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누스 - 신과학총서 39
아서 케슬러 / 범양사 / 1993년 8월
평점 :
절판


<야누스>(범양사, 1993)의 저자인 아서 케슬러는 1905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빈 대학에서 물리학과 심리학을 전공했다. 자연과학과 인문과학 전반에 걸친 방대한 지식을 축적한 케슬러는 중동, 구소련, 스페인 등에서 기자활동을 하다 1948년 영국으로 귀화했다. 그에게는 항상 '세계적인 과학평론' '신과학의 비전을 제시한 과학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과학자로서 케슬러의 이력은 특이하다. 그는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독일에서 공산당 편에 서서 나치즘과 싸웠고 스페인 내란 때에는 인민전선 편에서 투쟁하기도 했다. 그는 행동하는 과학자였다. 그러나 소련 공산당의 이중성에 실망하여 1938년 공산당을 탈당, 1948년 영국으로 귀화해 많은 활동을 하다가 1983년 3월 부인과 함께 자살했다.

케슬러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소련에서의 체험을 배경으로 쓴 <한낮의 어둠>은 그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린 저작이었으며, 그의 과학적 지식을 반영한 <창조행위>, <기계속의 유령>, <환원주의를 넘어서>, <실패한 신> 등의 저서들은 잇따라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이 <야누스>가 세계에 충격을 던져준 걸작 중의 걸작이다.

'혁명적 홀론이론'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범양사에서 야심차게 기획했던 신과학 총서 시리즈 중 39번째 책이다. 범양사의 이 시리즈는 대부분 과학이론에 한 획을 그은 굵직굵직한 명저들을 번역해 내놓았다. 하지만 이 책을 포함해서  거의 대부분의 책들이 애석하게도 절판되어 지금은 구해 볼 수가 없다. (다른 출판사에서 산발적으로 재 출간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저서는 놀랄만큼 광범위한 학문체계를 넘나든다. 물리학과 생물학을 위시해서 심리학, 경제학 그리고 뇌과학과 시스템론에 이르기까지 학문간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면서, 케슬러는 현대세계와 과학이 직면하고 있는 우리의 문제들을 세세히 점검하고 새로운 세계상을 제시하고 있다.

한편, 이 책이 케슬러의 다른 저작보다 중요한 이유는 그의 핵심 사상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현대과학의 유기적 통합론을 열게 한 홀론사상이 바로 그것이다. 여타 과학자들에 따르면 홀론이론은 지금까지 많은 분야에 심대한 영향을 주고 있는 혁명적 사상이라고 한다. 이 책은 그의 일생의 노력에 대한 요약이며 동시에 그 연장이다.

홀론(Holon)이라는 말은 본래 그리스어의 전체를 나타내는 holos라는 말과 부분을 나타내는 on이라는 말의 복합명사로 '부분적 전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홀론은 위로부터 보면 부분이되고 아래로부터 보면 전체가되는 계층적 구조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하나의 생명체는 전체이고 그 구성체인 분자는 부분이지만 분자는 또 그 구성체인 원자에 대해서 전체가되고 원자는 부분이 된다. 말하자면 어떠한 개체도 하나의 홀론으로서 전체에 대해서 부분으로 기능하는 통합적 경향과 독자의 자율성을 유지하는 자기주장적 경향의 양면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인체를 구성하는 각 세포 홀론들은 각기 시각세포는 시각세포 홀론으로서, 뇌세포는 뇌세포 홀론으로서 자기 맡은 바 일, 즉 자기주장적 기능을 하면서 동시에 자기보다 높은 단계, 예컨대 뇌중추로부터 내려오는 명령에 순응해서 각각 감각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그러나 만일 어떤 세포가 위로부터 오는 전체적 조절의 합목적적 지시를 무시하고 기이한 자기주장적 경향만을 강하게 갖게 되면 암세포와 같은 이상한 자기증식 현상을 일으켜  그 생명체는 파괴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야누스>의 홀론사상은 생물계와 무생물계, 국가와 사회, 대우주와 소우주 그리고 유형적 세계와 무형적 세계 등 그 어느 것을 불문하고 모든 현상에 적용될 수 있는 일반시스템론을 제시하고 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첨단의 창조력과 상상력이 요구되는 오늘의 급변하는 시대에 있어서 전체와 부분, 부분과 전체간에 일어나는 갈등과 모순을 초극할 수 있는 철학을 <야누스>의 홀론사상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 마틴 가드너의 <양손잡이 자연세계>와 같이 읽으면 현대과학을 좀 더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책에서>
자력을 몸으로 느낄 수 없는 것처럼 궁극적 실재를 우리의 언어로 파악한다는 것은 가망이 없는 일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잉크로 쓰인 텍스트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비류로 세월 보내기를 좋아한다. 선장은 주머니 속에 먼 바다로 나아가야만 열어 볼 수 있는 봉인된  항해지령서를 넣고 출항했다. 그는 불안감이 사라지는 순간을 고대했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이 왔을 때 봉투를 열어보니 거기에는 온갖 화학처리를 해보아도 글씨가 나타나지 않는 지령문이 있을 뿐이었다. 간혹 가다 글씨가 나타나기도 하고 자오선을 표시하는 숫자가 보이기도 하다가는 다시 사라져 버린다. 그는 지령문을 정확하게 알 도리가 없었다. 지령문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그의 임무를 저버릴 것인가마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주머니 속에 지령문이 들어 있다는 의식은 그것을 해독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선장을 유람선이나 해적선 선장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게 끔 만들었다.(p3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