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숙자 / 말없는사나이 [알라딘 특가]
존 포드 외 감독, 모린 오하라 외 출연 / 에이치디디브이디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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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지오 레오네의 웨스턴을 좋아한다. 레오네의 웨스턴은 '변종 웨스턴'이라 여겨졌다.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졌다고 해서 '이탈리아 웨스턴' '스파게티/마카로니 웨스턴'이라고도 불렸다. 이런 명명을 한 사람들은 명칭 자체에 경멸의 의미를 담았다. 장르적 오리지날리티가 없는 이유로, 잘해봐야 '변종'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그러나 변종은 그 나름의 에너지와 활력을 가진다. 오리지널이 형성해온 권위를 통쾌하게 무너뜨리기도 한다. 특히 시대의 변천으로 인해 오리지널 장르의 정서와 기법이 더 이상 관객들에게 먹히지 않을 때, 순진한 낭만주의의 소산으로 받아들여질 때, 변종은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며, 그 영향력은 때로 사람들의 피부를 뚫고 스며들 정도가 된다. 그리하여 우리의 세상 인식 틀을, 더불어 감각 작용을 이전과는 판이하게 바꿔 놓는다.  

 

이런 영화는 한 번 보는 영화가 아니다. 반복해서 봐야 되는, 몇 번이고 자발적으로 보게 되는,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영화다. 영화에 잡아 먹힌 것이다. 60년대의 <007 시리즈>, 70년대의 이소룡 영화들이 그런 영화들이다. 90년대 한국에는 주윤발-장국영-왕가위로 대표되는 다양한 홍콩 영화들이 있었다.

 

이런 영화들을 본 관객은 극장을 나선 후에도 여전히 영화에 사로잡힌 상태로 남아 있다. 영화 때문에 모든 게 달라진 것이다. 주변의 모든 게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들린다. 관객 자신도 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행동한다.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빈축을 사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누가 누가 더 영화 주인공 흉내를 잘 내나, 라는 식의 '흉내 배틀'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웨스턴들도 그런 영화에 속한다. 일단 레오네의 웨스턴은 그것을 보고 난 관객들로 하여금 (주인공들을 따라) '인상을 팍 쓰게' 만든다. 레오네의 '스파게티 웨스턴'은 동적 액션이 특징적인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움직임이 최대한 절제된 정적인 영화다. (게다가 템포도 느리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쓰도록 하겠다.) 인물의 움직임과 연기가 절제된 대신, 돋보이는 것은 연출, 카메라, 그리고 음악(+ 음향)이다. 가만 보면 레오네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별 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는다. 배우들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말을 타거나 걷거나 가만히 서 있거나 아니면 심지어 의자에 몸을 뻗고 누워 있거나 한다. 이게 지금 연기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실제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인터뷰를 통해,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과 함께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 작업을 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그땐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기분이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pmdAsL1n6q4 

<석양의 무법자> 마지막 결투 시퀀스

 

 

가만히 있는 배우들로부터 연기를 끌어내는 건 연출이다. 우선은 카메라가 가장 특징적인데 이 카메라는 자주 배우들의 신체를 클로즈업 한다. 인상을 팍 쓰고 있는 얼굴은 물론이고, 허리에 찬 총, 그 언저리에 걸쳐 있는 손, 모자 챙에 살짝 가려진 눈, 펄럭이는 외투, 입에 문 담배, 손에 든 돌과 같은 것을 클로즈업, 또는 줌인한다. 덕택에 배우들의 '인상 쓴' 표정과 함께 동작의 디테일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다. 이러한 카메라 워크에 잠재된 효과를 극대화하는 건 편집이다. 인상 쓴 얼굴, 총에 걸쳐진 손, 모자, 외투, 담배, 돌들을 적절한 타이밍상에 배치함으로써 영화는 (알고 보면) 딱히 별 것도 안 하고 인상만 쓰고 있는 세 명의 배우들로부터 엄청난 에너지와 상황의 긴장감을 이끌어낸다.

