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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령군 - 조선을 홀린 무당
배상열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7년 3월
평점 :
품절
한 사람 때문에 대한민국 온 국민들이 아파하고 힘들어 하며 혹독한 겨울을 보냈다. 결과는 많은 국민들의 바람대로 났지만, 아직도 그 상처는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자신의 죄를 시인하기보다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연출하며 분열을 조장하고 있기에.
하지만, 생각해보면 어찌 한 사람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지겠나. 그 곁에서 불의한 일들에 동조하고 함께 한 수많은 이들이 사실 같은 주연들이다. 권력에 기생하여 불의를 묵인할뿐더러, 자신의 이익을 좇아 불의를 앞장서 시행한 자들. 더 큰 유익을 위해 뇌물을 주며 권력과 야합한 재벌들. 마땅히 밝혀야 할 진실에는 외면하고 오히려 자발적으로 권력에 눈치를 보며 아양을 떨었던 언론들. 맹목적인 충성심으로 여전히 앞뒤 가리지 않고 발광하면서도 자신과 뜻이 다른 자들은 모두 적색분자로 매도하는 수많은 자들. 사실 대한민국을 흔들고 분열과 아픔의 땅으로 몰아넣고 있는 자들은 하나가 아니다.
이러한 오늘 시국의 시선으로 조선의 마지막 시기를 바라본 책이 있다. 배상열 작가의 『조선을 홀린 무당, 진령군』이란 책이다. 책 표지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나라가 망하는 데는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
조선이 망하는 데는 한 사람이면 충분했다는 것. 그 한 사람은 누구일까? 책제목으로 본다면, 진령군이라는 존재다. 무당이었으면서도 ‘군’이란 호칭으로 불렸던 여인. 고종과 명성황후의 혼을 쏙 빼놓고는 온갖 전횡을 휘둘렀던 여인이 바로 진령군이다(마치 오늘의 최씨와 같은).
하지만, 실제 조선이 망하게 된 것은 진령군 한 사람 탓은 아니리라. 그런 무당이 뛰어놀 수 있는 판을 마련해준 명성황후. 백성들이야 죽어가건 말건 오백 석에 달하는 쌀밥을 한강에 뿌리며 굿판을 벌인 명성황후. 조선을 민씨 가문의 것으로 만들었던 여인이 나라를 망하게 한 바로 그 ‘한 사람’이다.
또한 그런 민씨를 뜨겁게 사랑한 애처가 고종 역시 ‘한 사람’이다. 나라를 이끌어갈 능력도 없이 왕의 자리에 앉아 있던 고종. 백성을 생각하기보다는 자리보존이 더 중요했던 그 역시 ‘한 사람’이다.
저자는 흥선대원군에 대해선 긍정적 평가를 하고 있다. 아울러 고종도 고종이지만, 명성황후가 나라를 망하게 한 일등 공신으로 이야기한다. 물론, 그 뒤에 기생하며 망국의 굿판을 벌인 진령군 역시 한 몫 했고. 그 뒤로도 또 다른 진령군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이 책은 조선의 망국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다. 내용이 참 좋다.
명성황후의 슬픈 최후는 우리에겐 씻을 수 없는 상처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 상처가 도리어 명성황후 개인에 대한 역사적 평가의 방어막이 되어 왔음도 사실이다. 후세에게 명성황후는 못된 악녀라기보다는 비운의 황후, 애틋한 연민의 감정을 품게 하는 대상으로만 기억되고 있기 때문이다. 비운의 황후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 부정적 평가들이 묻혀 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을 게다. 왜냐하면 이것 역시 오늘날 대한민국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만든 시선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여전히 수많은 이들에게 박 전 대통령은 비운의 공주이기 때문이다. 잘못한 것, 그 죄를 묻기에 앞서 여전히 불쌍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진실을 왜곡하는 큰 죄악일뿐더러, 이런 시선이 또 다시 망국의 문을 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책에서 명성황후의 부정적 모습을 적나라하게 알려주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다 여겨진다. 아울러 부정적 시선 일색인 흥선대원군에 대한 긍정적 평가들도 함께 하고 있음도 좋다. 게다가 대원군의 개혁이 실패하게 된 이면에는 기득권들이 자신들이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방해공작이 컸음을 볼 때, 역사는 역시 반복되는구나 싶기도 하다.
단, 아쉬운 점은 굳이 ‘진령군’에게 초점을 맞춘 제목을 잡을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사실, 진령군에 대한 이야기는 책의 내용 가운데 일부분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진령군이라는 존재가 책 전체를 끌고 가는 힘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어쩌면, 지금 독자들이 처한 이 땅의 상황과 연결하려다보니 ‘진령군’이란 존재가 부각될 수밖에 없었으라 싶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저 망국의 역사를 아우르는 제목으로 잡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나라가 망하는 데는 결코 한 사람으로 되지 않고 수많은 악당들이 함께 망치기 때문에 말이다.
‘진령군’이란 존재에 대한 궁금증에 이 책을 펼친다면 어쩌면 실망할 지도 모르겠다. 진령군은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으니. 그렇다. 절대권력 위에 존재하였던 것으로 드러난 최씨 한 사람이 결코 대한민국을 흔든 것이 아님을 우린 기억해야 한다. 최씨의 죄를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되지만, 그 한 사람에게 죄를 모두 전가해서 안 되기에.
그러니, 이 책이 ‘진령군’이란 존재에 대해 알게 해 준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제목을 떠나(진령군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책이 말하는 망국의 역사를 읽어내면 좋겠다. 대단히 좋은 내용을 품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