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 인사동 한 카페에서 충격적인 말을 우연히 들었다. 외국인과 한국인들이 섞여 있는 무리 옆에 앉아 있었다. 약간 소란스런 와중에 러시아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에게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영어가 유창하지 않은 러시아인이 천천히 말해서 알아들을 수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요지는 “너희는 주체성 있는 나라냐?”라는 거였다. 그냥 소리가 날아와 귀에 꽂힌 거였다. 헌데,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했다. 외국인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은 그 한국 친구는 어땠는지 모르겠다. 뭐라고 대답하던데, 소리가 작고 울려서 못알아들었다. 아마도 역사 공부를 하는 모임같았는데, 카페에서 이런 말을 들을 지는 꿈에도 몰랐다. 이 질문은 내가 오래 전부터 생각해 오던 문제의 화두여서 더 놀랐다. 이 단상은 아주 오래 전에 탁석산의 <한국인의 주체성>과 신채호 선생의 <신채호 문집>을 보고 끄적거렸던 내용을 생각나는 대로 살을 붙여 마구잡이로 쓴 글이다. 논의가 다소 거칠고 체계가 없더라고 양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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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를 읽는 주요 이유 중 하나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볼 수 있고 과거에서 교훈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역사를 볼 때면 항상 답답한 그 무언가가 마음을 누른다. 그것은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에 놓일 때까지 주권국가로서 반만 년의 전통을 가진 나라라고 자랑하는 일이다. 하지만 외국인이 지적했듯이 탁 깨놓고 말해서 우리나라가 중국의 속국이 아니었던 때가 언제인지 반문하고 싶다.


그래서 우리나라 일부 학자들과 외국 학자들 상당수는 흔히 우리역사를 가리켜 ‘사대주의의 역사’였다고 논평한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진행하면서 우리 역사를 왜곡할 때, 그리고 일본의 식민사관이 우리역사를 재단할 때도 언제나 ‘사대주의 역사’라고 주장한 것을 본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형식적 책봉관계 운운하더라도 우리역사에서 사대주의는 분명히 존재했고 또 그것이 우리가 남의 나라에 자랑할 만한 역사가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역사가 사대주의의 역사라고 하였는데, 그러면 우리 역사상 주체성을 가진 움직임은 전혀 없었는가 하면, 그건 아니라고 힘주어 말하고 싶다. 우리철학 사상의 토착화과정만 봐도 우리가 얼마나 창조적이고 주체적으로 외국사상을 우리체계에 맞게 흡수했는지 알 수 있다. 원효의 불교사상은 한국불교사상의 원형을 이룸으로써 그 초석을 놓았다. 중국 주자학은 한국에 도입돼 퇴율 철학의 논쟁 속에서 독자적인 한국 성리학의 토대를 닦았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주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문자생활의 지평을 피지배층으로까지 확대했다. 우리는 15세기에 독창적인 문자를 갖는 나라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활약은 어떤가. 왕 이하 모든 대소신료들이 조선을 도우러 온 명의 행패를 보고만 있었을 때 이순신 홀로 잘못된 점을 비판하며 명의 장수를 나무랐다. 워낙 추상같고 바른 지적이었기에 명의 장수 진린은 그런 이순신을 흠모하기까지 하여 자신의 실수를 뉘우쳤다고 역사는 전하고 있다. 난중일기를 토대로 한 드라마나 소설 속에서 그려진 이순신은 그렇게 통쾌할 수 없었다. 확실히 우리의 주체적인 모습이라 할 만 하다.


하지만 이러한 주체적인 움직임은 장구한 우리의 역사 속에서 자주적으로 계승되지 못하고 단절되었다. 우리 역사에 면면히 이어져 온 것은 다름 아닌 큰 나라를 섬기는 사대였다. 특히나 조선은 어처구니없게도 그 사대주의를 천명한 대표적인 나라였다. 오죽했으면 소중화(小中華)라는 표현을 스스럼없이 했겠는가.


