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여류작가인 강경애의 작품, 『지하촌』은 1933년에 발표된 작품이라고 한다. 그러니 어느덧 80년이 지난 작품이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불편함이 있었다.
이 불편함은 첫째, 그 언어가 80년 전의 언어이기에 맞춤법 등은 오늘의 것으로 바꾸었다 할지라도 단어들이 옛 단어들이며, 또한 표현하는 방식이나, 뉘앙스가 오늘의 것과 상당한 거리가 있음에서 오는 불편함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불편함은 작품을 읽어나가는 가운데 어느 정도 극복되어지는 불편함이다.
극복되지 않는 불편함은 두 번째 것이다. 이것은 바로 강경애 작가가 의도한 바이기도 할 것이다. 그 내용이 너무 마음을 아프게 하며 불편하게 한다는 점이다. 극한의 빈곤, 그리고 그 빈곤이 사람을 얼마나 비참하게 하는지를 작가는 잘 보여주고 있다. 그 묘사함에 있어, 어떤 부분들은 구토를 유발할 만큼 사실적으로 표현한 부분들 역시 없지 않다. 이런 불편함이 소설을 읽는 내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불편하게 한다. 아니 소설을 덮은 뒤에서 그 충격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가난 때문에 치료조차 받지 못해 어려서 팔에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칠성이, 구걸로 삶을 연명하는 그에게는 아무리 하루 종일 일해도 입에 풀칠하기도 힘겨운 어머니와 두 동생이 있다. 이제 갓난아기를 막 벗어난 막내 여동생은 머리에 진물이 나고 고름이 나서 그곳에는 언제나 파리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이것이 빈곤의 현실이다.
그런 칠성이는 한 마을의 앞을 보지 못하는 큰년이를 마음에 품고 있다. 큰년이를 위해 구걸한 돈들을 한푼한푼 모으고, 과자도 모은다. 하지만, 그런 큰년이가 이웃마을 부잣집의 씨받이로 시집가게 된다는 소식에 그동안 모은 돈으로 큰년이에게 예쁜 옷감을 사다주려 한다. 하지만, 오는 길에 구걸하다 부잣집 개에게 물리고, 비를 쫄딱 맞고, 게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큰년이는 이미 시집을 가버렸다. 큰비에 그나마 농사짓던 논은 다 쓸려나갔다. 게다가 막내 여동생의 머리에는 민간요법으로 쥐가죽을 붙여놓았는데, 아이는 계속하여 쥐가죽을 벗겨내려 하고, 엄마는 상처가 나으려고 가려운 것이라며 벗겨내지 못하게 막는다. 하지만, 결국 벗겨낸 그곳 아이의 머리엔 구더기가 가득.
강경애 작가의 『지하촌』은 결코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빈곤을 벗어날 수 있는 한 가닥 복선도 소설은 거부한다. 끝내 빈곤은 그들을 괴롭게 하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오히려 빈곤은 더욱 깊어진다. 이것이 작가가 고발하는 빈곤의 악마성이며, 그 빈곤의 힘에 휘둘린 인생의 비참함이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작가의 의도를 그 당시의 시대상이 그랬지 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오늘이라고 이러한 극한의 빈곤이 줄어들었을까? 아니 어쩌면 빈부의 간극이 더욱 벌어짐으로 인해, 상대적 박탈감까지 떠안아야 하는 빈곤층이 얼마나 많은가? 아무리 벗어나려 애쓰고 애써도 소용이 없는 그런 빈곤의 굴레. 그 무게에 짓눌린 사람들이 이 시대에도 여전하다.
그렇기에 여전히 마음은 무겁고 불편하다. 하지만, 이 불편함은 우리가 외면해선 안 되는 불편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