 

마지막으로 '음악(+음향)'이 있다. 여기서, 세르지오 레오네와 일찍부터 파트너쉽을 이루어 함께 작업한 음악가가 엔니오 모리꼬네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영화 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는 엄청난 에너지가 깃든 템포를 영화에 부여한다. (음악과 음향이 없다면) 그저 멀뚱히 서 있는 세 명의 배우지만, 이들은 그냥 서 있는 게 아니라 에너지 게이지를 맥스로 끌어올리고 있는 중이며, 잠시 후면 이렇게 쌓인 에너지를 한 순간에 터뜨릴 것이다, 라는 확신 어린 긴장감은 바로 (연출과 함께)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 덕분에 생기는 것이다. 그의 음악은 그 자체로 레오네표 '스파게티 웨스턴'을 보는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하다.

 

레오네의 웨스턴은 처음부터 끝까지 총질(총소리)이 난무하는 요즘 액션 영화와는 다르다. 레오네는 총을 아끼고 또 아껴둔다. 총격에 관한 모든 건 영화의(혹은 각 시퀀스의) 마지막에 가서, 그것도 30초에서 1분 사이의 한 순간에, 그것도 너무나 허망한 방식으로 보여진다. 긴장감에 휩싸여 기다리는 동안 제멋대로 부풀어 오른 관객의 기대를 배반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기억해둘 점은 총격 장면을 앞둔 몇 분 간의 그 뜸 들이고 폼 잡는 장면이 레오네 영화의 정수에 해당한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레오네의 웨스턴은 엄청 뜸을 들이는 영화이며, 엄청 '폼 잡는' 영화다. 이 영화는 아크로바틱한 신체 액션을 선보임으로써 인간 신체의 한계를 보여주는,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어떤 '통쾌함'이나 '처절함'의 미학을 핵심으로 하고 있지 않다. 기계화된 살상 무기 및 그것을 신체 일부처럼 자유자재로 다루는 주인공들이 선보이는 '살육의 향연'과도 거리를 두고 있다. '두두두두두두X100'이 아니라 '탕, 탕, 탕'인 것이다. 레오네의 웨스턴은 '폼 잡는 장면'에 많은 비중을 둔다. 어떤 상황에서든 폼 잡는 것을 결코 잊지 않고, 또 빼먹지 않는 주인공들을 우리는 레오네의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폼생폼사의 미학이랄까. 혹은 기다림의 미학.

 

'천천히 여유 있게 자기 할 건 다 하는 사내들'. 우리가 레오네의 영화를 보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사내들이다. '자기 할 건 다 하는 사내들'이라고 썼지만 실은 그 한다는 것이 대개 '폼 잡는 일'이라는 점을 알아둬야 한다. 이 사내들이 속한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에 대해서도 감을 잡을 필요가 있다. 웨스턴이란 장르 명칭에 이미 들어 있듯 레오네 영화의 배경은 '서부'다. 아직 법-질서가 들어오지 않은, 법-질서에 의해 재편되기 이전의 서부. 쉽게 말해 '약육강식'의 세계이며, 유일한 목표는 '황금'인 세계다. 바로 이 '황금'을 갖기 위해 거의 '고독한 늑대'와 다를 게 없는 거칠고 잔인한 사내들이 몰려와 서로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내들이 서로 맞닥뜨렸을 때 하는 일은 (여자도 없는데) 서로의 앞에서 '폼을 잡는' 일이다. 누가 더 폼을 잘 잡을 수 있나를 두고 배틀이라도 벌이는 듯.

