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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의 소녀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1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랜 만에 기욤 뮈소의 책을 읽었다. 기욤 뮈소의 책이 오랜 만에 나왔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오랜 만에 기욤 뮈소의 책을 읽었다는 의미다(기욤 뮈소야 여전히 해마다 한 권씩은 꾸준히 책을 내고 있다.). 한때 기욤 뮈소의 매력에 빠져 제법 여러 권을 읽었었는데, 요 근래 몇 년 간은 기욤 뮈소의 책을 어째 읽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오랜만에 만난 기욤, 역시 그의 책은 재미나다. 한번 책을 펼치면 마지막까지 읽어야 빠져 나올 수 있다. 이렇게 재미난 난 기욤의 책을 왜 그동안 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오랜만에 만난 기욤 작품과의 해후가 뜨겁다.
책 소개를 보니 이번 신작은 본격 스릴러란다. 사실, 기욤의 책들은 대부분이 스릴러가 아닌가 생각했는데 말이다. 그러니, 어쩌면 이번 작품은 다른 요소들을 뺀 스릴러의 향만을 내고 있다는 의미겠다. 내가 읽었던 작품들의 경우에도 시간을 오가며 만들어가는 판타지 스릴러, 로맨스 향내가 짙은 스릴러 등 순수 스릴러보다는 다른 요소가 복합적으로 섞여 있었던 기억이다. 그러니, 이번 작품 『브루클린의 소녀』는 다른 요소들을 쏙 뺀 스릴러 느낌만이 강한 소설이란 의미겠다. 그럼, 『브루클린의 소녀』를 잠시 들여다 보자.
소설가 라파엘은 언제나 직업 그대로 상상의 세계에서 살아가던 사람이다. 그런 라파엘이 상상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에 닻을 내리게 된 것은 그에게 가장 소중한 두 사람 때문이다. 실패한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들 테오. 그리고 이제 결혼을 앞두고 있는 안나(25살 소아과 전공의, 역시 기욤의 책엔 의사가 등장한다.)라는 여인이 그들이다. 두 사랑하는 이들로 인해 더 이상 상상의 세계를 항해하기보다는 현실의 세계에 닻을 내린 소설가 라파엘. 하지만, 라파엘을 찾아온 현실의 세계는 너무나도 잔혹하다.
사랑하는 여인 안나가 사라졌다. 결혼을 앞두고 떠났던 여행에서 라파엘은 안나에게 서로 비밀이 없어야 함을 강요하고, 이에 안나는 라파엘에게 한 장의 사진을 보여준다. 라파엘은 자신이 본 끔찍한 사진 한 장에 이성을 잃고 차를 몰고 안나 곁을 떠난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되돌아와 보니, 안나는 사라졌다. 화가 나 프랑스로 되돌아간 것. 그런데, 프랑스 안나의 집에 안나는 없다. 되돌아왔던 흔적은 있지만, 어디론가 사라진 안나.
이에 뭔가 불안한 느낌에 안나를 찾아 나서는 소설가. 그리고 소설가를 돕는 오랜 친구 퇴직한 강력계 형사 마르크. 이렇게 둘은 안나를 찾아 나서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사건들을 만나게 된다. 벌써 오래 전 한 사건과 안나가 연관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 한 사이코패스의 연쇄소녀납치 사건이 그것이다. 이 사건을 추적해가며 둘은 안나의 진짜 신분은 사이코패스가 납치한 소녀 가운데 하나인 클레어 칼라일임을 발견하게 된다. 모두 비참한 화재 사건으로 죽었던 그 사건에서 유일하게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던 피해자.
뿐만 아니다. 둘을 이 사건을 파헤치며 또 하나의 연쇄 살인 사건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납치 피해자였던 클레어의 엄마와 엄마를 취재하던 기자의 살인 사건(물론 둘 다 사고사로 결론 났지만, 둘은 살인사건임을 밝혀낸다.). 이런 과거의 두 가지 커다란 사건, 그리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납치사건 이면에는 어떤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걸까?
소설을 읽는 내내 역시 기욤이다 란 생각을 떨쳐낼 수 없다. 소설의 몰입도가 최고다. 사건을 추리해나가는 과정도 짜임새가 있을뿐더러, 사건들을 통해 작가는 사회적인 부조리, 사회적 문제들 역시 함께 고발하고 있다.
방송윤리라곤 찾아볼 수 없는 방송매체들의 행태를 작가는 고발한다. ‘시민의 알 권리’를 빌미로 피해자와 그 가족의 눈물, 아픔은 고려하지 않는 취재 행태가 과연 소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걸까?
마치 신나는 일이라도 벌어진 듯 캔디스의 집 앞에 몰려들어 취재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의 목적은 무엇일까? 정치인, 언론사 가자, 시민단체 회원이라면 나름 지적인 사람들일 텐데 정작 피해자의 입장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들이 피해자의 한숨을 외면하면서까지 내세우고자 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피해자의 이웃 사람 혹은 친구의 증언을 받아낼 경우 전체 맥락과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입맛에 맞게 편집해 사실을 왜곡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가뜩이나 침울해 있는 피재자의 집 앞에 마치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며 기고만장해 있는 모습을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236쪽)
이런 방송매체들이 정작 권력의 비리 앞에서는 ‘시민의 알 권리’를 외면하고 침묵하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기에 안타깝다.
또한 소설은 권력을 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인들의 냉혹함도 고발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 만나게 되는 사건의 미궁, 그 한 축은 이러한 권력을 쫓아가는 이들의 냉혹한 범죄, 권력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더러운 욕망이 그 원인이다. 이처럼 권력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더러운 욕망의 피해자가 오늘 대한민국 국민 아닌가.
아울러 소설은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내고 잡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피해자 가족의 멈춰버린 시간, 산산조각 난 삶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도록 한다.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공감능력’이다. 우리에게 이런 공감능력이 되살아나길 원한다.
작가는 이런 다양한 것들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에 소설 『브루클린의 소녀』는 단순한 스릴러소설, 재미난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기욤의 소설이 어쩐지 한 단계 성숙한 느낌을 갖게 하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