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된 기억의 세계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바야시 야스미란 작가를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을 몇 편 읽었는데, 마침 그 책들이 모두 기억과 연관이 있었다. 작가는 이처럼 기억에 관심이 많다. 이 책 분리된 기억의 세계역시 그렇다. 물론, 조금씩 결은 다르지만 말이다. 개인적으로 그 전에 만났던 작가의 책들이 기억이 이어지지 않는 개인에게 벌어지는 미스터리 소설이었다면, 이 소설은 SF 소설에 가깝다. 물론, 광의적 의미에서는 미스터리다. 그러니 SF 미스터리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 책에서의 기억은 인류가 단기기억상실증상을 보인다. 모든 인류에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나 버렸다. 모든 사람들의 기억은 길어도 10분 정도밖에 이어지지 않는다. 글이나 언어와 같은 기억들은 이어져 의사소통이 가능하지만, 다른 기억들은 이어지지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증상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인류는 과연 그 동안 만들어낸 문명을 지켜낼 수 있을까? 아님 인류는 대혼란을 넘어 마지막을 맞게 될 것인가? 이런 질문에서 소설이 시작된다.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소설의 관심이 아니다.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인류는 어떻게행동하며, “어떻게될까? 여기에 관심이 있다.

 

이런 관심에서 소설이 진행된다. 한 인물이 주인공으로 나서서 어떤 사건과 맞서 싸워나가는 형식이 아니다. 마치 같은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여러 단편들의 모음처럼 소설은 진행된다. 인류에 대망각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이에 대처하는 모습들, 그리고 이로 인해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이 펼쳐진다.

 

소설의 전반부는 이렇게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상황 속에서 어떻게대처해나가는 지를 보여준다. 결국 인류는 각자의 기억을 저장해놓는 장치를 만들어 개인에게 장착시킨다. 마치 USB를 꽂으면 그 속의 정보를 읽을 수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기억이 담긴 칩을 몸에 꽂게 된다. 소설의 중반부부터는 이런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을 마치 단편소설처럼 나열한다.

 

쌍둥이의 칩이 바뀌었는데, 알고 보니 바뀐 것이 아니라 쌍둥이 가운데 한 사람의 기억이 둘로 복사되어 두 사람에게 들어갔다. 그럼 둘 중 누구의 기억이 진짜인 걸까? 둘 중 누구의 기억을 포기해야 하는 걸까? 길에서 우연히 부딪힌 남녀, 둘은 이 사고로 칩이 빠져버린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그들은 서로의 칩을 자신에게 꽂았다. 이들은 어떻게 자신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까? 칩을 거부하는 공동체가 있다. 이들은 이어지지 않는 기억속에서도 공동체를 이어간다. 과연 그 공동체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이렇게 기억을 담은 칩으로 각자의 기억을 이어가다보니 또 다른 일이 벌어진다. 죽은 가족의 칩을 보관하고 있다가 누군가에게 꽂게 되면 그 사람의 기억이 그 사람의 몸에 심어짐으로 죽은 이와 대화가 가능하게 되고, 심지어 몸은 다른 이지만, 기억은 사랑하는 가족인 사람과 함께 살아가게 된다. 이로 인해 몸을 빌려주는 직업까지 생긴다.

 

이처럼 작가는 기억에 대한 또 하나의 실험을 이 작품 속에 풀어 놓고 있다. 처음 기대했던 그런 추리소설이 아닌 SF 소설이어서 약간 아쉬웠지만, 그럼에도 기억에 대한 작가의 다양한 실험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