이 사대주의 역사가 치욕스럽다면 그 원인은 어디서부터인지 소구해보는 건, 그래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역사가 오직 사대주의로만 일관된 건 아니었다는 반론 또한 만만치 않으니 그 점 또한 간과할 수 없겠다.

현 시점에서 우리에게 ‘너희가 주체성 있는 민족이냐?’고 묻는 외국인들에게 정확히 답하기 위해서라도 사대주의의 역사적 소구 작업은 필요할 듯하다. 역사적 성찰을 통해서 적어도 작금에는 같은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다.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나라는 미래가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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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의 역사, 즉 ‘사대’란 말은 ‘이소사대(以小事大)’의 줄임말이다. 풀자면, 약하고 작은 것이 크고 강한 것을 섬긴다는 의미. 그러니까 한마디로 정리하면, 소국이 대국을 종주국으로 섬긴다는 거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러한 사대주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이의 시초는 (거칠게 잡아도)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듯하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은 모두 중국의 책봉 관계 속에 편입되어 제후국으로 봉해졌다. 물론 이러한 관행은 중국 중심의 세계관이 반영된 형식적인 관계가 강하긴 했다. 역사를 보면 당시 중국이 3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일은 거의 없었던 걸 보면 형식적 관계가 강했다.


이러한 관계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한 이후에도 그리 달라지지는 않았다. 당을 끌여들여 미흡한 통일을 완성했지만 중요한 것은 당의 한반도 지배야욕을 막아 냈다는 점이다. 당시 신라는 어쨌든 전쟁으로 당의 세력을 이땅에서 몰아냈다. 신라 초기는 그래서 당과 적대 관계였지만 이후 체제가 안정되자 역시 무역을 위해 중국의 책봉제제를 받아들였다. 이후 신라는 당에 형식적인 사대의 예를 다한 것으로 보인다. 당과의 무역은 신라에게 매우 이로운 일이라 조공 관계는 그리 손해 볼 일은 아니었다. 단지 외부에서 봤을 때 형식적으로 중국 세계에 편입된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신라가 망하고 후삼국의 통일을 마무리한 고려는 처음에는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받아 북진정책을 추진했다. 고려 전기를 보면 중국과의 항쟁이 주를 이룬다. 이는 당시 동아시아의 패권국가였던 거란 족이 3차에 걸쳐 고려를 침입한 사건으로 알 수 있다. 전쟁을 해서 고려는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 거란으로부터 자주국가로 인정받았다. 광종이 독자적인 연호를 썼던 것은 중국과 대등한 황제 국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어쨌든 고구려 광대토왕 이후 우리 역사에서 드물게 황제 국가로서의 위신을 선포한 때였다.


하지만 이는 오래 가지 못하고 결국 거란의 연호를 쓰기로 결정했지만 당시 동아시아 3국의 세력은 팽팽하여 안정된 국면을 맞이했다. 고려도 형식적인 책봉관계를 받아 들였을 뿐 중국을 받드는 사대외교는 이때까지 출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2세기 들어오면서 한반도 북쪽 만주지역에 살던 여진족이 강성하여 나라를 세우게 된다. 화북 지방까지 세력을 떨친 여진족은 금을 세운 뒤 연운 16주를 차지했다. 이후 송을 남쪽으로 몰아내는 정강의 변(1126~1127년)으로 화북지방을 송두리째 빼앗으며 송을 신하의 나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는 다음 공격 목표를 고려로 정했다.


사실 여진족은 고려 초기부터 우리나라 북쪽 국경선에 살면서 고려에게 식량과 농기구를 구걸하다시피하며 생활 했다. 수렵으로 잡은 동물의 가죽 등을 갖고 와서 먹을 것과 교환해 갔다. 무역을 거부하면 애걸복걸하면서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겼다. 실록과 각종 역사서에 보면 나오는 얘기다.

