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출입 금지
코르네이 추콥스키 지음, 김서연 옮김 / 호메로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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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러시아 아동문학의 아버지라 불린다는 코르네이 추콥스키의 자전적 성장 소설이다. 성장 소설의 단골 메뉴라고 할 수 있는 풋풋한 짝사랑, 학교에서의 컨닝 작전 등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 소설의 주된 주제는 작가 자신이 경험한 학교의 부조리, 세상의 부조리다.

 

작가는 이 부조리에 대해 분노한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독자들 역시 자신의 그 분노함에 동참해 줄 것을 원한다. 왜냐하면, 그 대상은 다르다 할지라도 이러한 사회의 부조리들은 다양한 곳에서 여전히 존재할 것이기에.

 

작가는 세탁 일을 하는 어머니, 그리고 누나, 이렇게 세 식구가 힘겹게 살아간다. 이 가운데서도 어머니는 자녀들의 교육만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주인공은 어느 날 반 친구가 성적표를 조작하고 땅에 파묻은 사건을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누명을 쓰고, 퇴학당하고 만다.

 

학교에서 퇴학당한 엄청난 사실을 차마 어머니에게 밝힐 수 없어, 전전긍긍하는 그 모습, 그 심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이 퇴학당한 이유는 학교 교장 이하 교사들이 성적표 사간의 진실을 오해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집안이 가난하기에, 그토록 가난한 노동자 자식과는 함께 배우고 가르치는 것을 수치로 여긴 학교 방침(?)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가진 자들의 오만과 만행으로 인해,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어, 노동자가 되어야만 했던 작가(물론, 그럼에도 학업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 독학하여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대학에 들어가게 되고, 후엔 작가가 된다). 그래서 책 제목처럼 『학교 출입 금지』조치에 눈물 흘려야만 했던 자신의 청소년 시절의 그 아픈 상처를 통해 작가는 학교의 부조리를, 더 나아가 당시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한다.

 

작가는 자신의 퇴학 사건, 『학교 출입 금지』사건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이렇게 독백한다. “문제는 내가 코젤스키를 부추겨 성적표를 땅에 묻게 했는지 안했는지가 아니었다.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하찮은 일에 불과했다. 중요한 건, 내 어머니가 ‘튠틴 중령의 미망인’처럼 바닷가의 대저택도 없고, 주예프 어머니처럼 목욕탕이나 술집을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 내 어머니가 가진 거라곤 그저 남의 속옷을 빨아 거칠어진 손밖에 없었다.(pp.161-2)”

 

“내 어머니가 가진 거라곤 그저 거칠어진 손밖에 없었다”는 저자의 고백이 참 서글프게 느껴지며, 또 한편으론 그 아름다운 노동의 손이 퇴학당하는 원인이 되는 부당한 세상을 향한 분노가 끓어 오른다.

 

이 책은 저자의 당부가 없다 할지라도 저자가 느꼈을 분노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비열한 목적을 위해,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 가진 것 없는 약자들을 괴롭게 하는 그 세력들을 향해 분노가 일수밖에 없다.

 

특히, 교육자의 가면을 쓰고 있지만, 그 내면은 더럽고 추악한 교장, ‘여섯눈’과 그 졸개들의 모습에서 분노와 함께 본질을 상실한 자리보존은 추악한 죄의 근거가 될 수밖에 없음을 생각해 본다. 어느 누구이든 자신의 자리에 합당한 자세, 그 본질을 잃은 사람들은 부조리의 온상이 되며, 분노의 대상이 됨을 말이다. 종교인이든, 정치인이든, 공무원이든, 교사든 말이다. 우리 내가 서 있는 그 자리에 합당한 자가 되자. 나에게 씌워진 타이틀이 무엇이든 그 타이틀의 본질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되자.

 

아울러, 가진 것 없는 노동자의 자식이 감히 함께 교육받을 기회를 누린다는 것에 거부감이 있던 작가 당시의 가진 자들. 그들의 모습이 과연 당시만의 모습이었을까 생각해본다. 오늘은 이러한 부조리가 없을까? 자신들은 저들과 다르다고, 천민들과는 함께 할 수 없으며, 그들이 자신들과 같아져서도 안 된다는 귀족주의가 왜 없겠나? 자신들의 것을 지켜내기 위해선 가진 것 없는 자들에겐 양질의 교육을 보장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오늘은 더욱 팽배하지 않을까?

 

그나마 저자의 시대에는 가난할지라도 열심히 공부하면 신분상승의 기회는 주어졌다. 하지만, 오늘날 그런 기회는 하늘의 별따기만큼 줄어들지 않았나! 왜 그럴까? 예전엔 가난해도 운동을 통해, 신분상승의 기회를 잡기도 했는데, 가난해도 음악이나 미술 등 예술적 소질을 통해 신분상승의 기회를 잡기도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가난하면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하는 오늘의 세태는 무엇 때문일까? 단순히 시대가 바뀜에 따른 시대적 현상일 뿐일까? 아니면, 이런 사회로 몰고 가는 ‘여섯눈’들이 있기 때문일까?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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