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마리아나 엔리케스 지음, 엄지영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손에 든 이유는 호러소설집이란 소개 때문이었다. 막연히 으스스한 공포, 오싹한 즐거움을 통해 무더위를 날려보자는 평범한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몰라도 너무 몰랐다. 이 책은 그런 책이 아니다. 호러소설집이라 했는지 궁금할 정도다.

 

흔히 생각하는 호러는 아니다. , 귀신이 나온다던지, 견딜 수 없는 공포에 내몰린다던지 하는 흔히 생각하는 호러 말이다. 물론, 소설 속에 귀신이 등장하는 소설도 있긴 하다. 그럼에도 이 소설집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에 실린 12편의 단편소설들은 모두 현실 속 호러를 말한다. 부조리한 현실, 그 속에서 신음하는 이들에겐 현실이야말로 깰 수 없는 악몽인 게다. 꿈이라면 깨면 그만이지만, 현실 속에서 신음하는 이들은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에 극단적 선택으로 내몰리게 된다.

 

이를 잘 보여주는 단편은 책이름과 같은 제목의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이 아닐까 싶다. 실제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졌던 방화사건을 모티브로 쓴 소설이라는데, 처음은 지하철 여인에게서 시작한다. 남편에게 의해 끔찍한 화상을 입은 여인, 하지만 점차 이렇게 남성에 의해 불속으로 내몰려 죽음의 위협을 받는 수많은 여성들이 발생하게 되고, 급기야는 상황이 반전한다. 여성 스스로 불 속에 뛰어들기 시작한 것. 이는 남성의 오랜 폭력에 저항하는 그녀들만의 항거였다. <불타는 여성들>이란 활동까지 하며 수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얼굴을 불 속으로 몰아넣는다. ? 이런 극단적 선택을 하는 걸까?

 

소설 속 지하철 여인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이왕이면 밝은 면을 보도록 하세요. 그녀는 파충류처럼 생긴 입을 씰룩이며 웃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여성 인신매매만큼은 이 세상에서 사라질 테니까요.(340)

 

그렇다. 여성들은 자신들을 향해 쏟아지는 폭력을 대항하기 위해 자신 스스로를 불 속에 넣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당당하게 거리로 나와 버스를 타고,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샀다.”(341)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스스로를 불 속에 넣고 자신의 여성성을 망가뜨린 뒤에서 스스로의 삶을 당당히 살아가는 여성들, 이런 현실이 존재하는 한 현실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호러임에 분명하다.

 

여러 소설 속에서 만나는 현실은 군사 독재와 오랜 경제 불황 등으로 힘겨워진 아르헨티나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한다. 무엇보다 다양한 폭력을 만나게 된다. 물론, 성폭행을 당한 후 목이 잘린 5살 소년의 시체를 만나기도 하고, 가정폭력이나 여성 혐오와 같은 폭력을 만나기도 한다. 아울러 수많은 폭력을 직면하면서도 폭력을 막아야 할 경찰이 폭력을 외면하는 부조리 등 소설 속엔 여러 세상의 부조리를 고발한다. 이런 부조리함이 만연해 있음에도 그 부조리를 외면하는 세상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호러일 게다. 꿈에서 깰래야 깰 수 없는 끔찍한 현실의 악몽 말이다. 기대했던 소설집은 아니지만, 그래서 더 큰 행복(?)을 맛본 소설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