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사람 - 42년간의 한결같은 마음, 한결같은 글쓰기
정호승 지음 / 열림원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우리 시대의 대표 서정시인이라는 정호승 시인의 시선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책장을 덮으며 한동안 그의 시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온갖 여러 가지 감정이 내 안에 뒤죽박죽 엉켜 붙어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삶의 다양한 양태들을 해석하는 시인의 노래로 인한 감정들, 고달픔, 외로움, 절망, 분노, 죽음, 소멸, 연민, 반성, 사랑, 서글픔, 애잔함, 소망, 희망 등등 무수한 감정의 테러에 시달린다. 그저 한 동안 그 모든 감정 앞에 영혼을 맡겨본다.

 

그전부터 익히 알던 시도 있고, 새롭게 읽은 시, 새롭게 읽혀진 시들도 있다. 이 모든 시들이 준 감정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건 먹먹함이다. 여러 시편들에서 그 먹먹함을 느끼게 되지만, 유독 <못>이란 시가 뇌리에 남는다.

 

벽에 박아두었던 못을 뺀다 / 벽을 빠져나오면서 못이 구부러진다 / 구부러진 못을 그대로 둔다 / 구부러진 못을 망치로 억지로 펴서 / 다시 쾅쾅 벽에 못질하던 때가 있었으나 / 구부러진 못의 병들고 녹슨 가슴을 / 애써 헝겊으로 닦아놓는다 / 뇌경색으로 쓰러진 늙은 아버지 / 공중목욕탕으로 모시고 가서 / 때밀이용 침상 위에 눕혀놓는다 / 구부러진 못이다 아버지도 / 때밀이 청년이 벌거벗은 아버지를 펴려고 해도 / 더이상 펴지지 않는다 / 아버지도 한때 벽에 박혀 녹이 슬도록 / 모든 무게를 견뎌냈으나 / 벽을 빠져나오면서 그만 / 구부러진 못이 되었다

< 못 > 전문

 

문득, 연로하신 아버지가 떠오른다. 일평생 가정을 위해 애쓰신 아버지. 하지만, 가정을 위해 가정보다는 일을 우선하셨던 아버지. 그렇기에 자녀들과 살가운 대화조차 나누지 못한 아버지.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릴 무척이나 사랑하시고 아껴 주셨는데. 문득 어린 시절 아버지가 내게 볼을 비빌 때, 그 꺼칠꺼칠하던 느낌이 떠오른다. 이젠 내 아이들이 그 느낌을 받을 텐데 하는 생각과 함께. 이젠 시인의 노래처럼 구부러진 못이 되어버려 제대로 걷지 못하면서도, 힘들어 하는 아들을 보면 더 괴로울 것 같아 아들네 집에 찾아오지도 못하시는 아버지. 우리 모두 우리의 아버지들이 “한때 벽에 박혀 녹이 슬도록 모든 무게를 견뎌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음을 생각해본다.

 

그렇기에 나 역시 벽에 박혀 녹이 슬도록 모든 무게를 견뎌내 보자 다짐한다. 언젠가 나 역시 그러한 구부러진 못이 될 것이지만.

 

 

너무 무거운 감정을 털어보려, 시를 읽으며, 시인의 재치와 해학, 철학 그리고 시인은 넓은 마음까지 느꼈던 시, 와~~ 하며 이마를 치게 했던 시 한편도 함께 소개해 본다.

 

경주박물관 앞마당 / 봉숭아도 맨드라미도 피어 있는 화단가 / 목 잘린 돌부처들 나란히 앉아 / 햇살에 눈부시다 // 여름방학을 맞은 초등학생들 / 조르르 관광버스에서 내려 / 머리 없는 돌부처들한테 다가가 / 자기 머리를 얹어본다 // 소년부처다 / 누구나 일생에 한 번씩은 / 부처가 되어보라고 / 부처님들 일찍이 자기 목을 잘랐구나

< 소년부처 > 전문

 

비록 다른 종교를 갖고 있지만, 경주박물관에 갈 때마다 그 목 잘린 돌부처들의 모습에 마음이 좋진 않았다. 그런데, 시인의 눈은 역시 다르다. 그 돌부처들에 장난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소년부처를 보는 눈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처럼 아름다운 눈을 갖고 싶다.

 

 

마지막으로 힘겨운 삶의 자리에서도 치열하게 살길 결단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시인의 또 다른 시를 소개한다.

 

개가 밥을 다 먹고 / 빈 밥그릇의 밑바닥을 핥고 또 핥는다 /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 몇 번 핥다가 그만둘까 싶었으나 / 혓바닥으로 씩씩하게 조금도 지치지 않고 / 수백 번은 더 핥는다 / 나는 언제 저토록 열심히 / 내 밥그릇을 핥아보았나 / 밥그릇의 밑바닥까지 먹어보았나 / 개는 내가 먹다 남긴 밥을 / 언제나 싫어하는 기색 없이 다 먹었으나 / 나는 언제 개가 먹다 남긴 밥을 / 맛있게 먹어보았나 / 개가 핥던 밥그릇을 나도 핥는다 / 그릇에도 맛이 있다 / 햇살과 바람이 깊게 스민 / 그릇의 밑바닥이 가장 맛있다

< 밥그릇 > 전문

 

나에게 주어진 삶의 밥그릇을 이제 나 역시 치열하게 핥고 핥아 그릇의 밑바닥까지 맛있게 먹게 되길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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