 

이러한 '폼 배틀'을 두고, 상대의 '간을 보는' 것이라고 해석해볼 수도 있겠다. 한껏 여유를 부리는 폼 잡기는 실력 차를 강조함으로써 상대의 기를 죽이려는 것이기도 하고, 만만치 않은 상대의 경우에는 심리적 도발을 통해 평정심을 잃게 함으로써 곧 있을 결투에서 어떤 이점을 취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레오네의 주인공들은 여유를 부리긴 하지만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무리를 이루지 않고 혼자 다니기 때문에, 또한 공권력을 등에 업은 보안관도 아닌 '무법자outlaw'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주지할 것은 이들이 '여유를 부리면서도 긴장감을 잃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 게 아니라, 반대로 '긴장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끝까지 여유를 부린다'는 것이다. 정확히 레오네의 영화는 후자에 해당한다. 그 말이 그 말 같이 들리겠지만 이 차이는 크다.

 

예를 들어 보자. <내 이름은 노바디>(1973)--이 영화는 크레딧 상으로 보면 토니노 발레리라는 이탈리아 감독의 영화지만, 세르지오 레오네가 각본, 제작을 담당했다. 그리고 알려진 바에 따르면 크레딧에만 오르지 않았을 뿐, 공동 감독까지를 맡았다고 한다--에서 헨리 폰다는 이발소 의자에 누워 면도를 하는데, 면도날을 든 이발사에게 자기 목을 맡긴 상태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다. 밖에는 그를 습격하려는 일당들이 있고 여기 면도날을 들고 있는 이발사는 사실 그 일당 중의 한 명이다. 진짜 이발사는 이미 결박되어 창고에 감금되어 있다. 이상한 낌새를 챘지만 헨리 폰다는 여전히 면도를 즐긴다. 이발사 역을 맡은 악당이 면도 크림을 바르고 면도날을 헨리 폰다의 목으로 가져간다. 일촉즉발의 순간이다. 하지만 악당이 이상한 느낌에 자신의 엉덩이께를 내려다보는데 이미 헨리 폰다의 총이 그를 겨누고 있는 상태다. 그런 상태로 면도가 끝까지 진행된다. 드디어 헨리 폰다가 의자에서 일어나 면도가 잘 됐는지 거울을 들여다 볼 때, 바깥의 일당들이 총을 쏜다. 헨리 폰다는 아주 간결하게 몸만 살짝 틀어 총 몇 발을 쏜다. 일망타진. 상황이 끝나자 헨리 폰다는 턱을 쓰다듬으며 몇 발 걷다가 조끼 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이발소 돈통에 넣어둔다. 진짜 이발사가 해준 건 아니었지만 면도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옷들을 제대로 챙겨 입고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가다듬고, 분무형 스킨까지를 뿌린 후에야 천천히 이발소를 떠난다.

 

http://www.youtube.com/watch?v=rVaq2kAlSLY&feature=player_embedded

<무숙자>(<내 이름은 노바디>) 오프닝 시퀀스 : 헨리 폰다 면도 장면

 

 

이런 식으로 레오네의 주인공들은 상황을 지배한다. 어떤 돌발 상황에서든 당황하는 법도 초조해하는 법도 없이 자기 페이스를 잃지 않는다. 앞서의 '이발소' 시퀀스에서는 장면 내내 째깍째깍 시계 바늘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해 레오네+모리꼬네가 자주 사용하는 음향 기법이다. 하지만 이때 긴장감을 느끼는 것은 관객들뿐이다. 화면 속에서는 누구도 긴장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긴장을 하긴 하지만 긴장감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좀 더 정확을 기하자면, 적어도 긴장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몸을 덜덜 떤다든지, 실수로 총을 쏜다든지 해서 판을 중간에 엎어버리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인공인 헨리 폰다도 여유를 과시하지만, 바깥의 악당도 말 등에 솔질을 하며, 면도를 하는 악당도 집중해서 면도를 한다. 천천히, 여유 있게, 나름 대로 품위를 지켜 가며 말이다. 이런 장면을 보면 다음과 같은 느낌이 든다. 아, 이들이야말로 진정 '시간을 지배하는 자'들이로구나.

