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마지막 날 <루시>를 봤습니다. 맥스무비 할인쿠폰으로 2000원에 봤지요.ㅎ 이 영화에 말들이 많고, 특히나 영화를 본 지인들이 죄다 졸작이라는 평가를 하더군요. 네이버의 단평들을 보니, 좋다는 게 부지기수인데 말이죠. 그래서 본지 오래됐지만 보고 나서 몇자 끄적거려 놓았던 것을 좀 정리해 봤습니다.

 

 

이 영화는 순전히 지인때문에 보게 됐습니다. 추석을 앞 둔 몇 주 전 만난 지인이 "한국어 대사를 하는 최민식의 아우라를 볼 수 있어!"라는 멘트가 결정적이었지요. 뤽 베송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작품 중 해외 오프닝 최다 관객을 동원한 영화라기에 동하기도 했습니다.

 

 

 

 

네이버에서 이 영화를 검색하면 액션 영화 장르라고 돼 있습니다. 루시(스칼렛 요한슨)가 장(최민식)에게 쫓기면서 말도 안 돼는 초능력을 발휘하는 면을 보면.. 뭐, 액션 영화 장르로 봐도 무방하겠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엔딩 크래딧이 올라가면서 전 약간 사기 당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이건, 액션 영화가 아니라는 생각이 뒤통수를 후려쳤기에 그렇습니다.

 

영화 시사회 끝나고 뤽 베송과 최민식이 나온 대답을 봤는데, 그때 감독이 그랬죠. 10년을 준비했다고. 자기가 만들고 싶은 영화였다고..

 

영화를 다 보고 나니, 뤽 베송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겠더군요. 이 작품은 시간과 인간에 대한 뤽 베송의 철학적 성찰을 뚜렷이 드러낸 일종의 다큐영화입니다. 다큐 영화를 만들려니 지루해져서 액션 이라는 활극 스토리로 포장한 것이 이 작품의 실체같습니다.

 

표면적인 이야기는 인간이 두뇌를 100% 활용하면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란 것입니다. 영화는 이를 단계적으로 보여줍니다.

 

10%, 인간의 평균 뇌사용량,  24%, 신체의 완벽한 통제, 40%, 모든 상황의 제어 가능, 62%, 타인의 행동을 컨트롤, 100%, 인간의 한계를 완전히 뛰어넘음

 

주된 플롯의 축은 루시의 뇌 가용량이 100%에 근접할수록 전지전능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고, 다른 축은 이런 뇌 사용량의 한계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어느 박사의 이론입니다.

 

결국 합성 약물이 박사의 이론을 현실화 시켜주게 되고, 이 과정에서 여러 가설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뇌과학과 진화에 대한 여러 이론들이 등장합니다만,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전달하고 싶은 건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뤽 베송은 영화 중간에 나래이션을 통해 아주 직접적으로 그리고 확고하게 이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자동차가 점점 빠른 속도로 달리다가 빛의 속도로 달린 후 없어져버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설명이 이어지다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끝맺습니다.

 

"시간이 없다면 인간 존재는 없다."라고요. 곧 시간이 인간(시간이 인간 존재를 규정한다)이라는 겁니다.

 

근데, 이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주제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베르그손이 지속적으로 말해왔던 바로 그 '시간'이지요. 베르그손은 그의 주요 저서들 속에서 일관적으로 시간을 증명했습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시간의 존재를 증명하다니...우리는 시간에 맞춰 살고 미토콘드리아 내의 텔로미어가 닳아 없어지면 노화로 생명을 다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시간으로 이루어진 존재라 합니다. 하지만 시간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 실체가 없는, 그렇지만 지속적으로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아니 인간을 지배하는 이 시간을 베르그손이 철학적으로 증명해 낸 것입니다. 정말 위대한 철학자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베르그손은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에서 시간 속에 존재하는 인간을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물질과 기억>에서는 지속하는 시간이 인간 내부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증명했지요. <사유와 운동>에서도 마찬가지로 지속하는 시간을 다른 각도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창조적 진화>에서는 이 모든 것을 '알랑 비탈'로 집약시켜 주요 생철학자로 자리매김하지요.

 

 

 

 

 

 

 

 

 

 

 

 

 

 

 

 

 

 

 

 

 

 

 

 

 

 

 

뤽 베송은 베르그손이 증명한 이 '지속하는 시간'을 좀더 감각적이고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스토리 라인에 이 철학적 내용을 담다 보니, 감독은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었던 듯합니다.

 

뤽 베송이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이 플롯 구조 속에 녹아들어가지 못하고 불협화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도처에 플롯의 헛점이 산재해 있습니다. 뇌를 100퍼센트 사용하면 전능한 신이 된다는 설정 또한 짜증을 유발합니다.

 

그래서 액션영화로서의 재미를 반감시킵니다. 지인들이 졸작이라고 평가하는 부분도 바로 이것 때문인것 같습니다. 차라리 그냥 다큐 영화로 만들었으면 훨씬 더 연출이 매끄럽게 될 수 있었을 거 같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물론, 흥행은 참패했겠지요.

 

그래도 뤽 베송은 자신의 철학을 액션 영화에 담을 생각을 했고, 어느 정도는 상업적인 면에서 성공했다고 보여집니다. 뭐, 영화적 완성도는 좀 떨어지지만 그래도 철학적 주제의식이 뚜렷한 영화를 상업 영화로 포장할 수 있었다는 데 높은 점수를 주고 싶네요.

 

전, 그나마 의미 있게 보았습니다. 베르그손의 생각을 영화로 만나니 신선하기도 했구요.

 

아직 안 보신 분들은 한 번쯤 봐 줘도 괜찮을 듯 싶습니다. 최민식을 제외한 깍두기 배역들을 연기한 한국 배우들의 어색함을 보는 재미도 솔솔하니까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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