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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생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7월
평점 :
<은밀한 생>의 겉표지에는 파스칼 키냐르의 ‘장편소설’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작가의 책을 처음 펼치는 사람이라면, 일반적으로 서가에 진열되어 있는 소설작품 중 한 권을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아무생각 없이 책을 읽기 시작한 사람은 몇 페이지를 넘기다가 말고 이상한 책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페이지를 더 넘기면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소설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전통적인 산문도 아닌 것이, 거기다가 시도 아닌, 참으로 난감한 문장들과 단락들만이 계속 이어진다. 하지만 그런 것도 잠시, 예상을 뛰어넘는 감탄스러운 문장을 만나게 되고 계속 줄을 긋게 된다.
소설이라는 전통적인 장르 개념을 파괴한 이 작품은 무엇보다 이러한 독특한 형식이 주목을 끈다. 체계 없이 그냥 생각의 편린과 같은 단락들이 무수히 연결되어 나아가지만 결국에는 단일한 주제의식을 전달하고 있다. 키냐르가 개척한 새로운 장르라는데, 이 형식적 이질감으로 인해 가독성은 현저히 떨어지고 있음은 부인할 수가 없다. 어떤 장르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든 장르에 속하는 형식의 한 변형이라는 데 어지럽기는 매한가지다.(키냐르는 왜 한 가지 장르에 얽매여서 사고를 빈약하게 하는가?, 왜 모든 장르의 이점을 활용하면 안되는가?라고 반문한다)
이 작품을 형성하고 있는 53개의 장들은 각기 소설, 신화, 전설, 묘사, 대화, 희곡, 아포리즘, 평전, 음악과 미술에 대한 평론 등의 독자적인 장르를 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단지 한 두 문장으로 이루어진 극히 짧은 장과 단편소설 분량의 호흡이 긴 장들이 어지러이 섞여 있다. 이러한 체계없는 구성 속에서도 각 장들 간에는 나름대로의 연관성이 느슨하게 유지되는가 하면, 26장처럼 전혀 이질적인 장이 끼어들어 흐름을 방해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어지러운 방식이 “설명할 수 없는 삶을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표현하려는 작가의 의도된 전략임”을 알기 전에는 그저 당혹스러울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들쭉날쭉한 53개의 장을 읽는 방법도 평면적이어서는 이해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 책을 번역한 송의경씨에 의하면, 키냐르 책은 그에 걸맞은 독법이 필요하단다. “모자이크를 바라보듯 부분과 전체를 한눈에 아우르는 노력을 이중으로 진행시킬 때 가장 이상적인 독법이 된다. 이러한 독법으로 읽다 보면, 작품의 층위에서 그 자체로 한 점의 동판화인 53개의 장들이 모여서 다시 한 점의 판화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부분과 전체가 팽팽히 긴장하며 서로가 서로를 떠받치는 가운데 작가가 새기는 동판화 <은밀한 생>도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프랑스 평단에서는 키냐르의 소설들에 대해 ‘시적 산문’ 혹은 ‘산문시’라는 찬사를 늘어놓는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시처럼 아름다운 문장을 만나볼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아름다움이 키냐르의 글쓰기 방식, 어휘의 선택, 아포리즘적 문장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작품에서 시적인 메타포를 건저올리게 하는 것일까? 송의경씨의 말을 들어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아름다움은 일체의 기교가 배제된 극도로 예민한 감수성이 강렬하게 표출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솟아오른다. 그곳에서 단순히 ‘문제’가 아닌, 육체(작품)에 깃든 영혼과도 같은 한 목소리가 예리한 칼처럼 느닷없이 우리의 가슴을 겨눈다.” <르몽드>지가 “그의 작품들은 <시학>이 시에 부여한 영역을 단번에 획득하여 점령한다.”라고 언급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다.
