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은 물에 들기 전 무릎을 꿇는다 - 김정숙 시집
김정숙 지음 / 책나물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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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랜만에 시집을 손에 들었다. 항상 책이 곁에 있음에도 유독 시집을 멀리 한지 제법 오래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됐을까? 마지막 시집의 서평을 찾아보니, 작년 1월이다. 그러니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 마지막으로 시집을 펼친 후 여태 어느 시집도 손에 들지 못한 게다. 무에 그리 삶이 퍽퍽했기에, 아니 삶이 퍽퍽할수록 시집을 통해 감성을 채워야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시집 제목이 눈길을 끌어 삭막한 감성을 적셔보자는 생각에 택한 시집이 바로 멋진 제목의 이 시집, 햇살은 물에 들기 전 무릎을 꿇는다이다.

 

그렇게 택한 시집인데, 서평 마감일이 다가오도록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했다. 부랴부랴 시집을 펼치는데, 몸은 천근만근, 머리는 흐리멍덩하다. 시인의 시어가 머릿속에서 널을 뛴다. 아마도 시인의 탓이 아닌 내 탓이리라 싶다.

 

그래도 뭐 상관없다. 그저 읊조리며 읽다보면 뭔가 내 가슴을 건드리는 시어가 있으리라 생각하니 말이다. 역시 부모에 대한 시어는 그저 흘리지 못한다. 가슴을 두드린다. 누구나 부모님께 부족하고 못난 자식일 테니 말이다. 평생 내려놓지 못하고 비워내지 못하며 삶의 무게를 견뎌내며 버텨온 달팽이 어머니”, 어쩜 그 자리에 이젠 우리가 또 하나의 달팽이가 되어 버텨내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언젠가 바람에 날아오르는 비닐봉투를 보며 시로 표현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정말 생각만 했다. 그런데, 역시 시인은 다르다는 걸 시집을 넘기며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시인은 생각에서 멈추지 않고, 그 생각이 시어로 옮겨가니 말이다.

 

시인은 삶의 작은 것 하나 허투루 보내지 않나보다. 대상포진조차 시인에겐 손님이 된다. 물론 반갑지 않은 손님, “불러들인 적 없었던 이름의 손님이며, “대접하기 힘든, / 피가 나도록 붉은 / 까탈스러운 손님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런 까탈스러운 손님이 우리 삶에 한 두 개가 아님을 문득 떠올려보게 된다. 삶은 결국 이러한 까탈스러운 손님을 잘 달래가며 살아가야만 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도.

 

삶이 고단한 것은 이처럼 불러들인 적 없는 손님, 그것도 까탈스럽기만 한 손님이 수시로 찾아오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일까? 많은 시가 삶의 무게가 느껴져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한다. 우리네 삶은 참 고단하다. 마음대로 되지 않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시인은 고백한다. 그럴지라도, “내 삶은 오타가 아니지.”하고 말이다. 순간순간 삶의 모습은 오타일 수 있겠다. 그러나 삶 전체는 결코 오타가 아니리라는 위안, 그리고 다짐을 해 본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내 머릿속이 흐리멍덩해서일 것이다. 시인의 시가 공감되다가도 문득 흩어지곤 한다. 이는 분명 시인의 탓이 아닌 잠이 필요한 내 흐리멍덩한 상태 탓일 게다. 그럼에도 공감이 가는 시가 있어 한 편 옮겨보며 서평을 마칠까 한다.

 

낙타가시풀에도 꽃이 핀다 / 거친 땅 여린 풀로 살아가는 동안 / 온몸에 돋아난 가시, / 가시가 꽃을 피워낸 게다 / 저린 기다림을 위로하듯 피운 저 꽃, / 사막에서 기다림이 피운 꽃, / 사랑이다 / 낙타가 입천장이 아프도록 가시풀을 먹고 / 살갗이 헐지 않는 것은 / 가시가 아니라 사랑을 먹기 때문이다 / 물집이 돋치도록 아프게 걸어온 / 외로움이 외로움을 먹기 때문이다 / 뜨겁고 뜨거운 간절함이 / 간절함을 얻기 때문이다(<낙타가시풀> 전문)

 

누구나 고단한 삶을 살아간다. 간절함을 품은 삶은 어떤 고단함도 버텨내고 이겨낸다는 진리를 기억하며 잠시 시집을 덮는다. 좀 더 맑은 정신에 다시 펼칠 것을 다짐하며.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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