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 1
전경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역시 전경린! 이전에 보여줬던 전경린의 파괴적이고 우울한 작품과는 다른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그 포스는 간직하고 있었다.

야사속에나 등장하던 그 황진이를 전경린은 완전히 부활시켰다. 고뇌하고 사랑하고 아파하는 하나의 자유로운 여자로서.

이전의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어둡고 우울한 포스의 힘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황진이 자체가 어느정도 역사적 실증성을 부여받기에 그럴것이다. 그녀가 남긴 주옥같은 시들..소세양과의 관계, 서화담과의 관계가 문헌속에서 명확히 존재하기에...

가부장적 사회질서가 뿌리내리기 시작한 조선 중기를 불꽃같이 살다간 황진이. 김미진의 말대로 황진이는 팜므메탈의 선구자(최초는 미실이 있다- 김별아 저)였을 것이다.

인습과 사회적 굴레 그리고 법과 도덕을 초월해서 "16세기를 불꽃같이 살다간 21세기의 여자". 소설 <황진이>(이룸, 2007)을 읽고난 지금, 황진이를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한다. 이 표현은 김영하의 산문집에서 빌려와 봤다.

여기서 잠깐 김영하의 산문집 <포스트 잇>에 있는 글을 한 번 보자. 거기에 '19세기에 태어난 20세기의 여자'란 글이 있다. 존 파울즈의 1969년 소설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논평한 부분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사라 우드러프는 난파당한 프랑스 배에서 표류중인 한 장교를 보살피다가 그를 사랑하게 된다. 그 사랑은 불과 하룻 밤에 불과했지만 그것으로 그녀는 고뇌하기 시작한다. 그녀를 사랑한 귀족 스미스의 연정을 뿌리치며 그가 프랑스 중위를 사랑했던 걸 찰스에게 고백한다.

 "제가 살아갈 수 있도록 지탱해주는 것은 수치심과 다른 여자와 다르다는 자각입니다. 다른 여자들처럼 결혼해서 남편, 자식, 순결한 행복 따위는 결코 갖지 못할 거에요. 대신 나는 그들이 갖고 있지 못한 자유를 갖고 있습니다. 어떤 모욕이나 비난도 자극할 수 없는 그  경계를 넘어선 곳에 나 자신을 두고 있기에. 난 아무것도 아니고 더 이상 인간도 아닙니다. 그저 프랑스 중위의 창녀일 뿐"

이 멋진 사라 우드러프의 고백은 황진이가 황진사 집에서 나와 신분이 수직하강하여 창기가 되기로 결심한 부분과 매우 비슷하다. 머리올리는 날 진이 창기로서 자기소개하는 대목(p217)을 보자.

 "인사드려요 저는 진입니다. 오늘 밤 나의 뜻은 내게서 내용을 전부 버리는 것이에요. 호리병 같이 쓰러져 텅 비워질 거에요. 무아의 빈 그릇으로 남아 다시는 나로 인해 울지 않을 거에요. 사람이 자기를 버릴때...자기몸의 영욕을 버리고...천애고아가 되고...도덕과 관습, 규제를 버리고...오직 제 경험속에서 윤리를 발견하며...지침을 삼습니다...세상이 내게 허용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연연하지 않겠습니다..."

우드러프는 단지 프랑스 중위의 창녀라 고백하지만 진은 자기몸을 버리고, 세상이 내게 허용하지 않는 것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한다. 이 얼마나 멋지고 더 철학적인가.

계속해서 김영하가 우드러프를 평가한 부분을 보자. "사라는 존재 그 자체로 현대소설이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사랑을 선택했으며 그 사랑이 너무도 한심한 것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긍정하고 받아들였으며 그 이후의 시련에 대해서도 의연했다. 그 와중에서도 자신에 대한 탐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들었는가를 생각했다. 당대의 어떤 여성보다도 지적이었스며 문학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교육받을 수 있는 귀족이나 부르주아 딸들은 그녀와 같은 고뇌를 할 수 없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빅토리아 시대의 이름없는 그러나 위대한 개인이었던 것이다.(김영하, <포스트 잇>,pp144-145)

그런데 황진이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간다. 사라 우드러프가 한 남자의 사랑을 통해 빅토리아 시대에 저항했다면, 그리고 그 사랑의 자기애를 통해 자유를 획득했다면 황진이는 자기애를 버림으로써 자유를 획득했다는 점이다. 사라는 프랑스 중위의 창녀였지만 진은 모든 남성의 창녀였기에 뭇 남성의 사랑을 받을 수는 있을 지언정 그들을 사랑할 수는 없었다.