 

레오네의 주인공들은 항상 위험에 처해 있는 형편이고, 자신들에게 가해지는/다가오는 위험/위협의 배후에 어떤 힘이 작동하고 있는지를 잘 모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유를 잃지 않는다. 일례로 레오네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이--말을 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달리는 모습을 보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레오네 영화의 주인공들은 대개 뚜벅 뚜벅 소리를 내며 천천히 걷는다. 현실적 차원에서 본다면 이는 적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려줄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행위다. 딱히 벽에 붙어 걷거나 주위를 쉴새없이 살피거나 소리를 죽이지도 않고 커다란 실내나 복도 한 가운데를 유유자적하게 걷는다. 두리번거리기는 하는데, 그건 딱히 적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그저 딴청을 부리는 것처럼 보인다. 전혀 긴장감 없이 위험의 복판으로 들어온 셈이다. 하지만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레오네의 영화에서 불안해지는 건 관객뿐이다) 시야각이 넓은지,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는지 주인공은 잠깐 사이에 자신의 발달된 '촉'으로 적의 위치와 수를 파악한다. 뚜벅 뚜벅 이후에 아주 잠깐 총소리가 몇 방 들리고, 상황은 정리된다. 이처럼, 이들은 '공간을 지배하는 자'들이기도 하다.

 

다시 아까의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시계 바늘 소리와 구두 발자국 소리는 흥미로운 대비를 이룬다. 일단 둘 다 영화의 템포, 혹은 페이스(pace)와 연관되는 요소라는 점을 기억해야 하겠다. 그런데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시계 바늘 소리는 짧은 총격전 이후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디제시스 바깥의 음향이었던 셈인데, 이제 시계 소리 대신 구두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이것은 디제시스 내의 음향이다. 어찌 보면 관객은 시계 소리라는 음향 효과에 낚여 괜히 긴장한 셈이다. 그리고 총격전 이후 구두 발자국 소리는 시계 바늘 소리가 만들어낸 영화의 템포를 현저히 완화시킨다. 영화의 템포가 재조정 된 것이다. 헨리 폰다는 느리게 발 소리를 내며 걸어 다니면서 자기가 할 일--여유를 과시하며 폼 잡는 일--을 한다. 말하자면 그는 자기 '페이스'가 무엇보다 중요한 인물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헨리 폰다는 가차 없이 등속도로 흐르는 '세월-시계 소리-템포'를 자기 '페이스'로 끌어들이고 흡수하여 컨트롤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시대가 저물고 있는 마당에, (기차 시간표와 함께) '기차'가 서부로 들어오는 마당에,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새로운 무기들이 등장한 마당에, 계획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수많은 적들이 자신을 노리는 와중에, 여전히 '폼을 있는 대로 다 잡는' 여유를 부릴 수 있을 것인가? 그러한 여유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인 자신의 '낭만적'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전설의 레전드'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존 웨인과 더불어 웨스턴의 대표 스타였던 헨리 폰다는 <내 이름은 노바디>를 마지막으로 웨스턴을 영원히 떠난다. 출연 시 나이가 70세에 가까운 나이였으니 나이 탓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다른 장르 영화 출연은 계속 했다.) 어쨌든 1973년 헨리 폰다의 <내 이름은 노바디> 출연과 그 직후의 (웨스턴에서의) 은퇴는 이 해를 기점으로 '한 시대가 저물었다'라는 느낌을 강하게 전달한다. [이런 느낌은 물론 (역시 헨리 폰다가 출연했고 역시 세르지오 레오네가 감독한) 1968년 작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나 샘 페킨파의 <관계의 종말>에서도 느껴지는 것이기도 하다.] 

