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박물관
오가와 요코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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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박물관이란 독특한 제목의 소설을 만났다. 이 소설의 책장을 열어보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이 독특한 제목에 있었다. ‘침묵 박물관이라는 게 과연 무엇일지, 무엇을 전시하는 공간일지 궁금했던 것이다. 침묵이 도리어 어떤 소리보다 더 크게 손짓했던 셈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작가가 다름 아닌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작가라는 점 역시 소설을 펼쳐보게 된 이유였다.

 

이제 갓 겨울이 봄에 자리를 넘겨주던 시기에 한 젊은 박물관 기사(‘’)가 면접을 보기 위해 한적한 시골 마을의 어느 저택을 찾게 된다. 그곳에서 를 기다리던 이는 나이를 갸름하기 힘들 정도로 늙은 괴팍한 성향의 노파였다. 그 첫 만남의 느낌에 이번 면접은 틀렸구나 싶었는데 나는 그 괴팍한 노파와 함께 노파가 구상하는 박물관을 개관하기 위해 일하게 된다. 노파가 모아놓은 물건들은 다름 아닌 누군가의 죽음 이후에 남겨진 유물들. 노파는 소녀 시절 자신의 집 정원사(현재 정원사의 할아버지)가 사고로 죽게 된 후, 뭔가에 끌린 듯 정원사의 전지가위를 모으기 시작하면서 그 뒤로 누군가의 죽음 이후에 그 사람의 일생을 이야기 할 만 한 물건들 하나를 모으게 된다. 마치 자신의 사명인양.

 

내가 찾는 건 그 육체가 틀림없이 존재했다는 증거를 가장 생생하고 충실하게 기억하는 물건이야. 그게 없으면 살아온 세월이 송두리째 무너져 버리는 그 무엇, 죽음의 완결을 영원히 저지할 수 있는 그 무엇인지. 추억 같은 감상적인 감정과는 관계없어. 물론 금전적인 가치 따윈 논외고.”(47)

 

이렇게 유물들이 모아진다. 수십 년 전 마을의 유일한 살인사건으로 희생된 어느 창녀의 유골에서 발견된 피임링, 그리고 미라 개, 피부암으로 죽은 노인의 의안, 109세 전직 외과의사의 죽음 이후, ‘에 의해 수집된 수술 메스, 등등, 이런 식으로 전혀 일관성 없는 여러 유품들이 모아지게 된다. 나는 그 각각의 유품들에 얽힌 사연을 노파로부터 전해 듣게 되고, 그 사연들을 하나하나 기록하며, ‘침묵 박물관의 개관을 준비하게 된다. 괴팍한 노인, 그리고 상큼한 소녀인 노파의 수양딸, 가정부와 정원사 부부, 이렇게 이들이 한 마음으로 침묵 박물관을 만들어 간다.

 

는 이미 모여진 유물들을 하나하나 정리할뿐더러, 여전히 진행되는 누군가의 죽음 그곳을 찾아 그의 삶의 기억하게 하는 물건들을 모으는 작업을 하게 된다. 물론, 그 물건은 대부분 몰래 훔쳐오게 된다.

 

이렇게 하루하루 착실히 일을 하던 가운데, 마을에 사고가 일어나게 된다. 어떤 특별한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은 한적한 마을에서 갑자기 벌어지는 사건들. 폭발사고가 일어나게 되고, 몇 십 년 전 일어났던 살인사건과 유사한 살인 사건이 다시 연달아 벌어지게 된다. 유두가 잘린 채 희생된 여성들의 연쇄살인사건이. 과연 범인은 누구일까? 사실 소설은 범인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는다. 그러니 미스터리 소설은 아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범인이 누구인지는 궁금하다. 특히, ‘가 형사들에 의해 용의자로 의심되기 때문에 더욱. 그래서 어쩐지 묘한 미스터리 소설의 느낌이 없지 않다.

 

여기에 또 한 가지 묘한 느낌을 받게 하는 것은 는 형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곤 한다. 이제 곧 조카를 낳게 된다는 형수의 소식에 대한 궁금증을 담아. 그런데, 한 번도 답장이 오지 않는다. 과연 무슨 이유인 걸까?

 

소설은 참 묘한 분위기로 진행된다. 누군가의 죽음, 그 흔적을 모으며 그들만의 방식으로 애도한다는 면에서 어쩐지 텐도 아라타의 애도하는 사람이 떠오르기도 하는 소설이다(물론 두 소설은 전혀 다르지만 말이다.).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잊힌 마을에서 결코 누군가의 삶을 잊지 않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을 소설을 통해 만나게 된다.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죽음 뒤에 남겨진 유물, 그 흔적과 기억이 중요할 뿐.

 

정원사가 노파를 등에 업고 박물관을 한 바퀴 돌았고, 우리는 그 뒤를 따랐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노파의 힘겨운 숨소리가 끊어질 듯 약하게 들려왔다. 창문이 황혼으로 물들고, 눈은 더 선명한 그림자가 되어 떨어지고 있었다. 바람 소리는 닿지 않았고, 멀찍이 물러나 앉은 얼어붙은 숲 너머에는 발의 세계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것은 망자들을 애도하는 순례였다. 노파의 거친 숨소리는 그 애가였다.(332)

 

이 특별한 애도와 애가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무명의 인물들을 통해 이미 이들 역시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걸까? 모를 일이다. 분명한 것은 이름이 등장하지 않기에, 혹 등장인물의 이름이 헷갈려 일본소설을 읽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독자들에게 이 작품은 전혀 그런 문제가 없다는 것 역시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매력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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