 

그런데, 이런 보잘 것 없던 미개한 여진족이 고려 중기 이후 송을 남쪽으로 밀어낸 것이다. 화북지방을 차지한 금은 과거에 부모의 나라로 섬겼던 고려에 대해서 형제국의 예를 맺자고 사신을 보내온다. 쉽게 말해서 자기들을 고려가 형님으로 대접해 줬으면 좋겠다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서 고려 조정은 발칵 뒤집힌다. 무례한 놈들이라고 소리를 높이지만, 정작 금나라를 손봐줄 생각은 좀처럼 하지 못한다.


이때 묘청이라는 승려가 나와 금의 콧대를 꺽어버리자고 일갈한다. 처음에는 왕 이하 조정대신들이 솔깃했지만, 당시 정세상 금의 군사력은 동아시아 최강이었다. 묘청과 정지상을 중심으로 한 서경파(북진의 전초세력들)는 우리의 자주를 위해 금의 되먹지 못한 요구를 깨부수려고 천도까지 계획한다. 이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낀 왕과 대신들은 묘청의 이러한 행동을 제한한다. 거기까지만 하라는 것이다. 그냥 전쟁 없이 금을 형님 대접해주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는 논리였다.

 

이에 대해 묘청 일파는 불합리한 정치적 결정이라 생각하고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이것이 유명한 고려시대를 뒤흔든 ‘묘청의 난’이다. 묘청은 나라의 자주를 위해서는 전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연호를 ‘대위’ 국호를 ‘천개’라 하며, 금 정벌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안타깝게도 김부식으로 대변되는 개경파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1135년에 있었던 이 사건의 이름은 사건을 평정한 사람들의 사관이 투영되어 '난'으로 기록되었다. 김부식은 묘청을 잔혹하고 정권의 욕심이 아주 많은 인물로 그려 그를 폄하했다. 왕과 백성을 혹세무민한 대역죄인이라 평했다. 정권을 잡은 개경파의 사관이 투영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김부식의 평가는 후대에 새롭게 평가받기에 이른다. 이후에는 '서경천도 운동'이라 명명하며 금에 대한 우리의 자주의식을 천명한 사건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특히 신채호는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우리나라가 사대를 하기 시작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했다. 그는 이 사건을 ‘우리 역사상 제일대 사건(조선 천년 제일대 사건)’으로 보았다. 개경파와 서경파가 나뉘어서 정권을 놓고 싸운 게 아니라 아주 중요한 역사의식의 심각한 충돌로 해석한 것이다. 우리가 자주의식을 잃고 사대로 일관한 것은 묘청이 김부식 일파에게 패한 바로 그때부터 시작됐다고 신채호는 평가하고 있다.

 

모든 역사책과 기록에서 묘청과 서경파에 관계된 자료와 사서들은 제거 되었고, 이후 개경파의 역사의식이 투영된 <삼국사기>가 우리 역사 최초의 정사 기록으로 남게 되었으니,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삼국사기>는 금에 대한 사대의 예를 다한 김부식의 투철한 유교적 역사의식이 고취되어 있는 사서이다.

 

이로부터 시작된 우리의 ‘사대주의의 역사’는 유구한 시간을 갖고 내려오면서 우리의 의식을 지배했다. 사대의 유전자는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잉태되었다. 고려의 저 묘청의 사건은 이후 매번 다른 상황의 옷을 갈아입고 역사에 종종 출몰하게 된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얼마 안 있어, 명은 멸망했다. 조선에 파병한 군사력의 손실로 인해 청나라의 공격을 막지 못했던 것이다. 명을 멸하고 청 왕조를 세운 민족은 금나라의 후신인 여진족이다. 중원의 패권을 장악한 청은 금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고려의 후신인 조선에 형제의 맹약을 맺자고 소식을 전해온다. 이 사건이 정묘호란이다.

