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량화돼가는 학문세계(이승우)
아프락사스님이 서재에 올려주신 이승우 씨의 글을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다. 글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 있어 전문을 옮겨 놓고 몇 자 부가해 본다.
계량화돼가는 학문세계
2011년 10월 20일
이승우 출판인
최근 우리 사회에 독서 열풍을 몰고 온 한 교수의 책은 여러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 가운데 나는 경제적 삶의 영역을 이제와는 다른 시각으로 보게 함으로써 ‘통계’에 익숙한 경제 분석보다는 인간의 감정과 정신이 스며든 시각으로 경제 현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인식의 전환을 명징하게 드러내 보인 점이 신선했다.
사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저명한 경제학자들(예를 들어 애덤 스미스로부터 마르크스, 요제프 슘페터까지)이 단순한 ‘경제학자’가 아니라 사상가였음을 상기해본다면, 현대경제학 특히 미국식 계량경제학에서는 ‘인간’이 배제된 숫자놀음을 하고 있다고 좀 극단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통계자료를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경제 생활의 주체가 인간인데 인간은 배제되고 단지 숫자화된 통계자료를 통해 경제학을 해왔으니 일반 사람들 입장에서는 흔히 말해 ‘전문적인’ 경제학자들의 분석과 전망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경제 현상 한가운데 ‘인간’을 두고 분석해보면 의외의 시각으로 복잡한 경제현상을 ‘인간학적’으로 볼 수 있음을 그는 말하고 있다.
무릇 학문의 존재 이유는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고, 대학에서의 인문학, 사회과학 역시 인간의 이해를 돕는 학문일진대, 지난 십여 년간 우리 대학사회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숫자와 통계의 논리에 빠져 최소한의 상아탑 지위마저 상실 위기에 처한 느낌이 든다.
예를 들어 한 학회지 편집간사를 맡고 있는 소장학자에게 들은 바로는 예전에 비해 학회지에 기고하는 논문 편수가 눈에 띌 정도로 늘었지만, 질적 수준의 진전은 제자리걸음 내지는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형편이라고 한다.
아울러 실적을 쌓고 그에 걸맞은 승진 제도가 질적 평가기준보다는 수치화된 양적 평가 위주로 이루어지고, 연구 프로젝트 역시 (인문학의 경우 특히나) 장기간에 걸친 ‘사유의 모험’을 보장해주기보다는 당장 눈앞에 결과물을 내놓아야 하는 처지에 교수나 강사, 대학원생들이 내몰리고 있는 실정이다. 각 대학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이제 대부분의 평가기준은 논문 편수로 수치화된다.
그렇다보니 장기적인 관점에서 충분한 연구기간을 확보하고 심혈을 기울여 단행본 저술을 해나간다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자연스레 출판계 쪽으로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지난 해 각 언론사들이 선정한 올해의 책을 유심히 살펴보면 괄목할 만한 수준의 학술서를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출판계의 평가이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출품종수 자체가 현저히 줄어들었고, 그 질적 수준 역시 갈수록 떨어진다는 데 있다.
여기까지는 아마도 대부분의 연구자들이나 인문, 학술출판계에 종사자들이 대략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보다 먼 훗날을 생각해보면 실적에 급급한 양적 연구결과물 생산에 익숙해진 것이 고착화돼 저술의 早老 현상이 가속화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이다.
단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서구 학계에서는 정년을 넘어서도 오히려 더 열정적으로 연구에 매진해 대작을 집필하는 학자들을 자주 볼 수 있다. 가다머나 하버마스, 최근의 자크 랑시에르나 알랭 바디우, 테리 이글턴, 프레드릭 제임슨 등이 대표적인 학자들이다. 우리 주변에서 이제 大作이나 力作을 찾는 것은 물론, 소장학자 때부터 온축된 치열한 글쓰기와 사유의 모험을 나이 들어서도 활발히 전개해나가고 있는 학문의 ‘어른’을 찾기란 더더욱 요원한 일이 되어가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계량화를 전적으로 무시할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이 유용하게 쓰일 정도까지가 그 한계이지 그 범위를 벗어나면 사람이 거기에 종속하게 된다. 하물며 학문세계는 인간의 ‘정신’을 다루지 않는가. 한 연구자의 정신의 발현을 숫자로 표기할 수 있을까. 앞서 말한 한 교수가 시장자유주의의 숨겨진 허상을 인간화된 경제학으로 극복하자고 하듯이, 대학의 학문세계 역시 인간의 정신 행위에 대한 온당한 평가를 통해 계량화의 폐해를 극복해나가야 할 것이다.
