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은 길들이 반짝이며 흘러갔다 - 아버지 한국대표시인 49인의 테마시집
고두현 외 지음 / 나무옆의자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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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나무옆의자에서 좋은 시집이 또 한 권 발간되었다. 지난번엔 ‘어머니’라는 테마시집이 출간되었는데(『흐느끼던 밤을 기억하네』, 서울: 나무옆의자, 2015.), 금번엔 ‘아버지’라는 테마로 한국대표시인 49인의 시들을 모아 출간하게 된 것이다. 시집의 제목은 『굽은 길들이 반짝이며 흘러갔다』.

 

독자의 입장에서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여러 시인들이 노래한 시들을 한 자리에서 감상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큰 행운이며, 배부른 순간이다. 탐욕스레 그 순간을 누려본다.

 

시집을 통해 다양한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때론 성실하셨지만 무능한 아버지를 만나기도 하고, 때론 폭군과 같은 아버지를 만나기도 한다. 또한 젊은 시절을 상상할 수 없이 이제는 늙고 연약하고 병든 아버지들을 만나기도 하고. 때론 언제나 벗어나고 싶은 지붕으로서의 아버지, 굴레와 같은 아버지를 만나기도 한다. 지금은 뵐 수 없는 그리운 아버지들을 만나기도 하고, 때론 성실하게 새벽을 열던 아버지의 모습을 반추하며 그리워하기도 한다.

 

새벽은 숫돌에서 푸르게 빛이 섰다 / 어둠 속에서 낫을 미시는 아버지 어깨가 /

두꺼운 어둠 벽을 무너뜨렸다 / 새벽 들길에 이슬 한 짐 지고 오셨다 //

나의 아침잠에서 깨어날 즈음 / 안마당에 부리시던 아버지 지게 /

어둠 속에서도 점점 부풀어 올랐다 / 아버지 뒷동산을 지고 일어서셨다 //

- 김완하, <새벽의 꿈> 일부

 

우리네 모든 아버지는 가족을 먹이기 위해 이처럼 묵묵히 새벽을 여셨다. 어떤 두꺼운 어둠 벽마저 무너뜨리고 나가 일하셨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수고로움에 감사를 드리게 된다. 그 수고로움이 헛되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할 텐데 하는 자괴와 다짐도 함께 해보고.

 

49편의 시를 통해 다양한 아버지를 만나고 추억하고 그리워하게 되는데, 유독 마음을 끄는 내용은 아버지의 모습이 내 안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음이다. 아버지가 어떤 모습이든, 닮고 싶은 모습이든, 닮지 않고 싶은 모습이든, 때론 이해되지 않던 모습마저, 어느 샌가 내 삶 속에서 그대로 되살아나고 있음을 문득문득 느끼게 된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서재에 들어가면, 그곳엔 벽면 가득한 책과 함께, 책상 위엔 언제나 쓰디쓴 블랙커피가 놓여 있곤 했다. 호기심에 한 모금 살짝 입술을 적셔보면, 그 쓴 맛이 온몸을 찡그리게 만들던 그 커피. 아버지는 왜 이런 커피를 드시는 걸까? 싶던 내가 지금은 진한 블랙커피가 없으면 하루를 시작하기 어려울 정도니 어느 샌가 아버지의 모습은 내 삶에 이어지고 있다.

 

언제나 책을 가까이 하던 그 모습은 우리 형제들의 모습 속에 자연스레 녹아들게 되었음에 감사하다. 책 띠지를 오래내 책갈피로 사용하시던 모습은 왜 그리 궁상을 떠나 싶었었는데, 벌써 몇 년째 내 책꽂이 곳곳에 꽂혀진 책갈피가 되어버렸다(어쩌면 이런 나의 버릇은 아버지를 닮은 것만이 아니라, 책의 띠지 글귀를 신뢰하지 않아 책을 사면 띠지부터 버리는 습관과 맞물린 것이리라.).

 

이처럼 아들은 어느 샌가 아버지를 닮아간다. 이젠 닮고 싶던 아버지도, 경외의 대상이던 아버지도, 회한의 대상인 아버지도 모두 내 안에서 다시 살아난다. 내 아이들을 향해. 괜스레 삶이 무거워진다.

 

웃는 모습이 아빠 닮았다 // 밥 짓고 집 짓느라 / 발이 닳은 아빠 //

창가에 앉아 아빠 생각하다 / 맑아진 볼우물에 꽃이 피었다. //

집 나선 달팽이가 꽃 속을 기었다 // 달팽아 달팽아 / 천천히 가라 //

볼우물에 사랑사랑 / 고운 파도가 일었다.

- 박장호, <꽃과 민달팽이>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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