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이 아름답다 범우사상신서 35
E.F.슈마허 지음 / 범우사 / 198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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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호텔이나 고급음식점 같은 곳에선 차에 따라 대우가 달라진다. 주차안내원이나 종업원들은 작은 차를 타고온 사람에게 "어이"라고 호칭하고, 소형차는 "아저씨", 중형차는 "선생님", 대형승용차는 "사장님"이라고 부른다는 속설도 있다.

또한 대형차를 탄 재벌 아들이 자기 앞에 끼어든 작은 차의 무엄한(?) 행동에 격분하여 그 운전자를 폭행, 중태에 빠진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벌어진 적도 있다.

사회에서 흔히 경험하는 이런 일들은 우리가 큰 것에 약하기 때문이다. 일명 '사이즈 컴플렉스'. 큰 사이즈라면 무조건 주눅이 드는 경향. 이런 큰 것 선호의식은 큰 것은 무조건 좋고, 작은 것은 안 좋은 것이라는 편견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우리의 편견과 정 반대의 주장을 펼치는 석학의 명저가 있다.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범우사, 2004)가 바로 그것.

크기가 좋고 나쁨의 척도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 했을까? 

 작은 것은 가치개념이 개입되면 큰것보다 열등하기 때문이다. 20세기 이후 작은 것은 좋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특히 사회가 거시적인 것, 공업화를 추구하면서 작은 것은 끊임없이 개선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작은 것은 무조건 크게 해야만 가치있는 일로 생각되었다. 오죽하면 '성장의 신화'라고 까지 했겠는가.

 하지만 언제 부터인가 '절약과 능률'이라는 모토아래 그 전도가 서서히 뒤바뀌어지고 있다. 이런 조류를 존 네이스 빗은 "세계경제가 거대화 될 수록 소규모 경제주체들의 영향력이 커진다"는 글로벌 패로독스라는 개념으로 형상화 시켰다.

이것은 거대화된 경제구조 속에서  작은 기업이 세계경제를 주도한다는 것. 그렇게해서 일본은 1980~90년대 축소지향적 산업으로 세계시장을 석권했다. 바야흐로 작은 것이 가치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작은 것을 지향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한정된 에너지로 작은 것을 움직이는 것이 큰 것을 움직이는 것보다 훨씬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바로 작은 것과 큰 것 사이에 에너지라는 개념이 개입되면 양상이 달라진다는 것.

이 한정된 현재의 기술을  제레미 리프킨은  엔트로피 법칙으로 풀어냈다. 그의 명저 <엔트로피>에서 우리 지구는 폐쇄체제로서 에너지가 한정되어 한방향으로만 흐른다고 했다. 쓸 수 있는 에너지에서 써버린 에너지로 이행하는 에너지 고갈을 그는 엔트로피 법칙이라고 보았다.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이와 같은 엔트로피 법칙의 연장선상에 있다. 과학과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자원은 고갈되었다. 무분별한 개발은 자연 스스로 치유할 능력을 상실하게 할 정도로 황폐해졌다. 하지만 '발전'이라는 신화의 논리는 이 모든 행위를 정당화 시켜주기에 충분했다.

  그 댓가는 만만치 않았다. 에너지 문제가 전 지구적 문제로 확대되었고, 이때부터 환경파괴에 대한 경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하여 산업화와 도시화의 진행은 인간소외와 인구문제를 심화시켰다.

이에, 슈마허는 이 책의 반을 할애하여 우리시대의 암울한 미래상을 보여주고 있다. 홀크하이머과 아도르노가 쓴 우리시대의 가장 암울한 책이라 일컬어지는 <계몽의 변증법>이 우리시대의  철학의 부재와 가치관의 혼동을 보여주었다면, 이 책은 그 정신적 혼란이 야기시킨 물질적인 면을 경제학적 시각에서 분석하고 있다. 

헌데 그 경제학적 시각이 독특하다. 슈마허는 경제학의 역할이 경제학을 위한 경제학이 아닌 인간을 위한 경제학이 될 것을 주창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경제학은 복잡한 수식으로 가득찬 이론의 정치함 속에서만 안주해 왔다는 게 그가 주장하는 것. 경제학이 수많은 천재들을 집어삼키고서도 해답없는 문제가 지속되는 것은 그 가운데 인간을 위한 시도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슈마허는 경제학이 주류와 비주류를 지양하고 인간중심의 경제학으로 바로설 것을 역설한다. 

