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섬 앞바다 한국문학사 작은책 시리즈 5
홍상화 지음 / 한국문학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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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은 마음에 책을 구입했지만, 왠지 손이 잘 가지 않는 책이 있다. 마음잡고 책장을 펼쳤다가도 금세 다른 책을 집어 들게 하는 책도 있고. 나에게 홍상화 작가의 『범섬 앞바다』가 그런 책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은 <한국문학사 작은책 시리즈> 5번째 책이다. 그러니, 분량도 많지 않은, 제법 금세 읽히는 책이다. 책의 내용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또한 가독성이 떨어지게 번역된 번역서도 아님에도 왜 책을 펼쳐 들었다가는 이상하게도 금세 다시 덮고 다른 책을 읽게 되는 걸까? 그건 소설의 시작이 마음을 움츠러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하루가 있다는 것이 나의 확고한 생각이다. 중요하다는 것에는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그 하루가 없었다면 그의 인생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송두리째 바뀔 수도 있다는 믿음이 그 이유이다. 나에게는 지난 서른여섯 살 때 한 여성을 만난 어느 날이 바로 그날이다. 왜냐하면 그날이 포함된 그해가 지나기 전에 내 심장은 얼어붙었기 때문이다.(7쪽)

 

“그해가 지나기 전에 내 심장은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이 문장에 괜스레 움찔하게 된다. 계속 읽어 나가다 혹시 내 심장도 함께 얼어붙을까봐. 아름다운 사랑보다는 아프고 슬픈 사랑이 기다릴 것 같은 마음에 도망가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또 다시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 사랑이 어떤 사랑일지 궁금함에 결국엔 책을 펼쳐 들게 된다.

 

이 책, 『범섬 앞바다』는 한 대중소설가의 불꽃같은 사랑을 이야기한다. 어쩜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하지만, 뭐 자전적 내용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겠나.

 

소설은 어느 대중소설가의 한 여름 밤의 꿈같은, 아니 그 여운이 짙게 남는 열병 같이 아픈 사랑 이야기를 보여준다. 비록 이 사랑은 주인공의 가슴에 깊은 아픔을 남겨 놓지만, 그럼에도 그 열병 같은 사랑을 통해 주인공의 삶에 새로운 활력이 불어넣게 되고, 사랑의 설렘과 환희를 누리게 하는 축복의 시간이었음도 사실이다.

 

햇볕이 그렇게 고마운 줄 미처 몰랐었다. 바다가 그토록 생기 있는 줄 깨닫지 못했었다. 자연이 그렇게 위대한 줄 상상조차 못했었다.(127쪽)

 

이처럼 사랑하는 이에게 세상은 아름답다. 사랑의 힘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게 한다. 오늘 우리들 삶 속에 이런 사랑의 아름다움이 가득하면 좋겠다.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건 바로 사랑의 대상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에 사랑하는 사람보다 더 훌륭한 예술 작품은 세상에 없을 테니까요.”

“사랑이 바로 최고의 예술이지요. ... 예술이란 인간이 겪어야 하는 모든 것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다는 거예요. 모든 슬픔과 고통과 잔인함까지도. 사랑이 바로 그런 거지요.”(137쪽)

 

이처럼 소설은 비록 사랑의 상처로 인해 영혼이 산산이 부셔진다 할지라도, 사랑 그 자체가 갖는 힘, 최고의 예술인 그 사랑의 치명적 매력을 이야기한다. 주인공은 사랑을 통해 인생의 가장 큰 환희를 맛보게 되며, 또한 사랑을 통해 그 영혼은 산산이 부서지게 된다. 물론 이러한 부서져 버림도 시간이 지나면 하나의 추억으로 변하게 되지만. 그 사랑을 제주의 범섬 앞바다 밑에 새겨 넣는 장면은 어쩌면 바보 같으리만치 아름답다.

 

하지만, 소설은 사랑 이야기만을 풀어내고 있진 않다. 소설가의 사랑이야기를 통해,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작가의 생각들도 풀어내고 있는데(주인공이 소설가임으로.), 이 부분을 살펴보는 재미도 있다. 대중소설은 쓰레기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독자들이 외면할망정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쓰는 소설만이 진짜 소설인지.

 

그래도 소설은 읽혀야 하지 않나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읽히지 않는 소설을 힘들여 쓰는 사람이에요.(마이크가 주인공에게 하는 말 중에서, 15쪽)

 

또한 소설 창작에 있어 필요한 조건들은 무엇인지도 소설 속 곳곳에서 작가는 주인공의 입을 빌어 이야기한다. 이런 소설 창작에 필요한 조건들을 찾아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리고 글이 써지지 않는 주인공, 소설 소재가 고갈된 주인공의 글 도둑질도 나오는데(물론 주인공이 이내 밝히지만.), 그 부분도 인상 깊다.

 

나는 이제 소재가 없는 작가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소설거리가 될 만한 소재가 없는 작가는 죽은 작가나 마찬가지요. 그래도 계속해서 소설을 쓴다면 비루한 걸인과 다름이 없지요. 그래서 나는 소설을 쓰지 않기로 했어요.(132쪽)

 

괜스레 작가들의 징징거림으로 다가올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글 도둑에 대한 작가의 비웃음, 꾸짖음으로 들리기도 한다.

 

물론, 언뜻 언뜻 비치는 작가의 성향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열병 같은 사랑을 맛보게 해주고, 또한 글쓰기에 대한 여러 가지 작가의 견해를 살펴보는 재미가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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