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언제나 남쪽이었다
이종화 지음 / 해드림출판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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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환갑이 지난 어느 날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시인은 자신의 시를 넋두리라고, 낙서처럼 달아본 댓글이라고 겸손하게 말한다. 하지만, 그 시들은 왠지 어렵다. 왜 그럴까? 어쩌면 시인과 나의 코드가 맞지 않아서 일수도 있겠고, 시인의 시어가 시인만의 세상에 갇혀서 일수도 있겠다. 아니, 그런 이유보다는 독자인 내가 시인의 아름다운 시어를 따라가기엔 너무나도 세속적이고, 시인의 고매한 심상을 느끼기에는 메말라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시인의 시가 나에게 어려운 이유는 아직 시인의 연륜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시인은 이미 한 갑자의 세월을 살아오지 않았나. 그렇구나. 난 아직 젊기에 한 갑자의 세월에 대한 통찰력에 공감하는 능력이 부족한 거구나. 이리 생각하며, 난 여전히 젊다는 망상에 취해본다.

 

시인은 이젠 돌아갈 시간을 준비한다. 시인 몸담고 있는 이곳은 이미 “신들도 집이 있다면 돌아갈 시간에(<경계인> 중에서)” 이르렀다. 어느덧 봄, 여름, 가을을 지나 겨울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시인이 세월의 무게에 무릎 꿇는 것은 아니다. 겨울의 시간을 보내고 있기에 또 다른 꿈을 꾼다.

 

겨울이 오면 숲은 돌아 섭니다 / 이제 나무들은 마주보고, / 한 계절의 수고를 서로 위로 합니다 // 달이 뜬 밤에는 / 발등에 쌓인 낙엽을 내려다보며 / 어깨동무를 하고, / 밤하늘에 차가운 별도 / 몇 개씩 나눠 가져 봅니다 // 눈이 올 때도 / 살아온 만큼 각자 눈을 맞으며 / 마음을 하얗게 나눕니다 // 그래도 아침마다 찾아온 까치들은 / 언제나 반가운 친구 / 산책하는 이들의 발자국 소리 / 겨울이 뒤돌아보는, 또 / 다른 겨울의 시작입니다.

<겨울 동요> 전문

 

그렇다. 시인에게 겨울은 또 다른 시작이다. 비록 발등에 쌓인 낙엽이 쓸쓸하고, 밤하늘의 별은 차갑게 느껴지더라도, 겨울은 또 다른 시작 봄을 잉태하는 계절이다. 이러한 또 다른 시작이 어쩌면 시인에게는 시를 쓰는 것이었겠다.

 

또한 나이 듦은 서러움만이 아닌, 깊은 통찰력을 허락하기도 한다. 이런 재미난 시가 있다.

 

나이 들어 눈이 어두워지는 것, 이젠 / 일일이 다 확인 하려 들지 말라는 //

나이 들어 귀가 어두워지는 것 / 웬만한 건 못 들은 척 하라는 //

나이 들어, 입맛을 잃어 가는 것, 너무 / 맛있는 것 만 찾지 말라는 //

나이 들어 숨차고 긁히는 목소리 / 너무 떠들고 나서지 말라는 //

나이 들어, 자꾸 뭔가를 놓치는 것, 더 이상 / 손에 넣으려 하지 말라는 //

나이 들어 잠 안 오는 것, 젊어서 / 낮에 한 일들 잘 생각해 보라는 //

나이 들어, 점점 더 꽃과 새 별과 바람이, / 그대 산에 갈 때가 됐다는 / 이젠, 고마운 신호라고 해 볼까.

<신호> 전문

 

이처럼 나이 듦의 신호를 들을 수 있는 시인의 통찰력이 멋스럽다. 이젠 눈이 조금 어두워져도 좋겠다. 일일이 다 확인하는 빡빡함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이젠 귀가 좀 어두워져도 좋겠다. 날 향한 비방과 수군거림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이젠 조금 입맛을 잃어도 좋겠다. 탐식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이젠 조금 숨이 차도 좋겠다. 너무 나서지 않기 위해. 나이 들어 잠이 안 오는 건, 젊어서 한 일들을 잘 생각해 보라는 신호. 우리가 어떤 부끄러운 일들을 행하고 살아왔는지 떠올려 볼 수 있다는 건 축복이 아닐까? 이젠 조금 탐심으로부터 해방된다면 어떨까? 이처럼 멋지게 나이 든다면, 그 나이 듦은 해방과 다르지 않다.

 

이처럼 인생에 대해, 나이 듦에 대해 깊은 통찰력으로 인생 후반전을 새롭게 뛰기 시작한 시인의 앞으로의 행보가 마치 별처럼 빛나게 되길 응원해 본다.

 

작은 점 하나도 / 저리 빛날 수 있다는 것을 / 그리 크지 않아도 저렇게 높다는 것을 / 보잘 것 없이도 누군가를 보고 싶으며 / 아무리 멀어도 속삭일 수 있다는 것을

<별을 보며>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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