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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멍에 ㅣ 한국문학사 작은책 시리즈 3
홍상화 지음 / 한국문학사 / 2015년 4월
평점 :
오랫동안 사회에서 쌓아온 자신의 경력과 지위, 생활 기반을 버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이렇게 훌훌 털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일이 그전의 나의 삶과 전혀 관계없는 그런 모습이라면, 뿐 더러 세상적 잣대로 인정받지 못할 그런 모습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뿐 아니라, 어떤 외부적인 압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이런 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닌, 자기 내부의 갈등과 확신으로 인해,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들을 자발적으로 털어낸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홍상화 작가의 소설 『사람의 멍에』는 바로 그런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소설 속 화자인 ‘나’ 대식은 어느 날 말도 안 되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의 오랜 친구인 승혁이 미국에서 쌓아온 모든 생활 기반을 버리고 한국에 입국했다는 소식이다. 승혁은 외국인으로서는 드물게 미국 건축설계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설계사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으며, 미모의 아내, 그리고 사랑스러운 딸, 이처럼 부족한 것 없는 삶을 살아가는 친구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입국했다는 거다. 심지어 오랜 세월 이상적인 부부상으로 살아가던 사랑하는 아내마저 버리고 말이다. 행복한 가정마저 버리고 승혁은 무엇을 찾으려는 걸까?
놀랍게도 입국한 승혁은 바닷가에서 막노동을 하며 살아간다. 뿐 아니라, 그 지역의 건달과 헤게모니 싸움까지 해가며 말이다. 이런 놀라운 모습을 보게 된 ‘나’는 더욱 의아해 하며, 승혁의 아내인 석영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려보기도 하고, 석영의 고민 상담을 자처하기도 한다. 사실 대식의 마음속에는 석영이란 여인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여인으로 무의식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과연, 승혁과 석영, 그리고 그 사이에 낀 ‘나’ 대식은 어떤 결말을 맞게 될까?
이 소설 속에서 작가는 “사람의 멍에”를 과감히 끊어버리고 자유로운 삶을 찾는 중년의 남성, 그리고 “사람의 멍에”를 멍에가 아닌 안정적 삶, 성공한 삶, 행복한 삶이라는 자위하며 살아가는 중년의 남성을 대조시키고 있다.
엉뚱한 결정을 하였던 승혁, 그에게 있어서, 안정적인 삶, 성공한 삶, 행복한 가정, 이 모든 것이 도리어 ‘멍에’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아간다. 막노동 현장에서 일하고, 지역 사회에서 헤게모니를 잡아가며, ‘영감’이라 불리고, 에이즈에 걸린 시골 작부의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을 받으며 살아간다. 물론, 여기에 더하여 승혁에게는 홀로 열정을 쏟으며 매달리는 꿈이 있다. 바로 우리나라 국보 1호인 숭례문을 완벽한 건축물, 역사에 빛날 완벽한 건축물로 재창조하려는 꿈이 있다. 그래서 이 작업을 홀로 한다.
그러니, 승혁에게는 자신의 열정과 꿈을 좇는 삶이 아닌,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가도록 하는 삶 속의 모든 여건들을 “사람의 멍에”라 여기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가정이라 할지라도. 아울러, 이러한 멍에에 매여 살아가며 세상적인 성공을 좇아 살아가던 삶은 마치 사육되는 돼지와 같은 삶이었다 말한다.
이처럼, 자신의 꿈을 향해, 모든 멍에를 깨뜨릴 수 있는 그 열정과 무모하리만한 용기가 멋스럽다. 게다가 자유로운 사랑을 지나 절대적 사랑, 완전한 사랑을 표상하기 위해 에이즈에 걸린 시골 작부를 등장시키는 모습 역시 뭔가 특별한 느낌을 주는 감이 없지 않다. 에이즈마저 겁내지 않고, 천대받는 인생을 세상의 잣대로 판단하지 않는 그 모습이 어쩌면 “사람의 멍에”로부터 자유로워진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굳이 이런 사랑만이 순수한 사랑일까? 게다가 이 시골 작부와의 사랑 역시 또 하나의 멍에로 승혁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지 않은가. 멍에를 벗기 위해 선택한 삶에서, 여전히 또 하나의 멍에를 매는 모습이 아닌가. 어쩌면 작가는 결국 우리네 인생이란 것이 “사람의 멍에”를 온전히 벗기엔 불가능함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승혁의 삶에 대조되는 인생이 바로 ‘나’ 대식이다. 대식은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라 여긴다. 오히려 더욱 자유롭게 아부하고, 자유롭게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만들어가며, 자신의 성공적인 삶을 추구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러한 삶 역시 어쩌면, “사람의 멍에”를 벗어버리는 모습이라 볼 수도 있다. 세상의 어떤 비판과 손가락질도 상관치 않겠다는 자유함(!), 이것 역시 바람직하진 않다 할지라도 “사람의 멍에”를 벗는 또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으리라. 결코 권장하고 싶진 않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나’ 대식 역시 여전히 “사람의 멍에”에 매여 있다. 그건 그에게 있어 가장 이상적인 여인, 그리고 남 몰래 키워온 사랑의 대상 석영과 여행을 결정하면서도 여전히 현실에서의 삶에 발목을 잡히는 그런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것을 굳이 “사람의 멍에”로만 해석할 필요도 없다 여겨진다. 어차피 우리네 삶이란 것이 내가 하고 싶은 것, 내 본능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며, 또한 그렇게 사는 것만이 자유는 아니기 때문이다. 날 힘겹게 하는 의무, 날 얽어매는 삶의 자리들, 이것들이 삶의 ‘멍에’가 아닌, 어쩌면 삶의 ‘축복’일 수도 있다. 특히, 가족이란 그렇지 않은가. 물론, 가족을 생각할 때, 내 맘대로 살 수 없다. 내 맘대로 결정할 수 없고, 내 맘대로 행동할 수 없다. 그러니, 어쩌면 ‘멍에’라 여길 법하다. 하지만, 그런 ‘멍에’는 기꺼이 맬 수 있는 멍에가 아닐까. 가족이야말로 날 현실에 안주하게 하는 ‘멍에’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내 삶에 가장 커다란 축복이며, 행복의 근원이기도 하기에 말이다.
그러니, 굳이 ‘멍에’라기보다는 또 다른 내 삶의 자유함을 누릴 수 있는 한계라 볼 수는 없을까.
그럼에도 작가가 말하는 분명한 바는 현실에 타협하며 살아가는 인생은 마치 사육되는 돼지와 같은 인생이라는 점. 내 열정과 꿈을 위해서라면, 내가 쌓아온 삶의 기반마저 포기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삶이 진정한 자유함을 누리며,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여전히 “사람의 멍에”를 수없이 매고 살아가야만 하는 인생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왕이면 그 멍에가 의무감에 의한 것만이 아닌, 내 삶의 진정한 행복, 의미, 가치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이왕이면 그러한 멍에들 역시 함께 열정과 꿈을 향해 나아가는 동반자들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