases and Two Other Stories / 1979) - 국내미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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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크리스티를 읽는다면 <살인을 예고합니다> <열세 가지 수수께끼> <움직이는 손가락>을 추천합니다. 재미있어요.

특히 <살인을 예고합니다>는 현재(다 읽질 못했으니) 저의 훼이보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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