자, 비교해 보자. 어떤 여자가 더 자유로운 여자였을까? 한 남자를 사랑한 여자와 자기를 비우고 모든 남자를 사랑한 여자. 자유는 안정과는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그렇기에 진이 진정한 자유를 획득한 여자로 보인다. 우드러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냉철히 비교해보자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사라우드러프와 16세기 중종대의 황진이를.

 어떤 개체가 그 자체로 현대소설인가? 김영하는 "사라우드러프라는 소설의 인물 자체가 곧 이 소설인 셈"이라 했다. "그녀는 19세기라는 시대가 갖고 있는 관습적 도덕률과 다가올 20세기 해체적 양상을 동시에 내장한 인물이며 따라서 그녀를 통해 소멸해가는 19세기적 도덕률과 20세기이 사상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게 되는 것".(포스트잇, pp145-146)이라 했다. 

한편, 진은 자애를 버림으로써 천하에 고루 사랑을 나누어 주고 천하의 사랑을 모두 받은 존재였다. 그렇기에 진은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으니, 전경린은 이를 "자신을 버리고 다른 것과 바꾼 사람이 얻는 삶의 궁극적 조건이 되고 그로부터 이 세계와 타자를 향한 진정한 사랑의 실제적 삶이 실현된다"고 표현했다.

그녀는 16세기 중엽의 시대가 갖고 있는 도덕률과 20세기의 해체적 양상을 뛰어넘어 21세기의 사상을 몸으로 펼치면서 죽어간 인물이었다. 솔직히 우드러프에게 '해체적 양상을 동시에 내장한 인물'이라고 한 김영하의 이 평가는 황진이에게 주어져야할 평가라는게 더 적절한 듯 싶다.

홍경화가 진을 자신의 소실로 삼을 것을 제안했을때 진은 대답한다. "(기생의 길을 간다는 것이) 잘못한 일일 수도 있으나 후회하지 않습니다. 어떤 길을 택하였던 이제와서 무엇이 크게 달라지겠습니까? 어떤 길이든 뜻대로, 예상대로 편편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잘못된 길이라해도 내 의지대로 선택했기에 세상에 책임을 전가하지 않으며 지극히 진지하게 몰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길에서 벗어난다해도 남의 힘으로 나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옮기는 일에 불과하니까요. 이곳에서 나가면 나는 오직 나 자신에게로 옮겨갈 것입니다...이 시대가 낯설고 당황스러울 뿐입니다."(2권 p155)

화담은 금강산 유랑길에서 돌아온 진에게 진지하게 묻는다. "네게 있어 몸은 무엇이더냐?" 진은 대답한다. "제게 몸은 길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길을 밟으면서 길을 버리고 온 것처럼 저는 한 걸음 한 걸음 제 몸을 버리고 여기 이르렀습니다. 사내들이 제 몸을 지나 제 길로 갔듯이 저 역시 제 몸을 지나 나의 길로 끈힘없이 왔습니다. 길이 이렇듯 어느누가 몸을 목적으로 삼고 누가 몸을 소유할 수 있으며 어찌 몸에 담을 치겠습니까? 길이 그렇듯, 몸 역시 우리 것이 아니지요. 단지 우리가 돌아가는 방법이지요."(2권 p276)

이처럼 전경린은 황진이를 통해 그 가공할 포스를 다시 한번 발휘하고 있다. 머리올리는 날, 홍경화에 답한 말, 그리고 화담에 답한 진의 말 등을 통해서 볼 때 진이 얼마나 거침없고 철학적인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다.

이 작품이 전작과는 다르게 보일지 몰라도 본질은 동일한 거 같다. 책 전체를 통해 진이 하는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오늘의 창녀가 아닌 조선의 기생 진이를 통해 억압받는 몸의 철학을 운명론과 결부시켜 풀어낸 소설이 <황진이>였기 때문이다.(순전히 개인적인 생각~) 

전경린은 아직도 이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여자로서의 굴레를 다시 한번 진을 통해 표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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