 이 작은 책 속에서 인간중심의 경제학을 위해 슈마허는 방대한 형이상학적, 종교적 성찰을 시도한다. 그 성찰의 결과로서 슈마허는 모든 문제들에 대한 설득력있는 대안을 제시한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압권이라 할 수 있는 스몰사상 즉 중간기술의 개념이다.

 이 책에 따르면 중간기술은 기계적 대량생산체계가 아닌 대중의 손에 의한 대중생산에 초점을 맞춘다. 경험과 지식을 활용하는 대중생산체제는 분권화를 촉진하고 생태계법칙에 적합하며 인간을 위한 기술이라는 것. 다시말해 이것은 필요한 만큼만 소비한다는 불교의 구도자적 사상을 그의 대안 철학으로 받아들였음을 의미한다.

이 중간기술의 철학적 기반은 '중도'개념이다. 슈마허가 불교에 심취했을 때 그 사상에 매료됐다고 한다. 인간이 물질과 정신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기에 이것의 끝(물질적인 것)과 저것의 끝(정신적인 것)이 아닌 그 중간(중도)을 이용한다는 것은 매우 인간적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현대 대량생산체제에서 인간은 소비자로 전락했다. 경제학책 어디에도 인간의 개념은 나오지 않는다. 오로지 소비만을 하는 소비자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경제학적 사고방식이 우리의 의식을 점점 황폐화 시켜 부지불식간에 소비주의적 생활 습관에 익숙하게 했다. 매일 우리가 접하는 신문과 TV가 그런 소비에 익숙하도록 우리를 훈련시켰다.

이것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미국식 산업구조를 반성적 사고 없이, 소비주의적 생할양식을 그대로 받아들인 폐습이다.

  결국 우리는 작은 것과 적은 것에 고마워 할 줄도, 만족할 줄 모르게 되었다. 국민총생산과 같은 단순한 수량적 척도로 발전의 기준을 삼는 산업문화 속에서 인간은 점차 도구화 되어 가고 있다. 성장 제일주의와 정신적 가치가 부재한 물질적 번영은 심리적 빈곤과 불안 그리고 생명력의 상실을 가져온다. 인간이 아닌 소비자만을 배운 당연한 결과이다. 

이 책을 쓴 슈마허는 독일 출신으로  독일 영국 미국 등지에서 슘페터, 케인즈, 윌리스 등 저명한 학자들로부터 경제학을 배웠다. 22살에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나치스의 유태인 탄압으로 영국에 건너가 개인 기업의 재무고문 신문사 프리랜스 기자 등으로 근무했다.1946~1950년까지 경제통으로 활동했다. 국제결제제도에 관한 그의 구상은 케이즈로부터도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1964년 이후 이른바 중간기술이론을 제창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후 농촌 개발에 대한 그의 권고안은 수많은 외국 정부로부터 주목받았으며 활발한 학술 활동으로 1974년에는 대영제국 지도자 훈장(CBE)을 받았다.

현대 환경 운동사에서 최초의 전체주의적 사상가로 평가되는 슈마허는 매우 다양한 관심사를 하나의 참조 틀 속에 버무릴 줄 아는 위대한 경제학자였다. 바로 이런 시각에서 탄생한 책이 <작은 것이 아름답다>이다. 이 책은 그의 독특한 이력과 사상이 고스란히 담긴 슈마허 사상의 결정체이다.

그런데  '슈마허 사상'의 실체를 확인할수록 많은 아쉬움이 남았다. 슈마허가 지향하는 가치라는 것이 우리가 너무도 쉽게 버린 가치, 다시말해 물아일체되어 안빈낙도하며 안분지족의 생을 누린 우리 선조들의 시조와 사상적 자취에 고스란히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제시한 문제해결의 열쇠를 위한 기본철학은 우리의 한국사상 내면에 면면히 흐리고 있는 것들 이었다.

 슈마허가 제시한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명제는 결국 우리의 전통적 가치인 '안분지족'의 삶을 배우라는 소중한 충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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