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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임의 바다
팀 보울러 지음, 서민아 옮김 / 놀 / 201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팀 보울러의 신작이 나왔다. 『속삭임의 바다』라는 제목의 소설. 소설은 과연 어떤 이야기를 속삭여줄까 설렘는 마음으로 책장을 펼쳐본다.
외딴 섬 모라 섬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15살 소녀 헤티는 남들과는 다른 점이 있다. 그는 평범한 바다유리 속에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형상들을 본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형상을. 그리고 바다에서 들려오는 속삭임도 듣는다. 누군가 마치 유령들의 속삭이는 것과 같은 소리들을.
그런 헤티가 살고 있는 모라 섬에 지독한 폭풍이 몰아치던 밤, 한 노파가 작은 배에 실려 떠내려 왔다. 이 정체불명 노파의 출현에 섬사람들은 점차 불안에 쌓이기 시작한다. 특히, 섬에서 가장 나이 많은 어른인 파 노인은 노파의 출현을 악의 출현이라고, 이제 섬은 온통 불행이 시작될 것이라고 외치기 때문이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유일한 외부세상과의 소통의 도구인 배, ‘모라의 자랑’이 폭풍에 파괴되고, 노파를 죽이기를 외치던 파 노인은 헤티의 반대에 부딪치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런 불행의 일들이 겹치자 섬사람들은 노파를 불행의 단초로 여기기 시작하며, 살려둬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는데.
한편 외딴 섬에 갑자기 나타난 이 노파의 얼굴을 본 헤티는 노파가 바로 자신이 바다유리 속에서 봤던 그 얼굴임을 알고 어떻게든 노파를 살리려 한다. 하지만, 점차 마을 사람들의 광기가 드러나게 되고, 헤티 역시 마을 사람들의 미움의 대상으로 변해 가는데. 과연 헤티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게 될까?
팀 보울러의 소설, 『속삭임의 바다』를 읽으며 몇 가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무엇보다 헤티라는 이 소녀의 용기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을 사람들이 점차 인간성을 상실해 가며, 광기에 휩쓸리는 가운데서도 자신과는 일면식도 없는 노파를 지켜내기 위해 그 여린 소녀의 몸으로 맞서는 그 모습. 뿐 아니라 섬마을 공동체의 분열을 더 이상 볼 수도 없고, 노파를 모른 척 할 수도 없기에, 자신의 작은 배에 노파를 태우고 노파의 집이 있는 곳으로 여겨지는 본토를 향해 떠나는 용기는 대단히 감동적이다. 타인을 향한 관심을 끊어버린다면, 쉽게 나 자신을 지켜낼 수 있지만, 헤티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힘든 결정을 하고 실행에 옮기게 된다. 얼마나 숭고한 정신이며, 또한 불굴의 용기인가. 이런 용기 있는 발걸음은 또한 헤티를 새로운 세상으로 안내하게 되고,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을 희망하게 한다. 오늘 우리에게 헤티와 같은 멋진 용기와 헌신의 모습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음으로, 섬사람들의 광기에도 눈이 간다. 이들은 자신들의 작은 세계에 갑자기 들어온 한 죽어가는 노파를 악의 씨앗으로 간주한다(어쩌면 자신들의 안정을 위해 노파를 희생시키려는 그들이야말로 악의 씨앗이 아닐까?). 노파 때문에 자신들에게 불행이 거듭된다고 믿는다. 그리곤 노파를 살려둬서는 안된다고 여긴다. 처음엔 그 동조가 몇 사람뿐이었지만 점차 많은 사람들이 동조함으로 노파를 지켜내려는 사람들이 도리어 궁지에 몰리기도 한다. 이들이 노파를 마녀사냥의 대상으로 삼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두렵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가 정말로 노파가 악의 씨앗이라 믿는 건 아닐 거다. 하지만, 혹시 노파가 정말로 악의 씨앗이어서 자신들에게 재앙을 가져올까 그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이 두려움이 광기로 변한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발견하는 수많은 광기가 이런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문제는 어느 공동체의 우두머리, 즉 절대적 힘을 가진 이가 이런 두려움으로 인한 광기에 휩싸이게 될 때가 아닐까? 이러한 두려움의 광기가 우리 곁에는 없길 소망한다.
마지막으로 작가는 『속삭임의 바다』를 통해, 바다라는 대자연에 의해 목숨을 잃은 이들을 향한 진혼곡을 노래하고 있진 않은지 싶다. 남들과 다른 신비한 힘을 가진 헤티. 그녀가 바다유리에서 발견하는 형상, 그리고 듣게 되는 바다의 속삭임은 모두 이런 바다에 의해 희생된 생명과 연관이 있다.
모라 섬의 역사는 늘 그런 상실의 역사죠. 그랜의 할머니나 다른 어른들은 우리가 강해져야 한다고 말씀하곤 하세요. 그게 섬에서 살아가는 방법이래요. 죽은 자는 빨리 묻고 산 자는 계속 살아야 한다는 거예요. 하지만 전 그런 방식이 마음에 안 들어요. 저는 바라서는 안 되는 걸 소망하고 있어요.(291쪽)
헤티가 소망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다로 인해 상실된 자들, 그들을 기억 저편에 묻어버리기보다는 자신들의 삶 곁에 두고 여전히 기억하고, 다시 떠올려봄으로 소통하려는 것은 아닐까? 이런 소망이 결국 헤티에게는 남들이 보지 못할 형상을 보게 하고, 바다의 속삭임을 듣게 하는 것일 테고 말이다. 물론, 슬픔의 기억, 상실의 기억을 묻어버리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슬픔과 상실을 뛰어넘어 우리 곁을 떠난 이들, 상실의 역사가 되어버린 이들을 여전히 오늘 내 삶 속에서 기억하며 회상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상실의 역사가 되어버린 영혼들을 다독여주는 한 방법이 되지 않을까?
팀 보울러의 신작 『속삭임의 바다』는 모라 섬에 갑자기 불어 닥친 폭풍, 그리고 한 노파가 표류된 사건을 통해 마을 공동체가 어떻게 두려움에 빠지고 광기에 휩쓸리고 있는지. 또한 이러한 인간성 상실의 모습과 그에 맞서는 자들의 용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바다의 속삭임을 통해, 바다로 인해 상실의 역사가 되어버린 희생자들의 넋을 향한 진혼곡을 들려준다. 바로 헤티라는 연약한 소녀의 모습을 통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