 

정묘호란은 꽤 심한 반발이 있긴 했지만 일단 형님으로 대접해 주는 선에서 타협을 보고 사건은 마무리 된다. 하지만 정묘호란이 있은 지 얼마의 시간이 흐르지 않아 전세는 변하여 이번에는 청이 군신의 예를 맺자고 소식을 전해온다. 이에 조선 조정은 발칵 뒤집힌다. 미개한 무리들의 요구를 물리치고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는 무리와 전쟁 없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선에서 그치고 그 사이 우리의 힘을 기르자는 무리로 나뉘어졌다. 두 파로 나뉘어 서로 싸우는 와중에 결론은 나지 않고, 청 태종은 직접 조선을 정벌하러 내려오는 사태가 벌어진다.

 

1636년 청 태종이 조선을 정벌하러 온 이 사건을 일컬어 병자호란이라 한다. 병자호란이 발발하기 전, 김상헌을 비롯한 척화주전파는 청과 싸워 장렬히 전사하는 한이 있어도 오랑캐에게 굴복할 수는 없다고 일갈한다. 이에 대해 최명길로 대변되는 실리주의의 주화파는 우리의 힘이 청에게 상대가 되지 않으니, 일단 청의 요구를 들어주고 이후 힘을 길러 우리의 자주성을 찾자고 주장한다.

 

이 싸움에서는 고려와 달리 천화주전론이 승리하여 청과 싸움을 하지만, 이건 전쟁이 아니라 그냥 농성에 그치고 말았다. 남한산성에서의 40여일의 기록이 이때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전쟁의 결정이 우리의 자주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의명분에 있었다는 점이다.


명을 받든 소중화(小中華), 다시 말해서 조선이 명을 대신해 복수하여 중화사상을 회복한다는 거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조선의 자주성을 회복하자는 논의는 아이러니하게도 최명길의 입장에서 나온다. 어쨌든 소중화를 자처하고 행한 청과의 전쟁에서 인조는 삼전도의 굴욕을 맛보고, 깍듯하게 청에게 사대의 예를 다하게 된다.


시간은 흘러흘러 세도정권이 끝나고 세계 열강들이 이양선을 타고 우리 근해에 나타나는 시대가 도래 한다. 일명 구한말의 시기. 일본과 미국 그리고 프랑스와 러시아가 조선과 무역을 하기 위해 배를 타고 나타났다. 이 중에서 제일 열심인 나라는 일본. 일본은 치밀한 계획 하에 조선을 개항하여 청에 대한 종주권을 부인케하고 조선을 독립시켜 자신들의 속국으로 만들 시나리오를 계획하고 있었다. 강화도 조약으로 시발된 이 시대에는 자주와 사대의 싸움이 개항과 척사의 옷을 입고 재등장하게 된다.


조선후기에 등장한 개화와 척사의 대립은 일제시대 이후 ‘선 독립 후 실력양성파’와 ‘선 실력양성 후 독립파’로 갈려진다. 선 독립 주창자들은 위정척사의 의식을 갖고 자주를 지켜온 자들의 생각을 대변한다. 그들은 독립을 위해 끝까지 최후의 한 사람까지 대일전쟁을 할 것을 맹세한다. 후자인 독립보다 실력양성이 우선이라는 자들은 곧 인조대의 실리파와 궤를 같이 한다. 이들은 독립을 하기위해 일본의 좋은 점을 받아들여 실력을 키운 후 독일을 하자고 주장했다. 일제 36년 간 무장독립 투쟁과 애국계몽 운동은 자주와 사대(실리)의 또 다른 표출이었다. 어떤 것이 더 옳다고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실력양성 측인 애국계몽운동을 한 많은 인사들이 친일 행각을 한 것으로 보아, 현재의 우리는 무장독립투쟁파가 더 올바른 판단을 했다고 평가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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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러한 대립 양상은 냉전체제로 분단국가가 되고 6.25를 겪으면서 복잡하고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하고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출발한 대한민국 정부는 반공을 국시로 삼았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맞물려 우익의 세상이 된 이승만 정권은 친일파를 정재계에 고루 등용하여 친일파가 권력을 잡는 빌미를 제공했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거쳐 노태우 정권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를 지배한 이들은 친일파의 후예들(작금의 보수이자 우익)이었다.


