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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 1
전경린 지음 / 생각의나무 / 200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전경린의 소설을 읽으면 걷잡을 수 없는 우울에 빠지곤 한다. 정말 죽어버리고 싶은 충동...그리고 그녀가 소설 속에서 써 갈긴 주관적 생각에 ‘아니야~’를 수십 번 외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행간에 집중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뭐라고 단정지울 수 없는 마력이 전경린의 글에는 있는 것 같다.
<내 생에 단 하루뿐일 특별한 날> <열정의 습관> 단편 <환과 멸> 등을 읽고 전경린의 무시무시한 마력을 이미 경험한 바 있어, 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그녀의 작품을 예의 주시하게 된다. 새 번째 작품으로 <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를 펴 들은 거 역시 전경린의 몽환적 마력에 다시 한 번 빠지고 싶어서였다.
정말 그녀는 바람대로 나를 깊은 우울의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주말 모두를 전경린의 마력에 홀려있었다. 책장을 덮고 전경린의 그 처절한 존재의 글쓰기에 존경을 표했다. 그녀가 작가 후기에 “나는 내 글에 육체가 느껴지기를 바라며 글을 쓴다”고 했는데, 그리고 자기 소설에 ‘육체성을 완벽히 부여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자조석인 어조로 토로했는데, 나에게 전경린의 모든 소설들은 하나의 완벽한 육체를 입고 다가온다.
언제나 한 문장 한 문장이 얼마나 어렵게 잉태 되었는지 느낄 수 있고 그녀가 얼마나 ‘행복한 불행’(그녀 자신의 표현이다)의 시간을 살아왔는지 그녀의 글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더 우울한지 모르겠다. (솔직히 전경린의 글은 작가 유미리와 매우 비슷하다.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유아기의 결핍이 소설속에 형상화되어 있어 그녀의 행복한 불행을 예감하게 한다.)
25살의 김은령을 통해 전경린이 얘기하고자 하는 것들...그것은 전작들의 여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어떤 잘못된 굴레에 저항하는 일종의 일탈이다. 난 이것을 저항이라 이름 하지 않고 일탈로 명명하고 싶다. 왜냐면 저항이라 하기에 작품들 속에서 보여지는 주인공들의 행태는 퇴폐에 가깝기 때문이다.
<열정의 습관>의 미홍이 그랬고 <내 생에 꼭 하나뿐일 특별한 날>의 미흔이 그랬다. <유리로 만든 배>의 주인공 은령처럼 그녀 작품들의 주인공들은 불합리한 제도에 반기를 든 자유를 꿈꾸지만 그 자유를 일탈에 맡겨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은령이 경멸하던 안락을 버리고나서 선택한 이진의 안락한 품은 본질적으론 같은 것이다. 그런데 전경린은 그걸 애써 양분하고 있다. 이것은 모순 아닐까? 모순이 아니라면 은령은 이진에게 섹스의 대가로 돈을 받지 말아야 했다. 결혼을 매개로 돈을 받고 남편을 위해 봉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이것을 자유라고 포장하기에는 너무도 어설프다.
이 소설의 여 주인공 김은령은 두 남자, 27세의 문유경과 40이 넘은 이진 사이를 오가는 양다리 연애를 하고 있다. 그 둘이 줄 수 있는 것을 한 남자는 결핍하고 있기에, 그녀는 그 둘을 오가는 위험한 외줄을 타는 게 이 소설의 주 내용이다. 불륜은 아니지만 전형적인 삼각관계. 하지만 이 소설을 단순한 로맨스소설로 분류하기엔 하기엔 꺼림칙한 뭔가가 발목을 잡는다.
이 작품은 결코 말랑한 연애 소설이 아니다. ‘사랑에 관한 전경린식의 고찰’이라 해두고 싶은 심정이다. 그녀는 말한다. ‘사랑은 없다’라고. 그래서 유경은 끊임없이 은령에게 “나를 사랑하냐?”라고 묻는다. 은령은 그렇다고 대답하고 바로 유경에게 “자기를 사랑하냐”고 되묻는다. 하지만 유경은 항상 거기에 대한 답이 없다.
은령은 이진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가 주는 안락과 쾌락이 그녀가 그에게서 원하는 전부다. 그녀는 이진에게 ‘자기를 사랑하냐’고 묻지만 대답은 유경이 은령에게 하는 반응과 대동소이하다. 이것이 은령이 두 사람의 외줄을 타다가 떨어지는 본질이자 전경린이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사랑의 실체다.
“...그들의 진실이 어디에 있든 그 시간 동안 나는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토록 이상한 관계속에서 사랑을 했다고 주장하다니, 사람들은 나를 무도덕하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사랑이 전에 없었다고 해서, 상처를 주고 아무런 결과도 맺지 못했다고 해서 나의 사랑이 의심받을 수는 없다. 실제로는 이렇게 불쾌하고 의혹에 가득 찬 숱한 사랑들이 침묵속으로 가라않는 다는 것을 나는 안다.” (2권 p195)
백번 이 말에 동감한다. 하지만 은령이 보여준 이진과의 관계는 사랑이라 할 수 없다. 돈을 받고 갖는 관계라면 그것이 어떤 감정이든 난 비난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이 작품의 여 주인공은 명백히 돈을 받는 안락한 사랑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사랑에 있어 자유의 쟁취는 그런 것과는 다른 것이다. 자유는 타협과는 양립할 수 없기에...
전경린은 작가 후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소설은 스물다섯 살을 정면으로 다룬 것은 아니다. 앞으론 어떻게 될지 몰라도 나는 소설이 일반화되는 것을 늘 피해 왔다. 상식 내에서의, 체제 내에 편승하면서 동시에 냉소하거나 갈등을 빚거나 비판적인 주인공들에게는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비주류적 주인공의 아웃사이드적인 궤적을 통해 저항하면서, 일탈하면서, 무심한 척하면서, 갈등의 배경을 심리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을 나는 선호해 왔다.”
이 말을 되새김질 해 보면서, 은령을 대리해 독특한 사랑관을 설파하는 작가에 대해 막연하게나마 그려 본다. 주류에 편승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로서 그 울분을 저항과 일탈 그리고 무심한 척 하는 문체로 삭이는 모습에서 마르크스가 떠오른다. 마르크스가 대영박물관에 틀어박혀 체제에 대한 울분을 논리적이고 실체적인 <자본론>에 쏟아 부었던 것처럼.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전경린이 쇼펜하우어를 읽었다면 글이 더 철학적으로 풍부해졌을 거라는 점이다. 소설의 한축은 욕망을 말하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생에 대한 의지가 삶을 결정짓는다고 했다. 욕망은 생의 의지로부터 생기고 쇼펜하우어의 철학의 출발점이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전경린이 말하고자 했던 생의 욕망....이진을 통해서 말하려 했던 그것을 좀 더 소설 속에 형상화 시키지 못했던 게 못내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이었다.
전경린의 소설들은 항상 불편하다. 그리고 나에게 심한 우울감과 상실감을 안겨 준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더욱더 전경린의 글을 찾는 거 같다. 평범한 주제도 전경린이 쓰면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 전혀 새로울 게 없는 이 삼각관계의 사랑 타령이 이렇게 깊은 상실감으로 다가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전경린의 ‘글의 힘’이 놀라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