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고전파 경제학 이론 중에 '세이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프랑스 경제학자 장 폴 세이가 주장한 이론으로 '공급이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는 거다. 경제학의 다른 이론들에 비해서 아주 간단하고 심플한 이론이랄 수 있다.

 

그런데 이 이론은 대영제국이 번창하던 시대에 적합했던 이론으로, 이후 마르크스와 케인즈에 의해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주류 경제학에서 케인즈 시대가 도래한 이후 세이의 법칙은 거의 사장되다시피했다. 교과서의 한 귀퉁이에서나 볼 수 있는 정도였다.

 

그도그럴 것이 이 이론은 제국주의 경제로부터 나온 것이에 그렇다. 영국이 해가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던 시절 영국이 생산한 모든 생산물은 해외 식민지에서 모조리 팔렸다. 공급은 해외 식민지에 대한 수요를 끊임없이 충족시켰으며(개쳑했으며), 경제 전반에 과잉 생산은 있을 수 없었다. (일제시대 일본의 생산물이 조선에서 죄다 팔린 걸 상기하면 쉽다)

 

그런데, 경제학에서 화석화 됐다고 여겨졌던 이 이론이 21세기들어 다시금 힘을 얻고 있다. 확실히 요즘 디자인되고 있는 제품들은 공급이 스스로 수요를 창출하고 있다는 세이의 법칙을 입증해 주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아이폰일 것이다. 기존의 전화기를 단숨에 손 안의 컴퓨터로 버꿔놓았다. 애플이 공급하는 소프트웨어는 전 세계의 수요를 창출하고 있다.

 

세이의 법칙은 사장된 게 아니었다! 아마도 기존 경제학 교과서는 세이를 새롭게 조명해 봐야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둘!

 

송나라에 저공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원숭이를 좋아하여 키웠는데, 원숭이 수가 늘에남에 따라 원숭이 양식을 구하기 쉽지 않았다. 당시 원숭이 주식은 도토리였다. 그래서 저공은 키우는 원숭이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토리 가격이 올라 구하기 쉽지 않으니) 이제부터는 도토리를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를 주겠다"

 

그러자 원숭이들은 개지랄을 떨기 시작했다. 마구 가슴을 치고 소리를 꿱꿱 질러댔다.

이런 지랄에 저공은 할 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

 

"아, 알겠다. 그럼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를 주겠다!"

 

그러자 원숭이들은 좋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지 출처 ; <고사성어랑 일촌 맺기>(2010. 서해문집)

 

 

위 이야기는 朝三暮四(조삼모사)로 널리 알려진 고사다. 보통 이 고사에 대한 해설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눈앞에 보이는 차이만 알고 결과가 같은 것을 모르는 어리석음을 비유하거나 남을 농락하여 자기의 사기나 협잡술 속에 빠뜨리는 행위를 비유하는 고사성어 (두산백과)

 

고사의 핵심은 원숭이들이 어리석다는 거다. 근데, 정말로 원숭이들은 어리석은가? 현대경제학, 특히 행동경제학 이론에서는 오히려 원숭이들이 매우 합리적인 판단을 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현재를 미래보다 더 좋아하는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나. 뭐, 현시선호이론이란 것도 그래서 나왔나보다. 그래서 현재 1000원이 미래의 1만원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거.

그렇기에 우리는 미래를 위해 현재의 이익을 포기하는 대가로 이자라는 걸 받는다. 거금을 빌리면 시간단위로 이자를 내야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시간할인율로 중간 거래를 하는 사람도 있다고하니, 앞으로의 몇 시간은 경제학적인 면에서 상당한 가치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말 그대로 시간은 금인것이다.

따라서 과거에 멍청하다고 생각했던 원숭이들의 행위는 절대 멍청한 행위가 아니었던 것이다. 단지 시대가 단순해서 원숭이들의 경제학적 사고(경제학적 시간 개념)를 간과하고 있었던 거다. 

케인즈가 그랬다지.. 미래에 사람들은 모두가 죽는다고. 그래서 그는 미래를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쨌든 조삼모사 고사에서 원숭이들은 재평가를 받아야하지 않을까?!

 

 

셋!

여름 한철에 베짱이는 나무 그늘에서 놀며 노래부른다. 그 아래 개미들은 열심히 일하여 먹이를 저축한다. 드디어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온다. 날씨가 추워지자 여름에 땀흘려 일한 개미들은 모아 둔 먹이를 먹으면서 겨울을 잘 지낸다. 하지만 베짱이는 거지가 되어 동냥을 다니다가 쓸쓸하게 죽는다.

 

이게 개미와 베짱이 우화의 주된 줄거리이다. 이 우화의 교훈은 분명하다. 현재의 재미를 포기하고 미래를 위해 열심히 노동하라는 거. 너무 교조적인 색깔이 강하다. 현재 자기 삶을 희생하고 미래의 안락을 위해 일하라는 이 메시지는 누가 언제 무엇을 위해 고안해 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소박한 이야기 속에 노동을 착취하기 위한 자본가의 고단수가 숨어 있다는 거다. 도대체 베짱이와 개미를 왜 비교하는가? 개미는 곰과 뱀처럼 동면을 하며 겨울을 나는 곤충이다. 그에 반해 베짱이는 한 해살이 곤충이다. 봄에 태어나서 겨울에 죽는 운명을 타고난 곤충이다.

 

그런데 각 곤충의 생애주기를 무시하고 저 따위 우화를 만들어낸 건, 달리 생각할 수가 없다. '딴 생각하지 말아라. 미래를 위해 현재 열심히 일을 해야 네 노후가 평안하단다. 네가 좋아하는 걸 추구한다고? 재밌게 지낸다고? 베짱이를 봐, 겨울에 굶어 죽자나!'

이걸 무의식중에 주입시키려 '개미와 베짱이' 우화는 탄생한 거 같다.

 

남을 위해, 미래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삶이 과연 올바른 삶인가?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자기 재능이 뭔지도 모르고 계속 야근을 지속하고 있는 샐러리맨들. 거대한 착취구조 속에서 알량한 복지와 월급으로 하루하루를 사는 게 사람들이 일해야 하는 숙명인가? 그렇다면 메트릭스 속에 안정적으로 생활하고 있는 네오와 별반 다를게 없어 보인다.

 

'개미와 베짱이' 우화는 아이들에게 읽혀서는 안 될 우화가 아닐까?!

 

 

 

덧.

이런 생각이 발칙한 생각일까? 흠, 그럼 새로나온 <군주론>이나 다시 읽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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