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대멸종 ㅣ 안전가옥 앤솔로지 2
시아란 외 지음 / 안전가옥 / 2021년 3월
평점 :
『냉면』에 이은 안전가옥의 두 번째 앤솔로지 시리즈 『대멸종』이 찾아왔다. 솔직히 『냉면』이란 책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아직 읽어보진 못했다. 그러던 차, 두 번째 앤솔로지 작품집인 『대멸종』을 먼저 만나게 되었다.
‘대멸종’이란 주제로 공모된 다양한 작품들, 그 가운데 당선된 작품들을 만난다는 설렘을 안고 책장을 펼쳐든다.
첫 번째 만나게 되는 「저승 최후의 날에 대한 기록」은 우주 방사선의 폭격으로 하루아침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바로 저승에서의 이야기. 지구 전체가 멸망의 위기 앞에 놓인 상태, 그런데, 저승 역시 이로 인해 대혼란을 겪게 된다. 무엇보다 수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죽어 오게 되니 저승은 모든 업무가 마비될 정도의 대혼란을 겪게 된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었으니, 지구의 인간이 사라지면, 저승 역시 사라진다는 것. 이에 저승은 자신들의 기록을 남겨 혹시 먼 훗날 생명체가 살아나게 될 때를 대비하게 된다.
사실, 이야기는 다소 따분할 수 있다. 하지만, 저승이란 곳이 이승과 필요불가불의 관계에 있음을 이야기해주는 재미난 접근을 제공한다.
저승은 이승의 믿음과 문화에 의해서 성립합니다. 내가 여기 염라부에서 일한 지가 어언 500년쯤 되는데, 그 사이에 사라진 저승이 없을 것 같습니까? 나라가 무너질 때, 문화가 사라질 때, 민족이 말살될 때, 뒤따라 소식이 끊겨 버린 이웃 저승 세계들을 내가 압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겠군요. 생존자가 남아 있다면 그 생존자들이 의지하던 내세관에 맞는 저승들만 살아남을 것이고, 그들이 모두 죽고 나면 적어도 우리가 알던 사후 세계는 사라질 것입니다.(25쪽)
「세상을 끝내는 데 필요한 점프의 횟수」 역시 우주에 대한 다소 철학적 질문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우주를 코딩이라는 소재로 해석해내는 재미난 작품이다. ‘나’ 송현희는 새로운 게임 회사에 취직하게 되는데, 그 첫 임무로 게임 프로그램의 버그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게임 속 점프를 65,536번을 하게 되면 서버가 터지는 버그가 일어나는 것. 그런데, 이 버그는 전임 서버 개발자인 윤수현 씨가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것이다. 왜 그랬을까?
버그를 찾아 문제를 해결하니 연쇄적으로 또 다른 버그 문제가 등장한다. 이에 어느 날 갑자기 미쳐 회사를 나오지 않는다는 전임 서버 개발자 윤수현 씨를 만나러 가는데. 윤수현 씨는 정말 놀라운 이야기를 해준다.
혹, 우리 사회 역시 누군가의 코딩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이 아닐까 하는 어쩌면 한번쯤 해봤음직한 접근을 통해, 이 세상의 불합리한 일들에 대한 작가 나름의 해결을 제시해주는 작품이다.
이 세상의 신이 코딩을 더럽게 해 놓은 초보자 같다는 생각을 하니 웃겼다. 어쩌면 이 세상이 프로그래밍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사람의 습작일 수도 있겠다. 아, 그러면 많은 것이 설명되는 것 같기도 하다. 왜 세상에는 웃음보다 눈물이 많은지, 왜 사람들의 삶은 이렇게 삐걱삐걱 거리는지, 어째서 그렇게 삐걱삐걱 거리면서도 세상이 어찌어찌 돌아가는지. 나는 하늘을 바라보고 한 번 낄낄낄 웃었다.(131-2쪽)
「선택의 아이」를 읽을 땐, 주인공 소년 가나가 처한 상황이 내내 먹먹했다. 창녀였던 사라진 엄마, 다리를 절고 이상한 목소리를 가진 소년. 숙부의 집에서 천덕꾸러기처럼 살아가야만 하는 소년. 무엇보다 부모에 의해, 또는 친척에 의해 누이나 딸이 성적 노리개로 팔려가야만 하는 현실. 장기적출을 위해 아동을 사고파는 세상. 여기에 사라져만 가는 돌고래를 돈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자들. 이런 모든 상황 속에서 신음하게 되는 어린이의 고민을 엿보게 되기에 내내 먹먹하다.
무엇보다 자신을 반기는 이 없는 세상, 정 붙일 곳 없는 세상의 멸망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입장에 서 있는 소년. 과연 소년은 세상의 멸망을 선택할까, 아님, 자신을 괴롭게만 만드는 세상을 살려내기 위해 고통스러운 길을 여전히 걸어갈까? 이런 딜레마가 짓궂기만 하다.
「우주탐사선 베르티아」는 SF장르다. 마지막 부분에 대반전이 있는. 우주탐사선 베르티아 호는 500년만의 우주여행을 마치고 지구로 귀환하게 된다. 그런데, 그 사이 지구는 멸망해 있었다. 베르티아 호에 타고 있던 이들은 지구 멸망의 원인을 조사하게 되고. 이에 지구멸망의 원인은 핀이란 존재에게 있음을 알게 된다. 핀(지구 전체의 생명체와 A.I.를 연결하고 있는 시냅스로, 하나의 커다란 A.I.격인 존재.)은 전 우주에 인류 외에는 다른 생명체가 없음을 알고 우울함과 외로움의 끝에 자살을 결심, 지구가 멸망에 이르게 된 것. 그런데, 정말 지구엔 생존자가 없는 걸까? 그렇다면 전 우주에 홀로 남겨진 이들 베르티아 호의 요원들은 어떻게 해야만 하는 걸까?(사실 여기에 대반전이 숨겨 있다.)
소설은 우주의 또 다른 생명에 대해, 그리고 A.I.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SF소설이다.
마지막 수록 작품인 「달을 불렀어, 귀를 기울여 줘」는 판타지 소설로, 마술사 가운데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마빈(마력 빈대)이 마계의 달을 부름으로 시작된다. 마술사로도 인정받기 어려운 엉터리 마술사 마빈은 엄청난 마력을 빌려 쓰기 위해 가장 강한 힘의 원천인 마계의 달을 부르게 된다.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던 그 어려운 일을 해내는 마빈. 하지만, 어느 누구도 마빈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과연 세상은 어떻게 될까?
다섯 편의 작품 모두 서로 다른 색깔의 느낌을 전해 준다. ‘대멸종’이라는 하나의 주제 아래 모인 서로 다른 색깔의 다양한 맛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독자는 행복하다. 물론, 이런 종류의 앤솔로지 작품집을 읽는 독자로서의 또 하나의 재미는 이들 작품들을 향한 나만의 순위를 매겨볼 수 있다는 점(물론, 그 결과는 비밀이다.^^)이 아닐까 싶다. 안전가옥 앤솔로지 작품집, 아무래도 『냉면』을 얼른 찾아 읽어봐야겠다. 물론, 다음 작품집 역시 설렘 안고 기다리며.