현대 경제학이 인간을 위한 경제학이 아닌 수학적 모델을 위한 경제학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은 예전에 이미 슈마허가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설파한 내용이 아닌가. ‘우리 사회에 독서 열풍을 몰고 온 한 교수의 책’이 무슨 책인지 모르겠지만 “복잡한 경제현상을 ‘인간학적’으로” 본다는 시각에서, 그 교수는 확실히 슈마허의 경제학을 계승한 학자임이 분명할 것이다. 이 교수가 쓴 책이 무엇인지 참 궁금하다.
아무튼, 출판계에 종사하지 않아 출판계의 현황은 이런 출판인들의 전언에 귀 귀울이지 않는 이상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런 면에서 이런 글은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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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각 언론사들이 선정한 올해의 책을 유심히 살펴보면 괄목할 만한 수준의 학술서를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출판계의 평가이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출품종수 자체가 현저히 줄어들었고, 그 질적 수준 역시 갈수록 떨어진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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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목할 만한 수준의 학술서가 거의 없다거나, 출품종수가 현저히 줄었들었다는 사실을 우리네 평범한 독자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통계 수치로 좀 자세히 알려줬음 하는 아쉬움이 있는 대목이다.
각 대학의 논문 편수가 늘었지만 질적으로는 떨어지며 학술 단행본이 양적, 질적으로 저하된 이유는 위 글에서 언급 됐다시피 결과물 위주로 교수와 대학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작년과 올해, 교수들을 만날 수 있는 자리가 꽤 많아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교수들에 따르면 예전에 심혈을 기울여 1편 쓸 논문을 여러 편으로 쪼개서 발표한다고 한다. 그래야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논문이 질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닐까. 그런데 대학에서 실적 위주의 양적 평가 장치라도 없으면 1년에 논문 한 편도 안 쓰는 교수들이 엄청 많아지리라는 데 문제가 있다.
내가 학부를 다닐 때에도 그런 교수들을 부지기수로 많이 보았다. 그런데 그런 교수들도 지금은 결과물 위주의 평가 때문에 적어도 몇 편은 쓴다. 물론 부실할 수 있다. 쓰기 싫어하는 사람이 억지로 쓰니 오죽 할까. 그래도 이런 공부 안하는 교수들이 공부를 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그리 나쁜 장치는 아닌 것 같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좋은 논문들을 쓰고 항상 공부하는 교수들에게는 논문의 질을 저하시키는 작용도 할 것이다. 제약이 없었던 예전에는 1년에 양질의 논문 3편을 썼던 교수가 이제는 평가 제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6편-7편을 쓴다. 확실히 질적인 면에서 예전만 못할 가능성은 매우 높아질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 의견이지만, 주목할 만한 학술서가 없고 논문의 질이 떨어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예나 지금이나 좋은 논문을 쓰는 교수는 정해져 있다. 예전에 좋은 논문이 100편 이었다면 어떤 제약 없이 자유로운 연구 분위기에서 이들이 쓴 논문이다. 양질의 논문이 50편으로 줄었다면 이들이 스트레스로 인해 100편 쓸 것을 200편 쓴 것이다. (이게 주범일 듯)
현행 결과 위주의 대학 평가 시스템은 결국 양날의 검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공부 안하는 교수들을 어느 정도 공부하게 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하지만 공부를 꾸준히 해 오던 교수들에게 쓸데없는 스트레스를 주어 그들의 학구열을 반감시키는 것은 크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일반적으로 '학문의 진보'는 그저 그런 100편의 논문이 아니라 양질의 논문 1편에 의해 이루어진단다. 예전에 비해 좋은 논문이 점점 없어진다는 것은 이승우 씨가 지적했듯이 학문의 퇴보라 불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듯하다.
평가 제도를 개선하지 않는다면, 학문의 퇴보는 가속화 될 것같아 심히 걱정된다.
ps.
좋은 글을 접할 수 있게 해 준 아프락사스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