 

1970년대 초 황혼을 맞은 시대는 바로 이렇게 묘사할 수 있는 시대다. 낭만적 형태의 '마이 페이스'와 '마이 웨이'가 가능했던 시대. 다른 뭣보다도 '폼'과 '멋'이 우선시되었던 시대. 시계의 템포가 우리 일상을 지금보다는 덜 규율하던 시대. 국가의 행정망과 자본의 유통, 판매, 홍보망이 지금 보단 훨씬 느슨해서 국민 모두가 거기에 포획되지는 않았던 시대. 나를 둘러싸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완전히는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고, 누군가의 도움으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시대. 담배 하나 입에 물고 질겅거리는 것이나 옷을 펄럭이는 것,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내려놓는 동작만으로도 '폼'을 잡을 수 있었던 시대.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지금은 현란한 액션과 빠른 편집, 그리고 거대한 스케일이 아니면 관객의 눈을 잡아두기 힘든 시대다. 싸움 전의 5-10분 동안 폼 잡는 시간은 지루한 것으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오늘날 관객이 원하는 것은 5-10분 내내 쉬지 않고 이어지는 정신 없는 액션 씬이다. 시계 초침의 템포 보다 더 빠른 자극적인 감각을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감각은 영화관을 나오는 순간, 거의 완전히 휘발되어 버린다. 액션 영화의 OST들이 전하는 빠른 비트는 '페이스'와는 거의 무관하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페이스를 무참히 망가뜨려 놓는다. 때문에 두시간 반 동안 액션 영화를 보고 나면 완전히 지쳐 버리는 것도 당연하다. 오늘날 액션 영화는 우리 피부 표면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많은 생채기를 남겨 놓으며, 바디 블로와 같은 타격을 가해 우리를 그로기 상태로 몰아넣는다.

 

영화를 보는 다양한 방식과 관점이 있겠지만, 나는 영화를 (다른 무엇보다) '그저 즐기기 위해' 본다(해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화는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즐김의 대상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현실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본다. 그리고 나는 (일반의 생각과는 달리) 이 '도피' 행위에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도피' 행위는 그 자체로 적극적 행위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스크린과 화면 속에 나만의 영역과 지분을 확보, 구축해둘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현실로부터 보다 더 적극적으로 도피할 필요가 있다.

 

영화를 즐긴다는 것은 영화를 아무 생각없이 보는 것과는 다르다. 영화는 우리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나아가 그 '다른 세상'을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눈과 귀를, 오감을 최대한 열어두어야 한다. 물론 그러한 체험은 정교하게 프로그래밍된 '영화적 환상'을 통해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지만, 그것이 곧 '환상'에 매몰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안전 거리가 확보된 '환상 체험'과 그 거리가 확 줄어든, 혹은 거리 두기가 불가능해지는 '영화적 체험'은 다르다. 물론 우리들 대부분은 스크린의 물리적 현존을 알고서 영화를 본다. 하지만 어떤 영화는 우리가 확보했다고 생각하는 안전 거리를 무화시키면서, 우리의 피부를 뚫고 들어오기도 하는 것이다. 때로 우리는 영화를 보다가 전율을 느끼곤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스크린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스크린 밖으로 나와 관객석에 앉아 있는 우리의 피부를, 이른바 현실 감각과 방어 기제를, 살아오며 길들인 감각 작용들을 좀 느린 페이스이지만 분명하게 뚫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마치 한의학에서의 침처럼, 그러한 '영화적 체험'은 우리의 막힌 '혈'을 뚫는다.

