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면
이채현 지음 / 작가와비평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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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사랑한다면』을 펼치면 시인의 영성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제목처럼 사랑을 이야기한다. 해설가의 말처럼, 그 ‘사랑’이 영성으로 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여기서 말하는 이 ‘사랑’은 누구의 사랑이며, 누구를 향한 사랑인가? 시인의 사랑으로서 구체적 대상을 향한 사랑인가? 아니면 익명의 세상 모두를 향해 품는 사랑인가? 아니면, 인간이 아닌 신을 향한 사랑인가? 모두 맞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첫걸음은 날 향한 신의 사랑이 아닐까? 바로 그 사랑을 향한 시인의 영성을 느낄 수 있는 시를 뽑아본다.

 

겨울 밤 / 검은 산, / 삐죽이 머리카락 세워 / 쿡쿡 찌르는 어둠 //

하얀 소금, / 푹 / 푹 / 꿈틀꿈틀 / 단장(斷腸) / 꿰찔리는 / 영혼(靈魂) //

하얀 별, / 나폴 / 나폴 / 날아 앉는 / 숨 //

겨울 밤 / 산 너머 / 민땅에 오시는 / 붉은 아가

< 성탄(聖誕) > 전문

 

사랑의 첫걸음은 우릴 찾아오시는 그분에게 있다. 그분이 우릴 사랑하셨다. 그래서 신이 낮은 곳으로 친히 내려오셨다. 그분이 내려오셨던 그 때는 온통 얼어붙은 겨울밤이었다. 환한 빛보다는 온통 검은 산, 어둠이 짓누르고 있는 세상이다. 행복한 영혼보다는 단장의 아픔으로 상한 영혼들이 가득한 민땅에 찾아오셨다. 곱고 예쁜 모습이 아닌, 붉은 모습으로. 이것이야말로 시인의 영성을 보여주는 ‘사랑’의 첫걸음이 아닐까?

 

그리고 시인은 이러한 신의 사랑을 관념이 아닌, 삶을 통해 고백한다.

 

어둠의 성(城) 안 / 컴컴합니다. / 아버지 손잡고 들길을 걸어갑니다. / 달빛 따라 하염없이 걸었습니다. / 발등에 풀잎이 비벼댑니다. / 발끝에 돌들이 구릅니다. / 긴 머리카락 헤친 나무들이 출렁입니다. / 강물이 재잘대며 흐릅니다. / 별들이 잠들 대 아버지 팔 베고 나도 잠들었습니다. / 눈 뜨니 / 성문(城門) 밖 빛 속에 뉘어져 있습니다. /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 어두운 밤 함께 아름답게 걸어주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 눈물 나도록 혼자인 날에 > 전문

 

시인이 걸어가는 삶의 길은 결국 홀로 걸을 수밖에 없는 길이다. 온통 어둠이 짓누르고, 돌멩이 가득하고 잡초로 뒤덮인 인생길이다. 그래서 눈물 나도록 혼자인 날이다. 하지만, 그 길을 함께 걸어주는 아버지가 계시다. 분명 눈물 나도록 혼자인 날이라 고백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렇기에 이 아버지는 신적 존재다. 그분이 함께 걷고 있다. 이것이 시인의 영성이 담긴 고백이다.

 

마치 나 홀로 걸어야만 하는 고달픈 인생길이지만, 영성의 눈으로 보면 붉은 아가로 오신 그분이 내 곁에 함께 함을 느끼게 된다. 비록 장래 일을 알 수 없는 컴컴하고 어두운 인생길이라 할지라도 결코 혼자가 아님을 시인은 안다. 신이 우릴 향해 사랑의 첫 걸음을 내딛으셨고, 지금껏 함께 걷고 계신다. 그렇기에 이제 시인 역시 그 ‘사랑’을 향해 첫걸음을 딛게 된다.

 

나는 작은 아이였습니다. / 산 너머 석양이 질 때 / 당신 품속으로 뛰어가 빨갛게 물듭니다.

< 작은 아이 > 일부

 

비록 시인은 작은 아이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릴 위해 ‘붉은 아가’로 오신 그분 품속으로 뛰어가 안기게 된다. 그리곤 그 붉음에 물들게 된다. 이 ‘빨갛게 물듭니다’ 이것이야말로 시인의 위대한 발걸음이 아닐까?

 

여기 빨갛게 물들게 되었음은 이제 붉은 아가로 오신 예수의 정신에 함께 물들게 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 이것이 또 하나의 사랑의 발걸음이다. 이제 주님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단순히 그분 품속에 안기기 위한 걸음만이 아니다. 그 정신에 붉게 물들어 그것 가지고 세상을 향해 또 하나의 발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이것이 참 사랑의 영성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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