책은 굉장히 사적(私的)이다. 자신의 단상들을 적어 놓은 일기장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여주인공을 등장시켜 마치 자기 얘기를 하는 판토마임극과 같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저자는 사랑하던 여인을 잃고 은둔지를 찾아 끊임없이 사회로부터 이탈하면서, 기원의 탐색, 잃어버린 첫사랑의 기억, 은밀한 삶의 방식이라는 주제들을 표출해 나간다. 키냐르의 표현을 빌면, 그를 비롯한 모든 인물들은 모천을 향해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인간들’이다. 이러한 것을 키냐르는 ‘모천회귀’라고 명명한다. 키냐르에 있어 모천회귀 여행은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이루어진다.(그는 하루도 독서를 하지 않는 날이 없다고 한다) 독서는 책과 1:1로 대응하는 침묵의 여행이다. 또한 글쓰기는(키냐르식으로 말하자면) “말을 함으로써 사회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사회에서 자신을 사라지게 하는 방식이다.”
키냐르가 이 책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독서와 배우기 그리고 사랑은, 태아가 어머니와의 융합상태에서 느꼈던 완전한 일치감을 제공한다고 한다. 사랑을 통해서 키냐르는 끊임없이 그런 순간들을 찾아 헤맨다. 그 궤적은 다음과 같다.
1. 최초의 사랑(어머니) ← 2. 첫사랑(네미) ← 3. 사랑의 그림자(M)
1은 최초이며 지금은 잃어버린 불가능한 사랑, 곧 어머니이다. 현실의 어머니가 대신할 수 없는 사랑이다.
2는 첫사랑이다. 적어도 키냐르에게는 최초의 사랑에 가장 근접할 수 있는 사랑은 첫사랑뿐이다.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첫사랑은 이미 두 번째이므로, 네미의 머릿글자가 N인 것은 전혀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다. N은 M다음에 오기 때문이다. 이 책의 화자인 ‘나’는 이렇게 말한다. “네미 사틀레라는 이름은 가짜다. 이 세상에 존재했었으나 이제는 어벗는 내가 사랑했던 한 여인을 나는 그렇게 부를 것이다.”
3은 사랑의 그림자이다. 최초의 사랑을 잃고, 단 한 번 뿐인 첫사랑을 잃으면 그 아음부터의 사랑은 그림자에 불과하다.
키냐르에 따르면, 옛날과 옛날 이후. 전자와 후자가 분리되는 시점은 언어를 습득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우리는 원래 말하는 존재였던 것이 아니라 그런 존재로 변화된단다. 언어의 인칭대명사가 ‘나’와 ‘너’와 ‘그’를 구분하자 틈이 벌어지고, 엿보는 자가 생기고, 사회가 나타난다는 것. 언어의 개입으로 분리된 두 가지 시간은 관계를 분열시킨다.
이 책은 언어로 분열된 두 시간을 언어로 통합시키고자 필사적으로 애쓴 저자의 산물이다. 키냐르는 말할 수 없는 부분, 말 할려해도 혀 끝에서만 멤도는 그러한 부분만을 사랑이라는 보편적 주제로 환원시켜 전달한다. 포장은 ‘사랑’이지만 본질은 인간 실존 문제에 대한 언어적 고민이다. 하나의 범주로 가두기에는 그의 사상과 문체가 너무도 심대하다~
<책에서>
“진정한 모든 사랑에는 사랑이 싹튼 무렵보다 더 오래된 무엇이 자리잡고 있다. 바로 이 다른 곳으로부터 사랑이 드러난다.” p154
"우리의 매혹, 우리의 출생, 우리의 유년기, 우리의 나체, 우리의 약점, 이런 것들이 가장 확실하게 우리를 죽이는 무기들이다. 그래서 우리가 남자들과 여자들을 죽여야만 한다는 사실, 즉 그들이 우리를 죽이기 전에 먼저 재빨리 그들을 습격해서 죽여야만 한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칠 때, 그것이 사회적 삶이라는 것이다. 사회에서는 비명소리에 조차도 동족인 인간의 죽음이 끈질기게 따라다닌다. 사회에서는 꽃들마저도 동족의 죽음에 사로잡혀 있다. p 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