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상-언싱커블]

1

일반 스릴러 영화를 보려고 영화를 선택했다. 스릴러물이라서 폭탄 테러에 대한 범인과 FBI의 숨막히는 지략 대결을 기대 했다. 영화가 시작되고 1시간 여 동안 루즈하게 전개되는 양상에, ‘이건 뭐지?’를 되뇌이면서 영화를 꺼버리고 싶은 충동을 누를 수 없었다.

하지만 끝에 기막힌 반전이 있다는 영화 카피만 믿고 그냥 꾸역꾸역 플레이 시간을 늘려 갔다. 1시간이 가고 영화 플레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을수록, 나는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엔딩 크레딕이 올라가는 시점이 되자 매우 심기가 불편했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랄까. 영화는 고문의 정당성을 대놓고 묻고 있었다.

“과연 고문은 어떠한 경우에도 행해져서는 안 돼는 것인가? 그리고 윤리적으로 정당화 되는 고문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인가?”

영화 <언싱커블>은 이 물음에 대한 심각한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도 너무 원색적이다.  윤리학 영역에서 오랫동안 쟁점화 되어온 ‘고문의 정당화’에 대해서 관객의 주관적 생각을 묻고 있다. ‘그래, 윤리적 사고는 좋은데, 너라면 어떻게 생각하냐?’고.


2

고문은 인간에게 물리적 정신적 고통을 가해서 자백을 받아내는 전통적인 처벌 수단이다. 이러한 고문은 인류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이런 유구한 처벌 수단이 근대 헌법국가 단계에 오면서 심각한 반대에 부딪쳤다. 근대 헌법국가 시대에 가장 중요한 권리로 대두된 것이 천부인권 사상에 바탕을 둔 인간 존엄권이다. 생명권과 더불어 인간 존엄권은 시민의 기본권 중의 기본권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입헌주의 국가들 대부분은 국민이 고문을 받지 아니할 권리를 헌법적 차원에서 명시적으로 천명하고 있다. 우리 헌법도 예외는 아니어서 헌법 12조에 이 권리를 명시하고 있다.

근대 이후 고문은 공식적 처벌 수단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주된 이유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권리를 가장 심각하게 훼손하는 처벌이기 때문.

그래서 고문은 일반적으로 정당하지 않으며 범법행위로 간주된다.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을 가하는 행위는 이제 가장 비윤리적인 행위인 동시에 헌법에 위배되는 범죄행위이다.

헌데, 이러한 고문 행위가 아이러니컬하게도 정당화 되는 상황이 존재한다. <언싱커블>에서 보여지는 하나의 상황이 이를 예시한다.


3

'스티븐 아더 영거(전직 폭탄 전문가)'라는 이슬람계 미국 시민이 미국의 주요 도시에 핵폭탄을 몰래 설치한 후, 동영상 까지 찍어 자신의 행위를 당국에 알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에 스스로 체포된다.

핵폭탄이 터지기까지는 5일의 시간밖에는 없다. 핵폭탄의 위치를 찾기 위해 정보부는 한시적 조직을 만든다. 영거를 기밀이 유지되는 곳에 가두고 특수부대 장교, 고문 전문가 H (헨리 험프리스) 그리고 FBI 특수요원(브로디)으로 팀이 구성된다. 그리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폭탄의 위치를 자백받으라는 명령을 하달 받는다.

방법을 동원해도 소득이 없자 정부는 고문전문가인 H를 투입한다. 하지만 영거는 온갖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내 입을 열지 않는다. 동원되는 갖가지 고문이 여과없이 영화를 통해 보여진다.

손가락 자르기, 칼로 성기에 상처내기, 손톱과 이빨에 상처주기, 얼굴에 비닐봉지 덮어씌우기, 물고문, 전기고문 등등.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고문 기술이 H에 의해 시행되지만 끝내 영거는 폭탄의 위치를 말하지 않는다. 고문 당하는 것을 즐기기까지 한다.

H는 영거에게 휘둘린다. 고문전문가를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는 영거. 모든 고문 수단을 다 동원해도 영거는 모르쇠로 일관한다. 드디어 H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든다. 이 비장의 카드로 H는 영거의 결의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확신한다.  