이들은 구한말 개화파, 그것도 일본의 세력에 빌붙은 후손들이다. 자주국가 건설과 무장 독립투쟁을 외쳤던 민족지사들은 대부분 공산주의를 받아들여 해방과 함께 북으로 넘어갔다. 이것이 남한의 비극이자 나라의 주체성이 없어진 결정타였다. 비록 소수의 자주 계열이 남한에 남아 있긴 했지만 박정희 정권 하에서 독립투사들의 후예와 함께 빨갱이로 몰려 완전히 몰락했다.


작금의 진보 대 보수의 갈등은 전통적인 자주 대 사대의 도식으로 볼 수 없는 복잡한 양상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의 진보는 영미의 진보 개념이 아니며, 역시 보수도 영미의 보수 개념이 아니다. 우리의 보수 진보 논쟁은 색깔 논쟁을 넘어 종북이냐 아니냐로 확대되고 있다. 국가의 자주적인 국부를 위해서는 그 어떤 관심도 없는 게 현 정치권의 세태이다.


우리는 주한 미국의 주둔과 보호 속에 국방의 자주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며 각종 이권을 미국에게 빼앗기고 있다. 한미 FTA뿐만 아니라 차세대 전투기 사업을 둘러싼 잡음들 역시 한국의 기득권층이 이권을 미국에 넘겨주기 위해서라는 게 지배적인 시각이다. 현재의 외교 노선은 그야말로 미국에 대한 현대판 사대로 일관하고 있다. 중국에 대한 외교역시 소극적이고 국가의 영토적 환경적 이익에서 할 말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이 시시때때로 외치고 있는 독도 영유권에 대해서는 본질적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외교는 구한말과 비교해 결코 나아보이지 않는다. 박근혜 정권 초기에 미국에서 윤창중 사건이 터진 외교에 그 어떤 기대를 할 수 있을까? 일본 원전 사고로 방사능 유출수가 쏟아진다고 해도 일본산 해산물을 안전하다고 수입하는 나라다. 우리나라 국익과 자주를 위해 어떤 외교적 성과가 있는지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친일을 정당화하고 일본의 한국지배를 정당화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파동은 이 나라 우익의 실체가 무엇인지 명확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우리는 얼떨결에 사대주의도 모자라 친일 정권을 우리의 집권 정당으로 가진 나라가 된 것이다.



4


외국인이 우리에게 “너희가 주체성 있는 민족인가?”라고 물으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고려 김부식의 금에 대한 사대당이 조선의 소중화 사상을 거쳐 개화파로 그리고 친일파로 내려온, 이 기득권의 역사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만일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저 외국인의 물음 앞에 반성을 하고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현재의 우리는 주체성 있는 민족이 아니기에 그렇다. 가슴에 손을 올리고 생각해 보면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반성하고 행동할 때 저 묘청의 자주 정신은 되살아 날 날이 올 것이다. 나는 이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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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3-01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사람이 쓰는 한국말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한국사람다운 한국말을 쓰는지 알 길이 없곤 해요. 그러나, 누구나 한국말을 쓴다 하더라도 한국말이 어떤 한국말인지 제대로 들여다보는 사람이 거의 없지 싶어요.

말부터 말답게 쓰지 못하니, 역사도 역사답게 헤아리지 못하고, 문화도 문화답게 가꾸지 못하고, 정치도 정치답게 지키지 못하고...... 모두들 똑같이 흐르지 싶습니다.

외국사람이 한국사람더러 '너희는 진짜 한국말을 쓰는 사람인가?' 하고 묻는다면. 국어사전 만드는 일을 하는 저조차도 '아니다' 하고밖에는 할 말이 없기도 합니다.

2014-03-03 1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