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 시산맥 서정시선 8
권순자 지음 / 시산맥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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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자 시인의 시집은 처음 접하게 되었지만, 벌써 시집을 5집까지 낸 중견(?) 시인이다. 금번 시집 『순례자』를 묵상하며, 먼저 느낀 느낌은 무거움이다.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무겁고 어둡다. 때론 고통스럽고, 때론 공허하다. 아픔과 눈물이 가득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 가운데 밝은 빛이 존재한다. 이것을 시인이 노래하는 희망이라 말하고 싶다. 왠지, 시인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허무, 공허, 고통, 눈물, 아픔, 한숨에 있지 않고, 그것들을 지나 희망에로 나아감에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

 

따라서 권순자 시인의 시세계에서의 무거움은 부정적 무거움이라기보다는 긍정적 무거움이라 말하고 싶다. 삶의 무게가 결코 가벼울 수 없기에 삶을 통찰하는 시인의 시세계는 무거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무거움의 끝은 희망, 밝음을 일구어낸다. 아픔이 아름다움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시인의 의도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라는 것이 시인의 손끝을 떠나면 이미 시인의 것이 아닌, 독자의 것이기에 독자로서 시인의 시를 이렇게 해석해보고 싶다. 어두움을 뚫고 희망의 빛을 일구어내는 시로 읽고 싶다. 그런 구절들을 찾아본다.

 

지독한 겨울을 견뎌냈다네 / 바람에 폭행당하고도 눈물 흘리지 않았다네 / (중략) /

먹먹한 아픈 자리에 / 괴로움이 몸을 말고 기다리다가 / 어느 날 문득/ 하나씩 꺼내어 햇살에 내어놓네 / 울긋불긋 / 쟁여놓은 아픈 자리를 / 꿈길처럼 열어보이네

<상처에 피어나는 것들> 일부

 

삶은 지독한 겨울과 같다. 하지만, 겨울이 끝은 아니다. 겨울 뒤엔 반드시 봄이 온다. 지독하리만치 힘겨운 인생의 겨울이지만, 그 겨울을 견뎌낸 후에는 그 삶의 무게 하나하나가 햇살에 비춰지고, 결국 상처에서는 울긋불긋 피어나는 꿈길이 있다.

 

어둠이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시간이면 / 어제의 기억들이 하얗게 쏟아졌다 // (중략)

핏빛 울음도 붉어지던 눈자위도 / 기다림의 시간을 달이고 달이면 / 꽃보다 환한 빛으로 태어나는가

<어두워지면> 일부

 

어둠과 상처를 지나 하얗게 소금이 쏟아져 내린다. 꽃보다 환한 빛으로 태어나기 위해선 핏빛 울음도 붉어지던 눈자위도 거쳐야 한다. 그렇다. 인고의 시간 없이 밝음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비록 지금은 상처뿐인 시간일지라도, 견뎌낼 때, 꽃보다 환한 빛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세상의 텅 빈 모퉁이에서 / 꽃을 피워 올리는 손들이 있다 / 삶은 늘 소용돌이라서 / 자주 허리가 휘고 손마디가 꺾이곤 하지만 / 곡괭이로 쇠스랑으로 긁어댄 자리마다 / 뽀지직뽀지직 땅이 열리고 / 독백처럼 낮은 소리로 흔들리며 / 아픈 열탕 같은 세상 속으로 오는 발길이 있다 // 어둑한 걸음으로 / 어두운 기슭으로 오는 것들의 / 궁금한 발길들 / 구부러진 길에는 푸른 꽃들이 피고 / 파닥거리는 작은 잎들이 환한 잠을 깨우고 있다

<들판에 봄이> 일부

 

모든 것이 풍성하며 가득 찬 여름에서 봄이 시작되진 않는다. 되려 텅 빈 모퉁이의 삶 속에서 봄이 시작된다. 지금 텅 빈 모퉁이를 돌고 있는가? 실망하지 말자. 그 모퉁이를 돌면 날 위해 꽃을 피워 올리는 손들이 있을 것이기에...

 

아픔 사이로 빛이 걸어온다 / 환하고 눈부신 상처 사이로 온다

<봄날> 일부

 

그렇다. 아픔 사이로 빛이 걸어온다. 우릴 향해... 가슴이 뛴다. 그 빛을 소망하기에...

 

오직 한 길만 아는 이 / 그저 하편향할 뿐이다 / 추락이 아니라 더 낮아지기 위하여 / 몸부림칠 뿐이다 / 더 낮고 더 외진 곳을 향하여 / 때론 깊은 계곡에서 무지개를 피우기 위하여 / 더 깊고 더 음습한 그늘을 향한다 / 부서지는 것은 통증만 유발하는 건 아니다 / 산산이 부서짐으로써 / 더 새로워지고 더 맑아지고 / 더 생생해지는 것이다

<폭포> 일부

 

폭포는 더 낮고 외진 곳을 향해 떨어진다. 더 깊고 음습한 그늘을 향한다. 하지만, 그것은 통증만 유발하는 것이 아닌, 무지개를 피워 올리기 위한 몸부림, 더 새로워지고 더 맑아지고 더 생생해지기 위한 몸부림임을 발견하는 시인의 눈이 아름답다. 그렇다. 어두움 후에 빛이 옴이 삶의 진리다. 이 진리를 붙드는 인생은 더 새로워지고, 더 맑아지고, 더 생생해지게 될 것이다.

 

삶은 자작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이다 차가운 날이 있었지 지금은 훈훈한 입김이 다정하다

<초원의 노래2> 일부

 

어지럽다. 잊어버려. 인생은 그런 거야. 상처도 아물 거야. 내 봄바람 같은 풀잎으로 네 얼굴 닦아줄게.

<초원의 노래4> 일부

 

인생은 다 그런 것이지만, 상처는 곧 아물 것이라는 시인의 외침. 차가운 날이 있었지만, 지금은 훈훈한 입김이 다정하다는 시인의 고백. 이것들이 우리의 것이 되길...

 

부서지고 부서져, / 부글대는 물거품이 되더라도 / 땀내 나는 생은 / 축제의 시간! //

파란 불꽃은 비와 구름을 부르고 / 황홀한 광기는 / 가슴 속을 비집고 들어가는 화살이네 // 이 기쁜 소용돌이에서 / 기꺼이 겨루는 생의 질주 // 들끓다 고요히 돌아오면 / 거품들이 안개로 피어 하늘로 올라가는 / 꿈을 꾸네

<축제> 일부

 

인생은 결국 축제의 시간. 부서지고 부서지지만, 부글대는 물거품으로 사라지는 듯 보이지만, 결국에는 안개로 피어 하늘로 올라가는 축제의 시간이다. 우리 그 축제의 시간을 즐거워하자. 아픔, 고통, 눈물, 한숨, 상처가 있다 하지라도, 그것을 지나 희망의 공을 띄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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