지금까지의 온갖 고문은 견뎌냈지만 이 히든카드 앞에서는 자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H는 확신했다. 바로 영거 앞에서 자신의 부인과 자식들을 고문하고, 그 고문당하는 모습을 영거가 보는 것이다. (결국 H의 이 확신은 결실을 맺어 영거는 일단 자백하고 자살한다)

한편 H에 의해 선택된 조력자인 FBI 특수요원 브로디는 갈등한다. 영화에서 그녀의 심경 변화는 매우 중요하다. H는 영거의 입을 열게하는 방법은 오로지 고문밖에 없다고 하지만  브로디는 계속 고문만은 안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 고문을 제외하고 할 수 있는 수단은 다 동원해 봤지만 영거에게 놀림만 당하는 그녀는 드디어 고문에 묵시적 동의를 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고문은 부당한 것이라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그녀는 항상 밖에 있다. 그녀가 괴로운 것은 영거의 부인과 자식들이 아무 죄가 없고 단지 고문을 받아내기 위해 희생되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녀도 고문만이 수백만명의 사람들을 살리는 유일한 방법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가 H의 고문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고문을 하지 못하게 막는다면, 결과적으로 그녀의 고고한 윤리관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셈이 된다.



여기서 놓치지 말하야 할 것은 고문을 반대하는 사람도 어쩔 수 없이 고문을 지지할 수밖에 없게 되는 상황이 있다는 점이다. 난감한 상황이지만 별다른 해결책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

영화는 이 상황을 대놓고 들이댄다. 한 사람 또는 죄 없는 몇 사람에 대한 고문을 거부함으로써 미국 시민 수백만명을 죽이는 폭탄테러가 일어나도록 방치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이것은 자신의 윤리적인 욕심으로 인한 일종의 도덕적 방종이 아닐까?

더러운 행동을 하지 않아 자신의 윤리적 고결함은 지킬 수 있겠지만, 그런 그의 결정으로 인해 무고한 수백만명의 목숨들이 희생된다. H가 결국 최후의 고문 수단으로 택한 영거의 두 자식에게 가하는 고문을 인정할 수 있다면, 고문 필요성에 대한 근거는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된다.

하지만 모든 고문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인권유린 이라고 보는 인권운동가들에게는 이런 입장이 일종의 윤리적 도전이 된다. 영화에서는 FBI 특수요원 브로디가 인권운동가 입장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인권운동가들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도 고문을 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고수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분명한 사실은 무고한 생명을 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입장은 단호하지만 결국 수 많은 생명들이 희생된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결국 윤리적 원칙을 고수하면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은 없다.

솔직히 영화의 해결책은 간단하다. 한 사람의 생명보다 많은 사람의 생명이 더 중하다는 공리주의 입장이라면 고민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이 영화가 딜레마 상황에 부딪쳐 갈등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설의 입장에서 논의를 출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윤리 문제에서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설은 지극히 높은 위치에 있다. 인간 윤리에서 칸트의 정언명령은 견고 하고 절대적이며, 인간이면 누구나 따라야할 규범윤리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윤리학의 오랜 딜레마적 상황인 특수한 경우 칸트의 윤리법칙을 지킨다는 것은 너무나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영화의 상황은 그러한 딜레마 상황 중 하나의 사례이다. 이 지점에 오면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설이 힘을 잃고 공리주의적 윤리설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칸트의 윤리설 입장에서 고문의 정당성을 찾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영화 속에서 결국 브로디로 대변되는 인원옹호론자들이 승리하지만 하나의 폭탄이 터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담보로 지켜지는 보편적 윤리법칙이 과연 정당한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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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보고갑니다 2012-09-29 2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윤리적으로 동의하지않지만 할수 밖에없는... 딜레마군요.. 소수보다 다수가 중요하다는 논리에 저는 아직도 명확한 답을할수없는것 같습니다.. 과연 1명보다 수백만명의 목숨이 소중한걸까요? 때에 따라서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것이 맞는 것일까요? 글쎄요... 그 '소수'안에 제가 포함 되있지만 않다면 그것이 맞다고 하는것은 너무나도 이기적인 답변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