 

레오네와 웨스턴, 헨리 폰다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시대는 이미 지났지만, 그들의 영화가 영화제에서, 아카이브나 예술영화관이 마련한 회고전에서 계속 반복 상영되는 한(더불어 유투브에서 반복 재생할 수 있는 한), '천천히 여유 있게 자기 할 거 다 하는 사내'들이 선보인 '폼생폼사'의 미학과 '기다림/뜸들임'의 미학은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장담할 수 있는 건, 대중 문화 전반에서 (빠른) 템포가 우세한 요즘이지만, '(나만의) 페이스'를 찾고자 하는 개인들의 열망과 노력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시간에 쫓겨 불안과 초조함 속에서 매일의 일상을 보낸다. 여가가 주어진다고는 하지만 여가마저도 스케일이 크고 속도감 있는 영화를 보며 보내거나 빠른 비트의 아이돌 가수의 뮤직비디오를 보며 보내는 식이다. 이런 것들을 보는 장소도, 요즘은 극장이나 공연장, 심지어 집의 TV 앞에서가 아니라 출퇴근시 이동을 하는 도중에 만원버스나 지하철에서 스마트 기기들을 통해서 본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지배하기는커녕, 협소하디 협소한 공간에서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가운데, 그럼에도 여전히 시간에 쫓겨 가며, 찍어내듯 만들어진 문화상품들을 즐긴다. 그렇게 처절하게라도 해야 '자기 할 거 다 하면서도 문화에도 밝은 사람'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천천히 여유 있게'가 빠져 있다. '폼 잡고 뜸들이는 것'도 빠져 있다(스마트 기기 덕(?)에 뜸들이는 시간이 대폭 줄었고, 만원 버스에서 손바닥 만한 화면을 들여다보는 건 아무래도 '폼'과는 거리가 멀다). 보다 중요한 점은 우리의 감각이 '자본'이 만들어낸 문화상품에 '포획'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국가와 자본의 바깥을 상상할 힘을 잃었다. 70년대 후반-80년대의 미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외로운 늑대 =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은) 외부의 무법자'이면서도 인간미와 여유를 가진, 그리고 폼에 많은 의미를 둔 인물은 80년대 이후 더 이상 할리우드 영화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뭐 현실 차원에서 보면, 6-70년대에도 미국 서부는 이미 개척이 완료된 공간이긴 했다. 그런데 이는 상상력의 문제이고, 상상력에 양분을 제공하는 사회의 전반적 분위기와 연관된다. 아직 개척이 완료되지 않은 '무법적' 공간으로서 과거 서부를 상상하여 영화의 배경으로 삼는다는 기획은 60-70년대에도 어디까지나 영화니까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영화에서도 그런 기획 자체가, 그런 상상력 자체가 상품성, 사업성이 없다고 여겨진다(내용과 스타일의 올드함도 올드함이지만, 템포가 너무 느려서 오늘날 빠른 영화들에 익숙해진 관객이 잘 받아들이지 못할 거라는 얘기가 있다고 한다). 이미 웨스턴은 별 인기가 없다. 심지어 그것이 지닌 장르로서의 수명을 다했다고들 말하는 이들도 있다. (사실 '웨스턴적 상상력'은 이미 죽었다고 볼 수 있다. 요즘 할리우드에서 지배적인 것은 '좀비적 상상력'(디스토피아적 상상력) '테리리즘적 상상력' '수퍼히어로적 상상력'이다.)

 

하지만 지금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영화만이 생명력을 지녔다고 말할 수는 감히 없을 것이다. 오래된 '고전' 영화는 우리에게 많은 걸 일깨워주며,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잊혀진 '영화적 체험'을 가능하게 해준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웨스턴은 우리에게 '시공간을 지배하는 자'가 된 듯한 '영화적 체험'을 가능하게 해준다. 전율이 흐를 정도로 생생한 이런 영화적 체험이 주는 재미를 어떻게 쉽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6-70년대의 옛날 영화들로 때로 '도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욱이 그러한 도피 체험이, 점점 더 빨라지는 템포가 나를 지배하고 내 감각을 마비시키는 오늘날의 상황 속에서 '나의 페이스'와 '나의 감각'을 되찾는 데 생각외로 꽤 도움이 됨을 알았음에야.

 

 

http://www.youtube.com/watch?v=WCkWG2xkAsc&feature=player_embedded

<무숙자>(<내 이름은 노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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